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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297화 합본. 침묵 일치 판정서의 수취인란에서 출생 전 보관료의 영수증까지 일러스트

295-297화 합본. 침묵 일치 판정서의 수취인란에서 출생 전 보관료의 영수증까지

295화. 침묵 일치 판정서의 수취인란

철제 창구의 틈새로 눅눅한 냉기가 배어 나왔다. 서류가 밀려 나오는 소리는 종이가 바닥을 긁는 소리라기보다는, 누군가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에 가까웠다. 로웬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가느다란 유리창 너머로 내밀어진 것은 한 장의 판정서였다.

[침묵 일치 판정서]

가장 윗부분에 박힌 글자가 비정상적으로 검었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림자를 녹여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로웬은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판정서의 하단, 수취인란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옆의 확인자란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서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로… 웨….’

그의 이름 중 일부가 마치 뜯겨 나간 것처럼 불완전하게 찍혀 있었다. 도장이 찍힌 자리는 종이가 타 들어간 듯 거뭇하게 그을려 있었다.

“확인하십시오. 당신이 가져온 침묵과 이곳의 침묵이 일치합니다.”

창구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수십 명의 목소리를 겹쳐놓은 듯한 불쾌한 공명음이 로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수취인란이 비어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침묵이 일치한다는 것은 곧 당신이 이 서류의 정당한 수취인임을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령을 거부하는 것은 곧 존재의 부정을 의미합니다.”

창구의 목소리는 압박하듯 낮게 깔렸다. 로웬이 판정서에 손을 대기도 전에, 이네스가 그의 어깨를 낚아채며 뒤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건드리지 마, 로웬. 이건 단순한 서류가 아니야.”

이네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창구 안쪽의 보이지 않는 형체를 쏘아보며 경고를 덧붙였다.

“침묵 증거? 이건 함정이야. 모든 부재를 한 사람의 책임으로 묶어버리려는 수작이지. 저 비어 있는 수취인란에 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이 공간에서 사라진 모든 것들의 죄와 침묵이 네 이름 아래로 귀속될 거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판정서의 빈칸은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구멍이 아니라, 집어삼킬 대상을 기다리는 아가리처럼 보였다.

그때, 피핀이 귀를 쫑긋거리며 판정서 근처로 다가갔다. 그녀는 코끝을 찡그리며 종이의 가장자리를 유심히 살폈다.

“소리가 들려요.”

피핀의 중얼거림에 베라가 검 손잡이를 쥔 채 물었다.

“종이에서 소리가 난다고?”

“아뇨, 종이가 아니라… 접힌 자국요. 이 종이 끝부분에 아주 작게 접힌 자국들이 있어요. 이건 글자가 아니라 숨소리예요. 누군가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으면서 기록한 시간표 같은… 그런 소리가 나요.”

피핀의 말에 로웬의 시선이 다시 판정서로 향했다. 미세하게 접힌 자국들은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배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생존 보고서이자, 동시에 죽음의 기록 같기도 했다.

순간, 판정서 위에 놓여 있던 도장 끈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붉은색 끈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로웬의 그림자 쪽으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로웬의 그림자 손목을 감아 쥐려 했다. 물리적인 신체가 아니라 그림자를 묶어 판정서에 강제로 고정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챙-!

날카로운 파찰음과 함께 베라의 단검이 공중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그녀는 로웬의 발치까지 뻗어온 도장 끈의 기세를 단번에 끊어냈다. 잘려 나간 끈의 단면에서 잉크인지 피인지 모를 검붉은 액체가 튀어 올랐다.

“절차를 지키지 않는 행정에는 응할 이유가 없지.”

베라는 차가운 눈으로 창구 안쪽을 응시했다. 로웬은 그녀의 비호 아래 침착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당황하지도, 정체에 대한 혼란에 빠지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서류에 명시되어야 할 행정적 결함을 냉정하게 짚어 내려갔다.

“네 가지 사항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

로웬의 목소리가 사무실의 냉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첫째, 이 침묵이 채취된 정확한 시각. 둘째, 이 판정서의 근거가 되는 원본의 보관함 번호. 셋째, 판정 불일치 시의 재심 조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수취인란의 공란을 가리켰다.

“수취인란이 공란인 구체적인 사유를 밝혀라. 이 서류가 정당한 효력을 가지려면 확인자의 이름이 아니라 수취인의 자격이 먼저 확정되어야 한다. 확인자의 이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수취 확인을 강요하는 것은 이곳의 지침에도 어긋나는 것 아닌가?”

로웬은 기억의 파편을 뒤지는 대신, 눈앞의 모순을 공격했다. 창구 너머의 공기가 일순간 굳어졌다. 감정 없는 기계처럼 굴던 창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지지직거리는 잡음을 냈다.

그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 판정서는 로웬이라는 존재를 규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덫이었으나, 로웬이 그 덫의 구조적 결함을 논리적으로 파고들자 논리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 듯했다.

“재심… 재심은 허용되지 않는다….”

창구 안쪽에서 쇠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수취인이 불분명할 경우, 예외 조항이 존재한다.”

서류가 다시금 가늘게 떨렸다. 판정서 표면에 새로운 글자들이 핏물처럼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로웬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렸다.

“이곳의 법에 따르면, 주인이 없는 침묵은 다른 자가 대신 받을 수 있다는 건가?”

로웬의 물음에 창구가 답했다. 아니, 그것은 대답이라기보다는 기괴한 선언에 가까웠다.

“수취인란이 비어 있는 판정서는 선착순의 원칙을 따른다. 다만, 조건이 있다.”

창구 너머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로웬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아직 울지 않은 자에 한하여 대리 수취가 가능하다.”

그 문장이 떨어짐과 동시에, 복도 끝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규칙적이고, 무거우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은 자 특유의 서늘한 발소리였다.

296화. 대리 수취 위임장의 빈 생년월일

복도의 공기는 이제 단순히 무거운 것이 아니라, 잉크가 섞인 습기처럼 폐부를 끈적하게 조여 왔다. 로웬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백지 위로 기괴한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글자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종이 위를 기어 다녔다. 희미했던 테두리가 짙은 검은색으로 고정되자, 가장 윗부분에 서늘한 활자가 박혔다.

[대리 수취 위임장]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던 종이는 이제 명백한 서류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행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수취인의 이름은 마치 누군가 칼로 긁어낸 듯 하얗게 비어 있었고, 그 아래 ‘생년월일’이라고 적힌 칸은 움푹하게 파여 있었다.

그 구멍 난 칸 안에는 축축하게 젖은 잿가루가 고여 있었다. 타다 남은 유골의 잔해 같기도 했고, 태어나지 못한 것들의 마지막 흔적 같기도 했다. 잿물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났으며, 종이의 뒷면까지 검게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취인이 부재중입니다.”

창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감정이 거세된 기계의 마찰음과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로웬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아직 울지 않은 자를 대리 수취하십시오. 이곳에 존재하는 당신만이 유일한 적격자입니다. 보관함의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을 이 위임장으로 이양받으십시오.”

로웬이 펜을 들기도 전에 위임장 자체가 스스로 맥동하며 그의 손가락 끝을 유혹하듯 떨렸다. 그때, 옆에서 서류의 흐름을 지켜보던 이네스가 차갑게 제지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로웬, 멈춰요. 이건 단순한 대리 수취가 아니에요.”

이네스의 눈동자가 위임장 하단의 작은 주석들을 훑어 내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 짙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이 문구 보이나요? ‘수취 이후의 상태 변화에 대한 모든 귀책은 수취인에게 있음’. 이건 함정이에요. 대리 수취라는 형식을 빌려 당신에게 보호자 자격을 강제로 부여하려는 겁니다. 탄생 전 보관료는 물론이고, 만약 내용물이 반송될 경우 그 모든 파기 책임까지 당신이 짊어지게 돼요.”

피핀이 갑자기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소리가 나요….”

“피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야?”

베라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물었다. 피핀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위임장의 빈 생년월일 칸을 가리켰다.

“달력이 거꾸로 접히는 소리요. 숫자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넘어가고 있어요. 태어나지 않은 날짜를 억지로 만들어서 끼워 넣으려고 해요. 저 칸에 잿가루가 차 있는 건, 아직 시간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피핀의 말대로, 빈 칸의 잿물은 마치 초읽기를 하는 시계추처럼 출렁거렸다. 위임장 끝에 매달려 있던 가느다란 노끈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로웬의 가방 손잡이를 묶으려 들었다. 그것은 마치 강제적인 계약의 인장을 찍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 찰나, 베라가 품 안에서 묵직한 장부를 꺼내 위임장과 가방 사이를 거칠게 내리눌렀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위임장의 끈이 장부 사이에 끼어 멈췄다. 장부의 무게에 눌린 위임장의 뒷면에서 희미한 불빛이 배어 나왔다.

“단순한 위임장이 아니군. 로웬, 이 장부 사이에 끼인 걸 봐.”

베라의 지적에 로웬이 시선을 내렸다. 장부가 누르고 있는 위임장의 귀퉁이, 그 아래쪽 테이블 위로 숨겨져 있던 숫자들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원본 보관번호’였다. 대리 수취를 유도하며 숨기려 했던 이 서류의 본질적인 식별자였다.

창구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보관함 내부의 온도가 내려가면 수취물의 신선도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즉시 대리 서명하십시오.”

그러나 로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위임장을 테이블 위로 밀어내며, 행정적인 빈틈을 정확히 짚어냈다.

“거부합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이 위임장은 무효입니다. 수취인의 생년월일이 확정되지 않았고, 위임자의 서명 시각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대리 수취의 범위가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물품 수령인지, 아니면 생존권의 이양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는 잿가루가 고인 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또한, 대리 수취인에게 부여되어야 할 철회권자의 기재가 빠져 있습니다. 이 모든 공란이 채워지기 전까지, 저는 이 서류를 행정적 문서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절차에 따라 보완된 서류를 다시 가져오십시오.”

로웬이 서류를 밀어내자, 창구 안쪽에서 쇠사슬이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관함의 문들이 일제히 덜컹거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들이 안쪽에서 벽을 두드리는 것 같은 둔탁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창구 너머의 목소리가 젖은 잿가루를 뱉어내듯 마지막 선고를 던졌다.

“절차를 따지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탄생의 지연은 곧 연체료를 의미합니다.”

어둠 속에서 푸른 영수증 한 장이 위임장 위로 덧씌워졌다. 그 위에는 붉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출생 전 보관료는 선불.]

297화. 출생 전 보관료의 영수증

위임장 하단에 낙인처럼 박혀 있던 검은 글자들이 일제히 꿈틀거렸다. 종이의 섬유질을 찢고 돋아난 글자들은 기괴한 생명력을 얻어 스스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출생 전 보관료는 선불’이라는 문장이 본문에서 완전히 탈락했다. 그것은 허공에서 몇 번의 정교한 접힘을 반복하더니, 손바닥보다 작은 사각형의 영수증 형태로 변모하여 로웬의 눈앞에 떨어졌다.

창구 너머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직원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영수증의 여백을 톡톡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마치 관 뚜껑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건조하고 규칙적이었다.

“아직 울지 않은 자의 배달지가 말소되기 직전이다.”

창구의 목소리는 서늘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보관료가 제때 지불되지 않는다면, 수취인의 목적지는 폐기된다. 존재가 시작되기도 전에 돌아갈 곳을 잃는다는 뜻이지. 주소 없는 영혼이 이 좁은 보관함 속에서 영원히 풍화되는 것을 원하는가?”

압박은 물리적인 무게가 되어 일행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네스가 로웬의 소매를 붙잡으며 낮게 경고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서류상의 맹점이 주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로웬, 조심해. 저건 단순한 보관료 청구가 아니야. 저 영수증에 서명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순간, 너는 그 ‘수취인’에 대한 보호자 책임과 대리 수취 동의를 한꺼번에 묶어버리는 계약을 맺게 되는 거야. 저들이 노리는 건 돈이 아니라 연대책임이야.”

피핀은 귀를 막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영수증 중앙에 자리한,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금액란에서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짤랑거리는 금속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동전의 마찰음이 아니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존재가 처음으로 터뜨리는 울음소리, 그 맑고도 서글픈 공명음이 동전 구르는 소리로 치환되어 피핀의 고막을 긁어댔다. 피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아직 형태도 갖추지 못한 생의 기척이 그 빈칸 속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베라는 그사이에 자신이 결코 끊지 않았던, 손목에 감긴 낡은 붉은 끈을 들어 올렸다. 끈 끝에 매달린 빛바랜 태그에는 원본 보관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영수증 상단에 찍힌 번호와 자신의 것을 대조했다.

“번호가 일치해. 이 영수증은 우리가 들고 온 이 ‘위탁품’에 정확히 귀속되어 있다는 뜻이지. 조작된 청구서는 아니라는 거야. 하지만 그게 더 기분 나쁘군. 우리가 오기도 전에 이미 청구서가 발행되어 있었다는 소리니까.”

창구의 그림자가 로웬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 움직임에는 노골적인 유혹이 섞여 있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름도 없는 이 작은 수취인을 위해, 그저 아주 작은 보증만 서면 된다. 네가 가진 것 중 가장 사소한 기억 하나, 혹은 아주 짧은 시간의 파편이면 충분하다. 그러면 이 아이는 예정된 주소로 안전하게 배달될 것이다. 구원자가 되고 싶지 않은가?”

로웬은 영수증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창구의 유혹에도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구원이나 자비 같은 감상적인 단어에 매몰되는 대신, 그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무기인 ‘절차’를 꺼내 들었다. 로웬의 목소리는 창구의 냉기보다 더 차갑고 딱딱했다.

“청구의 근거를 명시하라.”

창구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로웬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첫째, 이 보관료가 산정된 법적 혹은 관례적 근거가 무엇인가. 둘째, 이 수취인의 보관이 개시된 정확한 시각을 증명하라. 셋째, 이 채무를 져야 할 원천 채무자가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3자에게 보증을 요구하는 행정적 결함을 설명하라.”

로웬은 영수증의 빈 여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수취인이 미출생 상태에서 소멸하거나 수취를 거부할 경우, 이 보관료의 환불권자는 누구인가? 계약의 주체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대납자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은 이 창구의 규칙에도 어긋날 텐데.”

창구 너머에서 당혹스러운 듯한 치익, 소리가 들려왔다. 로웬은 창구 직원이 내미는 달콤한 구원자의 서사를 철저히 배제한 채, 오로지 서류상의 모순만을 공격했다. 그는 자신을 보호자로 정의하지 않았다. 그저 이 불합리한 거래의 오류를 지적하는 까다로운 민원인의 태도를 견지했다.

“증명되지 않은 채무는 지불할 수 없다. 수취인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다고 주장하기 전에, 너희의 보관 절차부터 정당했는지 확인해야겠어. 이 영수증의 원본 대조표를 가져와라.”

로웬의 요구에 영수증이 파르르 떨렸다. 창구의 그림자는 대답 대신 영수증을 뒤집으려 했다. 로웬의 손이 영수증의 끝자락을 먼저 낚아챘다.

로웬이 영수증을 뒤집은 순간, 일행의 숨이 멎었다. 영수증 뒷면, 아까까지만 해도 백지였던 공간에 핏빛처럼 붉은 잉크가 번지며 새로운 문장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청구서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최후통첩에 가까웠다.

[ 미납 시 수취인은 가장 가까운 기억으로 반송됨. ]

그 문구가 나타남과 동시에 로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잔상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잊고 싶지 않았던 소중한 풍경들, 그리고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누군가의 얼굴. 영수증이 로웬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그의 온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기억’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창구의 그림자가 뒤틀린 웃음을 흘렸다.

“이제 결정해라. 기억을 내주고 존재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존재를 포기하고 기억을 지킬 것인가.”

영수증 뒷면의 붉은 글씨가 기분 나쁘게 박동하며 로웬의 심장 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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