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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화. 이름보다 늦게 열린 번호표 일러스트

402화. 이름보다 늦게 열린 번호표

402화. 이름보다 늦게 열린 번호표

낡은 책상 위로 서늘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베라의 손끝이 닿은 곳은 낡은 가죽으로 장식된 닫힌 장부 모서리였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느라 해지고 갈라진 그 끝부분은 마치 누군가의 말라비틀어진 손톱처럼 날카롭게 일어서 있었다. 장부 안에는 수많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서 누락된 기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나, 지금 펼쳐진 면은 이상하리만치 비어 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래 있었고, 그 표면에는 아무런 필적도 남지 않은 채 정적만이 감돌았다. 책상 주위의 공기는 마치 얼음물 속에 잠긴 듯 차가웠으며, 그 냉기는 뼈마디를 파고드는 감각을 선사했다.

로웬은 그 빈칸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잉크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오래된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책상 위 등잔불이 낮게 일렁이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그림자는 기괴한 형상을 그리며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베라는 장부 옆에 놓인 낡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봉투 안쪽에서 희미한 긁힘 소리가 났다. 마치 종이 한 장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뒤척이는 듯한 소리였다. 혹은 아주 작은 벌레가 종이의 섬유질을 갉아먹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미세한 소음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열어도 됩니까?"

이네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질문은 베라를 향했지만, 시선은 로웬에게 머물러 있었다. 로웬은 대답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그 순간 피핀이 옆에서 숨을 삼켰다. 피핀의 손은 가방 안쪽을 더듬고 있었다. 언제든 필요한 도구를 제시하겠다는 자세였지만, 무엇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이 손끝을 맴돌고 있었다. 가죽 가방 안의 금속 도구들이 부딪히며 낮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금속성 소음은 차가운 방 안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베라는 봉투의 접착선을 손톱으로 긁어 올렸다. 오래된 풀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얇은 종이가 찢어질 듯 팽팽해졌고, 손끝에 전해지는 저항감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마치 봉투 자체가 내부의 비밀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완강했다. 질긴 저항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베라의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갈수록 봉투의 종이 결은 비명을 지르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침내 작은 파열음과 함께 입구가 벌어졌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숫자 없는 번호표였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작은 종이 조각.

그러나 그 비어 있음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빈자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웬은 번호표 가장자리의 접힌 선을 보았다. 누군가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펼친 흔적이었다. 접힌 선은 종이의 중심을 가로질러 희미한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그 선을 따라 빛이 갈라졌고, 갈라진 빛은 접수대 위에서 가느다란 은빛 먼지처럼 흩어졌다. 종이의 질감은 지나치게 매끄러웠으며, 동시에 만지면 부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 종이 조각은 존재 자체로 거대한 심연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피핀이 가방 안쪽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병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투명하고 매끄러운 빈 유리병이었다. 피핀은 조심스럽게 병마개를 열어 번호표 주위의 공기를 담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병 입구에 닿은 공기는 아주 느리게 흔들릴 뿐, 결코 병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피핀은 당혹감에 젖어 병을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투명한 용기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공기의 흐름은 병 입구에서 기이하게 꺾이며 안쪽으로의 진입을 거부했다.

"담기지가 않습니다. 분명 여기에 무언가 흐르고 있는데, 병 안으로는 한 조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피핀이 속삭였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병의 온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유리병 자체가 눈앞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피핀은 다시 한번 병을 번호표 가까이 가져갔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병의 각도를 조절하고, 공기의 흐름을 포착하려 애썼다. 그러나 감각은 매번 허공을 찔렀다. 숨이 닿아야 할 자리에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감각. 유리 벽 너머로 손을 뻗어보아도 결코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쫓는 기분이었다. 가방 안쪽에서 꺼낸 다른 도구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존재하되 점유되지 않는 것, 그것이 눈앞의 번호표가 내뿜는 기이한 성질이었다.

"담기지 않는다면 아직 소유가 정해지지 않은 겁니다. 형태는 있으나 주인이 없으니, 용기에도 담길 수 없는 것이지요."

이네스가 차갑게 덧붙였다. 로웬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 부근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고, 혈관을 흐르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베라는 도장을 들기 전, 장부의 빈 면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닿는 종이의 감촉은 서늘하면서도 거칠었다. 그리고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번호표를 대기 보류 상태로 두기 위해서는 선택에 따른 비용을 확인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이 공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로웬이 눈썹을 찌푸렸다.

"비용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기다림의 무게입니다. 대기 보류는 기록의 흐름을 억지로 멈춰 세우는 행위입니다. 이 번호가 불리기 전까지, 이 방의 시간 중 일부는 이 종이 조각에 묶이게 됩니다. 그것은 기억의 파편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감각이 무뎌지는 대가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 올 때까지 누군가는 이 공허를 나누어 짊어져야 합니다."

베라의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네스가 로웬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그 비용을 누가 지불하게 됩니까? 접수자인 당신입니까, 아니면 이 자리에 있는 당사자들입니까?"

"이 기록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대기 보류를 선택하는 순간, 이름 없는 번호표는 모두의 숨을 조금씩 빌려 쓰게 될 것입니다. 감당하시겠습니까?"

피핀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로웬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름 없는 번호표가 공중에 떠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만약 여기서 멈춘다면 이 번호표는 소멸할 것이고, 밖에서 헤매는 이름은 영영 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었다. 로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의가 서린 눈동자가 등잔불 아래에서 단단하게 빛났다.

"감당하겠습니다. 이름이 올 때까지 자리를 비워둘 수 있다면, 무엇이든."

이네스도 짧게 한숨을 내쉬며 동의의 뜻을 비쳤다. 피핀은 여전히 빈 유리병을 손에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베라는 그들의 결의를 확인한 듯 장부의 접수 완료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베라는 도장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황동 도장이 빛을 받아 둔탁하게 번뜩였다.

쿵.

첫 번째 도장 박자가 장부의 빈 면을 울렸다. 잉크가 묻지 않은 도장은 종이에 직접 닿지 않았다. 허공에서 멈춘 채, 마치 보이지 않는 서류 위에 먼저 찍히는 것처럼 흔들렸다. 방 안의 공기가 그 진동에 맞춰 미세하게 떨렸다. 그 진동은 바닥을 타고 발바닥으로 전달되었으며, 방 안의 모든 가구가 미세하게 공명했다.

쿵.

두 번째 박자에 로웬의 숨이 늦어졌다. 숨 지연 박자는 더 이상 착각이 아니었다. 들이마신 공기가 목 안쪽에서 멈추고, 한 박자 뒤에야 폐부로 내려갔다. 로웬은 손가락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몸이 물리적인 시간보다 늦게 반응하고 있었다. 번호표가 열린 순간, 어딘가에서 누락된 호흡 하나가 이 방의 공기를 빌려 지나간 것 같았다. 심장박동과 호흡 사이의 간격이 비정상적으로 벌어졌다. 그 기이한 감각은 몸 안의 질서가 재편되는 듯한 불쾌함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접수 완료 칸은 비어 있습니다."

베라가 말했다.

그녀는 장부를 로웬 쪽으로 돌렸다. 접수 완료 칸은 분명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칸의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잉크 번짐이 남아 있었다. 기록된 적이 없는 글자의 그림자처럼, 읽을 수 없는 흔적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존재가 부재한다는 사실의 기록에 가까웠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곳에 머물다 떠난 듯한 희미한 온기만이 감돌았다.

이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비어 있는데, 이미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이미 이 칸을 통과해 버린 것 같군요."

"대기 보류 상태입니다."

베라의 대답은 짧고 명확했다.

피핀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대기 보류라면, 아직 부르지 않은 번호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이미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는 뜻입니까?"

"부르지 않은 번호가 아니라, 불릴 이름이 도착하지 않은 번호입니다. 번호는 이미 여기 와 있으나, 그것을 소유할 인격이 문턱을 넘지 못한 상태이지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번호표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딱, 하고 마른 씨앗이 껍질을 여는 듯한 소리였다. 번호표 개방음은 방 안에 있던 네 사람의 귀에 동시에 닿았다. 그 소리는 아주 미세했지만 공간의 밀도를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공기는 한동안 그 진동을 붙잡고 있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침묵이 뒤따랐다. 정적은 이전보다 더 무겁게 어깨를 눌러왔다.

로웬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번호표에 닿기 직전, 종이 표면에 아주 얕은 물결이 일었다. 숫자가 새겨질 자리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숫자가 없는 공백 아래쪽, 눈으로 읽을 수 없는 깊이에서 무언가가 순서를 바꾸고 있었다. 그것은 운명의 배열이 다시 짜이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모래시계 속의 모래가 거꾸로 솟구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이 왜곡되며 발생하는 비명과도 같았다.

베라는 로웬의 손을 막지 않았다. 대신 장부 옆에 놓인 작은 금속 자를 집어 들었다. 자의 끝으로 접힌 선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번호표는 아주 조금 더 펼쳐졌다. 보이지 않던 안쪽 면이 드러나는 순간, 봉투 안쪽에 남아 있던 먼지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 먼지들은 각자의 궤도를 그리며 허공을 부유했다.

먼지는 빛 속에서 잠깐 사람의 숨처럼 보였다. 둥글게 뭉쳐졌다가 흩어지는 모양새가 마치 누군가 내뱉은 마지막 탄식 같았다. 먼지의 소용돌이는 방 안의 대류를 따라 천천히 회전하며 로웬의 얼굴 근처를 맴돌았다.

피핀은 다시 가방 안쪽에서 아까의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병마개를 열지 않고 병 자체를 번호표 위로 가져다 대었다. 유리 표면에 미세한 서리가 서리기 시작했다. 내부의 공기가 아닌, 외부의 공기가 차갑게 식으며 반응하는 것이었다. 병 표면에 맺힌 결정체들은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며 빠르게 번져나갔다.

"차갑습니다. 소유주가 없는 숨은 온기를 품지 못하는 법이지요."

피핀의 손가락이 차가운 유리병 표면에 달라붙었다. 피핀은 아픔을 느끼면서도 병을 놓지 않았다. 이 차가운 감각만이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실재함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가움은 손가락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심장까지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이네스는 번호표의 빈 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닙니다. 문(門)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문은 열렸습니다."

베라가 말했다.

"무엇이 열렸습니까?"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깔깔했다. 목소리는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표입니다. 이름은 아닙니다."

그 대답에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피핀도 병마개를 닫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누구도 안심하지 않았다. 표가 열렸다는 말은 허가가 아니라 절차의 시작에 가까웠다. 문이 열리는 것과 문밖의 존재가 들어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오직 정적과 냉기뿐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냉기는 이제 피부를 넘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로웬은 번호표를 바라보았다. 비어 있는 표면은 이전보다 조금 더 밝아져 있었다. 마치 안쪽에서 아주 느린 불씨가 타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오래된 장부의 냉기와 봉투 안쪽의 먼지, 접힌 선의 상처가 한데 섞인 차가운 빛이었다. 그 빛은 로웬의 눈동자에 맺혀 기이한 잔상을 남겼다. 눈을 감아도 그 창백한 빛의 궤적이 망막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베라는 장부의 접수 완료 칸 옆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순간, 잉크가 아주 느리게 번져 나갔다. 점은 글자가 아니었다. 완료 표시도 아니었다. 다만 기록이 시작될 자리를 잃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말뚝 같은 것이었다. 그 작은 점 하나가 전체 장부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잉크는 종이의 섬유질을 타고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며 공간의 좌표를 고정했다.

"이 상태로 보관합니다. 이름이 도착할 때까지 이 페이지는 넘기지 않겠습니다."

"보관하면, 다음에는 무엇이 옵니까? 더 기다려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까?"

피핀이 불안하게 물었다.

베라는 잠시 침묵했다.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와 촛불을 흔들었다. 불꽃은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벽면의 그림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방 안의 사물들이 위치를 바꾸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호명입니다. 다만 호명할 이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부를 이름이 없으니, 목소리는 공중에서 흩어질 뿐이겠지요."

로웬은 그 말을 들으며 접수대 너머의 문을 보았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새벽 공기가 끊임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문밖에는 밤의 장막이 겹겹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노크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둠은 거대한 벽이 되어 모든 소리와 존재를 차단하고 있었다.

준비된 표는 이미 이 방의 공기 중에 제 자리를 잡고 안착했다. 하지만 그 표 위에 새겨져야 할 이름의 주인은 여전히 멀고 험한 길을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문밖의 정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무겁게 살을 파고들었다. 마치 수만 명의 사람이 숨을 죽인 채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것 같은 압박감이 전해졌다. 그 압박감은 방 안의 산소를 뺏어가는 듯한 질식감을 동반했다.

이네스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가죽으로 감긴 칼자루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핀은 가방 안쪽의 물건들을 정리하며 연신 문 쪽을 곁눈질했다. 베라는 장부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를 때마다, 조금 전 겪었던 숨 지연 박자의 감각이 환청처럼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기도는 얼어붙고 폐는 수축하며 존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촛불의 길이는 확실히 짧아지고 있었다. 녹아내린 촛농이 받침대 위로 눈물처럼 고였다. 문밖의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발소리 같기도 했고, 무거운 옷자락이 바닥을 끄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았다. 경계선에서 멈춘 채,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한 답답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서성임이 공기를 타고 진동으로 전해졌다.

번호표는 접수대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름이 없는 번호표는 주인을 부르지 못하고, 다만 주인에게 올 수 있는 길만을 비추고 있었다. 로웬은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으려다 멈췄다. 지금 문을 열어도 그곳에 이름이 서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문을 여는 행위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름을 영영 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손끝이 문고리에 닿기 직전의 거리에서 멈춘 채 로웬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침묵은 길어졌다. 촛불이 마지막 심지를 태우며 치익 소리를 냈다.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라 천장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이제 오직 숫자 없는 번호표뿐이었다. 긴장감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방 안을 가로질렀다. 누군가 작은 소리만 내어도 그 시위가 끊어지며 파국이 닥칠 것만 같았다. 모두가 석상처럼 굳어버린 채 오직 문밖의 어둠만을 응시했다.

네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서 문을 주시했다. 이름이 오지 않는 밤은 깊어만 갔고, 열린 표는 주인을 향한 침묵의 호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그 너머의 존재는 여전히 경계의 저편에서 서성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정지된 방 안에서, 오직 번호표만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며 차가운 광채를 발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해도 그 작은 종이 한 장만큼은 삼키지 못했다.

번호 비고: 열린 것은 표뿐이고 이름은 아직 문밖에 서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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