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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267화. 돌아오지 않은 접수인의 빈 창구 / 성자에게 가지 않은 첫 편지 / 성자가 되지 않은 자의 첫 문턱 일러스트

265-267화. 돌아오지 않은 접수인의 빈 창구 / 성자에게 가지 않은 첫 편지 / 성자가 되지 않은 자의 첫 문턱

265화. 돌아오지 않은 접수인의 빈 창구

우편함 0번의 낡은 철판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녹슬고 뒤틀린 금속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는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짐승이 신음하는 듯했다. 그 안은 단순히 편지를 보관하는 비좁은 함체가 아니었다. 로웬이 내부 발판 뒤편의 은밀한 틈새를 찾아 손가락을 밀어 넣자, 단단하게 닫혀 있던 공간이 마치 정교한 종이접기가 펼쳐지듯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간의 흐름조차 비껴간 듯한, 작고 고즈넉한 창구였다. ‘돌아오지 않은 접수인의 빈 창구’라 불릴 법한 그곳은, 우체국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이자 잊힌 성역이었다.

나무로 된 창구 선반 위에는 뽀얀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위에 놓인 물건들은 기이할 정도로 생동감을 머금고 있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두툼한 양피지 뭉치인 ‘출발 기록 장부’였다. 수천, 수만 번의 손길이 닿아 모서리가 반질반질해진 그 장부 옆에는, 반쯤 마른 채 끈적한 질감을 유지하고 있는 붉은 인주통이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로웬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책상 한가운데에 선명하게 남은 ‘빈 장갑 자국’이었다. 주인이 방금 전까지 손을 얹고 있었던 것처럼, 나무의 질감 속으로 깊게 배어든 장갑의 형상은 주인을 잃은 허망함과 기묘한 압박감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로웬이 창구로 한 걸음 더 다가선 순간, 정적을 깨고 기이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출발 기록 장부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제멋대로 페이지를 넘기며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쾌속으로 넘어가는 종이들이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마침내 장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한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그곳은 ‘접수인 대리 서명란’이었다.

순간, 창구 바닥에 찍혀 있던 빈 장갑의 형상이 마치 실체화하듯 꿈틀거렸다. 형체 없는 압력이 로웬의 오른손목을 거세게 붙잡아 장부 위로 끌어당겼다. 마치 그 빈자리가 원래부터 로웬의 것이었다는 듯, 보이지 않는 장갑의 마디마디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며 일체화를 시도했다. 코끝을 찌르는 끈적하고 비릿한 인주의 향기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로웬 님!”

동시에 피핀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귀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아이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했고, 입술은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누군가의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곳에 고인 오래된 잔류 사념의 목소리였다.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직 맡고 있고…… 아직 맡고 있으니 대신 받아야 한다고, 누군가 자꾸 머릿속에서 속삭여요. 이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누군가는 반드시 이 장부에 마지막 낙인을 찍어야만 한다고……!”

피핀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로웬의 고막을 때렸다. 로웬의 손등이 인주가 묻은 장부의 서명란에 닿기 직전이었다.

챙강,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차가운 감촉이 로웬의 손목을 가로막았다. 베라였다. 그녀는 검집을 채 뽑지 않은 상태로 로웬의 팔을 단단히 고정하며, 그를 집어삼키려던 장갑의 그림자를 단호하게 쳐냈다.

“함부로 자신을 끼워 맞추지 마십시오. 이 자국은 당신의 손마디보다 짧고 비좁습니다. 주인이 아닌 자가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베라의 냉철한 일갈에 로웬은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서명란으로 향하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로웬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심을 잡자, 옆에서 지켜보던 이네스가 창구 주변의 서류 더미를 날카로운 눈미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로웬.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아니, 서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네스는 장부 옆에 무질서하게 흩어진 종이 파편들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텅 빈 서류 보관함과 인계 관련 서류들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이곳엔 절차적 결함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접수인으로서의 권한 위임장도, 전임자로부터의 정식 보관 인계서도 존재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이 창구가 공식적으로 행정상 폐쇄되었다는 기록조차 전무합니다. 전임자가 단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로웬 당신이 이 무거운 책임을 승계해야 할 법적, 행정적 근거가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네스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기록의 공백을 파고들어 실체를 규명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그녀다운 분석이었다.

“정체불명의 직무를 함부로 대행하는 것은 우체국의 관리자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닙니다. 인계 기록이 부재한 상태에서 출발 기록의 보관 책임을 떠안는 것은 명백한 절차 위반이자 관리 소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웬은 이네스의 명료한 지적을 빌려 흔들리던 자신의 의지를 단단히 다잡았다. 그는 자신을 집어삼킬 듯 끌어당기던 장부의 압력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이 창구의 주인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감정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철저히 절차와 규정의 뒤로 물러나 방어벽을 세웠다.

“이네스의 지적이 타당하다.”

로웬의 음성은 이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임자의 공식적인 퇴임이나 권한 포기가 서류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리인 자격으로 이 장부에 서명할 수는 없다. 인계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모든 기록물은 행정적으로 무효다. 따라서 본인은 이 권한의 승계를 보류하겠다.”

그 선언이 창구의 공간에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로웬의 손을 옭아매려던 보이지 않는 장갑의 형체가 힘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미친 듯이 파닥거리던 장부의 페이지도 동력을 잃고 툭 떨어졌다. 창구를 감돌던 기괴한 압박감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실내에는 다시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로웬은 자신의 손가락 마디를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제로 무언가에 끼워 맞춰지려던 그 불쾌하고 생생한 감각이 여전히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정체를 각성하거나 거창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신, 눈앞의 모순과 절차적 결함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옥죄려던 굴레를 일단 멈춰 세웠다.

하지만 모든 소동이 가라앉은 창구 깊숙한 곳,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인주통 너머에 무언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장부에 기록되지 못한 채, 그리고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한 채 이곳에 버려진 마지막 유물이었다.

로웬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빛바랜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회수 접수물: 성자에게 가지 않은 첫 편지.

266화. 성자에게 가지 않은 첫 편지

먼지 섞인 공기가 창구 안쪽에서부터 무겁게 흘러나왔다. 로웬의 손끝에 닿은 것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간절함 혹은 저주가 물리적인 무게를 얻어 굳어버린 결정체와 같았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편지 봉투는 빛바랜 황색으로 변해 있었고, 그 중앙을 가로지른 붉은 봉랍은 마치 굳어버린 핏방울처럼 기괴한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이게…… 미회수 접수물이라는 건가요?”

피핀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봉투 정중앙에 찍힌 인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성휘(聖輝) 문양이었으나, 기묘하게도 그 중심부는 뭉개져 있어 마치 눈을 감은 신의 형상처럼 보였다.

로웬은 천천히 편지를 들어 올렸다. 손바닥을 타고 서늘한 감촉이 전해졌다. 보통의 종이라면 느껴져야 할 온기가 전혀 없었다. 그는 봉랍을 떼어내려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으나, 봉랍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수신자가 누구인지 증명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부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상하네요.”

이네스가 돋보기를 꺼내 들기도 전에 미간을 찌푸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은 편지의 겉면에 머물렀다.

“수신인 칸이 비어 있어요. ‘성자’라는 직함만 간신히 보일 뿐, 정작 이름을 써넣어야 할 자리는 백지예요. 게다가 발신인 쪽은…….”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잉크가 번진 흔적만 남아 있었다. 무언가 이름을 적으려다 급하게 멈춘 듯, 펜촉이 종이를 긁고 지나간 날카로운 자국이 발신자 칸에 흉터처럼 박혀 있었다. 접수인이 기록을 남기다 말고 공포에 질려 펜을 놓아버린 것 같은 형국이었다.

“배달에 실패해서 돌아온 게 아니야.”

이네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수많은 고문서와 행정 기록을 다뤄온 감각으로 단언했다.

“이건 애초에 성자에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중간에 보류된 거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 편지를 접수 단계에서 멈춰 세웠어. 성자가 이 내용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성자가 이 편지를 받는 순간 벌어질 무언가를 두려워했겠지.”

그때였다. 창구 주변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름을 써라.』

피핀이 움찔하며 귀를 감싸 쥐었다. 로웬과 이네스, 베라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오직 영적인 감각이 예민한 자에게만 허락된 파동이었다. 피핀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로웬을 향했다.

“로웬 씨, 목소리가 들려요. 봉랍 안쪽에서…… 성자가 되기 전의 이름을 쓰면 열릴 거라고, 아주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어요.”

그 말과 동시에 로웬의 오른손이 기이하게 떨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빈 수신인 칸을 향해 뻗어 나갔다. 편지 자체가 자성을 띤 거대한 자석이 된 것처럼 로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마치 그의 지문을, 혹은 그가 마음속에 숨겨둔 진실된 이름을 종이 위로 쏟아내게 만들려는 유혹이었다.

로웬의 눈동자가 잠시 흐릿해졌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잊고 있었던, 혹은 잊으려 애썼던 파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 했다. 성자가 되기 전, 그가 평범한 인간으로서 불렸던 이름. 그 단어 하나만 내뱉으면 이 거대한 수수께끼가 풀리고 봉랍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강렬한 충동이 그를 지배하려 했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베라가 어느새 검을 반쯤 뽑아 칼집 끝으로 로웬의 손목을 눌러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로웬의 시선과 마주쳤다. 칼집의 묵직한 무게감이 로웬을 짓누르던 기괴한 인력(引力)을 차단했다.

“정신 차려.”

베라의 단호한 한마디에 로웬의 호흡이 돌아왔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손을 거두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금기된 이름을 저 종이 위에 새겼을지도 몰랐다.

로웬은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며 다시 편지를 응시했다. 편지는 여전히 그의 정체를 갈구하듯 기괴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로웬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감정이나 직관이 아닌,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방식인 '절차'로 해석하기로 했다.

“개봉을 보류한다.”

로웬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이 편지는 수신자가 명확하지 않고, 발신자의 신원 또한 불분명하다. 행정적으로 볼 때, 수취인 불명의 서류를 함부로 개봉하는 것은 절차상 심각한 결함이다. 수신자가 ‘성자’라고 되어 있으나, 현재 이 자리에는 공식적으로 그 직함을 수락하거나 증명한 자가 없다.”

그는 마치 까다로운 서류를 검토하는 서기관처럼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또한 발신자 칸의 기록 누락은 접수인의 과실이다. 이처럼 하자가 명백한 물건을 억지로 열어보는 것은 불필요한 위험을 초래할 뿐이다. 정당한 권한이 확보되거나 서류상의 결함이 보완되기 전까지, 이 편지의 열람 절차를 무기한 중단한다.”

그것은 정체에 대한 고백도, 과거에 대한 각성도 아니었다. 단지 눈앞의 함정을 행정적인 논리로 회피해버린 지극히 로웬다운 대처였다.

그 순간, 로웬의 손목을 잡아당기던 기괴한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봉랍의 붉은 빛이 사그라들고 편지는 다시 평범하고 낡은 종이 뭉치로 돌아갔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로웬이 편지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는 찰나, 편지 뒷면의 여백에 보이지 않는 펜이 휘두르듯 새로운 문장들이 스르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로웬의 거절에 반응하여 기록이 갱신되는 것만 같았다.

검은 잉크가 종이의 결을 따라 번지며 선명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배달 경유지: 성자가 되지 않은 자의 첫 문턱

새롭게 나타난 문구는 로웬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차갑게 박동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아무리 부정하고 회피하더라도, 이미 이 여정의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음을 선언하는 낙인과도 같았다. 로웬은 그 글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성자가 되지 않은 자. 그것은 지금의 그를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이 편지를 가로막았던 과거의 누군가를 뜻하는 말인가.

정적만이 감도는 빈 창구에서, 주인 잃은 편지만이 여전히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267화. 성자가 되지 않은 자의 첫 문턱

편지 뒷면으로 검게 번진 글자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잉크처럼 번져나간 그 흔적은 빈 창구의 먼지 쌓인 대리석 위에 기묘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얼룩이 아니었다. 공간의 경계를 억지로 비집고 나온, 아주 오래된 ‘문턱’의 형상이었다. 로웬은 발밑을 가로지르는 그 검은 선을 내려다보았다. 선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며 대리석의 결을 따라 확장되었고, 이내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그것은 문도, 복도도 아니었다.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현실의 틈새를 빌려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에 가까웠다. 로웬의 시선이 그 기괴한 경계면을 훑었다. 물리적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 그 선 너머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게…… 경유지인가요?”

피핀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웬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주변의 공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숨이 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아니,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 뇌리에 직접 박히는 거대한 사념의 파편에 가까웠다.

[성명을 밝혀라.]

로웬의 발끝이 문턱에 닿자마자 시작된 문답이었다. 의지는 거부할 수 없는 파도처럼 밀려와 존재의 근원을 캐물었다.

[직함을 제시하라.]

[배달의 자격을 증명하라.]

세 가지 요구가 동시에 쏟아졌다. 압력은 실체적인 무게가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무릎을 꿇었을 법한 위압감이었으나, 이네스는 냉정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바닥의 문턱선과 편지에 남은 마력을 대조하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이것은 목적지가 아니에요. 로웬 님, 주의하세요. 일종의 검문 절차입니다. 그것도 아주 비정상적인 상태로 고착된 시스템이죠.”

이네스의 손가락이 허공을 훑으며 마력의 흐름을 분석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문턱은 수만 갈래의 인과율이 엉겨 붙은 거대한 매듭과 같았다.

“미완료된 접수물들이 나가지 못하고 쌓여 있는 임시 보관소…… 혹은 폐기되기 전의 대기실 같은 곳이에요. 이 문턱은 그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가 정당한 권한을 가졌는지 확인하려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기준이 너무나 오래전의 것에 멈춰 있군요.”

그때, 피핀이 귀를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이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영적인 감각이 예민한 아이에게는 그 사념의 파동이 비명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소리가 들려요. 아주 오래된 발소리예요. 누군가 멈추지 않고 계속 걷고 있어요. 그리고…….”

피핀이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성자가 되지 못한 자는 지나갈 수 없다고, 수천 번도 넘게 속삭이고 있어요. 그 말이 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로웬의 발목 주위로 검은 그림자가 뱀처럼 감겨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뜯어지지 않는 견고한 봉인실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로웬이 움직이려 할 때마다 봉인실은 살점을 파고들 기세로 조여졌다. 마치 ‘자격 없는 자’의 전진을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시스템의 완고한 거부 의사 같았다.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베라가 칼집을 휘둘러 로웬의 발목을 감싸던 봉인실을 내리쳤다. 칼날을 뽑지도 않은 상태였으나, 그녀의 묵직한 마력이 실린 타격은 질긴 봉인실을 단번에 끊어냈다.

“성자 같은 소리 하고 있군.”

베라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로웬의 곁을 지켰다. 그녀의 안광이 어둠 속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끊어진 봉인실 조각들이 재가 되어 흩어졌지만, 문턱 너머에서 느껴지는 압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로웬의 신원을 명확히 확인하지 못한 시스템이 폭주하듯 더욱 거센 사념을 내뿜기 시작했다. 대기가 진동하며 창구의 유리창들이 비명을 질렀다.

[성자가 아닌 자는 첫 문턱을 넘을 수 없다.]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영구히 수취 거부될 것이다.]

로웬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건드리는 그 거대한 의문 앞에 섰다. 성자. 이곳의 시스템은 성자의 자격만을 유일한 통행권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여기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기억을 되찾았는지, 그리고 자신이 계승한 빛이 무엇인지 외쳐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로웬은 그러지 않았다. 성자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와 그에 따르는 운명을 그는 아직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품 안에서 반쯤 타버린 배달 영수증과 의뢰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초라하고 낡은 종이 조각에 불과했지만, 이 기묘한 경유지에서는 그 어떤 성물보다도 뚜렷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본인은 성자로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완전한 권한을 떠올렸다. 각성하지 못한 기억, 완전하지 않은 힘. 그러나 그 결함이야말로 지금 이 고착된 시스템을 돌파할 유일한 열쇠였다.

“이곳에 쌓여 있는 미회수 접수물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 본인은 현재 이 구역의 임시 관리자 자격으로 경유 확인을 요청한다.”

[……관리자?]

거대한 사념이 잠시 멈칫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시스템의 논리 회로가 충돌을 일으키는 듯했다. 로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것은 절차상의 결함이다. 수취인이 물건을 받지 못했고, 최초의 배달자가 돌아가지 못했다면 이 물건들은 여전히 ‘배송 중’인 상태로 남는다. 배송 중인 물건에 대한 모든 관리 권한과 책임은 현재 배달을 대행하고 있는 이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턱을 넘을 정당한 행정적 권한이 있다.”

로웬은 억지스러운 논리를 밀어붙였다. 그는 성자가 되어 문턱을 당당히 넘는 정공법 대신, 이 장소가 가진 행정적 모순을 파고들었다. 완벽한 성자가 아니라면, 차라리 권한이 낮은 하급 대행자로서 시스템의 틈새를 지나가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논리는 차갑고 건조했지만, 시스템이 거부할 수 없는 법칙을 담고 있었다.

문턱의 검은 선이 가늘게 떨렸다. 마치 로웬의 궤변을 분석하고 검증하려는 듯 차가운 냉기가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성자가 되어야만 넘을 수 있다는 고위 규칙과, 관리자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다는 하부 실행 규정이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공간 자체가 일렁이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뒤섞였다.

긴 침묵 끝에, 발목을 옥죄던 압박감이 스르르 풀렸다. 주변을 짓누르던 위압적인 사념도 밀물처럼 물러갔다.

“통과…… 된 건가요?”

피핀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물었다. 그 물음에 답하듯, 문턱 너머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텅 빈 창구였던 풍경은 간데없고, 기하학적으로 뒤틀린 기둥들이 끝없이 이어진 기묘한 회랑이 나타났다. 바닥은 거울처럼 매끄러웠으나 그 아래에는 수많은 편지와 소포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 회랑의 초입, 문턱 바로 너머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아주 낡고 해진 가죽 가방이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듯 가죽은 군데군데 갈라져 있었고, 은색 금속 장식은 세월의 때가 앉아 검게 녹슬어 있었다.

“저건…….”

이네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그 가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마력의 파동을 감지했다.

가방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흐릿한 그림자를 내뿜고 있었다. 로웬이 한 걸음을 내딛자, 그 가방의 덮개가 의지를 가진 듯 서서히 들썩였다. 그것은 첫 번째 배달자가 이곳에 도달했을 때 미처 전하지 못하고 남겨두었을, 혹은 스스로가 그 자체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오래된 유산이었다.

가방의 틈새가 천천히 벌어지며, 그 안에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어둠과 함께 수많은 사람의 속삭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로웬은 직감했다. 이것이 성자가 되지 못한 자가 마주해야 할 첫 번째 문턱의 실체이자, 과거로부터 배달된 거대한 업보라는 것을. 그는 가방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공기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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