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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457화. 시작되지 않은 젖은 선의 접수대 / 접수대 안쪽에서 울린 마른 종소리 일러스트

456-457화. 시작되지 않은 젖은 선의 접수대 / 접수대 안쪽에서 울린 마른 종소리

두 개의 두꺼운 표지가 접수대 위에 나란히 놓였다. 왼쪽의 표지는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낸 듯 거칠고 메마른 가죽의 질감을 고스란히 띠고 있었으며,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들이 마치 고대 지도의 등고선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오른쪽의 표지는 서늘한 금속의 광택을 머금은 채 주변의 미약한 빛을 날카롭게 튕겨내고 있었고, 손을 대면 지문조차 남지 않을 만큼 매끄럽고 완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그 두 표지가 맞닿은 지점, 그 아주 미세한 틈새를 가로질러 얇은 선 하나가 그어졌다. 그것은 검은 잉크의 흔적도 아니었고, 붉은 혈흔의 잔재도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에 젖은 듯한,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며 일렁이는 축축한 흔적일 뿐이었다.

선은 기이했다. 보통의 흔적이라면 그것이 시작된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펜촉이 종이에 처음 닿아 잉크를 머금었던 자리나, 위에서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진 중심부 같은 발생의 근원이 존재해야 했다. 그러나 이 젖은 선은 왼쪽 표지에서 시작되어 오른쪽으로 넘어온 것도 아니었고, 오른쪽 표지에서 왼쪽으로 스며든 것도 아니었다. 두 표지의 경계면에서 갑자기 발생한 것처럼 보였으나, 정작 어느 쪽 표지의 표면에도 발원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공중에서부터 어떤 과정도 거치지 않고 바로 내려앉은 것처럼, 혹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결여된 채로 존재했던 것처럼 선은 그저 그곳에 있었다. 존재하되 시작되지 않은 선은 기묘한 위화감을 발산하며 접수대 위의 공기를 서서히 적셔 나갔고, 그 습기는 물리적인 물기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침식하는 종류의 무거운 수분이었다.

접수대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 공간 자체가 가진 거대한 관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접수대는 본래 확인되지 않은 것을 확인된 것으로, 모호한 것을 확정된 것으로 바꾸려는 강박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압박이 육중한 파도처럼 밀려와 로웬의 어깨를 눌렀다. 접수대의 나무 판재가 미세하게 떨리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고, 그 젖은 흔적을 어서 빨리 ‘누군가의 확인’으로 처리하라고, 이 불확실성을 종결지으라고 끊임없이 재촉했다. 접수대의 시스템은 이 무연고의 흔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날 선 반응을 보이며, 존재의 증명서가 없는 이물질을 향해 보이지 않는 법망의 그물을 좁혀왔다.

그때, 접수대 위로 뻗어 있던 젖은 선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빈 여백이 스스로의 위치를 묻는 듯한 기묘한 파동이었다. 선의 떨림은 이내 공명 현상을 일으키며 기록자의 고막을 날카롭게 두드렸다.

“……확인자보다 확인 칸을 먼저 묻고 있습니다.”

피핀이 깃펜을 든 채 손을 멈칫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접수대의 기록부 위로 글자가 나타나기 전, 허공에서 먼저 질문이 형상화되었다. 선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디서 흘러왔는지를 말하기보다 자신이 기록될 ‘칸’의 위치를 먼저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과를 정면으로 뒤집는 요구였다. 누가 보았는가가 먼저 결정되어야 무엇이 적힐지가 정해지는 것이 이 세계의 법도인데, 이 흔적은 자신의 존재 형식과 위치부터 확정해 달라고 보채는 중이었다. 주체 없는 객체가 먼저 자리를 잡겠다는 오만한 요구에 접수대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이네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 젖은 선이 가진 정체불명의 갈증을 해소해 주려는 듯, 혹은 그 모호함이 주는 불쾌감을 견디지 못해 직접 확인자가 되어 이 상황을 끝내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네스의 손가락 끝이 젖은 선의 축축한 경계에 닿기 직전, 로웬이 전광석화처럼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이네스 님. 손대지 마십시오.”

로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거절할 수 없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이네스가 동작을 멈추고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로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웬 님, 저 선이 번져 나가고 있어요. 그대로 두면 표지 전체가 젖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확인자가 없어서 길을 잃은 것이라면 제가…….”

“그것이 접수대가 바라는 함정입니다.”

로웬은 이네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젖은 선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이 흔적은 시작점이 없습니다. 시작점이 없다는 것은 책임질 주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누군가 저 선에 손을 대는 순간, 저 선의 정체 모를 습기와 번짐, 그리고 그 뒤에 따를 모든 이월된 비용이 손을 댄 사람의 것이 됩니다. 성자나 대리 확인자의 이름으로 저것을 수취해서는 안 됩니다. 저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기록자들이 이것을 개인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인과의 무게가 기록자 전체를 짓누를 것입니다.”

이네스는 로웬의 말에 담긴 서늘한 무게를 깨닫고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로웬은 시선을 돌려 접수대 위의 젖은 선을 응시했다. 그는 이제 이 현상을 하나의 사건으로 뭉뚱그려 묶지 않고, 구성 요소별로 철저하게 분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전의 기록들, 즉 ep453에서 끝내 처리되지 못하고 보류되었던 물방울의 연장이었으며, ep454에서 다음 칸으로 무책임하게 넘겨졌던 문장의 잔해였고, ep455에서 본체와 떨어져 나왔던 그림자의 파편이었다. 흩어진 조각들이 이제 하나의 선이 되어 확인의 자리를 찬탈하려 들고 있었다.

로웬이 손을 들어 허공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의 흐름이 조각나며 분리되었다.

“분리하겠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시작점’을 선에서 떼어냈다. 존재하지 않는 시작점을 억지로 찾아내어 누군가에게 할당하려 하지 않고, ‘시작점이 없음’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속성으로 격리했다. 이어 ‘닿은 손’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 선에 직접적인 물리적 영향을 준 존재가 없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선언하며 접촉의 변수를 제거했다. 그리고 ‘번짐 방향’을 고정했다. 선이 어느 쪽 표지로도 더 이상 스며들지 못하도록, 가죽과 금속의 경계면에 절대적인 중립성을 강제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확인자’의 위치를 선의 영향력 밖으로 멀리 밀어냈다. 관찰하되 간섭하지 않고, 인지하되 소유하지 않는 거리였다.

옆에 서 있던 베라는 그 치밀한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소매 안의 수건을 만지작거렸지만, 끝내 그것을 꺼내거나 마른 가루를 뿌리지 않았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젖은 것을 닦아내거나 건조하게 말리려 했겠지만, 그녀는 로웬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닦아내는 행위조차 접촉이며, 말리려는 시도 또한 대상에 변화를 가하는 일종의 확인 절차였다. 베라는 그저 젖은 선과 표지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주변의 기운을 미세하게 조절할 뿐이었다. 젖음은 젖음 그대로, 그러나 다른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박제된 상태로 유지되었다.

“피핀, 기록하십시오.”

로웬의 명령이 떨어지자 피핀이 빠르게 깃펜을 움직였다. 기록부의 새 페이지가 거친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평소처럼 유려한 문장이나 유기적인 연결로 이루어진 서술이 아니라, 마치 단절된 사실들의 나열처럼 투박하고 건조한 기록이 종이 위로 새겨졌다.

[ 기록번호: 미정 ]

[ 시작점: 없음 ]

[ 닿은 손: 없음 ]

[ 번짐 방향: 불명 ]

[ 확인자: 없음 ]

피핀의 펜촉이 마지막 네 줄의 명시적 부정(否定)을 완성하는 순간, 접수대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한풀 꺾였다. 접수대의 시스템은 이 흔적을 누군가의 ‘업보’나 ‘보관물’로 강제로 떠넘겨 책임을 전가하려 했으나, 로웬이 그 연결고리를 전부 물리적으로 분리해 버리자 더 이상 강요할 명분을 찾지 못한 듯했다. 기록부의 종이는 떨림을 멈췄고, 공기는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젖은 선은 여전히 두 표지 사이에 유령처럼 머물러 있었고, 그것이 언제 다시 기회를 엿보며 번져 나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로웬은 품 안에서 작은 임시 표지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아무런 글자도 적히지 않은, 표백된 것처럼 깨끗한 양피지 조각이었다. 그는 그 조각을 젖은 선 위에 직접 붙이지 않고, 선의 바로 위 허공에 살짝 띄워 고정하는 정교한 작업을 수행했다.

그 표지 위로 로웬의 의지가 담긴 문장이 서서히 떠올랐다.

‘젖은 선은 확인자가 아님.’

이것은 성자의 자비로운 승인도, 죄를 사하는 구원의 선언도 아니었다. 그저 이 흔적이 다른 누군가의 신원을 도용하거나 확인자의 정당한 자리를 찬탈하지 못하도록 막아두는 최소한의 방어선이었다. 로웬은 스스로를 대리 확인자로 내세워 명예를 얻는 대신, 오로지 이 기괴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분리하는 ‘기록자’이자 ‘분리자’의 위치에 자신을 엄격하게 묶어두었다.

접수대 내부에서 수취 시스템이 공회전하는 무거운 소리가 들려왔다. 배달되어야 할 대상이 정해지지 않았고, 장부의 빈칸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 공백으로 남았다. 로웬은 죽은 태양의 장부나 빈 옥좌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확정이 아니라 유예였고, 점유가 아니라 고립이었다. 성급한 확정은 곧 파멸을 의미했기에, 그는 철저하게 중간자의 위치를 고수했다.

이네스는 로웬의 굳건한 옆얼굴을 보며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분명 눈앞의 접수대 앞에 서 있었으나, 마치 접수대라는 거대한 체계의 부속품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그 체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방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이질적인 균형이 이 위험한 접수대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어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이네스의 불안 섞인 물음에 로웬은 젖은 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기록자들이 지킬 수 있는 한계입니다. 기록자들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인을 자처하는 순간, 시작되지 않은 이 선은 기록자의 이름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은 기록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이월이 아닙니다. 시작되지 않은 것은 끝낼 수도 없기에, 이쪽에서는 그저 고립시켜야만 합니다.”

베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치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고, 베라는 단 한 치도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수취와 반송, 그리고 보류라는 세 갈래 길 중에서 로웬은 보류의 구조를 극단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셈이었다. 보류는 곧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공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접수대 안쪽의 어둠은 여전히 깊고 습했으며, 문밖에서 멀리 들려오던 규칙적인 박자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멈춰 있었다. 사방이 숨 막히는 고요에 잠겼다. 기록부의 무거운 종이가 넘겨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완전한 정적의 시간이었다. 기록자들의 호흡만이 가늘게 이어질 뿐이었다.

그때였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접수대 위, 로웬이 덧댄 임시 표지와 그 아래의 젖은 선 사이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선의 수분은 증발하지 않았고, 표지도 더 이상 젖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마찰이 일어난 듯한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공기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긴장감이 일순간 접수대를 휩쓸었다.

짤랑.

젖은 선 아래에서 아주 작은 마른 종소리가 났다. 그것은 매끄러운 금속이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라기보다는, 아주 건조한 뼈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오래된 종이가 서로 부딪칠 때 나는 메마른 소리에 가까웠다. 습기로 가득한 선 아래에서 들려오기에는 지독하게 이질적인 건조함이었다.

피핀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로웬과 이네스, 베라의 시선이 동시에 젖은 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종소리는 그 젖은 선 위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소리는 접수대 안쪽,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숙한 서랍이나 이중으로 된 칸막이 너머에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그 어둠 속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혹은 기록의 완성을 기다리며 아주 작은 신호를 보낸 것처럼. 젖은 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고, 소리는 선의 아래쪽에서 올라왔지만, 그것은 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접수대 자체가 낸 소리인지, 혹은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낸 소리인지 확인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로웬은 젖은 선 아래를 가리키던 손을 끝내 거두지 않았다. 소리가 들려온 지점과 선이 머무는 곳 사이의 거리를 정밀하게 측정하듯,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시작되지 않은 선은 여전히 시작되지 않은 채였고, 접수대의 확인 절차는 그 마른 종소리와 함께 기묘한 공백 속으로 가라앉았다. 기록자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고, 흔적은 공간 속에 박제되었으며, 소리는 오로지 내부에서만 맴돌았다. 접수대 안의 고요는 한층 더 깊어졌으며, 확인되지 않은 인과들은 그 소리 없는 공명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기록자들은 그저 그 자리를 지키며, 이름 없는 흔적이 남긴 파동이 완전히 잦아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젖은 선 아래에서 아주 작은 마른 종소리가 났지만, 소리는 선 위가 아니라 접수대 안쪽에서 들림.

습기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짐승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젖은 선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냉기는 발목을 타고 올라와 뼈마디 사이를 파고들었으나, 정작 고막을 두드린 감각은 그 무엇보다 건조했다. 쨍그랑, 혹은 그보다 더 둔탁하고 메마른 금속음. 그것은 선 위에서 벌어진 일도, 질척이는 바닥을 딛고 대기 중인 줄 사이에서 터져 나온 소동도 아니었다. 소리는 정확히 접수대 안쪽, 두꺼운 목재 판자가 외부와의 경계를 엄격히 가로막고 있는 폐쇄된 공간 내부에서 울려 퍼졌다.

로웬은 깃펜을 멈추었다. 펜촉 끝에 위태롭게 맺혀 있던 검은 잉크 한 방울이 젖은 선의 경계면에 낙하했다. 수면에 떨어진 기름처럼 잉크는 물기 위를 기어 다니며 기괴한 무늬로 번져 나갔다. 본래 접수대라는 공간은 외부의 요청이 내부로 전달되고, 내부의 승인이 외부로 출력되는 유일한 통로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 들린 소리는 그 어떤 통로나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안쪽이라는 밀폐된 심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과가 거세된 소리였다.

접수대 바닥면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으나, 로웬의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감각은 묵직했다. 마치 안쪽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거대한 톱니바퀴가 녹슬어 비명을 지르며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혹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가 확인 도장을 집어 들어 바닥을 내리찍으려 준비하는 것처럼 둔중한 압박감이 주변의 공기를 짓눌렀다. 내부 절차는 외부의 확인이나 기록자의 개입을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완료’라는 최종적인 단계를 향해 폭주하듯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방금 들린 종소리는 그 비정상적인 행정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들었습니까? 지금 분명히 안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뒤편에서 숨을 죽이며 대기하던 이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그들은 종소리의 본질적인 의미를 묻지 않았다. 종소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소리를 낸 주인이 누구인지, 혹은 그 소리가 이 공간의 물리적 법칙에 위배되는지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도 없었다. 줄을 서 있던 군중 중 하나가 까치발을 들고 목을 길게 빼며 로웬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그의 눈에는 공포보다도 앞선 탐욕이 서려 있었다.

“어느 칸입니까? 어느 확인 칸이 열리는 겁니까? 안에서 신호가 왔으니 이제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질문은 이미 오염되어 있었다. 종을 실제로 본 사람이 있는지, 그 종이 실재하는 물건인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군중은 이미 ‘확인’이라는 결과가 도출될 칸의 위치부터 파악하려 들었다. 한 명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둑이 터진 것처럼 뒤따르던 이들의 증언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접수대 밑바닥 틈새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고 주장했고, 누군가는 이미 안쪽에서 서류가 넘어오는 마찰음을 들었다며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각자의 욕망이 청각과 시각을 왜곡하여 실재하지 않는 사실들을 가공해내고 있었다.

“정숙하십시오. 위치를 사수하십시오.”

이네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군중이 만들어내던 소란스러운 소음을 단번에 가르고 공기의 흐름을 고정시켰다. 이네스는 성급하게 조작된 증언을 쏟아내는 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들끓던 열기가 차갑게 식었다. 이네스는 군중의 기억이 그들의 절박한 욕망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그녀의 강압적인 개입으로 인해 비대해지던 소문은 일순간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본 것은 본인의 기대가 빚어낸 잔상일 뿐, 이곳의 사실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이라도 선을 넘는 자는 절차 위반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네스의 통제 아래 군중이 마지못해 입을 다물자, 다시금 접수대 주변에는 기묘하고도 무거운 고요가 찾아왔다. 로웬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접수대 안쪽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완료’를 향한 압박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접수대라는 거대한 구조물은 내부에서 발생한 소리만으로 모든 절차를 강제 수취 확인으로 처리해버리려는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외부의 기록자가 그 소리를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것으로 모든 과정이 종결된 것이 아니냐는 무언의 강요가 로웬의 턱밑까지 차올랐다.

로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적을 일으키는 성자도 아니었고, 내부의 권능을 대리하는 확인자도 아니었다. 그가 이 습기 찬 바닥 위에 서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내부의 논리가 외부의 실체를 잠식하지 못하게 막는 견고한 쐐기가 되기 위해서였다.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검증되지 않은 소리는 소음일 뿐이다.

“베라.”

로웬의 낮은 부름에 베라가 움직였다. 그녀는 접수대 위에 놓인 복잡한 서류나 안쪽의 깊은 어둠을 살피는 대신, 시선을 낮추어 바닥만을 응시했다. 베라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접수대 다리가 바닥과 맞닿은 지점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는 물리적 현상의 부재가 놓여 있었다.

“그림자뿐이에요.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베라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하여 주변의 습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접수대 다리 아래에는 기이할 정도로 짙고 정적인 그림자만이 고여 있었다. 만약 소리가 안쪽의 물리적인 공간에서 발생했다면, 그 파동에 따라 먼지 하나라도 일렁이거나 그림자의 끝자락이라도 흔들려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 검은 얼룩은 박제된 것처럼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리는 분명히 존재하여 모두의 고막을 울렸으나, 그 소리를 뒷받침할 물리적 작용이 외부의 공간으로는 단 1밀리미터도 흘러나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베라는 소리의 정체나 근원을 쫓아 허상을 잡으려 하는 대신, 그 소리가 외부에 어떤 물리적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명확히 표시했다.

로웬은 다시 펜을 잡았다. 옆에 서 있던 피핀이 이미 장부를 넓게 펼쳐 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피핀의 눈동자는 로웬의 입술이 만들어낼 다음 문장을 주시했다. 로웬이 혼란스러운 현상 속에서 정제하고 분리해낸 사실들이 피핀의 펜촉을 통해 영원한 문장으로 고착될 차례였다.

“적어라. 사실만을 분리한다.”

로웬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한 종소리만큼이나 딱딱했다.

“첫째, 소리 있음.”

피핀의 손이 기계적인 정확도로 움직였다. 종이 위에 날카로운 잉크 궤적이 그려지며 첫 번째 사실이 박혔다. 이것은 소리가 들렸다는 현상 자체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둘째, 종 없음.”

로웬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접수대 위에도, 젖은 선 주변에도, 대기하는 이들의 소지품 중에도 소리를 낼 수 있는 물리적인 종은 존재하지 않았다. 안쪽에서 들린 것은 종소리의 형태를 빌려 나타난 ‘개념’에 불과했다. 실체가 없는 현상은 기록에 의해 부정되어야 했다.

“셋째, 내부자 없음.”

접수대 안쪽은 외부로부터 철저히 봉인된 공간이다. 그곳에서 누군가 실제로 종을 흔들었다면 그것은 접수 절차를 무시한 불법적인 침입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환영의 소행일 수밖에 없다. 로웬은 내부의 폐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이루어진 주체적인 행위의 주체를 부정함으로써 안쪽의 의도를 무력화했다.

“넷째, 확인 완료 아님.”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선언이었다. 접수대 안쪽에서 들린 소리가 ‘확인 완료’라는 행정적 신호로 둔갑하여 절차를 종결지으려던 거대한 흐름이 이 문장에 의해 단절되었다. 내부에서 아무리 종을 울리고 절차를 끝내려 획책해도, 외부의 유일한 기록자가 그것을 수취로 인정하지 않는 한 절차는 결코 완결될 수 없었다. 기록자의 거부는 내부의 폭주를 막는 마지막 제동 장치였다.

피핀은 로웬이 읊은 네 줄의 문장을 단 한 글자의 오차도,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장부에 새겨 넣었다.

소리 있음 / 종 없음 / 내부자 없음 / 확인 완료 아님

장부 위에 새겨진 문장들은 각각의 독립된 사실로서 존재하며 서로를 감시했다. 소리가 있다고 해서 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종이 없기에 내부자의 존재 역시 증명될 수 없고, 그 인과관계의 부재로 인해 이 모든 소동은 결코 ‘확인 완료’라는 결론으로 수렴될 수 없다는 논리적 고립이 완성되었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종이 위로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리와 종, 내부자와 확인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낱낱이 쪼개어 나열하는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피핀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필체는 모호한 현상들 사이에 억지로 선을 긋는 것처럼 날카롭고 위태로웠다. 각 항목 사이에 놓인 공백은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현상을 하나로 확정 짓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기묘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로웬은 그 기록을 가만히 응시하며 숨을 골랐다. 눈앞의 문장들은 들려오는 감각을 정보로 치환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이 서로 섞이지 못하도록 격리하고 있었다. 손목에 닿는 서늘한 공기가 기록자의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 분류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파편화된 정보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는 압박감이 가슴팍을 짓눌렀다. 관찰된 사실을 낱개로 고립시키는 행위 자체가 주변의 풍경을 생경하게 만들고 있었다.

로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피핀이 작성한 네 줄의 기록 아래에 별도의 붉은색 임시 표지를 덧붙였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이자, 현상을 규정하는 봉인이었다.

[들린 소리는 확인자가 아님]

그 문구가 장부의 여백에 기입되는 순간, 접수대 안쪽에서 느껴지던 팽팽한 압박감이 일순간 바람이 빠진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마치 내부의 이름 모를 무언가가 외부 기록자의 완강하고 논리적인 거부에 부딪혀 뒤로 물러나는 듯한 기운이었다. 접수대는 더 이상 스스로를 완료된 상태로 꾸며내거나 외부의 인식을 기만하지 못했다. 기록자가 소리와 확인을 명확히 분리해버린 이상, 안쪽에서 울려 퍼진 소리는 그저 정체 모를 소음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네스는 여전히 군중을 억제하며 그들의 동요를 살피고 있었다. 사람들은 로웬이 장부에 무엇을 적었는지 직접 보지 못했으나, 접수대 주변을 무겁게 감싸고 있던 기묘한 열기가 식어가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느 확인 칸이 열릴지 기대하며 마른침을 삼키던 자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들에게는 절차의 정당성이나 사실의 진위보다 눈앞에 주어질 결과가 중요했으나, 로웬은 그 결과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고 현상을 해체함으로써 이곳의 위태로운 질서를 유지했다.

로웬은 젖은 선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바닥의 물기는 여전했고, 차가운 냉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소리는 일단 안쪽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이 완전히 소멸하거나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접수대라는 장치는 여전히 무언가를 끊임없이 삼키고 내뱉기 위해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목구멍과 같았다.

“다음 칸을 열 준비를 할까요? 기록은 끝났습니다.”

피핀이 장부의 잉크를 말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웬은 즉시 대답하는 대신 묵직한 장부의 겉장을 덮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내부에서 울린 소리가 확인자가 아님을 명시했으니, 이제는 그 소리가 왜 굳이 그 시점에 밖으로 터져 나오려 했는지를 지켜봐야 했다. 소리는 단순히 들린 것이 아니라, 들려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습기 찬 공기가 다시 한번 기괴하게 뒤틀렸다.

접수대 안쪽에서 마른 종소리가 한 번 더 울리지만, 이번에는 소리가 바깥 줄의 발목 아래에서 되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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