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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465화 합본. 아직 걷지 않은 발자국의 앞코에서 울리지 않은 종의 수취 확인란까지 일러스트

464-465화 합본. 아직 걷지 않은 발자국의 앞코에서 울리지 않은 종의 수취 확인란까지

464화. 아직 걷지 않은 발자국의 앞코

습기로 눅눅해진 공기가 접수대 주변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천장 어딘가에서 떨어진 차가운 수증기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먼지 냄새를 머금고 흩어졌다. 임시로 세워진 문구 위에는 오랜 세월이 응축된 듯한 회색 분진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곳은 누군가의 이름을 기록하고, 행선지를 확인하며, 존재의 무게를 증명해야 하는 경계였다. 그러나 지금 그 경계 위에는 오직 정적만이 고여 있었다.

어느 순간, 미세한 기류의 흐름이 고요를 갈랐다. 바닥에 내려앉은 먼지들이 보이지 않는 압력에 밀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람에 의한 흩날림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곳에 서서 아주 천천히 발을 내디디려 하는 것처럼, 먼지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밀려 나갔다. 밀려난 먼지들은 문구의 가장자리에서 곡선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그 형태는 기묘할 정도로 선명했다. 신발의 앞부분, 즉 앞코가 그리는 반원형의 곡선이 먼지 더미 위에 새겨졌다.

그 반원 안쪽은 기묘할 정도로 깨끗했다. 먼지가 밀려 나간 자리에는 바닥재의 거친 결이 그대로러 드러났지만, 그곳을 밟고 지나갔어야 할 발바닥의 압력이나 무게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빈칸이 주는 냉기가 발등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발자국이 없는데도 느껴지는 지독한 압박감이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보폭이 만들어낸 허구의 무게였다.

접수대 뒤에 놓인 낡은 기계 장치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금속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리며 비명을 질렀고, 잉크가 마른 도장 판이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기계는 먼지 위에 새겨진 그 반원형의 흔적을 '선도착 확인'으로 처리하려 들었다. 누군가 도착했다는 전제하에, 그 앞코의 모양에 맞춰 다음 절차를 진행하려는 강박적인 움직임이었다. 기록부의 빈 면에 보이지 않는 힘이 가해지며 글자가 새겨지려 했으나, 펜촉은 종이 위에서 파르르 떨릴 뿐 확정적인 획을 긋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줄, 즉 이 장소에 귀속된 질서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가 이 흔적을 남겼는지,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이 흐트러진 먼지 위에 어느 쪽 발을 맞춰서 이 미완의 걸음을 완성할 것인가. 왼쪽인가, 아니면 오른쪽인가. 그들은 빈 공간을 채울 실체를 갈구하며,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성자'의 발을 그 반원형의 틀 속에 끼워 넣으려 안달했다.

접수대의 낡은 목재 톱니가 비명을 질렀다. 얇은 가죽판이 덧대어진 선별 막대는 바닥에 찍힌 기묘한 앞코 모양 위에서 갈 곳을 잃고 덜덜 떨렸다. 기계적인 판정 기준은 명확해야 했으나, 바닥에 남은 흔적은 그 어떤 범주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다. 접수대는 앞코의 각도를 인식하여 ‘선도착 확인’ 칸으로 막대를 밀어 넣으려다 멈췄고, 다시 무게중심의 잔류치를 계산해 ‘선수취 대기’ 쪽으로 방향을 틀려다 삐걱거리는 소음과 함께 멈춰 섰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마지막 선택지인 ‘선거절 예약’의 홈에 막대 끝을 맞추려 했으나, 흔적이 지닌 기묘한 질감은 거절의 명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확정되지 못한 기계음이 접수실 내부를 건조하게 긁어댔다.

그 소음보다 더 날카로운 것은 등 뒤를 가득 메운 순례자들의 시선이었다. 줄은 이미 질서를 넘어선 압박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그 흔적을 남긴 자가 누구인지,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단지 완성되지 못한 퍼즐 조각 하나였다. “누가 밟았는가”라는 질문은 이곳에서 힘을 잃었다. 대신 “어느 발을 맞춰야 이 기괴한 정체를 끝내고 다음 칸으로 넘어가겠는가”라는 갈망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앞코 모양은 그들에게 있어 정답을 기다리는 빈칸이었고, 누구든 제 발을 들이밀어 그 형태를 완성하고 접수대의 판정을 강제로 끌어내야만 이 지루한 대기가 끝날 터였다.

군중의 갈망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가장 앞줄에 서 있던 한 순례자가 홀린 듯 발을 내디뎠다. 그는 자신의 발 크기가 흔적과 맞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저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워 정지된 체제를 가동하려 했다. 그가 바닥의 앞코 모양에 발끝을 맞추려던 찰나, 이네스가 번개처럼 끼어들었다. 이네스는 거칠게 어깨를 밀어 순례자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갈팡질팡하던 접수대의 선별 막대를 손바닥으로 쳐서 멀리 밀어내 버렸다. 텅 빈 바닥과 기계의 접점은 그렇게 강제로 분리되었다. 순례자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신음했지만, 이네스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막대가 튕겨 나간 궤적만을 차갑게 응시했다.

베라는 그 흐트러진 현장 속으로 다가갔다. 흔적을 보고 누군가의 신원을 유추하려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겠다는 듯, 베라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의 먼지가 밀려난 방향만을 간결하게 그어 표시했다. 그것은 도착의 증거가 아니라 이동의 관성일 뿐이었다. 베라는 끊어진 테두리의 단면과, 어떤 발바닥도 닿지 않아 정갈하게 남아 있는 빈 바닥의 경계만을 짚어냈다. 누군가가 이 자리에 존재했다는 실존의 증명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베라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누구’라는 의문은 사라지고, 오직 ‘남겨진 물리적 상태’만이 건조하게 드러났다. 정체를 추론하려는 모든 단서 위에는 부정의 낙인이 찍혔다. 빈 바닥은 그저 빈 바닥이어야 했고, 닿지 않은 곳은 영원히 닿지 않은 채로 두어야 했다.

피핀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수첩을 펼쳤다. 지금 당장 이 모든 현상을 정의 내릴 수는 없었으나, 훗날 왜곡되지 않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전제 조건들을 머릿속에 각인했다. 피핀의 시선은 이네스에 의해 밀려난 막대의 끝에서부터 베라가 그어버린 금의 경계까지 훑고 지나갔다. 잉크가 묻지 않은 깃펜이 허공을 돌며 기록의 예행연습을 마쳤다. 수첩의 첫 줄에 새겨질 문장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먼지 밀림 / 앞코 모양 / 걸음 없음 / 도착 없음]

이 문장들은 그 어떤 수식어도 허용하지 않았다. 흔적은 누군가의 의지나 도착을 상징하지 않았으며, 그저 그 자리에 머물렀던 공백의 형태일 뿐이었다. 접수대의 톱니는 이제 동력을 잃고 느리게 회전 속도를 줄여갔다. 선도착도, 수취도, 거절도 아닌 무색의 상태가 접수대 주변을 감쌌다. 사람들의 압박은 이네스의 물리적인 거절 앞에서 갈 길을 잃고 흩어졌다. 바닥의 앞코 모양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으나, 이제 누구도 그것을 자신의 발에 맞춰 완성하려 들지 않았다. 미완성된 채로 버려진 흔적만이 정체불명의 박자를 머금은 채 차갑게 식어갔다. 로웬이 그 정적을 깨고 공간을 나누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기 직전, 접수실의 공기는 이 기묘한 불일치를 받아들인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로웬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시선은 바닥에 새겨진 먼지의 곡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흔적에 휩쓸리지 않는 서늘한 이성이 깃들어 있었다. 로웬은 손을 뻗어 허공을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선들을 하나씩 짚어 내려갔다. 그것은 현상을 해체하는 손길이었다.

성자의 역할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식의 오해로부터 강요되어 왔다. 앞선 흔적이 보이면 누군가는 그 뒤를 따라야 하고, 모양이 만들어지면 그 모양에 발을 맞춰야만 하는 당위성이 세계를 지배해 왔다. 로웬은 그 강제적인 질서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목한 것은 바닥에 흩어진 먼지의 이동이었다.

"먼지가 밀린 현상은 기류의 변동일 뿐이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이어 시선은 반원형의 곡선으로 향했다.

"앞코의 모양이 형성되었다 하여, 그것이 누군가의 의지를 담은 형상이라 단정할 수 없다."

로웬은 먼지 밀림과 앞코 모양을 명확히 분리했다. 그리고 그 옆의 텅 빈 공간,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바닥의 결을 가리켰다.

"실제적인 걸음은 발생하지 않았다. 압력도, 마찰도, 이동의 궤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접수대의 덜컥거리는 기계 장치를 응시했다.

"따라서 도착은 성립되지 않는다."

먼지 밀림, 앞코 모양, 실제 걸음, 도착. 로웬은 이 네 가지 요소를 칼로 베어내듯 분리해 냈다. 이것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 성자의 강림이나 수취의 증거로 삼으려는 세계의 시도를 거부한 것이다. 도착의 의사가 담기지 않은 형상은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며, 그 모양에 발을 맞출 의무 또한 누구에게도 없다는 선언이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무리 중 한 명이 홀린 듯 발을 내디뎌 먼지의 곡선에 자신의 발을 맞추려 했다. 그가 그 틀 안에 발을 집어넣는 순간, '성자'라는 가혹한 굴레가 그를 덮칠 터였다. 접수대의 기계 막대가 그를 향해 위협적으로 기울어졌다.

이네스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흔적에 발을 맞추려던 사람의 어깨를 밀쳐내며 그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동시에 접수대에서 뻗어 나온 금속 막대를 강하게 쳐내며 경로를 차단했다. 이네스의 눈빛은 단호했다. 강요된 역할에 희생양을 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태도였다. 막대는 허공을 휘젓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베라는 그 옆에서 조용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품 안에서 가느다란 표식을 꺼내 바닥의 상태를 면밀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베라가 표시한 곳은 먼지가 쌓인 곳이 아니라, 먼지가 밀려 나간 방향과 그로 인해 끊어진 테두리의 단면이었다.

"밀린 방향은 불규칙하며, 테두리는 외부의 압력이 아닌 내부의 진공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닿지 않은 빈 바닥에는 그 어떤 생명의 온기도, 잔존하는 마력의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베라의 보고는 차가웠다. 그것은 존재가 머물다 간 자리가 아니라, 존재가 결여된 자리임을 증명하는 기록이었다. 베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의 실체를 무시하고 오직 물리적인 사실만을 남겼다.

피핀은 로웬의 곁에서 두꺼운 기록부를 펼쳤다. 펜촉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피핀은 로웬이 분류한 네 가지 항목을 정확하게 한 칸씩 채워 넣었다.

[ 항목 1: 먼지 밀림 - 확인됨 ]

[ 항목 2: 앞코 모양 - 형성됨 ]

[ 항목 3: 걸음 없음 ]

[ 항목 4: 도착 없음 ]

기록은 명료했다. 나타난 현상만을 인정하되, 그 현상이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되는 상징이나 의무는 철저히 배제했다. 피핀은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며 로웬을 바라보았다. 로웬은 기록부의 하단, 비어 있는 주석 란에 직접 펜을 들어 문장을 덧붙였다.

"걷지 않은 앞코는 도착이 아님."

그것은 이 장소에 머물던 기묘한 압박감을 해소하는 쐐기였다. 아직 걷지 않은 발자국의 앞코 모양 따위는 도착의 의사도, 무언가를 수취하겠다는 약속도, 거절의 의사표명도 대신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성자의 역할을 강제로 부여하기 위해 세계가 쳐놓은 덫이 그 문장 하나에 힘없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접수대의 기계는 더 이상 소음을 내지 않았다. 톱니바퀴는 멈췄고, 허공을 떠돌던 잉크 냄새도 차츰 옅어졌다. 먼지 위의 반원형 곡선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그저 흩어진 먼지 더미에 불과했다. 누구도 그곳에 발을 맞출 필요가 없었고, 누구도 그 흔적의 주인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금의 발생 주체가 누구인지, 마른 종의 소유자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빈 이름의 당사자가 누구이며 문밖에서 들려오는 저 일정한 박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젖은 재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반송 도장이 찍혀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일 또한 다음의 몫으로 남겨졌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보이지 않는 발자국에 묶여 누군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사태를 막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주변의 냉기는 여전했으나 더 이상 숨을 막히게 하지는 않았다. 바닥의 결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밀려난 먼지들은 미세하게 흔들리며 제자리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네스는 접수대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베라는 자신이 남긴 표시들이 훼손되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피핀은 기록부를 소중히 품에 안으며 로웬의 뒤를 따를 준비를 마쳤다.

정체 모를 흔적이 남긴 위압감은 사라졌지만, 복도 끝 어둠 속에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한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단서들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으나, 로웬은 서두르지 않았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발을 맞추는 대신, 아직 걷지 않은 발걸음의 무게를 부정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었다.

덧붙인 문구 끝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바닥의 빈칸에서 뒤꿈치 없는 그림자가 아주 짧게 접힘

465화. 울리지 않은 종의 수취 확인란

표지 뒤쪽, 겹겹이 쌓인 질감이 공기 중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못한 소리들이 서로의 목을 조르며 버티는 팽팽한 대치였다. 그때, 보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종의 그림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 자체는 미동도 없었으며, 그것을 흔들어야 할 손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그림자만이, 실제의 움직임보다 정확히 한 박자 늦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는 그림자의 궤적은 기괴할 정도로 매끄러웠으나 그 끝에서 터져 나와야 할 금속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울리지 않은 종의 파동이 그림자의 형태로만 바닥을 훑었다.

접수대는 기계적인 마찰음을 내며 반응했다. 정면의 석판 위로 싯누런 빛이 명멸하더니,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접수대는 주인을 잃은 그림자의 흔들림을 ‘신호’로 규정했다. 시스템의 논리는 단순했다. 현상이 발생했다면 그에 따른 절차가 존재해야 했고, 절차의 완결을 위해서는 수취인의 동의가 필요했다. 접수대의 상단에 위치한 수정구가 붉게 달아오르며 수취 확인란의 칸을 강제로 생성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건에 대해 미리 서명을 요구하는 고압적인 독촉이었다.

주변을 에워싼 군중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경외보다 갈급함이 앞섰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종을 흔든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진실이 아니었다. 거대한 시스템이 요구하는 ‘수취인’이라는 빈칸을 누구로 채워야 이 불안한 정적을 끝낼 수 있는가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누가 받았는가?”

누군가 던진 질문은 순식간에 변질되었다.

“누구를 수취인으로 맞출 것인가?”

목소리들은 파도처럼 밀려들며 하나의 거대한 압박이 되어 로웬의 등을 밀었다. 군중은 이미 정해진 답을 원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상징의 끝에 서 있는 자, 성자라 불리며 궤적을 증명해온 로웬이 그 확인란에 이름을 적어 넣기를 바랐다. 누군가 수취인으로 확정되는 순간, 정체 모를 종소리의 부재도, 기이한 그림자의 흔들림도 모두 ‘정상적인 수취 과정’으로 포장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확인되지 않은 신비를 견디기보다 가공된 확신을 수용하는 쪽을 택했다.

로웬은 흔들리는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접수대가 강제로 열려고 시도하는 수취 확인란의 빛이 로웬의 구두 끝까지 뻗어 나왔다. 하지만 로웬은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로웬의 눈에 비친 그것은 동의를 구하는 창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부채를 떠넘기려는 족쇄였다.

“분리해야 한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군중의 웅성거림을 단번에 가르는 서늘함이 있었다.

“종은 울리지 않았고, 그림자만 존재하며, 물건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다. 고로 확인은 불가능하다.”

접수대의 수정구가 거칠게 점멸했다. 시스템은 로웬의 부정을 오류로 처리하려 들었다. 그림자가 흔들렸으니 누군가는 종을 흔든 것이고, 종을 흔들었다는 것은 전달할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며, 메시지가 존재한다면 수취인은 당연히 응답해야 한다는 논리의 순환. 그러나 로웬은 그 고리 자체를 거부했다. 수취인이 없는데 확인란을 먼저 여는 것은, 결과에 맞춰 원인을 조작하는 기만일 뿐이었다.

군중의 속삭임은 해류처럼 방향을 틀었다. 질문의 본질은 이제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이 현상의 제물로 삼을 것인가’로 변질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먼저 침을 삼켰고, 그 소리는 삽시간에 확신으로 번졌다. 그들의 시선은 로웬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무거운 견장처럼 그를 짓눌렀다.

“침묵은 곧 시인이지 않습니까.”

누군가 던진 그 한마디가 기폭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로웬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대답이 아닌, 성자라는 지위의 수락을 읽어내려 애썼다. 그들에게 있어 이 부자연스러운 현상은 반드시 해석되어야만 하는 신탁이었고, 그 신탁을 감당할 적임자는 이 자리에 선 사내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흔들렸다면 종이 울린 것이며, 종이 울렸다면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그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논리 구조 안에서 로웬의 침묵은 부정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사명을 받아들이는 자의 엄숙한 무게감으로 왜곡되었다.

수정구의 점멸은 더욱 가팔라졌다. 시스템은 로웬의 거부권을 인식하지 못한 채, 비어 있는 ‘수취인’ 칸에 그의 이름을 강제로 기입하려는 듯 끊임없이 명멸했다. 군중은 로웬이 그저 손을 뻗어 수정구에 손을 올리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은 확인 절차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에 도장을 찍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그때, 군중의 시선 한 축이 이네스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로웬의 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 미묘한 위치 이동을 목격한 누군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증언을 피하려는 건가! 당신도 보았지 않소? 저 그림자가 누구를 향해 굽어굽어 흘러갔는지!”

이네스의 침묵과 거리 두기는 순식간에 진실을 회피하려는 방관자의 태도로 낙인찍혔다. 사람들은 그녀를 로웬의 성자 등극을 증명할 유일한 목격자로 세우려 들었다. 집단의 의지는 거대한 그물망이 되어 두 사람을 에워쌌고, 그물코 하나하나마다 ‘수취’와 ‘확인’이라는 단어가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로웬은 그 강요된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분절해내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침묵은 공백이지 동의가 아닙니다. 그림자는 빛의 부재일 뿐 소리의 진동이 아니며, 수취인의 부재 속에 이루어지는 전달은 오배송에 불과합니다.”

로웬은 시스템이 제시하는 네 가지 항목, 즉 침묵과 그림자, 수취와 확인을 철저히 분리했다. 그는 군중이 엮어놓은 인과관계의 고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성자라는 역할이 강제되는 절차적 모순을 지적하며, 그는 자신 앞에 놓인 확인란을 여는 대신 그것을 아예 시야 밖으로 밀어냈다. 결과가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 걸맞은 원인이 이 자리에 실재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이네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군중이 만들어낸 시선의 격자무늬 사이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불규칙했으나 단호했고, 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궤적은 사람들 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집단 증언의 실타래를 사정없이 끊어놓았다. 이네스는 누군가와 눈을 맞추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물리적으로 점유하며 그 흐름을 산산조각 냈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이네스의 몸짓은 증언을 거부하는 회피가 아니라, 증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적극적인 방해였다. 그녀가 로웬의 그림자 끝을 밟고 서서 군중의 시선을 정면으로 차단하자, ‘누구를 수취인으로 맞출 것인가’에 몰두하던 광기는 갈 곳을 잃고 흩어졌다.

울리지 않은 종의 그림자는 결코 알림이 될 수 없었고, 수취가 확인되지 않은 메시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웬이 확인란의 개방을 보류함으로써 얻어낸 것은 성자라는 가면의 해체였다. 시스템의 오류는 여전히 수정구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적어도 로웬과 이네스, 두 사람을 그 소용돌이의 중심축으로 삼으려던 군중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여전히 마른 종을 흔든 주체가 누구인지, 그 흔들린 손의 끝에 무엇이 맺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닥을 적신 물방울의 출처나 문밖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박자,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젖은 재의 시작점 또한 베일에 싸인 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로웬은 자신에게 찍히려는 반송 도장의 대상을 거부하며 그 모든 불확실성 속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네스가 군중과 로웬 사이의 거리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증언이라는 이름의 밧줄이 되어 로웬을 묶으려 할 때마다, 이네스는 그 시선이 닿는 궤적을 몸으로 막아 세웠다. 이네스의 손끝이 허공을 가르자 물리적인 간격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내뱉는 확신 섞인 말들이 로웬의 확언에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흩어졌다. 이네스는 군중의 몸짓이 하나의 확인 증언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움직이며 공간의 밀도를 조절했다. 한 명의 목격담이 전체의 사실로 비화하는 것을 막는 고독한 방어였다.

베라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표지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표지를 뒤집어 그 뒤에 숨은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유혹이 현장에 가득했으나, 베라는 결코 손목을 비틀지 않았다. 표지를 뒤집는 순간, 억지로 고정되어 있던 그림자의 상태는 파괴될 것이었다. 베라는 오직 그림자가 유지되는 최소한의 장력만을 보존하며 접수대의 진동을 억제했다. 베라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압력이 가해졌지만, 표지는 수평을 유지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들춰내지 않겠다는 완강한 의지였다.

그 뒤편에서 피핀의 펜촉이 거칠게 종이 위를 달렸다. 피핀은 감정이나 추측을 배제한 채, 눈앞에 구현된 현상만을 도려내어 기록했다. 잉크가 번질 틈도 없이 날카로운 문장들이 새겨졌다.

[ 울림 없음 / 그림자 있음 / 수취인 없음 / 확인 불가 ]

피핀은 적어 내려간 문장 끝에 마침표 대신 긴 여백을 남겼다. 그것은 확정되지 않은 현재를 그대로 박제하는 행위였다. 접수대의 수정구가 마지막 발악처럼 빛을 뿜어내며 수취 확인란의 봉인을 강제로 해제하려 할 때, 로웬이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로웬의 손바닥 아래에서 잉크보다 짙은 그림자의 냉기가 흘러나왔다. 로웬은 접수대의 논리 구조 자체를 마비시키며, 명확한 한 문장을 선언하듯 덧붙였다.

“수취 확인란 선개방 보류.”

그 말과 함께 접수대를 감싸던 기괴한 진동이 멈췄다. 억지로 열리려던 수취 확인란의 빛이 사그라들고, 석판 위의 글자들은 갈 곳을 잃은 채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군중은 탄식했으나 로웬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절차를 늦추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강제로 부여될 예정이었던 ‘성자’ 혹은 ‘수취인’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받은 적 없는 것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들리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고 기만하지 않는 것. 그 당연한 원칙이 무너진 세계에서 로웬은 보류라는 이름의 방벽을 세웠다.

폭풍 같은 대치가 지나간 자리에는 서늘한 침묵만이 남았다. 종의 그림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으나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박자가 어긋난 심장처럼, 표지 뒤편에 달라붙어 정지해 있었다. 로웬이 손을 떼자 접수대 아래쪽에서 마른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젖은 재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뜨거운 열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정성스럽게 갈무리되는 모양새였다. 재들은 서로의 입자를 맞물리며 평면을 만들더니, 이내 속이 빈 봉투의 형태로 꺾이고 접혔다. 내용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담긴 것이 없었으므로 봉투는 그저 형태만을 유지한 채 로웬의 발치에 떨어졌다.

봉투의 귀퉁이에는 검은 액체가 서서히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잉크라기보다 오래된 슬픔이 농축된 물방울 같았다. 젖은 재로 만들어진 봉투는 누군가의 손에 닿기도 전에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듯 얼룩져 갔다. 그 얼룩은 정교한 글자의 모양을 갖추며 수취 거부보다 더 근원적인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봉투 귀퉁이에 번진 받은 적 없음이라는 글자가 마르기 전에, 접힌 봉투 안쪽에서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가 거꾸로 매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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