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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473화. 목격란의 빈 서명 / 증언석 아래 접힌 보류표 일러스트

472-473화. 목격란의 빈 서명 / 증언석 아래 접힌 보류표

472화. 목격란의 빈 서명

접수대 앞의 공기는 눅눅하고 무거웠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램프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불규칙한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웠다. 접수처 내부를 가득 채운 것은 잉크의 비린내와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대기 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초조한 체취였다. 이미 제출된 서류 더미 맨 위에는 ‘밀린 손목은 의사가 아님’이라는 문구가 적힌 임시 표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문구는 마치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절차가 인간의 온기보다는 차가운 서류상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듯했다.

서기는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펜을 내려놓으며 무심한 손길로 얇고 길쭉한 보조지 한 장을 밀어 넣었다. 거친 종이가 거뭇하게 때가 탄 나무 책상 위를 긁으며 미끄러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정적을 깨는 그 마찰음은 지켜보던 이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보조지의 상단에는 ‘목격자 확인 및 연대 서명란’이라는 글자가 굵고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접수대 서기는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리며 안경 너머로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을 무미건조하게 훑어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개개인의 사정이나 감정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절차의 완결성만을 따지는 기계적인 시선이었다. 서기는 감정을 거세한 목소리로 지침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규정에 의거하여 알린다. 대상자의 확정 서명이 누락되었거나 자격 미비로 판명될 경우, 현장 목격자의 확인으로 해당 절차의 정당성을 보완할 수 있다. 이는 개별의 의사보다 현장의 사실적 정황을 우선시하는 예외 조항이다.”

서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보조지를 톡톡 두드렸다.

“목격자가 충분하고 그들의 증언이 일치한다면, 로웬의 직접 서명 없이도 접수는 유효한 것으로 간주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로웬의 행위와 존재를 목격한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 서명하라.”

서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기 줄 뒷부분에서 낮게 깔린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질서 정연한 대화가 아니라, 좁은 틈새를 타고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압박이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밀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들의 눈에는 기묘한 열망과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이 지루한 대기를 끝낼 수만 있다면, 혹은 이 기묘한 절차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태도였다.

“봤어! 나도 봤다고!”

누군가 비명처럼 외치자, 제방이 터진 것처럼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사람이 저기 서 있었던 거, 다들 봤지 않소? 거기서 손을 뻗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오!”

“맞아, 여기 있는 사람 전부가 증인이요. 로웬이라는 자가 여기 있었고, 접수 절차에 응하고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누군가의 팔꿈치가 옆 사람의 옆구리를 거칠게 찔렀고, 거친 숨소리가 공중에 흩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며 보조지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개별적인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로웬의 머리 위를 무겁게 짓눌렀다. 종이 뭉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딱딱한 바닥을 구르는 발소리가 접수처 내부를 빈틈없이 가득 채웠다. 이것은 정당한 증언의 수집이 아니라, 다수의 위력으로 개별의 의사를 지워버리고 절차를 강행하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이네스가 군중과 접수대 사이를 가로막으며 섰다. 그녀의 구두 굽이 바닥을 치는 소리는 작았으나, 그 울림은 군중의 소란을 단번에 압도했다. 차갑고 서늘한 시선이 서명을 하겠다고 날뛰는 이들을 하나하나 꿰뚫듯 향했다.

“목격이라고 했나?”

이네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실내의 소란을 가르며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광기에 가깝게 고조되던 열기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일순간 굳어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들 중, 순수하게 사실만을 기록하려는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군. 빨리 접수를 끝내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서, 혹은 뒷사람의 압박에 밀려 ‘본 것 같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 과연 공정한 목격자가 될 수 있는가? 압력을 만드는 자가 그 압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목격자가 된다는 건 논리적 모순일 뿐이다.”

이네스의 일갈에 군중의 기세가 잠시 주춤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지만, 여전히 펜을 쥔 서기의 주변을 탐욕스럽게 에워싸고 있었다. 서기는 그 광경을 방관하며 보조지 위에 잉크를 툭 떨어뜨렸다.

보조지의 가장자리가 서서히 짓눌리고 있었다. 줄을 선 이들의 습한 숨결과 초조한 발구름이 공기의 무게를 더하자, 종이는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채 비좁은 칸 안으로 먼저 구겨져 들어갔다. 그 비릿한 압력은 마치 수많은 이들의 의지가 이미 결론을 내렸으니 어서 서명하라고 종용하는 무언의 협박 같았다.

“목격했다는 사실이 곧 동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네스가 서늘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그녀는 서류를 내려다보는 관리자들의 눈을 하나씩 꿰뚫으며 차분히 논리의 허점을 짚었다.

“당신들이 목격한 시간, 그와의 거리, 그가 행한 동작 하나하나가 기록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건 관찰의 영역일 뿐입니다. 몇 미터 거리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가 어떻게 그 사람의 내밀한 승낙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거죠? 목격은 타인의 시선일 뿐이지만, 동의는 오로지 당사자의 영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관찰자가 많다고 해서 사실이 진실이 되지는 않아요.”

그 기세에 눌린 대기자 몇 명이 웅성거리며 제 앞에 놓인 증언서를 급히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사람의 어깨 너머로 문장을 훔쳐보며 급하게 베껴 쓰기 바쁜 탓에, 종이 위에는 ‘동일한 광경을 목격함’이나 ‘앞선 이의 증언과 같음’ 같은 문장들만이 기계적으로 반복되었다. 서로의 기억을 복제해 만든 증언은 겹쳐질수록 그 신뢰를 잃고 투명해질 뿐이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침묵하는 한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그들은 집단의 머릿수가 개인의 이름 칸을 강제로 채울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다수의 시선이 겹겹이 쌓여 거대한 압력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이 결코 타인의 의지를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타인의 시선이 아무리 촘촘하게 엮여 그를 옭아맨다 한들, 그 이름 석 자가 가진 고유한 무게까지 빚어내지는 못했다.

로웬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펜촉과 이름 칸 사이에 남은 빈 거리를 보고 있었다.

그때, 접수대 구석의 어두운 틈새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젖은 재들이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목격란을 향해 가늘게 번져가려 했다. 그 재들은 이전의 혼란이 남긴 찌꺼기이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용하는 부정한 의지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공기 중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마른 종 모양의 흔적들이 도장처럼 종이 위에 찍히기 위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들은 물리적인 무게가 없었으나, 서류의 내용을 강제로 확정 지으려는 영적인 압박을 담고 있었다.

베라가 손을 뻗어 그 불길한 흐름을 차단했다. 베라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투명한 기운이 젖은 재의 경계선을 대리석처럼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재는 더 이상 보조지의 서명란 쪽으로 1밀리미터도 스며들지 못한 채 검게 굳어버렸다. 공중에 떠돌던 마른 종 모양의 잔상들도 베라가 친 무형의 벽에 부딪혀 유리 조각처럼 부서지며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기만적인 증거가 목격란에 닿아 실질적인 효력을 얻는 일은 베라의 결계 안에서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그 순간, 문밖에서 일정한 박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그것은 누군가 육중한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대기 줄에 선 사람들이 초조함에 발을 구르는 소리와 교묘하게 섞여 기괴한 리듬을 형성했다. 박자는 일정했고 단호했다. 줄을 선 이들의 발 구름은 그 외부의 박자에 동화되어 점점 더 거세졌으나, 정작 그 소리를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복도의 어둠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다. 문밖의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 오직 소리의 압력만으로 실내의 긴장감을 극도로 고조시킬 뿐이었다. 심장을 압박하는 듯한 그 리듬은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서명을 강요하는 무언의 채찍처럼 느껴졌다.

로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란스러운 장내를 단숨에 가라앉히는 차분하고도 깊은 어조였다.

“목격은 사실의 관찰일 뿐, 권리의 이양을 의미하지 않는다.”

로웬의 시선은 서명하려던 군중을 지나 접수대 위 보조지에 고정되었다.

“저들이 본 것은 로웬의 존재와 움직임이지, 로웬의 동의가 아니다. 누군가 어떤 행위를 보았다는 사실이 그 행위를 한 당사자의 의사를 전적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세상의 모든 계약과 서명은 의미를 잃고 다수의 폭력으로 변질된다.”

로웬은 접수대 위에 놓인 보조지와 본 서류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리해 보았다. 그것은 물리적인 분리이자, 개념적인 격리였다.

“목격하는 행위, 주변의 압력에 가담하는 행위, 당사자의 자발적 의사, 그리고 이름에 부여된 고유한 권한. 이 모든 것은 엄연히 별개의 영역이다. 칸이 비어 있다는 것은 기입할 내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기입될 자격이 없는 것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목격자의 서명이 아무리 빼곡하게 들어찬들, 그것이 로웬의 이름 칸을 대신 채울 효력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피핀이 로웬의 곁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피핀은 접수대 위에 놓인 펜을 집어 들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피핀은 망설임 없이 보조지의 하단, 아직 오염되지 않은 비어 있는 비고란에 네 줄의 문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군중의 웅성거림과 문밖의 박자 소리를 잠재우며 선명하게 울렸다.

목격 있음

압력 가담 있음

자발 의사 확인 불가

대리 효력 없음

글자가 한 자 한 자 새겨질 때마다 사람들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여 나갔다. ‘보았다’고 외치며 서류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던 목소리들은 이제 갈 곳을 잃고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것은 더 이상 증언이 아니라 비겁한 변명이 되어버렸다. 로웬은 피핀이 기록한 네 줄의 요약 위에 새로운 임시 표지 하나를 더 겹쳐 세웠다. 두꺼운 종이 위에 정갈하고도 단호하게 쓰인 문구가 당황한 서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본 사람이 대신 동의할 수 없음.’

서기는 한참 동안 그 표지와 피핀이 작성한 비고란의 기록을 번갈아 보았다. 서류의 정당성을 보완하려던 그의 시도는 로웬 일행이 제시한 명확한 논리 앞에 가로막혔다. 서명을 하려 밀려들던 군중은 이제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어느 누구도 선뜻 펜을 다시 집어 들지 못했다. 보류표를 던지듯 무책임하게 쏟아졌던 압박의 목소리들은 이제 증거가 아닌 단순한 소음으로 분류되어 서류의 뒷면으로 밀려났다.

문밖의 박자 소리는 여전히 줄의 발 구름과 섞여 기묘한 공명을 만들고 있었지만, 더 이상 실내의 결정을 뒤흔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리듬은 목적을 잃은 채 복도 끝으로 멀어지는 잔향처럼 희미해져 갔다. 접수대 위에는 오직 명확하게 구분된 사실과 권한의 경계만이 남았다.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가 로웬의 권한을 잠식하려 했던 비정상적인 우회 절차는 그렇게 완벽히 차단되었다.

서기는 긴 한숨을 내쉬며 결국 보조지를 접어 본 서류 뒤편에 철했다. 보조지에는 증언하려 했던 수많은 사람의 흔적과 압력의 기록이 어지럽게 남았지만, 그것은 본문의 법적 효력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보조지는 주석일 뿐, 본문이 될 수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정리되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 과정을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고, 수많은 손가락이 그 칸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기대했다. 목격란은 빼곡했지만, 로웬의 이름 옆 서명 칸은 끝내 비어 있었다.

473화. 증언석 아래 접힌 보류표

대리석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가 증언석 주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청회장의 높은 천장은 빛을 집어삼킨 듯 어두웠고, 오직 중앙의 증언석만을 비추는 인위적인 광원만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고요를 깨트린 것은 거창한 선언도, 격양된 비난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닥을 긁는 듯한, 아주 낮고 기분 나쁜 마찰음이었다.

접수대 서기가 허리를 깊게 굽혔다. 그의 손가락이 증언석의 움푹 팬 아랫부분, 육중한 대리석과 바닥재가 맞물리는 어두운 틈새를 더듬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먼지 뭉치나 버려진 쓰레기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손가락 끝에 걸린 감각은 의외로 단단하고 질겼다. 서기가 숨을 들이키며 그것을 힘껏 끌어당겼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끌려 나온 것은 빛바랜 종이들이 겹겹이 포개진, 기이할 정도로 두툼한 뭉치였다. 툭, 하고 탁자 위에 올려진 그 뭉치는 단순한 종이 수십 장의 무게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묵직한 소리를 냈다.

“이것은…….”

서기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 위에는 수없이 많은 접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하나같이 일정한 각도로 날카롭게 꺾여 있었고, 겹쳐진 모서리마다 누군가의 지문이 남긴 듯한 희미한 얼룩이 번져 있었다. 오랜 시간 습기와 압력에 노출된 탓인지, 종이들은 서로를 강하게 밀착시킨 채 하나의 단단한 판자처럼 굳어 있었다.

서기가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의 접힌 면을 펼쳤다. 그 순간, 누적된 시간의 압력이 종이 틈새에서 비어져 나와 회장 안을 메웠다. 그것은 단순히 오래된 종이 냄새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과, 증언과, 결론짓지 못한 의지들이 응축되어 터져 나오는 기묘한 중압감이었다.

“전부 보류표입니다. 한두 장이 아닙니다.”

서기가 마른침을 삼키며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일련번호와 작성 일자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식으로 접수되었으나 끝내 결론이 나지 않은, 이른바 ‘보류’의 기록들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누적 정황들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서기의 낭독이 시작되었다. 목격란에 적힌 수많은 증언이 공청회장의 공기를 희박하게 만들었다. 기록은 집요했다. 언제, 어느 성소에서, 어떤 사건 속에서 로웬의 행보가 목격되었는지, 그리고 그 행보가 왜 특정한 성자적 역할의 징표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서술이 빼곡했다. 어떤 장에는 그가 지나간 자리의 온기가, 어떤 장에는 그가 내뱉은 말이 신탁과 일치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문장의 끝은 기이했다. 확정된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글자 대신 날카롭게 꺾인 접힘만이 존재했다. 마치 누군가 결론을 내리려 할 때마다 강제로 종이를 접어 입을 막아버린 듯한 형상이었다.

증언석 뒤편, 깊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대기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웬의 확정된 이름을 기다리며 오랜 시간 침묵해왔던 자들이었다. 이제 그들의 목소리는 점차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로웬을 덮쳐왔다.

“이미 저토록 많은 보류가 쌓였다는 건, 사실상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오?”

“보류표가 이 정도 두께로 쌓였다면, 그것은 이미 세계가 그를 지목했다는 증거지. 침묵은 긍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오.”

“언제까지 빈칸으로 남겨둘 셈인가! 저 누적 정황들이야말로 본인의 동의를 대신하는 강력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압박은 물리적인 무게가 되어 로웬의 어깨를 짓눌렀다. 동의를 대신하려는 우회적인 논리가 성역의 법도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당사자의 이름이 직접 적히지 않았더라도, 수년간 보류된 기록의 총량이 존재의 성격을 규명한다는 궤변이었다. 그것은 보류라는 형식을 빌린 강제적인 추대였고, 확정되지 않은 기록을 근거로 한 성자 역할의 강요였다.

그때, 이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시선은 서기의 손에 들린 보류표 뭉치, 그 날카로운 접힌 선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서기를 직격했다.

“서기, 그 보류표들의 보관 경위를 상세히 밝히십시오. 증언석 아래라는 은밀한 장소에 누가, 어떤 권한으로 이 뭉치를 밀어 넣었습니까?”

서기가 당황하며 우물쭈물했다. “그것은…… 관리 대장에는 기록이 없습니다만, 발견된 장소가 증언석 아래이므로…….”

“보관 경위 불명. 그것이 첫 번째 결함입니다.”

이네스의 추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서기의 탁자로 다가가 종이의 질감을 살피듯 눈을 가늘게 떴다.

“종이를 접은 손과 다시 펼친 손의 흔적을 대조했습니까? 이 모서리의 얼룩들이 발생한 시점은 보류표가 작성된 직후입니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수집된 이후입니까? 절차를 무시하고 임의로 쌓아 올린 정황은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체계적인 증언이 아니라, 악의적으로 방치된 침묵의 퇴적물일 뿐입니다.”

이네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보류표의 접힌 선을 따라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거뭇거뭇한 가루들이 종이의 미세한 결 사이에서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젖은 재였다. 습기를 머금어 끈적하게 달라붙는 재들이 종이의 접힌 면을 봉인하듯 굳히려 들었다. 그대로 두면 종이는 영영 펼쳐지지 않는 검은 덩어리가 되어, 그 안에 담긴 ‘보류’라는 명분을 영원히 박제해버릴 기세였다. 보류가 확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베라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손가락 끝에 미세한 진동을 일으켜 젖은 재의 침투를 막아섰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공기가 소용돌이치며 종이 사이의 수분을 강제로 분출시켰다. 재가 접힌 선을 따라 봉인선처럼 굳지 않도록, 그녀는 아주 섬세하게 성분들을 분리해나갔다.

“재는 젖었으나, 흔적은 마른 종 모양을 하고 있군요.”

베라가 가리킨 곳에는 종이의 질감이 기묘하게 눌린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종 모양의 인장을 강제로 찍으려다 멈춘 듯한, 혹은 실체 없는 종소리가 종이 위에 물리적인 압력으로 박힌 듯한 마른 흔적이었다. 그것은 보류표가 작성될 당시의 의도가 아니었다. 베라는 그 인위적인 흔적을 보류표의 본질과 엄격히 분리해냈다.

“이 귀속 미정의 흔적을 보류표의 효력과 연결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누적된 시간 동안 누군가 인위적으로 심어놓은 상징일 뿐, 실제 작성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마른 종의 흔적은 기록의 진실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공청회장 내부의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에서부터 들려오던 규칙적인 박자였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던 그 소리는 어느 순간 문밖이 아닌, 바로 이곳, 증언석 아래 바닥 전체에서 울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리듬이 지면을 타고 올라와 사람들의 심장 박동을 강제로 맞추려 들었다. 그것은 기록되지 않은 거대한 압력이었고, 정체를 확정 짓지 못한 존재들이 내보내는 무언의 시위였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박자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으며, 로웬의 입에서 나올 ‘동의’를 갈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로웬은 그 리듬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 박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의 입술을 주시했다. 대기자들의 열망과 서기의 당혹감, 그리고 젖은 재와 마른 종의 흔적이 뒤섞인 혼돈 속에서 로웬의 목소리는 유달리 선명하고 차갑게 울렸다.

“기록은 기록일 뿐,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로웬은 탁자 위에 놓인 보류표들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그는 그 종이 뭉치에 서린 복잡하게 얽힌 효력들을 하나씩 논리적으로 분리해나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보류 기록이 현재의 동의를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목격 기록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사자의 이름 기입권까지 가져가는 것은 아닙니다. 압력에 가담한 목소리들은 공증된 증언이 될 수 없으며, 원문에 없는 동의를 누적된 정황만으로 소급 적용하는 것 또한 성역의 법도에 어긋납니다.”

로웬의 손가락이 아직 펴지지 않은 이름 칸의 접힌 면을 가리켰다.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결정을 미룬 것이 아니라,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을 보존한 것입니다. 보류가 수백 번 반복되었다는 사실이 이름 칸을 채울 권한을 서기나 여기 모인 대기자들에게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동의 원문이 없는 기록은 그저 비어 있는 상태로 존재할 권리가 있습니다.”

혼란스럽게 요동치던 공기가 로웬의 선언에 따라 질서를 찾기 시작했다. 로웬의 논리는 정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모든 압박을 무위로 돌렸다. 그는 성자라는 역할을 수락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며 새로운 대립각을 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덧씌워진 ‘역할’의 근거들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법적으로 해체했을 뿐이었다.

이네스가 켜켜이 쌓인 서류 더미를 서늘한 시선으로 훑으며 지적했다. "기록지에 목격한 시간과 목격한 거리가 아무리 상세히 적혀 있다 한들, 이 문서가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보관되었는지 그 경위가 불명확하다면 결코 동의 원문으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된 목격은 그저 누군가의 일방적인 관찰일 뿐입니다."

그 단호한 선언에 피핀은 마른침을 삼키며 보류표 모서리에 작은 임시 번호를 하나씩 기입했다. 일련번호가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기묘한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부여된 숫자가 많아질수록, 이 기록들은 동의라는 본질적인 목적지에서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양적 팽창은 질적 증명을 대신하지 못했다.

그때 대기자들이 웅성거리며 숫자의 압도적인 양을 무기로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공중을 떠다니던 젖은 재들이 눈송이처럼 내려앉아 번호가 적힌 종이 위로 스며들려 했다. 젖은 재가 검게 번져 그대로 굳어버린다면, 그것은 마치 조작 불가능한 봉인선처럼 서류들을 구속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베라가 한발 앞서 손을 뻗었다. 베라가 일으킨 미세한 열기가 젖은 재의 습기를 순식간에 걷어냈고, 번호 위로 번지려던 잿가루는 굳기 전에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압박의 증거가 될 뻔한 낙인을 사전에 차단한 셈이었다.

로웬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펜 끝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숫자의 기록, 목격의 정황, 보류의 사유, 가해진 압력, 그리고 실제 이름의 칸은 반드시 제각각 다른 줄로 분리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서로 섞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며, 결코 하나로 뭉뚱그려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로웬의 말은 명확했다. 누적된 수치가 개인의 고유한 권리이자 책임인 이름 칸을 대신할 수 없다는 원칙이 공고해졌다. 아무리 거대한 압력이 숫자의 탈을 쓰고 몰아쳐도, 그것이 곧 본인의 의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숫자는 보류의 양을 세었을 뿐, 로웬의 이름을 대신 쓰지는 못했다.

피핀이 깃펜을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냉철했고, 기록지는 그 어느 때보다 하얗게 빛났다. 그녀는 정적 속에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필체로 네 줄의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보류 기록 있음

보관 경위 불명

동의 원문 없음

이름 기입 불가

네 가지 사실이 확정되자, 증언석 주위를 감돌던 끈적한 젖은 재의 기운이 힘을 잃고 흩어졌다. 바닥을 울리며 심장을 압박하던 불분명한 박자 소리도 밀물처럼 멀어져 갔다. 로웬은 펴진 보류표 뭉치 위에 작은 종이 한 장을 올렸다. 그것은 어떤 판결문보다 단호한, 이 기록의 성격을 규정하는 임시 표지였다.

[접힌 기록은 빈 이름을 대신 펴지 못함]

대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보류표라는 과거의 잔재를 통해 특정 역할을 강제로 수락하게 하려던 그들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 보류의 기록이 가진 법적 한계를 명확히 짚어낸 로웬의 논리에 가로막혔다. 누적된 정황은 힘을 잃었고, 이름 칸으로 향하던 모든 우회로는 차단되었다.

서기는 떨리는 손으로 펴진 종이들을 정리해 봉투에 담았다. 수많은 정황과 목격담이 담긴 그 두툼한 봉투 어디에도 로웬의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보류표는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왔으나, 그 안에 담긴 침묵은 여전히 유효한 권리로서 보존되었다.

접힌 보류표는 펴졌지만, 로웬의 이름 칸은 이번에도 접힌 채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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