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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318화 합본. 선택 전 대리인의 빈 서명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름까지 일러스트

316-318화 합본. 선택 전 대리인의 빈 서명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름까지

316화. 선택 전 대리인의 빈 서명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던 푸른 문자가 잘게 부서지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잔상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선택 전 대리인’이라는 다섯 글자가 남긴 무게는 광장에 모인 이들의 숨통을 틀어쥐기에 충분했다.

가장 먼저 변화를 보인 것은 로웬의 주위를 부유하던 수만 개의 표찰들이었다. 금방이라도 폭주할 듯 사납게 떨리던 이름의 조각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꺾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군대가 누군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이는 듯한 장관이었다. 질서 정연하게 정렬된 표찰들이 만들어낸 기묘한 정적이 광장을 뒤덮었다.

“이것이… 대리인의 권능인가.”

관리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눈동자는 경외감과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허공의 기록체계를 더듬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대리인은 이름이 그 주인에게 완전히 당도하기 전까지, 이 공간에 흐르는 모든 수취 절차를 보류하거나 거부할 권한을 가집니다. 아직 ‘본인’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그 공백을 메우는 대리인의 의사가 곧 법이라는 뜻입니다.”

관리인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 말대로라면 이곳의 모든 규칙은 방금 나타난 정체불명의 대리권 아래에 종속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은 이가 있었다.

이네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관리인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정렬된 표찰들을 지나 로웬의 발치에 머물렀다.

“관념적인 설명은 됐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행정적 근거입니다.”

이네스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명확했다. 그녀는 로웬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모든 대리권에는 두 가지 필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대리권을 부여한 발급처이며, 둘째는 그 권한이 소멸하는 만료 조건입니다. 발급처가 불분명하고 만료 시점이 기약 없는 대리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리가 아니라 강탈이니까요.”

이네스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관리인은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시스템이 출력한 문구 어디에도 그 권한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언제 끝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눈을 감고 주변의 진동을 느끼던 피핀의 귀에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아니었다. 종이 위에 이름을 새기는 서명 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멀리서, 혹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규칙적인 소음이었다.

‘발자국 소리?’

피핀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리인의 서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남은 것은 글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비어 있는 복도를 끝없이 걷는 듯한, 공허하고도 일정한 발소리가 서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채워지지 않은 공백을 억지로 유지하며 버티고 있는 누군가의 고독한 의지처럼 들렸다.

“소리가 들려요. 비어 있는 발자국 소리가….”

피핀의 중얼거림에 베라의 시선이 움직였다. 베라는 피핀이 느끼는 기척의 근원을 쫓아 로웬의 등 뒤를 살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지점, 로웬의 발치에서 뻗어 나간 그림자가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분명 태양은 하나인데, 로웬의 뒤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하나는 로웬 자신의 것이었지만, 그 아래에 겹쳐진 또 하나의 그림자는 형태를 알 수 없을 만큼 길고 흐릿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로웬의 등 뒤에 밀착해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림자가 너무 많군.”

베라의 손이 검병을 움켜쥐었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서늘한 궤적이 로웬의 등 뒤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로웬의 뒤를 따르던 두 번째 그림자가 본체에서 분리되어 잘려 나갔다. 잘려 나간 그림자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다 이내 바닥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잔재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전히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로웬은 이 모든 과정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혹은 과거에 어떤 기억이 있었는지를 추론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 눈앞에 닥친 상황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관리인과 허공의 시스템을 향해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절차상의 결함이 지적되었다. 대리권의 정당성을 증명하라.”

로웬의 손끝이 허공을 가리켰다.

“발급처와 만료 조건을 분리하여 출력하라. 보류권이 유효하려면 그 근거 또한 명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시스템을 향한 강제적인 집행에 가까웠다. 로웬의 의지가 닿자, 정지해 있던 표찰들이 다시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거부 권한이라는 강력한 장벽에 부딪혔던 시스템이 새로운 명령어를 처리하기 위해 연산을 가속했다.

광장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이번에는 파괴적인 진동이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톱니바퀴가 제자리를 찾아 맞물리는 듯한 육중한 울림이었다.

이네스는 긴장 어린 눈으로 로웬을 바라보았다. 그가 정체를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마치 세상을 다스리는 법도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흩어졌던 문자 조각들이 로웬의 눈앞에 다시 정렬되었다. 한 글자씩, 선명한 빛을 내뿜으며 문장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이 기이한 대리권이 언제 소멸하는지를 알리는 최후의 통보였다.

[ 대리권 만료 조건: 첫 이름의 본인 수령 ]

317화. 첫 이름을 받는 사람

공중에 부유하던 수천 개의 표찰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나무와 금속, 때로는 짐승의 뼈로 깎아 만든 이름표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내뱉었다. 광장의 소용돌이는 이내 질서를 찾으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광장의 차가운 석재 바닥에 불꽃이 튀었다. 표찰들이 일정한 궤적을 그리며 회전하자, 바닥에는 거대한 원형의 기록선이 새겨졌다. 그것은 마치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자, 동시에 도망칠 수 없는 감옥처럼 보였다.

[ 대리권 만료 조건: 첫 이름의 본인 수령 ]

허공에 떠오른 문장은 여전히 명멸하고 있었다. 광장의 주인이라 자칭하는 관리인이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입가에 걸린 서늘한 미소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대리권의 종말이 눈앞에 왔군.”

관리인이 지팡이로 바닥의 기록선을 가리켰다.

“조건은 명확하다. 이곳에 쌓인 수많은 가명과 오명 중, 이 세계가 허락한 ‘첫 번째 이름’을 본인이 직접 수령하면 된다. 그러면 그 지긋지긋한 대리인의 의무도 끝이 나겠지.”

관리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하지만 경고하지. 이름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만약 본인이 아닌 자가 그 이름을 가로채거나, 혹은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잘못 수령할 경우, 그에게 부여된 모든 ‘선택권’은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 너희는 이름 없는 망령이 되어 이 광장을 영원히 떠돌게 되겠지.”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광장을 덮쳤다. 기록선 안쪽에서 소용돌이치던 이름표들이 하나둘씩 멈춰 서며 특정 후보군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그때, 이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동자는 기록선 위에 새겨진 문구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었다.

“잠깐. 관리인, 당신의 말에는 함정이 있어.”

이네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지적했다.

“‘첫 이름’이라는 정의가 모호해. 그것이 이 기록소에서 가장 먼저 발급된 순서를 의미하는 건가, 아니면 수취인이 실제로 받아야 할 우선순위를 의미하는 건가?”

관리인의 고개가 기묘하게 꺾였다. 이네스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발급 순서와 수령 순서를 분리해서 제시해. 우리는 기록의 오류를 검증할 권리가 있다. 이름이 잘못 전달되는 것은 배달부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결함이니까.”

관리인은 대답 대신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네스의 논리적인 요구에 기록선 안의 표찰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재정렬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피핀은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쫓고 있었다. 이름표들이 내뿜는 마력의 잔재나 영혼의 울림이 아니었다.

“이상해…….”

피핀이 몸을 낮추며 기록선 가장자리에 코를 가져다 댔다. 그녀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이름표에서 나는 냄새가 아냐. 이건 아주 오래된, 먼지 쌓인 종이랑…… 낡은 배송 도장의 냄새야.”

피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이름표들 사이에서 단순히 글자가 새겨진 판때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때가 묻고 수천 번은 찍혔을 법한 ‘인장’의 흔적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전달되기 위해 준비된, 완결되지 않은 심부름의 냄새였다.

그때였다. 광장 구석에서 스멀거리는 검은 기운이 기록선을 향해 기어들기 시작했다. 아까 퇴치했던 두 번째 그림자의 잔재였다. 그것들은 이름이 결정되는 순간의 공백을 틈타 기록의 공백을 잠식하려 들었다.

챙!

날카로운 파찰음과 함께 은빛 검기가 바닥을 갈랐다. 베라가 대검을 바닥에 박아넣으며 그림자의 접근을 차단했다.

“한 발자국도 들여보낼 수 없다.”

베라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투기가 기록선 주변을 감싸 안았다. 그림자의 잔재들은 그녀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베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동료들에게 외쳤다.

“뒤는 내가 맡지. 로웬, 서둘러라. 저놈들이 기록을 오염시키기 전에!”

로웬은 기록선 중심에 멈춰 선 표찰들을 응시했다. 관리인은 그가 자신의 진짜 정체를 깨닫거나, 성자로서의 기억을 각성하기를 종용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로웬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과거에 어떤 위대한 존재였는지를 묻지 않았다.

로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침착하고 사무적이었다.

“관리인. ‘본인 확인’ 절차를 다시 정의하겠다.”

“뭐라고?”

“이것은 신원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업무에 대한 확인이다. 이 이름이 ‘첫 번째’라면, 그것은 이 세계의 배달 시스템이 가동된 이후 가장 먼저 발생한 미결제 심부름이라는 뜻이겠지.”

로웬은 기록선 안으로 손을 뻗었다. 수많은 이름표 중 단 하나, 가장 낡고 볼품없는 목패가 그의 손짓에 반응해 떠올랐다.

“나는 내 정체를 증명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 물건의 수령인으로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배달 사고를 수습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이 심부름을 완수할 ‘수취인’의 자격을 물어라.”

그것은 정체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절차에 대한 요구였다. 관리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로웬은 자신을 가두려는 ‘이름’이라는 틀을 역으로 이용해, 그것을 단지 수령해야 할 ‘화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기록선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황금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피핀이 맡았던 배송 도장의 냄새가 광장 전체를 진동시켰다. 수천 개의 이름표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오직 로웬 앞에 떠오른 목패만이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로웬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것은, 화려한 성자의 이름도, 위대한 영웅의 칭호도 아니었다.

그것은 타다 남은 재의 온기를 머금은, 아주 오래된 직함이었다.

허공에 수령을 확인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 첫 수취명: 잿불 심부름꾼 ]

318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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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떠오른 푸르스름한 문자가 광장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 첫 수취명: 잿불 심부름꾼 ]. 그 기괴한 호칭이 확정됨과 동시에, 광장의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변화가 일어난 곳은 수천, 수만 개의 표찰이 매달려 있던 격자무늬의 천장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찰들이 일제히 파닥거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낡은 종이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얇은 금속판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서늘하고도 규칙적인 기계음이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이름과 번호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것들은 바닥에 흩어지는 대신, 로웬의 발치로 모여들며 기이한 질서를 갖추기 시작했다.

착, 착, 차착.

일정한 박자에 맞춰 겹쳐진 표찰들은 로웬의 발등부터 무릎 높이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것은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배송 영수증이 겹겹이 접혀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수만 개의 사연이 담긴 그 종이 뭉치들이 오직 한 사람, 로웬만을 향해 길을 내고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로웬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보다는 업무적인 의구심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관리인은 대답 대신 그림자로 이루어진 손을 뻗어, 길게 늘어진 영수증의 가장 끝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칸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명하십시오.”

관리인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를 울렸다. 이전보다 한층 더 무겁고 압박감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당신은 ‘잿불 심부름꾼’으로서 이곳에 섰습니다. 이 서류에 수취 확인 서명을 마치는 순간, 당신이 짊어지고 있던 대리권은 종료됩니다. 그것은 곧 당신이 이 지겨운 인과에서 해방됨을 의미하지요.”

관리인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로웬의 주변을 에워쌌다. 마치 서두르라는 듯, 혹은 도망칠 구멍을 차단하려는 듯한 위협적인 움직임이었다. 로웬이 깃펜을 잡으려는 듯 손을 움츠리자, 뒤에 서 있던 이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잠깐.”

이네스의 서늘한 목소리가 관리인의 압박을 갈랐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로웬의 발치에 놓인 거대한 영수증 더미를 날카로운 눈미로 훑었다.

“배송의 기본도 모르는 모양이군. 아니면 이 장소의 규칙이 원래 그렇게 허술한 건가?”

관리인의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이네스를 향했다. 하지만 이네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수취물이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명부터 요구하다니. 이건 명백한 절차 위반이야. 내용물이 파손되었는지, 혹은 주문한 물건이 맞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이 서명란은 무효나 다름없어.”

그녀의 지적은 지극히 타당했다. 이네스는 로웬의 곁으로 다가가 관리인을 쏘아보며 덧붙였다.

“대리권의 종료라는 달콤한 말로 현혹하지 마라. 물건을 먼저 보여주는 게 순서다.”

관리인이 침묵에 잠긴 사이, 로웬의 뒤쪽에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피핀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영수증 더미가 길게 늘어선 뒤쪽,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가 들려요.”

피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감싸 쥐듯 손을 올린 채, 영수증 너머의 공간을 응시했다.

“빈 꾸러미가 아니에요. 저 안에서…… 아주 작고 가냘픈 소리가 들려요. 누군가의 첫 울음 같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숨소리 같은 게…….”

피핀의 말에 베라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베라는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그 순간, 관리인의 그림자 잔재가 슬그머니 영수증의 서명란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로웬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명을 강제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챙!

베라가 검을 완전히 뽑지 않은 채, 칼집에 넣은 상태 그대로 칼등을 내리눌렀다. 묵직한 금속음과 함께 서명란으로 스며들던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듯 흩어졌다.

“서두르지 마라, 관리인.”

베라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녀의 칼등이 영수증의 빈 칸을 짓누르며 관리인의 접근을 물리적으로 차단했다.

“이쪽의 전문가가 절차를 따지겠다고 하지 않나. 고객의 요구를 무시하는 상인은 신용을 잃기 마련이지.”

동료들의 비호 속에서 로웬은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그는 자신을 압박하는 관리인의 그림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각성한 영웅이나 위대한 성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맡은 배달 사고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실무자의 눈빛이었다.

“당신 말대로 제 대리권이 끝나는 것이라면, 마지막 업무만큼은 완벽하게 끝내고 싶군요.”

로웬은 영수증 위로 뻗었던 손을 거두고, 관리인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서명은 나중입니다. 제가 받을 물건을 먼저 보여 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 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단 한 글자도 적지 않겠습니다.”

광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관리인의 그림자가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거부할 수 없는 규칙과 로웬의 단호한 태도가 충돌하며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얼마간의 팽팽한 대치 끝에, 결국 관리인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좋을 대로.”

관리인이 손을 휘두르자, 광장 중앙의 바닥이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 틈새 사이로 육중한 철제 보관함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수많은 봉인구가 사슬처럼 감겨 있는, 배송칸이었다.

봉인된 배송칸의 틈새로 눈부신 빛과 함께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육중한 뚜껑이 열리는 순간, 로웬의 눈앞에 투명한 문자가 각인되듯 떠올랐다.

[ 수취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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