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491화 합본. 수취 거절권 없는 빈 확인서에서 거절권 위임장의 빈 수임인까지
490화. 수취 거절권 없는 빈 확인서
두껍고 매끄러운 재질의 종이가 접수대 위에 놓였다. 그 옆에는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빈 종결통지서가 서늘한 백색광을 반사하며 누워 있었다. 새로 추가된 종이의 상단에는 ‘수취 거절권 확인서’라는 고딕체 제목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를 채워야 할 항목들은 지독할 정도로 깨끗했다. 수취인, 발신자, 거절 사유, 그리고 거절권을 보유한 당사자의 이름까지. 마땅히 채워져야 할 그 모든 칸은 기괴한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다. 심지어 가장 하단, 이 모든 절차를 끝맺어야 할 반송 도장이 찍힐 자리조차 잉크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접수대의 대리석 상판은 차가운 냉기를 뿜어냈고, 서류의 백색은 지나치게 눈이 시려 그것이 마치 실존하지 않는 허상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은 지나치게 생생했다. 적당한 무게감과 손끝을 스치는 건조한 마찰음이 이것이 엄연히 집행되어야 할 행정적 실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접수대 너머에 앉은 서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서류의 여백을 훑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허공을 향해 있었으나, 손가락만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서류의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규칙적이고 건조한 그 소리는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는 초침 소리처럼 들렸다. 서기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감정이 배제된 기계적인 목소리로 미리 정해진 법무 문구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오래 수취하지 않은 사람의 침묵은 임시 거절 의사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이는 행정적 편의를 위한 추정이 아니라, 배달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절차적 결단입니다.”
서기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지자, 뒤편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대기자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들의 얼굴은 피로와 조바심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 저 말이 맞다. 안 받았으면 거절한 거나 다름없지!”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대기 줄에서 기다려야 하는 거야? 수취인이 받지 않겠다고 침묵하고 있다면, 그건 거절한 거다. 거절했으면 당장 반송 도장을 찍어라!”
“반송 도장만 찍히면 이 모든 지체가 끝난다고 들었어. 왜 도장을 찍지 않는 거지? 서류가 비어 있다면 그냥 비어 있는 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닌가!”
압박은 물리적인 무게가 되어 접수대를 짓눌렀다. 대기자들은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오며 로웬의 등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밀어내는 듯한 기세를 뿜어냈다. 그들의 눈에는 서류의 내용이나 절차의 정당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종결’이라는 도장이 찍히기만을 바라는 맹목적인 갈구만이 가득했다.
그때, 문밖에서 짧은 박자가 울렸다.
쿵, 쿵, 쿵.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육중한 문틀을 두드리는 듯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그 소리는 접수대 바닥을 타고 로웬의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두드리는 주체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그 소리는 서류 위의 빈칸들을 향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력을 밀어 넣을 뿐이었다. 마치 그 박자에 맞춰 빈칸을 채워 넣으라고 재촉하는 선고처럼 들렸다.
이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시선은 서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네스는 서류의 첫 번째 빈칸을 가리키며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수취인이 누구입니까.”
서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메마른 공기뿐이었다. 이네스는 멈추지 않고 두 번째 빈칸으로 시선을 옮겼다.
“발신자는 누구입니까. 이 봉투를 보낸 주체가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수취 여부를 결정합니까.”
여전히 침묵만이 홀을 메웠다. 이네스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날카롭고 분명해졌다.
“수취 대상은 무엇입니까. 마땅히 거절되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단순한 서신입니까, 아니면 그 안에 담긴 책임입니까. 거절권의 법적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권리가 발생한 기원은 무엇입니까.”
서기는 식은땀을 흘리며 서류를 매만졌으나, 여전히 그 어떤 항목도 채워지지 않았다. 이네스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타격음에 귀를 기울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거절 기간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그리고 방금 문밖에서 울린 저 박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것이 수취를 독촉하는 소리입니까, 아니면 이미 늦었다는 경고입니까.”
질문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서류의 빈칸은 역설적으로 더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채워지지 않은 공백이 이제는 단순한 정보의 누락이 아니라, 어떠한 절차로도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절벽처럼 보였다.
베라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냈다. 어디선가 흘러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젖은 재가 어느새 ‘거절 사유’ 칸의 가장자리로 번지고 있었다. 재는 검고 축축했으며, 종이의 결을 따라 기분 나쁜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베라는 조심스럽게 손수건 끝으로 재를 눌러 번짐을 막았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재의 감각은 지독하게 차가웠다. 그것은 단순히 타다 남은 물질이 아니라, 시간의 끝에서 묻어 나온 습기 같았다. 재에서는 희미하게 탄내가 났지만, 그 끝에는 비린 물기 어린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재는 종이 위에 검은 물길을 만들어 글자처럼 보이려 했지만, 베라의 단호한 손길이 그 길을 끊어냈다.
이어 마른 종 흔적 하나가 ‘거절권 보유자’ 칸 위로 나풀거리며 내려앉으려 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르는 파편이었다. 베라는 숨을 죽이고 핀셋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것을 떼어 냈다. 흔적은 너무 가벼워 작은 숨결에도 산산이 흩어질 것 같았지만, 종이 표면에 닿는 순간 끈적이는 저항감을 내비쳤다. 마치 그 자리에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기입하고 싶어 하는 망령처럼. 베라는 그것을 빈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서류 표면을 다시 매끄럽게 정리했다.
베라의 손가락 끝에서 짓눌린 젖은 재가 진득한 오명처럼 묻어났다. 칸의 표면에서 억지로 떼어 낸 자리에 남은 마른 종의 흔적은 흡사 지워지지 않는 낙인과도 같았다. 이것은 거부의 증명이 아니라, 아직 처리되지 못한 업보가 남긴 비루한 잔재에 불과했다. 문밖에서 들려오던 기괴한 박자가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으나, 안에서는 결코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는 행위가 곧 발송인에 대한 정당한 거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수취인이 확인되지 않은 채 비어 있는 이름은 그 자체로 거대한 인과의 공백을 형성했다. 수취하지 않음은 결코 명확한 거절의 의사표시가 될 수 없었으며, 적법한 절차를 거친 반송의 효력 또한 발생시키지 못했다. 서신은 반송 도장을 받지 못한 채 문턱 너머에 영구히 유예될 뿐이다. 돌아갈 곳을 잃은 인과는 그저 문앞에 쌓여 젖은 재가 되고, 부서진 마른 종의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그저 문을 닫아거는 행위만으로는 이 불길한 방문을 끝낼 수 없었다. 거절의 의사를 온전히 표하지 못한 채 방치된 침묵은 오히려 더 큰 갈증이 되어 문틀을 갉아먹고 있었다. 수취인이 부재한 서신은 결코 반송되지 않는다. 그것은 수령될 때까지, 혹은 누군가 그 이름을 채워 넣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썩어갈 따름이었다.
로웬은 펜을 들지 않았다. 그는 접수대 위에 놓인 빈칸들을 차례로 바라본 뒤, 천천히 손가락을 펴서 서류의 항목을 하나하나 짚어 내려갔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서류의 공백이 가진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취할 수 없는 것과 거절한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소란스럽던 홀 전체를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서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취인이 정해지지 않은 것과, 정해진 수취인이 명시적으로 거절한 것도 다릅니다. 발신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반송 효력이 생긴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데 어떻게 반송이 가능합니까.”
로웬은 ‘반송 도장 적용’ 칸 위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이 칸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수취인이 누구인지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거절권 자체를 행사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핀은 로웬의 곁에서 작은 기록 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종이는 빳빳했고, 그가 쥔 펜촉에는 진한 검은색 잉크가 듬뿍 머금어져 있었다. 피핀의 손은 긴장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종이 위에 내려앉는 글씨만은 정교하고 또렷했다. 그는 서류의 여백에 네 줄의 기록을 정중하게 써 내려갔다.
수취인 미정 / 발신자 미정 / 거절 의사 기록 불가 / 반송 도장 적용 보류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적막한 홀에 크게 울렸다. 잉크는 아직 채 마르지 않아 등불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피핀이 마지막 획을 긋고 펜을 내려놓자, 접수대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대기자들의 거친 숨소리도, 서류를 넘기려던 서기의 손끝도, 심지어 문밖에서 들려오던 기이한 박자조차 그 네 줄의 기록 앞에서 일시적으로 멈춰 섰다.
잉크가 천천히 종이 속으로 스며들며 광택을 잃어가는 동안,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불완전한 절차에 대항하는 논리적 방벽이었다.
로웬은 기록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접수대 중앙에 작은 임시 표지를 세웠다. 그것은 마치 이 서류가 더 이상 오염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결계처럼 보였다. 표지에는 짧지만 단호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받을 사람이 없는 봉투는 거절한 사람도 만들지 못함
그 문장은 짧았지만, 수취 거절권 확인서 전체를 가로막는 거대한 빗장이 되었다. 서기는 다시금 반송 도장을 들어 올려 서류에 찍어 누르려 시도했다. 그의 팔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고, 도장의 놋쇠 부분이 공중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손목을 아래로 내리지 못했다. 도장이 내려앉아야 할 칸은 아직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으며, 그곳에 도장을 찍는 행위 자체가 행정적 모순임을 깨달은 서기의 손가락은 힘을 잃고 풀렸다.
문밖의 박자가 돌연 한층 더 빨라졌다. 쿵쿵쿵쿵, 이제는 박자가 아니라 누군가 거칠게 문을 부수고 들어올 듯한 기세였다. 건물의 벽면이 미세하게 진동했고,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져 서류 위를 덮으려 했다. 하지만 로웬이 세워둔 임시 표지와 피핀이 적어 넣은 네 줄의 기록은 견고한 요새가 되어 그 모든 압력을 버텨냈다. 서기는 더 이상 낭독을 이어가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접수대 위의 풍경은 기묘한 정적 속에 침잠했다. 종결통지서는 여전히 비어 있었고, 그 옆에 놓인 수취 거절권 확인서 역시 아무런 기입 없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젖은 재는 베라의 손 안에서 서서히 온기를 잃으며 사그라들었고, 갈 곳을 잃은 마른 종 흔적은 바닥의 먼지와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네스는 로웬의 멈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손은 펜을 잡지도 않았고, 권위의 상징인 도장을 쥐지도 않았다. 그것은 무책임한 방치나 회피가 아니었다. 실체가 증명되지 않은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불완전한 끝맺음을 거부하겠다는 가장 엄격한 절차적 저항이었다. 누군가 성자의 역할을 강요하려 해도, 그 대상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인장을 찍지 않겠다는 침묵의 선언이었다.
수취 거절권 확인서는 종결통지서 옆에 남았지만, 그 빈 확인 칸은 로웬의 멈춘 손을 끝내 거절 의사로 적어 넣지 못했다.
491화. 거절권 위임장의 빈 수임인
접수대 위로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겹겹이 쌓인 서류 더미 사이로, 방금 놓인 종이 한 장이 유독 이질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수취 거절권 확인서와는 결이 다른 물건이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거절권 위임장'이라는 제목이 서슬 퍼런 필체로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채워지지 못한 빈칸들이 입을 벌린 채 누군가의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임인, 수임인, 위임 범위, 수취 대상, 그리고 마지막에 찍혀야 할 반송 도장 칸까지. 모든 칸이 하얗게 비어 있는 그 문서는 권한의 이전이 아닌, 권한의 실종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대기실의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다. 복도를 가득 메운 대기자들의 숨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그 피로감은 곧 날카로운 압박으로 변질되어 접수대를 향했다. 줄의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사람들의 시선이 로웬의 손끝에 머물렀다. 그들의 눈에는 갈망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 이 지긋지긋한 절차를 끝내주길 바라는, 혹은 누구든 좋으니 책임을 지고 문을 열어젖히길 바라는 집단적인 욕구가 공간을 짓눌렀다.
그때, 접수대 안쪽에서 서기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규정집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거세된 목소리는 마치 금속이 바닥을 긁는 듯한 불쾌한 공명을 일으켰다.
"행정 절차법 제4조 12항에 의거, 거절할 사람이 부재하거나 그 신원이 불분명할 경우, 해당 사안을 가장 오래 보존하고 있던 사람이 거절권을 임시 보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절차의 지연을 막기 위한 한시적 조치이며, 보관자는 수임인으로서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습니다."
서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질서 정연한 대화라기보다는 굶주린 짐승들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거기, 그쪽이 가장 오래 들고 있었잖아!"
"오래 들고 있던 사람이 대신 거절하면 되는 거 아니야? 법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는데!"
"이름을 적어라! 수임인 칸에 이름만 적으면 끝나는 일이다. 왜 모두를 힘들게 만드는 거지?"
누군가 외치자 다른 이들이 뒤따라 소리를 높였다. 수백 명의 시선이 화살이 되어 로웬의 어깨를 꿰뚫었다. 공기는 물리적인 무게를 가진 것처럼 로웬을 압박했고, 대기자들의 줄은 마치 거대한 뱀처럼 요동치며 접수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웬이 위임장의 빈칸을 채우기만을, 그리하여 그 '임시'라는 명분 뒤에 숨은 거대한 책임을 떠안기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 긴박한 대치의 순간, 이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접수대 위에 놓인 위임장을 훑었다. 그녀는 대기자들의 소요를 단번에 잠재울 만큼 냉정하고 명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위임인이 비어 있습니다."
이네스의 시선이 서기를 지나 대기자들을 향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위임인이 비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넘겼다는 겁니까? 위임이라는 행위는 권한을 가진 주체가 존재할 때만 성립합니다. 주체가 없는 권한은 실체가 없는 유령과 같습니다. 수임인 칸에 이름을 적으라고요? 누구의 권한을 받는지도 모르는 채 이름을 적는 것이 이 절차의 원칙입니까?"
그녀는 손가락으로 위임장의 항목들을 하나씩 짚어 내려갔다.
"위임 범위도, 수취 대상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거절하는지, 누구로부터 온 것을 반송하는지도 명시되지 않은 이 종이가 어떻게 효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시점조차 불분명한 이 문서에 이름을 적는 순간, 그것은 위임이 아니라 정체 모를 구속에 스스로 발을 들이는 꼴이 될 뿐입니다."
이네스의 논리적인 분해는 대기자들의 압박을 미세하게 균열 냈다. 그녀는 반송 효력이 발생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기만적인 행정적 함정인지를 폭로했다. 위임인과 수임인,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명확한 범위가 없다면 그 어떤 서명도 무효라는 사실을 그녀는 날카롭게 짚어냈다.
그 옆에서 베라는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접수대 구석에 놓인 젖은 재가 담긴 그릇과 무거운 도장 받침대를 분리해 놓았다. 젖은 재에서는 타버린 종이의 매캐한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서늘한 수기가 배어 나왔다. 그것은 누군가가 기록을 인멸하려 했던 흔적 같기도 했고, 혹은 기록 자체가 되지 못한 의지의 파편 같기도 했다.
베라는 조심스럽게 마른 종이의 흔적들을 가려냈다. 그것들은 아주 미세한 진동에도 흩어질 만큼 가벼웠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서명처럼 보일 수 있는 위험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베라는 그 흔적들이 위임 서명처럼 오인되지 않도록, 도장 받침대의 검은 잉크가 번지지 않게 주의하며 그것들을 격리했다. 그녀의 손길은 단호했다. 젖은 재의 눅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으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른 종이의 흔적이 공중에 부풀어 오르다 다시 가라앉는 과정에서, 베라는 그것들이 그 어떤 권한의 증거도 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했다.
로웬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정의 배제가 아니라, 존재의 성격을 규정하는 절차적 분해였다. 위임인이라는 존재의 공백, 수임인이라는 명칭의 허구성, 위임 범위라는 경계의 부재, 그리고 수취 대상이라는 과녁의 상실. 로웬은 거절권이라는 권한이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애초에 발원지가 없는 신기루임을 직시했다.
반송 효력은 그 결과물일 뿐, 그 자체가 원인이 될 수는 없었다. 로웬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오래 들고 있던 사람'이라는 딱지를 거부했다. 그것은 점유의 시간일 뿐, 권한의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권한은 시간의 누적이 아니라 정당한 부여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준 사람이 없는 권한은, 오래 들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넘어오지 않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압력의 고동은 일정했다. 규칙적인 박자가 문틀을 흔들며 내부로 침투하려 했으나, 로웬은 그 진동이 누구의 손길인지 정의하지 않았다. 손끝에는 서늘한 감각이 맺혔다. 탁자 위에 흩어진 마른 종의 흔적은 희미한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그 옆으로 고인 젖은 재는 검게 타버린 문장의 잔해처럼 보였다. 로웬은 손가락 끝으로 그 젖은 재를 짓눌러 보았다. 그것은 어떤 인장으로도, 서명으로도 기능하지 못했다. 형태는 있으되 그 안에 담겨야 할 위임의 의지가 거세된 탓이었다.
위임인의 이름이 비어 있고, 수임인의 신원이 불분명하며, 위임의 범위와 수취 대상조차 명시되지 않은 허공의 문서. 그 위로 떨어진 재와 가루는 그저 시간의 부스러기일 뿐이었다. 보내는 이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남은 것은 서늘한 냉기뿐이었으며, 받는 이의 칸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매끄러운 종이의 질감만을 유지했다. 누군가 서명을 강요하듯 문틀이 삐걱거렸지만, 로웬은 그 압력이 요구하는 바를 수용하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은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설령 그 박자를 수천 번, 수만 번 들어 지독한 이명이 남을 지경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준 사람 없는 권한은 오래 들은 사람에게 넘어오지 않음.
이것은 단순한 인내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밖의 존재가 아무리 거센 압박을 가하고, 그 리듬이 영혼을 갉아먹을 듯 선명해진다 한들, 비어 있는 위임장의 칸은 메워지지 않았다. 단순히 오래 기다렸다는 사정이나, 그 박자를 오랫동안 경청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거절권이라는 엄중한 권능이 이쪽으로 이전되지 않았다. 위임인과 수임인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이상, 문앞에 놓인 반송의 의무 또한 공중에 붕괴될 뿐이었다. 마른 종 소리의 흔적을 긁어모아 인장의 붉은 잉크 대신 쓰려 해도, 그것은 종이 위에 정착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젖은 재 또한 위임의 증거가 아니라, 타버린 약속의 잔해에 불과했다.
로웬은 마른 종의 흔적을 털어내며 임시 표지를 고정했다. 젖은 재가 손가락에 검은 얼룩을 남겼으나, 그것은 도장이 찍힌 계약의 증표가 아니라 씻어내야 할 오염에 불과했다. 문밖의 박자는 여전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일정한 리듬으로 내벽을 두드렸다. 그 소리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했으나, 로웬은 그것이 무엇을 수취하러 온 것인지, 혹은 무엇을 반송하려 하는 것인지 확정하지 않았다. 위임의 근거가 부재한 상태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무효였다. 권한의 공백은 그 어떤 압력으로도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구멍과 같았다. 로웬은 그 구멍 위로 아직 마르지 않은 표지를 덧씌웠다. 권한 없는 거절이나 대리 수행의 효력이 발생하기 전, 오직 모호한 경계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로웬의 목소리가 접수대를 넘어 복도 끝까지 낮게 깔렸다. 그것은 선언이라기보다 확립된 원칙을 확인해주는 행정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피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깃펜을 들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기록물 위로 잉크가 스며드는 소리가 사각거렸다. 대기실의 소음은 여전했으나, 피핀이 써 내려가는 한 줄의 문장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힘을 잃었다.
[ 위임인 미정 / 수임인 미정 / 위임 범위 없음 / 거절권 이전 불가 ]
피핀이 적어 넣은 문장은 명확했다. 그녀는 그 옆에 '권한 귀속 주체 부재로 인한 절차 중단'이라는 주석을 덧붙였다. 잉크가 천천히 마르는 동안, 접수대 밖에서는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박자감이 느껴지는 압력이 전해져 왔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그 박자는 누군가의 두드림 같기도 했고, 거대한 심장의 고동 같기도 했다. 하지만 로웬은 그 정체를 확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이 서류상의 공백을 메울 근거는 되지 못했다.
박자는 압력의 리듬으로만 남았고, 그 실체는 안개 너머로 밀려났다. 피핀은 잉크가 완전히 마른 것을 확인한 뒤, 그 위에 '임시 보관 및 권한 승계 거부'라는 표지를 단단히 세웠다. 그것은 더 이상 이 문서를 근거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강요할 수 없음을 뜻하는 최종적인 경계선이었다.
서기는 입을 다물었다. 대기자들의 웅성거림은 기세가 꺾였다. 그들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논리적으로 분해되고 기록으로 고정된 원칙 앞에서는 더 이상 로웬의 이름을 부를 명분을 찾지 못했다. 위임장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으나, 그것은 이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죽은 종이에 불과했다.
로웬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오랫동안 무거운 서류를 들고 있었던 탓에 손끝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 온기는 권한의 이동이 아니라, 단지 육체적인 고단함의 증명일 뿐이었다. 오래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물건의 주인이 되거나 그 물건에 얽힌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원칙은 감정보다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오히려 로웬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다.
접수대 주변의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베라가 격리한 젖은 재는 더 이상 냄새를 풍기지 않았고, 도장 받침대의 검은 잉크는 굳게 닫힌 채 자리를 지켰다. 이네스는 다시 로웬의 곁으로 돌아와 섰고, 피핀은 기록부를 덮었다. 문밖의 박자는 이제 희미한 진동으로만 남았다. 그 진동조차 접수대의 견고한 원칙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누군가에게서 오지 않은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머물 수 없다. 그 자명한 사실이 이 혼란스러운 행정의 미로 속에서 유일한 길잡이가 되었다. 대기자들은 하나둘씩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여전히 줄을 서 있었지만, 이제는 로웬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혹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을 확인해줄 진짜 위임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거절권 위임장은 반송 도장 옆에 남았지만, 그 빈 수임인 칸은 로웬의 이름을 끝내 대신 거절할 사람으로 끌어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