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538화. 성자 역할 분산표의 빈 동의선 일러스트

538화. 성자 역할 분산표의 빈 동의선

538화. 성자 역할 분산표의 빈 동의선

접수대의 낡고 육중한 목조 상판 위로,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무거운 소음이 내려앉았다. 수백 번의 손때가 묻어 번들거리는 나무 결 사이마다 오랜 세월 누적된 관료제의 서늘한 먼지가 끼어 있었고, 그 위에서 서류 뭉치가 뒤섞이며 내는 소리는 바싹 마른 겨울 잎사귀가 긁히는 소리보다 훨씬 더 거칠고 불쾌했다. 정산 구역의 공기는 늘 정체되어 있었으나, 오늘따라 유독 종이 섬유가 뿜어내는 비릿한 잉크 향과 오래된 피딱지 같은 건조한 악취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곳은 500화에서 540화에 이르는 기나긴 정산 구간의 한복판이었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온갖 책임과 대가의 무게가 숫자와 서식의 형태로 낱낱이 파헤쳐지는 심판대나 다름없었다.

접수원은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마치 정밀한 기계 부품처럼 흔들림 없는 손길로 이미 수차례 검토가 끝난 ‘반송 도장 잔흔 정산표’를 옆으로 밀어내었다. 그 붉고 얼룩진 도장의 흔적은 과거에 누군가가 거절했거나, 혹은 끝내 수취인에게 도달하지 못해 되돌아온 선택들의 잔해였다. 도장의 붉은 잉크는 종이의 결을 따라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고, 그것은 단순한 행정적 반송이 아니라 누군가의 운명이 튕겨 나갔음을 증명하는 흉터처럼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두꺼운 반송 종이 더미의 맨 아래에서, 지금껏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던 것처럼 묘한 압박감을 풍기는 새로운 서식 한 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최초의 봉투가 이 정산처에 배달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고되어 있던 끈적한 부채의 문서였다. 봉투를 보낸 발신 주체가 누구인지, 어째서 이 시점에 첫 배달이 이루어졌는지는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으나, 종이 위에 새겨진 목적만큼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명확했다.

‘성자 역할 분산표.’

상단에 굵고 진하게 적힌 글자는 보통의 인쇄 활자라기보다, 벼려진 쇠지렛대나 날카로운 칼날로 억지로 짓눌러 새겨 놓은 상흔에 가까웠다.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강제로 압인을 찍은 듯 글자의 테두리는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그 틈새로 불길한 잿빛이 감돌았다. 접수원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텅 빈 시선으로 로웬의 피로한 얼굴을 응시하며, 그 분산표를 접수대 정중앙, 로웬의 시선이 피할 수 없는 지점에 정확히 맞춰 배치했다.

표 안에는 여러 개의 칸이 숨 막힐 듯 엄격하고 직선적인 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역할명, 분산 대상, 동의자, 거절자, 보류 사유, 그리고 반송 도장 잔흔 참조까지. 각 항목은 인간의 고통과 희생을 철저히 규격화된 부품처럼 다루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칸들의 맨 아래, 유독 넓은 공백을 차지하고 있는 ‘빈 이름 확인’ 칸이 기괴할 정도로 창백하게 비어 있었다. 그 빈칸은 마치 아직 덫에 걸리지 않은 제물을 기다리는 아가리처럼, 서식 위에서 혼자만 이질적인 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어 있는 이름의 당사자가 과연 누구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인지, 서식은 묵언으로 강요하고 있었다.

단독으로 수락하기에는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철저히 짓뭉개버릴 정도로 지나치게 무거운 무게를, 함께 길을 걷는 타인에게 교묘히 전가할 수 있다는 지극히 행정적이고도 잔혹한 유혹이 그 얇은 종이 위에 도사리고 있었다. 혼자서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달콤한 속삭임이 서식의 줄칸마다 배어 있었다. 무거운 정적을 깬 것은 접수대 옆에 꼿꼿이 서 있던 서기의 서늘한 목소리였다. 서기는 손에 든 두꺼운 규정집을 기계적으로 넘기며, 로웬의 얼굴이 아닌 그의 굽은 등 뒤를 응시한 채 건조하게 낭독을 시작했다.

“단독 수락이 어려운 역할은 동행자의 동의선으로 분산 보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자라는 무게가 한 명의 육신에 고착되어 소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이며, 동의자가 존재할 시 그 책임과 권한은 기재된 비율에 따라 안분됩니다.”

서기의 낭독은 일말의 고저도 없는 평탄한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뼈를 깎아내는 듯한 강제성을 띠고 있었다. ‘안전장치’라는 그럴듯한 미명 아래, 성자라는 극단적인 역할을 동료들에게 쪼개어 떠넘기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접수대 뒤쪽 대기석을 채우고 있던 그림자들 사이에서 거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정산 구간을 맴돌며 타인의 선택을 감시하고, 누군가가 짐을 대신 짊어지길 바라는 망령 같은 대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로웬의 주변을 에워싸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누군가는 눈썹을 짓푸리며 몹시 걱정스럽다는 듯한 동정의 가면을 썼고, 누군가는 그저 이 지긋지긋하고 숨 막히는 정산 절차가 한시라도 빨리 끝나 다음 순서로 넘어가길 바라는 조급한 눈치였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목소리들이 이리저리 겹쳐지며, 로웬의 고막을 물리적인 무게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그 무거운 성자의 짐을 다 짊어지겠다는 건 오만이야. 싫으면 같이 나누면 되지 않나? 그게 동료 아닌가? 슬픔도 고통도 나누는 게 진짜 동료잖아.”

“맞아, 로웬. 저기 동의선에 동료들 이름만 올리면 자네가 짊어질 부담이 확 줄어들 거야. 저들도 지금까지 자네와 함께 고생해 왔으니 분명 이해할걸. 아니, 오히려 자네가 혼자 희생하려 드는 걸 원치 않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들을 믿고 이름을 적어.”

“이름만 적으면 되네. 펜을 들어 그 저주받을 빈칸을 채우기만 하면, 당신도 살고 이 꽉 막힌 장소도 평화를 찾을 수 있어.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굴지?”

군중의 압력은 일정한 리듬을 타고 점점 더 거세졌다. 타인의 일방적인 희생과 고통의 분담을 당연시하는 배려의 가면들이 로웬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숨통을 조여왔다. 동의선에 이름 세 글자를 적어 넣기만 하면 모든 고통과 짓누르는 책임이 공평하게 분산될 것이라는 감언이설이, 정체된 공기 중에 독기처럼 떠다녔다.

로웬은 쥐고 있던 펜의 차가운 금속 촉을 내려다보았다. 펜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펜을 서류 위로 가져가기도 전에, 군중 속 누군가의 앙상한 손가락이 쑥 불쑥 나와 분산표의 ‘분산 대상’ 칸을 거칠게 툭툭 쳤다. 빨리 이름을 적어 넣으라는, 무언의 강요이자 폭력적인 재촉이었다. 그 순간 로웬의 머릿속에는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여기에 그들의 이름을 적는다면, 시스템은 그것을 합법적인 동의로 간주하고 그들의 어깨 위에 성자라는 명목의 끔찍한 족쇄를 나누어 채울 것이다. 그것은 동료를 향한 구원이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 동료를 제물로 바치는 배신이었다.

바로 그때, 로웬의 등 뒤편에서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만큼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위를 에워싸던 대기자들의 수군거림이 그 서슬 퍼런 기운에 눌려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이네스가 묵직한 군화 발소리를 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로웬과 접수대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녀의 눈빛은 비겁한 동정과 배려를 가장해 압박을 가하던 대기자들의 허위를 단숨에 꿰뚫어 얼려버릴 듯 차갑고 매서웠다.

이네스는 로웬의 어깨를 넘어 접수대 위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검지 손가락이 분산표의 날카로운 선 위를 스치듯 지나갔으나, 그녀의 피부는 결코 그 혐오스러운 종이에 닿지 않았다. 마치 종이 자체에 묻어 있는 비열한 의지를 경멸하듯, 손끝을 1인치쯤 띄운 채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름을 나누는 것과 선택을 나누는 것은 다릅니다. 동의 없는 분산은 서명 위조입니다.”

이네스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으나, 접수처 내부의 웅성거림을 단 한 마디로 베어버릴 만큼 예리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기계적인 표정으로 서 있는 서기와 접수원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당사자의 진실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된 채, 그저 짐을 덜기 위해 이름들을 나열하는 것이 어떻게 신성한 역할의 안분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고통의 분산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향한 무책임한 투척입니다. 이름이란 것은 단순히 종이 위의 기호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가 감당해야 할 궤적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당사자의 동의 없이 타인의 편의를 위해 잘라 붙이는 행위는, 인간의 영혼을 행정적으로 난도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네스의 차가운 논리에 대기자 중 몇몇이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로웬이 펜을 쥔 손을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대신 로웬의 흔들리던 시선을 유도하며, 분산표에 인쇄된 비인간적인 항목들을 하나하나 단호한 어조로 짚어 내려갔다.

“로웬, 이제 묻겠습니다. 저들의 기만적인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이 정산처의 철저한 절차에 따라 답하십시오. 첫째, 당신이 짊어지거나 나누려는 역할명. 둘째, 그 무게를 떠넘길 분산 대상. 셋째, 그 희생을 자발적으로 수락한 동의자. 넷째, 그것을 거부한 거절자. 다섯째, 결정을 미루는 보류 사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인 확인.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펜으로, 이 모든 끔찍한 칸에 들어갈 이름이 단 하나라도 명확하게 준비되어 있습니까? 동료들이 당신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해서, 당신이 그들에게 죽음을 명령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자의 길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의 비겁한 도피일 뿐입니다.”

이네스의 물음은 로웬의 가슴 속에 묵직한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자발적 선택이 배제된 이름의 나열은 그저 폭력일 뿐이라는 진실이, 분산표의 화려한 행정적 언어를 찢고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로웬은 자신이 쥐고 있던 펜의 무게가 방금 전보다 수만 배는 더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그 펜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라, 타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흉측한 칼날이었다.

로웬이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을 망설이는 찰나, 서류 위에서 인간의 이성을 조롱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접수대의 나무 틈새인지, 아니면 서류의 밑바닥인지 알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리도록 차갑고 축축한 젖은 재가 흘러나와 동의자 칸 밑으로 스멀스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얼핏 보면 누군가가 쏟은 검은 잉크가 엎질러져 번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불에 타들어 가다 만 시체나 문서의 재가 불길한 습기를 흠뻑 머금은 채 종이의 결을 타고 기어오르는 흉측한 형상이었다.

젖은 재는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기생충처럼, 혹은 누군가의 이름을 억지로 흉내 내어 적으려는 유령의 손길처럼 구불구불한 궤적을 그리며 빈 동의자 칸을 침범하려 했다. 그 재가 어디에서 발생하여 이 정산처의 상판 위로 솟아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명백히 로웬의 침묵을 강제 동의로 왜곡하려는 시스템의 악의적인 개입이었다. 재의 냄새는 썩은 유황과 곰팡이 핀 양장본의 냄새가 뒤섞인 듯 역겨웠으며, 그것이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찌르르한 소름이 로웬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동시에, 굳게 닫힌 정산처 천장 부근의 어두운 허공에서 마른 종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찰칵, 사사삭. 그것은 금속으로 만든 종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바싹 마른 종이 조각들이 공중에 수없이 흩날리며 서로 부딪히고 찢길 때 나는 실체가 없는 기묘한 소음이었다. 허공에 떠도는 미세한 마른 종 흔적들이 특정 위치에 걸리며, 사람의 이성을 긁어내리는 소름 끼치는 환청을 만들어냈다.

그 환청은 마치 동료들이 멀리서 로웬을 부르며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 대리인의 손이 동의선 위에 맹렬하게 펜을 놀려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날카롭고 건조한 마른 종소리는 빈 동의선 바로 윗공간에 멈춰 서서 집요하게 로웬의 결정을 재촉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관료들이 로웬의 망설임을 비웃으며, 그의 손을 대신해 서명을 완성하려 드는 기괴한 연출이었다.

“안 돼.”

그때, 베라가 짧고 단호하게 단언하며 한 발짝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을 뻗어, 기괴하게 번져가던 접수대 위의 습기를 손등으로 거칠게 눌러 막았다. 그녀의 손 피부가 종이 위에 닿자, 차갑고 비릿한 젖은 재의 기운이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부딪히며 미세한 수증기를 일으켰다. 베라는 젖은 재가 마치 진짜 동의 잉크라도 되는 양 동의선 안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자신의 체중과 체온을 온전히 실어 재의 확산 경로를 온몸으로 차단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경계선에서, 끈적하고 불쾌하게 눌러붙으려던 재의 흔적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딱딱하게 말라붙어 버렸다. 베라가 만든 강력한 물리적 경계는 시스템의 교묘한 서명 위조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이어 베라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노려보며, 공중에 머물며 환청을 만들어내던 마른 종 조각들을 향해 손바닥을 거칠게 휘저었다. 강한 바람을 일으키는 그녀의 손짓에, 동의선 위를 맴돌던 마른 종의 흔적들은 맥없이 흩어져 접수대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동의는 이런 식으로 젖은 재처럼 억지로 스며드는 게 아니야. 마른 종소리처럼 허공에서 지저귀는 환청으로 날조할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 만약 누군가의 이름을 이 더러운 종이 위에 새겨야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살아있는 뜨거운 피와 온전한 목소리가 동반되어야 해. 이런 죽은 자들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가짜 동의는 내가 인정하지 않아.”

베라의 거침없는 행동과 숨김없는 일침으로 인해, 불길한 침식에 시달리던 분산표의 동의자 칸은 다시금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기괴하고도 순수한 백색을 되찾았다. 동료들의 의지는 명확했다. 그들은 로웬이 짊어진 무게를 모른 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강요하는 기만적인 방식의 분산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베라의 손등에는 젖은 재가 남긴 차가운 붉은 반점이 돋아났으나, 그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더욱 단단히 로웬의 곁을 지켰다.

바로 그 순간, 정산처의 굳게 닫힌 두꺼운 철문 밖에서 둔탁하고 불길한 박자가 들려왔다.

쿵, 쿵, 쿵.

길게 두 번, 그리고 짧게 한 번.

규칙적이고도 압도적인 그 박자는 차가운 벽을 타고 그대로 전해져 와, 접수처 내부의 정체된 공기와 바닥을 진동시켰다. 그것은 이 모든 분산 절차의 끝을 확인하러 온 집행관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인지, 아니면 정산 구간의 마감 시간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며 결정을 재촉하는 외부의 거대한 압력인지 알 수 없었다. 문밖에서 울리는 그 박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었으나,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접수대의 나무 상판이 미세하게 울렸고 대기자들의 숨소리는 더욱 가빠졌다.

철문의 이음새마다 붉은 녹가루가 떨어져 내렸고, 진동은 로웬의 발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전달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결정을 내리지 못한 자를 향한 거대한 분쇄기의 회전음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무언의 압박이 정산처 전체를 압도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리듬은 그저 분산표의 여백과 로웬의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르는 무형의 행정적 압력으로만 존재했다. 서기는 문밖의 박자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손에 든 펜바늘을 까딱거리며 서류의 빈 곳을 찾아 움직였다. 그러나 서기조차 그 소리의 주인을 명확히 특정하지 못한 채, 그저 기계적인 붓질로 ‘외부 압력 리듬 기록’이라는 무미건조한 주석만을 서류의 구겨진 귀퉁이에 갈겨썼다.

피핀은 그 소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접수대 한쪽 구석에 바짝 붙어 앉아, 자신이 짊어진 속기용 깃펜을 묵직하게 움직였다. 피핀의 맑고 예리한 눈동자는 로웬의 굳은 손끝과 분산표 위에 뚫린 수많은 빈칸들을 분주하고도 정확하게 오갔다. 그가 펜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잉크가 종이를 파고드는 찰칵거리는 소리가 접수처에 선명하게 울렸다. 피핀의 펜촉은 어떤 유혹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오직 존재하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정직한 철퇴 같았다.

“기록합니다. 분산 대상 미정 / 동의자 미정 / 거절자 미정 / 대리 동의 불가.”

피핀의 명확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한 항목씩 사실을 확정 지을 때마다, 종이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거운 투명 압인이 쾅, 쾅 찍히는 듯한 묵직한 파장이 느껴졌다. 피핀은 기록을 마친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로웬을 보며,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당사자의 온전한 허락 없이 타인의 이름을 대신 써넣는 기만적인 행위가 이 정산 구간에서 얼마나 끔찍한 인과율의 붕괴를 불러올지 경고하는 몸짓이자, 로웬의 올바른 선택을 지지하는 침묵의 조언이었다. 피핀의 기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방어벽이 되어, 허공을 떠돌던 부당한 강요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로웬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다시금 자신의 바로 앞에 놓인 분산표를 내려다보았다. ‘성자’라는 그 세 글자의 역할명. 그 단어 뒤에 그림자처럼 따르는, 가늠할 수조차 없이 무겁고 차가운 희생의 짐. 그리고 그 압도적인 무게를 비겁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유혹하며 널려 있는 동의와 거절의 수많은 빈칸들. 로웬은 펜을 쥔 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주며, 서류 위의 항목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분리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엉켜 있는 실타래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타인에게 던져버리는 과정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 섞여서는 안 될 불순물들과 진짜 책임의 성분들을 냉철하게 여과해 내는 고통스러운 거름망 작업이었다.

오래전 누군가가 남겼던 반송 도장의 붉은 잔흔이 서류의 거친 질감 속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과거에 이 부당한 굴레를 거절했던 누군가가 남긴 투쟁의 흉터였고, 동시에 지금 로웬이 나아가야 할 선택의 기준점이기도 했다. 로웬의 펜끝은 동료들의 삶을 파괴할 ‘동의자’ 칸 근처에는 결코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서식의 여백, 빈칸들이 모여 있는 가장자리 바로 옆에 작고 단호한 꼬리표 하나를 덧붙여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적힌 것은 이네스의 이름도, 베라의 이름도, 피핀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 누구의 이름도 비겁하게 빌리지 않겠으며, 시스템이 강요하는 기만적인 동의를 구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단절의 선언이었다. 로웬은 문밖에서 울리는 박자와 대기자들의 숨소리가 만들어내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한 글자씩 뼈에 새기듯 펜을 눌러 글자를 써 내려갔다. 종이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펜촉의 움직임은 로웬의 각오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성자 역할은 빈 동의선으로 나뉘지 않음.’

역할을 적당히 분산하여 각자의 짐을 덜 수 있다는 체제의 제안은 얼핏 들으면 지극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 서식의 틈새에는 당사자들이 짊어져야 할 진실한 의지와 각오가 담길 공간이 단 한 뼘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고통을 피하고자 타인의 이름을 그 빈칸에 적어 넣는다면, 그것은 성스러운 짐의 분산이 아니라 가장 비겁하고 추악한 저주의 전가가 되었을 것이다. 로웬은 자신이 성자로서 짊어져야 할 첫 번째 십자가가 바로 이 빈칸들을 결코 채우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로웬이 꼬리표를 완성하는 순간, 접수대를 덮치려던 불길한 현상들이 완전히 힘을 잃었다. 종이 틈새로 파고들려던 젖은 재는 베라의 체온과 손길 아래에서 완전히 바싹 말라 비틀어졌고, 공중을 부유하며 환청을 내뿜던 마른 종소리는 이네스의 서슬 퍼런 논리 앞에서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문밖의 둔탁한 박자는, 피핀의 정확한 속기 아래 그저 수치화된 무의미한 외부 압력 기록으로만 서류 귀퉁이에 남게 되었다. 정산처 내부를 가득 채웠던 끈적한 유혹의 공기가 일시에 걷히고, 오직 차갑고 투명한 진실만이 남았다.

접수원은 감정 없는 기계적인 손길로, 로웬이 밀어 내민 서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분산표는 여전히 처음 접수대에 올려졌을 때만큼이나 창백하고 깨끗했다. 성자라는 극단적인 역할의 무게는 알량한 동의선 따위로 분산되지 않았고, 책임의 주체 또한 이름 모를 모호한 다수에게로 비겁하게 흩어지지 않았다. 접수원은 길고 긴 침묵 끝에, 그 어떠한 승인도 반려도 아닌 ‘미결’의 도장을 서류 구석에 힘없이 찍었다. 그 도장 소리는 작았으나, 로웬에게는 그 어떤 환호성보다도 명확한 해방의 신호로 들렸다.

로웬은 시스템이 집요하게 요구했던 동의자 칸을 끝끝내 완전한 백지상태로 비워 두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그 비어 있는 공간이야말로, 사지를 함께 넘나든 동료들에 대한 가장 절박하고도 확고한 보호였으며, 동시에 지금껏 자신이 걸어왔고 앞으로 감당해야 할 역할에 대한 마지막 남은 인간적 예의였다. 동료들이 훗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라도, 그것은 서식의 빈칸에 억지로 짓눌려 적히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로 선택되어야만 했다. 비어 있는 칸은 단순히 이름의 부재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숭고한 침묵의 공간이었다.

서기가 법전처럼 낭독했던 분산 보류의 차가운 규정들은, 로웬의 묵직한 침묵과 단호한 문구 앞에서 그 모든 행정적 힘을 잃고 부서졌다. 대기자들이 쏟아냈던 압박 섞인 가증스러운 조언도, 상판을 타고 오르던 젖은 재의 기괴한 침투도, 공중을 부유하며 고막을 어지럽히던 이름의 환청도 끝내 그 순수한 빈칸을 단 한 글자도 채우지 못했다. 접수원의 무미건조한 손길에 의해 서류 더미는 다시 한번 차가운 소리를 내며 정리되었고, 성자 역할 분산표는 누구의 이름도 품지 못한 미결의 상태 그대로 철해져 깊은 어둠 속으로 치워졌다.

정산처 사무실 내부에는 여전히 문밖에서 들려오는 기묘하고 둔탁한 박자만이 쿵, 쿵, 쿵 감돌고 있었다. 길게 두 번, 그리고 짧게 한 번. 끝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그 리듬은, 서류상에서 아무런 이름도 얻지 못한 채 어둡고 길고 긴 정산 구간의 복도 끝을 향해 서서히 멀어져 갔다. 로웬은 손에 쥐고 있던 차가운 펜을 내려놓고, 빈칸을 마주했던 자신의 거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서식 위에 아무런 이름도 적지 않고 백지를 지켜냄으로써 온전히 지켜낸 것들이, 그의 손바닥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숭고한 무게로 묵묵히 남아 있었다.

로웬은 이네스와 베라, 그리고 피핀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정산의 파고를 함께 견뎌내겠다는 굳건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비록 서류상의 분산은 실패했을지 모르나, 그들의 유대는 그 어떤 행정적 장치보다도 단단하게 로웬을 지탱하고 있었다. 정산처의 문을 열고 나가는 로웬의 등 뒤로,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수많은 빈칸들이 먼지 속에서 희게 빛났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실패의 기록일지 모르나, 로웬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낸 승리의 증거였다.

성자 역할 분산표의 동의자 칸은 비어 있었고, 그 빈 동의선은 로웬의 이름도 동료들의 이름도 대신 나누지 못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