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367화 합본. 서명보다 먼저 열린 책임란에서 인계자 공란의 반납 불가 짐까지
366화. 서명보다 먼저 열린 책임란
철문의 표면에서 피어오른 성에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이네스의 장갑 낀 손끝을 따라와 눌어붙었다. 가죽 장갑의 솔기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는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갗을 에고 뼈마디를 얼려버리려는 명백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기괴한 수첩의 마지막 장은 이제 이네스의 손안에서 기분 나쁜 박동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도 이름을 남기지 않은 빈 서명란, 그 결백해 보이던 백지 아래로 잉크가 번져 나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새로운 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금속이 날카로운 송곳에 긁히는 듯한 마찰음이 복도 전체를 울렸다. 종이의 질감이 변하는 소리였다. 펄프의 거친 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마치 사람의 마른 피부처럼 얇고 서늘한 막이었다.
수첩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던 이네스는 본능적으로 손을 멈췄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각이 종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등 가죽을 만지는 듯한 끔찍한 불쾌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새로 나타난 칸 위에는 정교하게 인쇄된 듯한, 그러나 사람의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기묘한 서체의 글자가 떠올랐다. ‘책임란’이라는 글자였다. 보통의 서류라면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그 결과에 대한 실질적인 손익이 계산된 뒤에야 마지막으로 책임을 지는 자가 자신의 성명을 남기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철문 너머의 논리는 인간 세상의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원인보다 결과가 먼저 도착하고, 죄를 짓기도 전에 형벌의 집행관이 문 앞에 서 있는 식이었다.
이네스는 깃펜을 고쳐 쥐었다. 손등을 타고 흐르는 오한이 팔꿈치를 지나 심장까지 닿으려 했으나, 법무관으로서의 자의식은 손가락을 건조하고 정교하게 유지하게 만들었다. 이네스는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잉크병 속의 액체는 검은색이 아니라 아주 짙은 핏빛에 가까웠다. 이네스는 떨림을 억누르며 수첩의 빈 칸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문장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것은 ‘책임란-발생 전 개방’이라는 기괴한 절차였다. 이네스는 펜촉이 종이의 결을 가를 때마다 느껴지는 저항감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첫 획인 ‘책’자를 그을 때, 수첩의 가죽 막은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다. 펜촉은 종이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근육을 가르고 들어가는 것처럼 둔탁한 감각을 손목에 전달했다. 성에는 이네스가 적으려던 중립적인 기록의 획을 강제로 비틀어,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로 고쳐 쓰려 들었다. 그것은 ‘책임 인정’이라는 네 글자로 수렴되려 하고 있었다.
획 하나를 그을 때마다 이네스의 손목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깃펜의 끝을 붙잡고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압박이었다. ‘임’자의 마지막 받침을 적어 내려갈 때, 잉크는 사방으로 튀며 수첩의 여백을 오염시키려 했다. 이네스는 호흡을 고르며 손끝의 감각을 극한으로 집중했다. 한 치라도 힘을 빼면 펜촉은 즉시 궤도를 이탈해 ‘책임 인정’의 굴레로 미끄러져 들어갈 판이었다. 이네스는 법무관의 권위를 담아, 발생하지 않은 인과를 억지로 열어젖히는 이 모순된 행위를 기록의 영역 안에 묶어두려 애썼다. 펜촉이 부들부들 떨리며 종이 위에 깊은 골을 만들었지만, 이네스는 단 한 순간도 그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로웬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의 가죽 끈을 천천히 풀어냈다. 로웬의 움직임은 신중했고 불필요한 동요가 없었다. 그는 풀어낸 가죽 끈의 한쪽 끝을 수첩의 모서리에 맞추고, 다른 쪽 끝을 철문의 경첩 부근까지 늘어뜨렸다. 수첩과 문 사이의 거리를 물리적인 수치로 고정하려는 시도였다. 가죽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공중을 부유하던 성에의 흐름이 잠시 주춤거렸다.
로웬은 가죽 끈 중간중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첫 번째 매듭은 수첩의 책임란이 시작되는 지점의 높이에 맞췄고, 두 번째 매듭은 철문의 잠금장치가 위치한 수평선상에 배치했다. 가죽 끈의 거친 질감이 로웬의 손가락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로웬은 매듭 사이의 거리를 다시 쟀다. 수첩에 글자가 새겨질 때마다 이 물리적 공간의 비틀림이 발생하고 있었기에, 로웬은 그 비틀림의 양을 가죽 끈의 장력으로 억제했다.
끈을 쥔 로웬의 팔 근육이 단단하게 팽창했다. 수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척력과 철문에서 당기는 인력이 가죽 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로웬의 몸으로 전이되었다. 그는 무릎을 약간 굽히며 무게 중심을 낮췄다. 수첩과 문 사이의 거리가 단 1인치라도 변한다면, 이네스가 유지하고 있는 기록의 평형은 즉시 무너질 것이었다. 로웬은 매듭의 위치를 눈대중으로 확인하며, 가죽 끈이 내는 팽팽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공간이 찢어지기 직전에 내는 비명과도 같았다. 로웬은 가죽 끈을 다시 한번 고쳐 감으며 수첩의 책임란과 문 사이의 거리를 절대로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정지된 상태로 박제하듯 고정했다. 그의 손끝은 차가운 서리로 하얗게 질려갔으나, 로웬은 그 물리적 거리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요지부동이었다.
피핀은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자 주변의 모든 소리가 개별적인 층위로 나뉘어 귓가에 박혔다. 이네스의 손끝에서 들려오는 서명 사각거림은 단순한 마찰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명을 지르는 영혼의 속삭임처럼 들렸고, 동시에 낡은 시계태엽이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피핀은 그 소리의 파동 속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듯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그는 문 안쪽 숨소리를 분리해 들었다.
그것은 이네스가 펜을 움직이는 박동과 정확히 일치했다. 문 너머의 존재는 이네스가 글자를 적는 속도에 맞춰 숨을 들이켰고, 그녀가 펜을 멈출 때마다 긴 날숨을 내뱉었다. 피핀은 왼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박자를 세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이 검지 끝을 치는 것은 이네스의 깃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였다. 중지가 엄지와 부딪히는 것은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음습하고 축축한 폐부의 떨림이었다.
피핀은 두 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박자를 쪼갰다. 서명 사각거림이 한 박자라도 빠르면 문 안쪽의 숨소리는 굶주린 짐승처럼 문틈을 비집고 나오려 했고, 숨소리가 앞서가면 이네스의 펜끝은 제멋대로 휘둘렸다. 피핀의 손가락은 마치 보이지 않는 악기를 연주하듯 정교하게 움직였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경련을 일으키며 실핏줄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박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소리의 경계선을 긋는 자였다. 펜이 내는 금속성의 파찰음과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거대하고 불길한 날숨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벌려놓았다. 피핀의 이마에서 떨어진 식은땀이 바닥의 성에 위로 떨어졌으나, 그는 그 차가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오직 두 소리의 평행선을 유지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베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전체적인 구도를 관찰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네스의 손과 로웬의 가죽 끈, 그리고 철문의 배치가 하나의 기하학적인 도표처럼 보였다. 베라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네스가 수첩에 적어 넣은 책임란 폭과 잠금 간격이 마치 미리 설계된 도면처럼 같은 비율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첩 위의 빈칸이 넓어질수록 철문의 잠금장치는 미세하게 느슨해졌고, 반대로 이네스가 글자를 촘촘하게 채워 넣으려 하면 잠금장치는 더욱 견고하게 맞물렸다.
베라는 그 현상을 보고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이 단순한 함정이 아니라, 이 세계가 작동하는 근원적인 방식 중 하나임을 직감했다. 베라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가동했다. 현재의 책임란 폭이 1단위 증가할 때마다 잠금 간격의 수축률은 로그 함수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베라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초침의 움직임조차 이 기묘한 비율의 변화에 동조하듯 조금씩 박자를 잃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베라가 개입하여 수첩을 붙잡거나 문을 밀어붙인다면, 이 비례 관계는 즉시 붕괴할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베라가 짊어져야 할 선택 비용이었다. 그녀가 관찰하는 모든 숫자는 실재하는 무게였고, 그 무게를 건드리는 순간 이 균형은 한쪽으로 쏠려 모두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베라는 자신의 손가락을 꽉 쥐어 감췄다. 개입하고 싶은 충동, 숫자를 수정하여 이 기괴한 연동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은 지적 욕구가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베라는 방관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의 비용은 무거운 침묵과 압도적인 무력감이었다. 베라는 책임란의 폭이 잠금의 간격과 1:1.618의 황금비에 수렴하려는 찰나를 포착했고,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호흡을 멈췄다.
이네스의 이마에서 흐른 식은땀이 수첩의 표면에 떨어졌다. 하지만 땀방울은 종이에 흡수되지 않고 구슬처럼 굴러다니다가 성에와 섞여 증발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다. 성에가 펜촉을 비틀어 ‘책임 인정’을 강요하는 압력은 점점 더 거세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그녀의 손등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네스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 놓인 책임을 부정하여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 열려버린 이 기묘한 칸을 공란으로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펜촉은 종이 위를 아슬아슬하게 유영했다. 잉크는 번지려 했으나 로웬이 가죽 끈으로 설정한 거리의 경계를 넘지 못했다. 피핀이 듣고 있는 문 너머의 숨소리는 이제 거친 헐떡임으로 변해 있었다. 베라가 관측하는 책임란의 폭은 더 이상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팽팽한 평형 상태에 도달했다.
철문의 틈새에서 새어 나오던 냉기가 잠시 멈췄다. 서명란 아래에 돋아났던 살가죽 같은 막은 서서히 그 광택을 잃고 다시 거친 종이의 질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네스가 적어 넣으려 했던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책임란-발생 전 개방’이라는 글자 중 앞의 몇 마디만이 희미한 자국으로 남았을 뿐이다. 성에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마치 화상을 입은 피부처럼 흉터가 남았다.
로웬은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가죽 끈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끈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아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칼집 끈을 다시 허리춤에 묶으며 이네스의 손을 살폈다. 그녀의 장갑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깃펜은 중간이 휘어져 더 이상 정상적인 필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끝난 건가?”
피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여전히 문 안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아까의 거대한 숨소리는 이제 가느다란 바람 소리 정도로 잦아들어 있었다. 베라는 대답 대신 철문의 잠금장치를 가리켰다. 잠금장치는 이네스가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결정의 순간이 뒤로 미뤄졌음을 뜻할 뿐이었다. 책임란의 폭과 잠금의 간격이 이루던 기괴한 비례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침묵은 이전보다 훨씬 무거웠다.
이네스는 수첩을 덮었다. 수첩의 표면은 다시 차갑고 딱딱한 가죽의 느낌으로 돌아왔으나, 그 안의 내용은 이미 변해 있었다. 이네스는 자신이 무엇을 남겼는지, 혹은 무엇을 남기지 못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법무관으로서 수많은 서류에 서명해 왔지만, 이토록 자신의 이름이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거대한 철문은 그 자리에 완강하게 서서 가로막고 있었다. 누군가가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대리인을 세워 문제를 해결하려던 시도조차 허용되지 않은 공간에서, 그들은 오직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서 있을 뿐이었다.
공기 중에 부유하던 미세한 성에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바스라졌다. 이네스는 수첩을 갈무리하여 품에 넣었다. 품 안으로 전해지는 수첩의 무게는 아까보다 배는 무거워진 듯했다. 로웬은 다시금 문 너머의 어둠을 응시했고, 피핀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소리를 찾으려 애썼으며, 베라는 뒤틀린 비율이 남긴 잔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려 했다. 방 안에는 오직 그들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남았다. 서명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열렸던 책임란은 이제 보이지 않는 형태가 되어 그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이 되어버린 짐이었다. 문은 닫힌 채였고, 복도의 끝에서부터 다시금 알 수 없는 한기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아무도 먼저 발을 떼려 하지 않았다. 이네스가 쥐고 있던 깃펜의 부러진 촉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잉크가 묻지 않은 빈 종이 위로 다시금 서리가 내려앉으며, 기록되지 못한 진실들을 덮어버렸다.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으나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지 이름 없는 주인을 기다리며 다음 순간으로 유예되었을 뿐이다.
인계자 공란: 맡긴 적 없는 짐이 다음 손을 찾음
367화. 인계자 공란의 반납 불가 짐
이네스의 손목이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손에 든 수첩은 분명 얇은 가죽과 종이 뭉치에 불과했으나, 그 위에 적힌 글자의 무게는 현실의 물리 법칙을 비웃고 있었다. 수첩 하단, 아무런 이름도 적히지 않은 채 비어 있는 칸인 인계자 공란은 이제 단순한 여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바닥이 없는 구멍처럼 주변의 공기와 무게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바닥을 짓누르는 압박감으로 시작되었으나, 무게는 순식간에 팔꿈치를 타고 올라와 어깨죽지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네스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지고 가느다란 떨림이 팔 전체로 번져 나갔다.
수첩의 종이 질감은 서늘한 냉기를 머금은 채 축축하게 변해갔다. 이네스는 이 정체불명의 무게를 털어내기 위해, 혹은 이 상황을 종결짓기 위해 펜촉을 종이 위에 올렸다. 그녀가 쓰고자 한 단어는 명확했다. 반납. 이 짐이 누구의 것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잉크가 종이에 닿는 순간, 기이한 저항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펜촉은 마치 보이지 않는 자석의 같은 극을 밀어내는 것처럼 미끄러졌고, 이네스가 새기려 했던 ‘반’자의 첫 획은 종이 위에서 멋대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글자는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꾸려 들었다. 반납이라는 단어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잉크 자국은 획을 비틀고 꼬며 전혀 다른 형태를 지향했다. 수취. 그 글자가 완성되려는 찰나, 이네스의 미간에 맺힌 식은땀이 수첩 위로 떨어졌다. 만약 이 글자가 완성되어 수취로 뒤집히려 한다면, 이 이름 없는 짐의 소유권은 영원히 이네스에게 귀속될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의 수령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계자가 남긴 공백 자체를 짊어지는 행위였다.
로웬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이네스의 손목을 직접 잡는 대신,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의 끈을 풀러 냈다. 낡았지만 질긴 가죽 매듭은 로웬의 손가락 사이에서 정교하게 풀려나갔다. 그는 칼집 끈의 끝단을 조심스럽게 늘어뜨려, 바닥에 놓인 정체불명의 짐 손잡이가 만들어낸 그림자와 문틈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로웬의 눈동자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짐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네스. 펜촉을 떼지도 말고, 그렇다고 더 적지도 마십시오.”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는 가죽 끈에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을 지으며 짐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짐의 손잡이가 드리운 그림자는 바닥의 성에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 끝이 문틈의 어둠과 맞닿아 있었다. 로웬은 매듭 사이의 간격을 이용해 그 그림자의 길이를 쟀다. 그림자와 문틈 사이의 거리는 불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였으나, 로웬은 그 좁은 틈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긋듯 가죽 끈을 배치했다. 직접적인 접촉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때, 피핀이 바닥에 귀를 바짝 대고 숨을 죽였다. 피핀의 예민한 감각은 일반적인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영역의 소동을 포착해 내고 있었다. 피핀의 시선은 짐과 문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두 가지예요. 들려요?”
피핀의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짐의 표면을 가리켰다. 짐 안쪽 마른 긁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날카로운 손톱이나 딱딱한 부속품이 마른 가죽이나 나무판을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는 소리였다. 무언가 짐 내부에서 밖으로 나오려 애쓰는 듯한, 혹은 짐이라는 공간 자체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듯한 건조한 마찰음이었다. 그러나 소리는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피핀은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틈 쪽을 바라보았다.
문 안쪽 숨소리 역시 분명하게 존재했다. 짐 내부의 긁힘이 물리적이고 거친 소리였다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규칙적이고 습했다. 마치 누군가 문 뒤에 서서 짐이 수취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긁는 소리와 숨소리는 서로 공명하며 기묘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하나는 나가려 하고, 하나는 들어오려 하는 욕망이 그 좁은 공간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핀조차 그 숨소리의 주인공이 살아있는 인간인지, 혹은 짐 안에 든 것과 같은 종류의 무언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체는 어둠 속에 가려진 채 소리로서만 그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베라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이 기괴한 구도를 관찰했다. 그녀의 눈은 이네스가 든 수첩과 로웬이 바닥에 펼쳐놓은 가죽 끈,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적 비율을 계산하고 있었다. 베라의 시선이 머문 곳은 수첩의 인계자 공란 폭과 매듭 간격이었다. 종이 위의 공백이 차지하는 너비와 로웬이 설정한 안전거리의 비율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손대지 않는 것에도 비용이 따릅니다.”
베라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판단은 냉혹했다. 짐을 수취하지도, 그렇다고 성공적으로 반납하지도 못한 채 이 대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공짜가 아니었다. 이네스의 어깨는 점점 더 아래로 처지고 있었고, 수첩을 쥔 손가락 끝은 혈액이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인계자 공란의 너비가 넓어질수록 로웬이 설정한 매듭의 간격은 상대적으로 좁아 보였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안전지대가 잠식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짐을 건드리지 않기로 선택한 대가로, 그들은 자신들의 체력과 정신력을 실시간으로 지불하고 있었다.
문틈에서 새어 나온 성에는 어느새 로웬이 놓아둔 가죽 끈 근처까지 뻗어 나왔다. 성에는 마치 투명한 결정체들이 기어가는 것처럼 서서히 바닥을 잠식했다. 로웬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죽 끈의 위치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짐의 손잡이 그림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물리적인 바람은 없었으나, 짐 자체가 스스로의 위치를 재조정하려는 듯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이네스는 펜을 꽉 쥐었다. 반납이라는 글자를 완성하려 할 때마다 수첩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사각거림을 내뱉었다. 종이는 이제 가죽보다 단단해졌고, 펜촉이 닿는 자리는 불꽃이라도 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네스는 자신의 의지가 잉크를 통해 종이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종이가 잉크를 빨아들여 자신의 의지를 왜곡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취로 바뀌려 하는 획의 끝부분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온몸의 무게를 펜 끝에 실었다.
피핀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짐 안쪽 마른 긁힘은 이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문 안쪽 숨소리 또한 그 리듬에 맞춰 조금씩 거칠어졌다. 마치 문 뒤의 존재가 짐 안의 존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긁힘이 멈추면 숨소리가 길게 이어졌고, 숨소리가 잦아들면 다시 짐 내부에서 날카로운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둘 사이의 상호작용은 점점 더 긴밀해졌고, 그럴수록 이네스가 느끼는 무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로웬은 이네스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을 동원해 이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칼집 끈을 당겨 매듭의 위치를 확인했다. 인계자 공란 폭과 매듭 간격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이 좁은 복도는 짐의 내부로 변하거나 문 너머의 공간으로 편입될 것이었다. 로웬은 구두 굽으로 바닥의 성에를 긁어내며 경계를 강화했지만, 성에는 긁어낸 자리에 더 굵고 날카로운 결정체를 피워 올렸다.
“이네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강제로 떼어내면 반납조차 불가능해집니다.”
로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네스의 팔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팔꿈치 관절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첩에 적힌 공란은 이제 글자 몇 개를 적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암석 덩어리를 지탱하는 지렛대의 받침점처럼 변해 있었다. 반납의 'ㄴ'자 끝부분이 수취의 'ㅅ'자로 꺾이려는 찰나, 이네스는 비명을 삼키며 손목을 비틀었다. 잉크가 사방으로 튀었으나 종이 위에는 단 한 방울의 얼룩도 남지 않았다. 모든 액체는 공란 속으로 흡수되어 무게를 더할 뿐이었다.
베라는 이 광경을 지켜보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무게는 분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인계자가 공란인 이상, 이 짐은 수취자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누군가 기꺼이 그 짐을 들겠다고 나서거나, 혹은 완벽하게 거부하여 반납의 절차를 마치지 않는 한 이 무게의 저주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베라는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자신에게 전이될지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하중을 경계했다.
짐 내부의 긁힘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동시에 문 너머의 숨소리도 숨을 참듯 고요해졌다. 폭풍 전야와 같은 정적이 복도를 메웠다. 이네스의 손목이 떨림을 멈추고 굳어버렸다. 근육이 경직되어 이제는 펜을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수첩의 인계자 공란은 이제 시꺼먼 심연처럼 변해 이네스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으나, 동시에 모든 불길한 가능성이 적혀 있는 듯했다.
로웬은 가죽 끈을 고쳐 쥐었다. 매듭 간격이 서서히 좁아지고 있었다. 짐의 그림자가 로웬이 설정한 가이드라인을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자는 액체처럼 바닥을 타고 흘러 로웬의 구두 끝에 닿으려 했다. 로웬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나는 순간 이네스가 고립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칼집 끝으로 그림자의 경로를 차단하듯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챙그랑, 하는 금속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으나 소리는 곧바로 문틈의 숨소리에 잡아먹혔다.
이네스는 느꼈다. 무게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었다. 수첩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그리고 이제는 어깨를 넘어 그녀의 영혼 어딘가로 전이되는 묵직한 감각. 그것은 들고 있는 짐의 무게라기보다는, 앞으로 짊어져야 할 운명의 무게에 가까웠다. 반납이라는 글자는 결국 완성되지 못했고, 수취라는 글자 또한 선명하게 새겨지지 않았다. 상태는 교착되었으나 무게는 멈추지 않았다.
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방 안의 누구도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짐 안쪽 마른 긁힘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느리고, 무겁고, 신중한 소리였다. 마치 짐 안의 존재가 밖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듯한 여유로운 소리였다. 문 안쪽 숨소리 또한 그에 응답하듯 깊고 낮은 울림을 내보냈다.
이네스의 고개가 힘없이 떨궈졌다. 그녀의 시야 끝에 수첩의 다음 페이지가 살짝 보였다. 그곳은 아직 깨끗한 백지였으나, 이미 보이지 않는 압력이 그 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로웬의 매듭은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지기 직전이었고, 피핀은 공포에 질려 입을 틀어막았다. 베라는 이 모든 비효율적인 소모를 지켜보며 마지막 계산을 끝냈다. 이 짐은 반납될 수 없다. 처음부터 주인 없는 짐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주인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보관자 공란: 들지 않은 짐이 어깨 무게를 먼저 고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