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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29화 합본. 일곱 번째 칸의 이름표에서 북문 검문소의 젖은 끈까지 일러스트

127-129화 합본. 일곱 번째 칸의 이름표에서 북문 검문소의 젖은 끈까지

127화. 일곱 번째 칸의 이름표

멈추지 않는 귀가 종 아래에서 육중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보육실 중앙 장부, 그중에서도 견고하게 닫혀 있던 일곱 번째 칸의 봉인이 해제된 것이다. 낡은 종이가 비명을 지르듯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서랍이 천천히 밀려 나왔다.

이네스가 검 손잡이를 쥔 채 한 걸음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서랍 안에서 튀어 오른 것은 치명적인 함정도, 저주 서린 괴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종이 조각이었다.

“……이름표?”

이네스의 말대로였다. 서랍 안에는 이름이 적히지 않은 빈 이름표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형태가 기묘했다. 어떤 것은 아이들의 가슴팍에 달렸을 법한 천 조각이었고, 어떤 것은 창고에 매달아 두는 물품 보관표였다. 심지어 누군가의 팔목에 감겨 있었을 법한 낡은 보호 번호표까지 뒤섞여 어지러운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장부의 여백 위로 서늘한 문장이 떠올랐다.

[ 일곱 번째 이름 입력 ]

그 문장이 나타나자마자, 서랍 속에 고여 있던 빈 이름표들이 일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굶주린 생물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산 사람’의 존재를 갈구하는 움직임이었다.

“조심하십시오!”

이네스가 외치며 검신으로 이름표들의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이름표들은 물리적인 타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중을 부유했다. 그것들이 향한 곳은 로웬이었다.

공중에 떠오른 백색의 종이들이 로웬의 그림자에 닿자마자 기괴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던 종이 위에 검은 먹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로웬의 이름을 베껴 쓰려는 시도였다.

‘로…….’

첫 글자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로웬의 소매 끝에 닿은 이름표가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그의 이름 일부가 산 자의 기록에서 빠져나가 빈 이름표로 전이되려는 찰나였다.

“이것들이 감히!”

이네스가 검을 휘둘러 이름표들을 베어내려 했다. 서슬 퍼런 검기가 허공을 가르기 직전, 로웬이 나직하게 제지했다.

“멈춰. 이네스.”

“하지만 로웬 님, 이 종이들이 당신의 이름을 훔치려 합니다!”

“종이도 증거다. 파괴하지 마.”

로웬은 자신의 이름을 집요하게 베껴 쓰던 이름표를 손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이름이 번지던 종이는 그의 거부 의사를 확인한 듯 잠시 주춤거리며 공중을 맴돌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아이들은…… 자기 이름이 뭔지 잊어버린 걸까요? 그래서 아무 이름이나 붙잡으려고…….”

베라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녀의 손에는 아이들을 위로할 때 쓰던 따뜻한 색의 펜이 들려 있었다.

“로웬 님, 차라리 제가 이름을 지어주면 안 될까요? 예쁜 애칭이라도 붙여주면 이 아이들도 진정할 거예요. 그냥 빈칸으로 두기엔 너무 가엽잖아요.”

로웬은 베라의 떨리는 손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베라, 기억하고 싶은 마음과 기록을 덮어버리는 마음은 구분해야 한다.”

“그게 무슨…….”

“증언과 위로는 별개의 영역이야. 네가 임의로 붙인 애칭은 결국 이 아이들이 가졌던 진짜 흔적을 영원히 지워버리는 가림막이 될 뿐이다.”

로웬의 단호한 태도에 베라는 입을 다물었다. 위로하고 싶다는 선의가 때로는 진실을 가리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로웬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통해 깨닫고 있었다.

그때,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이름표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냄새가 다 달라요. 이 종이는 매운 연기 냄새가 나고, 이건 딱딱하게 굳은 빵 냄새…… 아, 이건 차가운 빗물 냄새예요.”

피핀의 감각이 닿자 무질서하게 섞여 있던 이름표들의 정체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모르그가 그 뒤를 이어 신속하게 장부의 기록과 대조하며 손을 움직였다.

“분류 가능합니다. 이건 보호 번호, 이건 배급용 물품표, 그리고 이건…… 마지막까지 귀가를 기다리던 아이들의 대기표로군요.”

모르그의 손끝에서 이름표들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 이름은 사라졌을지언정, 그들이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고 무엇을 기다렸는지에 대한 행정적 흔적만큼은 명확히 드러났다.

로웬은 자신의 팔 주변을 배회하던, 이름의 파편이 묻은 종이들을 다시 장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펜을 들어 일곱 번째 칸의 공백 위에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 일곱 번째 이름: 미상 ]

[ 사유: 이름표 혼선 및 식별 불능. 생존자 이름의 대체 입력 엄금. ]

그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 로웬의 이름을 베끼려던 먹물들이 순식간에 휘발되어 사라졌다. 장부는 거부할 수 없는 행정적 결론을 받아들인 듯 조용히 가라앉았다. 이름표들은 더 이상 산 자의 이름을 탐내지 않고, 각자의 사유가 적힌 채 제자리로 돌아갔다.

“실무적으로 해결됐군. 가짜 위로보다는 명확한 공석이 낫지.”

로웬이 짧게 농담조로 던졌으나,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무거웠다.

상황이 종료되는 듯싶었을 때였다. 모두가 서랍 안의 이름표들에 집중하고 있을 때, 장부의 맨 밑바닥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툭.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바닥보다 작은, 재가 가득 담긴 낡은 종이 봉투였다.

이네스가 경계하며 봉투를 집어 들려 했으나, 로웬이 먼저 장갑 낀 손으로 그것을 확보했다. 봉투는 이미 바스러질 듯 약해져 있었다. 로웬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안쪽면에 적힌 기묘한 자국들이 드러났다.

그것은 잉크로 쓴 글씨가 아니었다. 뜨거운 무언가로 지져서 남긴 듯한, 탄 자국으로 이루어진 선들이었다.

“이건…… 지도입니까?”

모르그가 다가와 물었다. 로웬은 탄 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복잡하게 얽힌 선들은 보육실 내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담벼락 너머, 숲을 지나고 계곡을 건너 이어지는 상세한 경로였다.

“심부름 경로로군.”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육실 밖으로 나간 아이들의 이동 경로야. 일곱 번째 칸이 품고 있던 진짜 증거는 이름이 아니라 이 길이었군.”

봉투 안의 재는 아마도 그 길을 갔던 아이들의 마지막 흔적일지 몰랐다. 탄 자국으로 남은 지도는 마치 누군가 이 길을 잊지 말라고, 혹은 누군가 뒤따라오기를 바라며 남긴 처절한 이정표처럼 보였다.

로웬은 지도가 그려진 봉투를 품에 넣었다. 멈추지 않던 귀가 종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보육실 내부의 조사는 끝났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담장 밖, 타버린 지도가 가리키는 어둠 속으로 향했다.

128화. 재 봉투의 심부름길

바닥으로 떨어진 작은 봉투는 마치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가볍게 들썩였다. 로웬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서늘했고, 겉면에는 거친 검댕이 묻어 있었다.

로웬은 봉투를 펼쳤다. 종이는 이미 여러 번 접혔다 펼쳐진 듯 결을 따라 하얗게 일어났고, 그 틈 사이로 불규칙한 탄 자국들이 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었다. 단순한 훼손이라고 하기에는 그 방향이 지나치게 일정했다. 로웬의 눈동자가 그 검은 선들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중앙 장부가 반응합니다.”

모르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책상 위를 차지한 거대한 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요동치고 있었다. 일곱 번째 칸의 빈 이름표가 희미한 빛을 내뿜더니, 잉크가 번지듯 글자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분류: 유품 회수]

[상태: 사망 추정]

장부는 효율적이었다. 주인을 잃고 불에 탄 물건이 돌아왔다면, 그 주인의 부재를 죽음으로 갈음하려 드는 것이 기록의 본성이었다. 장부의 펜촉이 확정 도장을 찍기 위해 허공에서 움찔거렸다.

“보류.”

로웬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장부의 펜촉이 멈췄다. 로웬은 봉투 안쪽의 탄 자국을 다시 살피며 말을 이었다.

“유품으로 분류하는 순간, 이 아이의 시간은 여기서 끝난다. 아직은 닫을 때가 아니야.”

“하지만 로웬 님, 이 정도의 훼손이라면…….”

베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피핀이 한발 앞서 봉투 쪽으로 코를 들이밀었다. 킁킁거리며 공기를 들이마시는 피핀의 미간이 잘게 떨렸다.

“아니야. 이거 보육실 냄새가 아니야.”

피핀의 단호한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피핀은 봉투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냄새의 성분을 하나하나 짚어냈다.

“보육실 재는 나무랑 솜이 타는 냄새가 나야 해. 근데 이건 달라. 아주 미세하게 석회 가루 냄새가 섞여 있어. 그리고 이건…… 젖은 끈 냄새, 싸구려 잉크 냄새도 나. 결정적으로 북쪽 문간에서나 나는 그 시리고 축축한 바람 냄새가 배어 있어.”

이네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북문이라고? 아이들이 보육실 밖으로 나갔다는 뜻인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로웬은 봉투를 다시 접었다. 원래 접혀 있던 모양대로, 탄 자국들이 서로 맞물리게끔 손가락 끝으로 정교하게 각을 맞췄다. 그러자 무질서해 보이던 검은 선들이 하나의 경로처럼 이어졌다. 그것은 보관용 봉투가 아니었다.

“이건 유품이 아니라 배달 봉투다.”

로웬의 말에 베라가 눈을 크게 떴다.

“배달 봉투라고요? 그럼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전달하려 했다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요.”

베라의 목소리에 희망 섞인 떨림이 묻어났다. 하지만 로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성자가 아니라 심부름꾼의 눈으로 이 종이 한 장을 읽고 있었다.

“베라, 희망은 달콤하지만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기록자는 감정에 도장을 찍지 않아. 우리가 확인한 건 이 봉투가 보육실 밖의 공기를 머금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달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로웬은 봉투의 접힌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심부름은 수취인의 확인을 받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이 봉투가 여기에 돌아왔다는 건, 배달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심부름꾼이 길 위에서 멈췄거나, 혹은 경로를 잃었거나.”

모르그는 로웬의 의중을 파악하고 즉시 장부의 분류 체계를 수정했다. ‘유품’이라는 단어 위에 가느다란 줄이 그어졌다.

“분류를 분리하겠습니다. 해당 물품은 ‘유품’이 아닌 ‘미완료 물품’으로 재등록합니다.”

로웬이 장부 위에 손을 올렸다. 잉크가 그의 의지를 받아 적듯 새로운 문장들을 새겨 넣었다.

[분류: 재 봉투]

[상태: 미완료 심부름 / 수취인 미확인]

[조치: 경로 추적 개시]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네스가 낮게 경고했다.

“북문 밖은 지금 정상적인 통제 구역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흔적을 미끼로 누군가 우리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속셈일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봉투가 우리 손에 들어온 이상, 이건 우리가 맡아야 할 심부름이 됐어.”

로웬은 봉투를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서 봉투의 탄 자국을 다시금 비추어 보았다. 특정한 각도로 빛이 투과되자, 잉크와 탄 가루가 엉겨 붙은 모양새가 낯익은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얼룩이 아니었다. 낡고 해진, 이제는 폐쇄되어 기록 속에서나 존재하는 북문 검문소의 고유 인장과 정확히 맞물리는 표식이었다.

로웬의 눈매가 깊게 가라앉았다.

“심부름길이 열렸군.”

탄 자국이 가리키는 방향은 어둠이 짙게 깔린 북쪽 끝, 차가운 석회 냄새가 진동하는 검문소의 잔해를 향하고 있었다. 수취인이 누구인지, 그곳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재 봉투가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기 전까지 이 일곱 번째 칸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129화. 북문 검문소의 젖은 끈

석회 가루가 섞인 눅눅한 비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북문 검문소는 오래전 버려진 초소처럼 보였지만, 그 안을 채운 공기는 기묘할 정도로 무거웠다. 낡은 잉크가 종이에 말라붙으며 내는 특유의 비린내와 찬 문간에서 배어 나오는 한기가 일행의 발길을 붙들었다.

검문소의 비좁은 입구, 썩어가는 나무 문틀에는 젖은 끈 하나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끈을 따라 수십 장의 통행표가 굴비 엮이듯 매달려 있었다. 비에 젖어 흐물거리는 종이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힘없이 파닥거렸다.

“기분 나쁜 냄새야.”

피핀이 코를 찡그리며 앞장섰다. 이네스는 이미 검날을 반쯤 뽑은 채였다. 그녀는 검문소 내부의 어두운 구석을 날카롭게 훑으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매복하기 딱 좋은 구조군. 로웬, 시간 끌지 말고 회수해. 끈을 끊어버리면 금방이다.”

로웬은 이네스의 제안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문틀에 묶인 젖은 끈을 가만히 응시했다. 끈은 단순히 종이를 묶어둔 용도가 아니었다. 위에서 아래로, 층층이 쌓인 매듭마다 미세한 규칙이 보였다.

“자르면 안 돼. 순서가 사라지니까.”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가장 아래쪽에 매달린 통행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건 그냥 버려진 종이 더미가 아니야. 누군가 일부러 기록의 흐름을 남겨둔 거지. 끈을 끊는 순간, 누가 먼저 왔고 누가 나중에 나갔는지에 대한 증거는 영영 섞여버려.”

그는 품에서 핀셋을 꺼내 첫 번째 매듭에 손을 댔다. 축축하게 젖어 팽팽하게 당겨진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네스가 초조한 듯 발을 굴렀지만, 로웬은 마치 정교한 시계를 수리하는 장인처럼 느릿하고 정확하게 매듭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옆에 놓인 낡은 장부에는 붉은 잉크로 날카로운 명령이 적혀 있었다.

[미확인 통행자 폐기]

그 글자를 본 모르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분류관으로서 그는 이 단어가 품은 서늘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확인되지 않은 존재를 기록에서 지우는 것은, 곧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폐기라니. 이 안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름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로웬이 매듭을 하나 풀 때마다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소년의 예민한 후각이 젖은 종이와 끈 사이에서 미세한 정보를 걸러냈다.

“여기, 아이 손 냄새가 나요. 아주 작고 떨리는 손으로 이 종이를 꽉 쥐었던 것 같아.”

피핀의 손가락이 특정 통행표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 바로 위에 묻은 잉크 냄새는 달라요. 이건 아주 싸구려 잉크야. 어른 냄새도 섞여 있어. 아이를 밀어내고 억지로 끼어든 것처럼.”

베라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통행표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던 걸까요? 이 순서가 구조 신호라면….”

“가능성은 결론이 아니야, 베라.”

로웬이 짧게 대꾸했다. 그는 두 번째 매듭을 풀며 피핀이 말한 ‘싸구려 잉크’가 묻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분리했다.

“희망적인 추측은 일지에 적지 않아. 우린 오직 남겨진 궤적만 본다. 가능성은 보류 항목으로 남겨둘 뿐이야.”

로웬은 장부의 ‘폐기’ 칸에 그어진 붉은 선 위에 얇은 먹지를 덧댔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분류를 써넣었다. 모르그가 로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신속하게 보류 분류함을 열었다.

[외부 전달 직전 보류 / 수취인 잉크 확인 필요]

로웬의 펜촉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는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사실의 파편들을 재조립하는 데 집중했다. 아이들의 흔적과 낯선 어른의 잉크가 뒤섞인 이 현장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중단된 심부름의 경로였다.

마지막 매듭이 풀렸다. 젖은 끈은 이제 로웬의 손바닥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끈은 수분을 머금어 묵직했고,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져 있었다.

“다 풀었나?”

이네스가 주변을 경계하며 물었다. 로웬은 대답 대신 끈의 가장 안쪽, 매듭이 시작되던 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끈의 속살에는 잉크가 짙게 배어 있었다.

로웬이 끈을 조심스럽게 펼치자, 그 안쪽면에 찍힌 작은 도장 자국이 드러났다. 비에 젖어 번졌지만, 그 독특한 무늬만은 선명했다.

둥근 테두리 안에 새겨진, 빗줄기를 막아내는 듯한 우산의 형상.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뒷골목의 온갖 뒷조사와 은밀한 서신 전달을 도맡는다고 알려진 집단의 표식이었다.

“이 도장 무늬….”

베라가 숨을 들이켰다. 로웬의 눈매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검은 우산 사무소.”

로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젖은 끈 안쪽에 숨겨진 접수 표식은, 이 통행표들이 단순한 미완료 심부름이 아니라 그들의 손을 거쳐 조작되거나 탈취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로웬은 젖은 끈을 증거물 봉투에 담으며 검문소 밖, 안개가 자욱한 북쪽 길을 응시했다. 심부름의 수취인은 이제 명확해졌다. 아니, 수취인을 가로챈 자들의 정체가 드러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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