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175화. 빈 맥박의 보관함 / 둘째 손의 따뜻한 복도 / 늦지 않았나
173화. 빈 맥박의 보관함
장부의 뜯겨진 봉합선 사이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 ‘첫 번째 손: 빈 맥박의 보관인’. 그 기괴한 별칭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다. 로웬의 시선은 장부의 마지막 장에 적힌 좌표, 그리고 서고의 가장 깊숙하고 서늘한 구석을 향했다.
일행이 발을 들인 곳은 일반적인 서류 보관소와는 공기부터 달랐다. 습기를 머금은 냉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벽면을 가득 채운 것은 종이 뭉치가 아니라,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는 작은 마력 수정들과 연결된 금속 보관함들이었다.
“이곳이 맥박 기록실입니까? 관리 대상자들의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곳치고는 너무 조용하군요.”
이네스가 손가락으로 공중을 휘저어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보통의 기록실이라면 수천 명의 생동감이 마력 파동으로 변환되어 활기찬 진동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정적만이 감돌았다.
로웬 일행이 ‘빈 맥박’이라고 표기된 열 보관함 앞에 멈춰 서자,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검은 우산망의 하급 관리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쪽은 보실 필요 없습니다. 단순한 측정 오류가 발생한 구역이니까요. 장비가 노후화되어 맥박이 잡히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미 폐기 처분 보고서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우산망의 대리인은 마치 사소한 기계 고장을 설명하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류. 그 단어가 로웬의 귓가를 거슬리게 파고들었다. 로웬이 한 걸음 다가서자, 차가운 위압감이 관리자를 짓눌렀다.
“오류라고?”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서고 전체를 압도했다.
“맥박이 뛰지 않는다는 건 생명이 끊겼다는 뜻이지. 하지만 너희는 이것을 ‘사망’으로 분류하지 않고 ‘빈 맥박’이라는 해괴한 명칭 아래 묶어두었다. 이건 생명의 부정이 아니다.”
로웬이 보관함의 잠금장치를 강제로 비틀어 열었다.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열린 보관함 안에는 낡은 맥박 기록판들이 굴비 엮이듯 매달려 있었다.
“이건 생명 증명권의 박탈이다.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기술적인 말살이지.”
로웬의 일갈에 관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 보관함 안쪽으로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리던 피핀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손을 뻗었다.
“로웬, 이거 봐. 여기 구석에 낀 천 조각에서 냄새가 나.”
피핀이 꺼내 든 것은 아주 작은 비단 조각이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했지만, 피핀의 감각은 속일 수 없었다.
“아주아주 연하지만, 사람 체온 냄새가 나. 방금까지 누가 여기 있었던 것처럼 따뜻한 냄새.”
피핀의 말에 이네스가 즉각 기록판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푸른 마력광으로 빛났다. 기록판 위에 멈춰 선 바늘들은 모두 0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멈춘 것이 아니었다.
“교묘하군요. 바늘 자체가 물리적으로 0의 위치에 고정되어 있어요. 마력 회로를 역전시켜서 맥박이 전달되어도 바늘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둔 겁니다. 이건 고장이 아니라 의도적인 조작이에요.”
“시간을 봐.”
모르그가 옆에서 수치를 빠르게 계산하며 끼어들었다. 그는 품속에서 꺼낸 장부의 복사본과 기록판의 고정 시점을 대조했다.
“이 바늘들이 0에 고정된 시각과, 지난번 확인했던 행정 대리인들의 ‘대체 승인’ 시각이 정확히 일치해. 맥박을 지운 순간, 그들의 사회적 권한을 다른 누군가가 가로챘다는 소리지.”
상황은 명확해졌다. 검은 우산망은 살아있는 이들의 생체 신호를 강제로 은폐하고, 그들이 마치 죽은 것처럼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꾸며내어 그들의 이름과 권리를 착취하고 있었다.
검은 우산망의 관리자들은 할 말을 잃고 뒤로 물러났다. 로웬의 서늘한 시선이 그들을 훑고 지나가 베라에게 향했다. 베라는 이미 공증용 마법 펜을 꺼내 들고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베라, 항목을 새로 개설해.”
로웬의 명령에 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펜 끝에서 황금빛 법적 마력이 흘러나와 새로운 보호 구역을 선언했다.
“명령 확인했습니다. 해당 인원들에 대해 ‘사망 아님/생존 확인 전 권리 보류’라는 임시 보호 항목을 수립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보관함에 기록된 모든 이름은 검은 우산망의 관할에서 벗어나, 로웬 일행의 직접 감시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것은 검은 우산망이 쳐놓은 법적 그물을 정면으로 찢어발기는 선언이었다. 관리자들이 반발하려 입을 뗐지만, 로웬이 내뿜는 서슬 퍼런 투기에 눌려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로웬은 피핀이 찾은 비단 조각을 건네받았다. 보관함 깊숙한 곳, 맥박이 지워진 자리에 남겨진 온기. ‘첫 번째 손’이 관리하던 이 차가운 보관함 너머에, 아직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실체가 있었다.
로웬이 보관함 안쪽 벽면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급하게 남긴 듯한 손자국 같기도 했고, 다음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 같기도 했다.
기록판의 바늘은 여전히 0에 멈춰 있었지만, 피핀의 손바닥 위에 놓인 비단 조각은 여전히 미약한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첫 번째 손은 죽은 자들을 가두었을지 몰라도.”
로웬이 고개를 돌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는 듯했다.
“둘째 손은 아직 따뜻하다.”
174화. 둘째 손의 따뜻한 복도
맥박 바늘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0. 생명의 신호가 완전히 끊겼음을 알리는 잔인한 숫자였지만, 그 숫자가 가리키는 기계 뒤편의 진실은 전혀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로웬이 빈 맥박 보관함의 뒷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육중한 금속음 대신,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둔탁한 울림이 돌아왔다. 그가 손 끝에 마력을 집중해 벽면의 틈새를 비틀자, 매끄럽게 맞물려 있던 이음매가 어긋나며 좁고 어두운 틈이 벌어졌다.
그 틈 사이로 믿기 힘든 것이 흘러나왔다.
“……따뜻해.”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중얼거렸다. 서늘한 냉기가 지배하던 보관소 안에서, 그 미세한 온기는 이질적이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차가운 음성이 끼어들었다. 검은 우산망의 조사관, 케이먼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로웬이 열어젖힌 틈새를 조사하듯 훑었다.
“이건 그저 마력의 잔류 진동일 뿐입니다. 고출력 마도 기구가 멈춘 직후에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죠. 살아 있는 생명의 체온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합니다.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곤란합니다.”
케이먼의 말은 지독히도 효율적이었고, 그만큼 냉정했다. 그는 이미 이 안의 생존자들을 ‘처리 대상’으로 분류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로웬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벌어진 벽면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로웬의 손가락 끝이 공기 중의 미세한 흐름을 읽어냈다.
“잔류 마력은 파동이 불규칙하고 끝이 날카롭지. 마찰로 생긴 열이니까.”
로웬이 고개를 돌려 케이먼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달라. 일정하게 퍼져나가면서도 중심부가 뭉근해. 공기를 데우는 게 아니라, 공기에 스며들어 있는 열이야. 이건 기계가 만든 열이 아니라, 누군가의 숨이 머물다 간 흔적이다.”
로웬은 단호하게 결론지었다. 살아 있는 체온과 마력의 잔해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는 무딘 남자가 아니었다.
피핀이 로웬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코를 킁킁거리며 좁은 복도의 바닥을 살폈다.
“맞아요, 로웬 님 말이 맞아요. 여긴…… 따뜻한 먼지 냄새가 나요. 아주 조금 전까지 누군가 여기 있었던 것처럼.”
피핀의 감각은 본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바닥의 먼지 사이로 남겨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온기의 궤적을 쫓기 시작했다.
이네스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푸른빛으로 갈무리되며 복도 전체의 마력 흐름을 조망했다.
“단순한 복도가 아니군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열기를 가두려 했어요. 외부에서는 냉기만 느껴지도록 장벽을 쳤네요. 하지만…….”
이네스가 지팡이 끝으로 공중을 가볍게 휘저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력의 실타래가 그녀의 손길에 따라 역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방향만 뒤집으면, 이건 아주 훌륭한 이정표가 되죠.”
이네스의 마법이 장벽의 성질을 반전시키자, 어두웠던 복도 바닥에 은은한 붉은빛의 선이 그어졌다. 온기가 잔류한 경로가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모르그가 그 경로를 유심히 지켜보며 품 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는 바닥에 찍힌 빛의 점들을 눈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간격이 일정하군요. 약 70에서 80센티미터 사이입니다. 이건 마력이 누출되면서 만들어진 무작위한 흔적이 아닙니다. 성인 남성의 보행 간격과 정확히 일치해요. 즉, 누군가 이 복도를 걸어서 이동했다는 증거입니다.”
모르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더 이상 ‘잔류 마력’이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
그때, 보관소 전체에 육중한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폐기 절차를 알리는 경보음이었다. 맥박 바늘이 0에 고정된 보관함들을 소각로로 옮기기 위한 예비 가동이었다.
“당장 멈추세요!”
베라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관리자들을 향해 수사관의 인장을 내밀었다.
“생존의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구역의 모든 폐기 절차를 즉시 정지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만약 단 한 구의 보관함이라도 훼손된다면, 그건 단순한 업무 과실이 아니라 살인 방조죄로 다스리겠습니다.”
베라의 서슬 퍼런 기세에 관리자들은 서둘러 레버를 당겼다. 요란하게 돌아가던 컨베이어 벨트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일행은 이네스가 열어준 온기의 길을 따라 복도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복도는 끝으로 갈수록 좁아졌고, 마침내 낡고 작은 나무 문 하나가 나타났다. 화려한 연구소의 시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치 숨겨진 골방 같은 문이었다.
로웬이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온기는 이제 숨길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그가 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늦지 않았나.”
문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질문인지, 아니면 자조적인 탄식인지 알 수 없는 그 목소리에는 서늘한 위압감과 함께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로웬의 손등 위로 솜털이 바짝 섰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공기를 찢을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175화. 늦지 않았나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오랜 시간 습기를 머금은 나무가 비틀릴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말라붙은 목구가 바닥을 긁는 소리 같기도 했다.
“늦지 않았나…….”
그 한마디가 복도의 차가운 공기를 타고 로웬의 귓가에 닿았다. 로웬은 섣불리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대신 반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무게 중심을 낮췄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일행들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검은 우산망 소속의 요원들이 즉각 반응했다. 그들은 로웬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그들의 눈에는 저 너머의 존재가 구조 대상이 아닌, 처리해야 할 ‘변수’로 보이는 듯했다.
“단독 생존자입니까? 아니면 매립된 잔류물입니까?”
요원 하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미 품 안에서 봉인석을 꺼내 들고 있었다.
“상황이 불분명합니다. 증언 오염원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큽니다. 격리 절차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증언 오염원. 진실을 말하는 입이 아니라, 사건의 흔적을 흐트러뜨리는 불순물로 취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요원들이 문을 강제로 폐쇄하고 외벽을 마력 장벽으로 덮으려 하자, 로웬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아직 살아 있어.”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는 감각을 곤두세웠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미세한 기류를 쫓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떨리는 공기, 그리고 그 안에 섞인 희미한 열기.
“호흡의 박자가 일정해. 공포나 적의에 휩싸인 게 아니라,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숨소리다. 체온이 남아 있는 한, 격리가 아니라 구조가 우선이야.”
그때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피핀은 문틈에 코를 가까이 대고 한참을 들이마시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한 피 냄새가 아니에요. 이건…… 아주 쓴 약 냄새예요. 그리고 젖은 붕대 냄새도 나요. 오랫동안 갈아주지 않아서 썩기 직전인 진득한 냄새요.”
“약이라고?”
“네. 독은 아니에요. 오히려 상처를 억지로 붙들어 매고 있는 종류의 약이에요. 아주 지독한 놈으로요.”
피핀의 말에 이네스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색 마력사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와 문고리와 문틀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네스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침묵 마력이 걸려 있어요. 그런데 완벽하게 차단하려는 목적이 아니에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억누르면서도, 아주 가느다란 통로 하나만 남겨뒀어요. 마치 누군가 와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네스는 조심스럽게 마력의 매듭을 건드렸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력의 올이 느슨해지며 문 너머의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쇳소리 섞인 호흡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모르그는 바닥의 타일과 벽면의 두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머릿속으로 공간을 재구성했다. 그는 보관함 뒤편의 은밀한 공간이 얼마나 깊은지 계산해냈다.
“목소리의 진원지는 문 바로 뒤가 아닙니다. 안쪽으로 약 5미터, 보관 침상이 놓여 있을 법한 위치입니다. 침상 아래에 고정 장치가 박혀 있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일 확률이 높습니다.”
모르그의 계산이 끝나자마자 검은 우산망 요원들이 다시 앞서나가려 했다.
“확인되지 않은 생존자는 잠재적 위험 요소입니다. 봉쇄 후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하지만 그들 앞을 가로막은 것은 베라였다. 그녀는 검은 우산망의 문양이 새겨진 요원의 완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갑게 읊조렸다.
“현장 지휘권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내 사전에 생존자를 확인하고도 봉쇄부터 하는 지침은 없어. 구조 우선 명령이다. 거부하겠나?”
베라의 서슬 퍼런 기세에 요원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로웬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웬은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하고 비명이 들릴 듯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어두웠다. 하지만 피핀이 말했던 그 지독한 약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확 끼쳐왔다. 모르그의 계산대로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보관 침상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한 형체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온몸에 칭칭 감긴 붕대는 이미 진물과 약물로 얼룩져 원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겹겹이 싸인 존재가 고개를 아주 느리게 돌렸다.
로웬이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안전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이 안심할 수 있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지? 아니면, 무엇으로부터 숨어 있는 건가?”
침상 위의 인물은 대답 대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지만, 그 안에는 기묘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마치 로웬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아니면 누군가 반드시 이 문을 열어야만 했다는 듯이 힘겹게 입술을 뗐다.
“물어볼…… 필요 없다.”
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깊게 갈라졌다. 그것은 경고인 동시에 체념이었다.
“이미 늦었는지…… 그걸 물으러 온 거라면…….”
인물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 커다란 계약서라도 앞에 둔 것처럼 손을 휘둘렀다.
“첫째 손은 이미 서명했다.”
로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첫째 손. 그것은 이곳의 관리자나 단순한 생존자가 내뱉을 법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서명이라니, 누구와 무엇을 약속했다는 건가?”
로웬의 질문에 방 안의 온기가 급격히 식어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침상 위의 인물은 기괴하게 뒤틀린 웃음을 흘리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가…… 직접 왔다. 첫째 손이 서명했으니, 나머지는…… 순서대로 꺾일 뿐이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복도 끝에서부터 기분 나쁜 진동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은 진동이었다. 로웬은 직감했다. 이 자를 발견한 것이 단순한 구조의 시작이 아니라, 멈춰 있던 어떤 거대한 음모의 초침을 돌려버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