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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324화 합본. 소거된 접수 창구에서 그림자가 남긴 수령 거부서까지 일러스트

322-324화 합본. 소거된 접수 창구에서 그림자가 남긴 수령 거부서까지

322화. 소거된 접수 창구

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증거 사본의 하단이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분명 무채색의 활자로 기록되어 있던 문구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핏줄처럼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 대리 서명: 성자 ]라는 글귀가 유독 짙은 선홍색을 띠며 부풀어 오르더니, 그 아래로 매끄럽게 비어 있던 여백이 쩍 갈라지며 서명란을 만들어냈다.

"자, 여기입니다. 배달원님."

관리인의 목소리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는 마치 아주 사소한 오타를 수정하라고 권유하는 사무원처럼 자연스럽게 깃펜을 내밀었다.

"접수자가 미기재된 것은 명백한 행정상의 오류지요. 하지만 배달원께서 이 '성자'라는 직함으로 대리 서명을 수락하시기만 하면 모든 절차는 정상화됩니다. 사고 기록은 삭제될 것이고, 당신의 배송 실적에도 오점은 남지 않을 겁니다. 그저 이곳에 지장이라도 찍으시면 됩니다."

로웬의 시선이 붉게 타오르는 서명란으로 향했다. 손 끝이 닿기도 전인데, 서명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열기가 손등을 스쳤다. 로웬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옆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이네스의 목소리가 쐐기를 박듯 파고들었다.

"멈추세요, 로웬."

이네스의 눈동자가 증거 사본의 텍스트를 낱낱이 파헤치듯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관리인이 내미는 깃펜이 아닌, '미기재'라고 적힌 접수자 칸을 가리켰다.

"함정이에요. 접수자가 누군지 명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신이 대리인으로서 서명하는 순간, 이 배송 건에 얽힌 모든 인과와 책임은 오로지 서명자인 당신에게 전가돼요. 배송 사고의 정정 처리가 아니라, 사고의 주체를 당신으로 확정 짓는 절차라는 뜻입니다."

"이보세요, 외부인은 간섭하지 마시지. 이건 엄연한 배송 규정에 따른……."

"규정 좋아하시네."

이네스가 관리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냉소를 흘렸다.

"접수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물건에 대리 서명을 시키는 규정이 어디 있죠? 이건 '성자'라는 이름 뒤에 숨은 누군가의 부채를 로웬에게 떠넘기려는 수작일 뿐이에요."

그 순간, 줄곧 로웬의 뒤편에서 주변을 살피던 피핀의 귀가 움찔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 떠 있는 서명란 너머, 보이지 않는 공간의 틈새를 향했다. 피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로웬 님, 조심하세요. 저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소리라고?"

"도장을 찍는 소리예요. 그런데 평범하지 않아요. 거꾸로, 아주 깊게…… 마치 이름을 지워버리려는 것처럼 쾅쾅 울리고 있어요. 이름 없는 접수 창구의 인장이 거꾸로 찍히는 소리가 서명란 뒤편에서 들려오고 있다고요!"

피핀의 경고와 동시에, 붉게 물든 사본의 가장자리가 날카롭게 휘어졌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이빨처럼 로웬의 손가락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명을 유도하는 것이 안 된다면, 강제로 피라도 묻혀 서명선을 긋겠다는 듯한 기세였다.

챙!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베라의 검집이 로웬의 손 앞을 가로막았다. 종이 한 장에 불과할 사본의 모서리가 베라의 검집과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물러서, 로웬."

베라가 로웬의 앞을 막아서며 관리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본의 날카로운 끝단은 베라의 방해에 가로막히자, 마치 분노한 것처럼 부르르 떨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배달원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다니. 관리자의 본분을 잊은 모양이군."

관리인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가 사라졌다. 무표정하게 굳어버린 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서명이 필요합니다. 성자의 서명이 없으면 이 구역의 배송 흐름은 멈출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붕괴를 의미합니다. 당신은 배달원이지 않습니까? 임무를 완수해야지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로웬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베라의 어깨너머로 관리인과 공중에 떠 있는 사본을 응시했다. 이네스의 경고대로라면 이 서명은 독이 든 성배였다. 하지만 피핀이 들었다는 '이름 없는 접수 창구'의 소리는 이 사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로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고, 사무적이었다.

"서명은 거부합니다."

관리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웬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배송 규정 제14조 3항에 의거, 접수자 정보가 누락된 물품에 대해서는 대리 서명을 통한 정정보다 우선시되는 절차가 있습니다. 바로 접수처 역추적 및 오인 접수 경위 조사 요청입니다."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또한,"

로웬이 관리인의 말을 끊으며 사본의 '미기재' 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피접수자의 성명이 소거되었거나 대리 서명이 강요되는 정황이 포착될 경우, 배달원은 현장에서 해당 건을 '특수 배송 사고'로 분류하고 상급 관리국에 추적 요청을 넣을 권한이 있습니다. 관리인님, 지금 제가 요청하는 것은 서명 수락이 아니라, 미기재된 접수자의 신원 추적입니다."

로웬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붉게 타오르던 증거 사본이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다. 관리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며 뒤로 물러났다. 허공을 감돌던 붉은 연기들이 로웬의 권한 행사에 반응하여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이네스가 그 광경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결국 정면 돌파를 선택했군요. 시스템 자체의 로직을 이용해서 역류를 일으키다니."

피핀이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었다. 거꾸로 찍히던 도장 소리가 멈추고, 대신 거대한 기계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굉음이 지하실을 울렸다.

로웬의 눈앞에 새로운 텍스트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관리인이 숨기려 했던, 그리고 누군가가 강제로 지워버렸던 이 배송 사고의 진짜 시작점이었다.

붉은 글씨가 사라진 자리, 차갑고 푸른빛을 띠는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추적 대상: 접수 창구 0번 / 담당자명 소거됨 ]

323화. 0번 창구의 무인 담당자

바닥에 깔린 냉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로웬의 추적 요청이 시스템의 심장부에 닿은 순간, 지하실의 낡은 석판 위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던 어둠 속에서 선명한 은빛 선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관공서의 바닥에 그려진 안내선처럼, 매끄럽고도 기계적인 궤적을 그리며 지하실 안쪽의 막다른 벽을 향해 뻗어 나갔다.

벽면이 마치 물결치듯 일렁였다. 그 뒤로 나타난 것은 현실의 물리 법칙을 비웃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접수 창구 0번'. 번호판은 낡아 있었지만, 그 주위를 감도는 마력의 밀도는 그 어느 곳보다 치밀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진동이 지하실 전체를 미세하게 울렸다.

이네스가 앞장서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짚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수만 개의 인과율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일종의 거대한 서류 보관소이자 집행소였다. 하지만 가장 이질적인 것은 그 창구의 풍경이었다. 인간의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오직 규정된 절차만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무덤과도 같았다.

창구 뒤편에는 낡은 가죽 의자가 놓여 있었으나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두꺼운 가죽 장부가 허공에 떠서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깃펜은 보이지 않는 손에 쥐어진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종이 위를 긁어내렸고, 묵직한 구리 도장이 일정한 간격으로 장부 위를 눌렀다. 쾅, 쾅, 하는 금속음이 정적을 깨뜨릴 때마다 바닥의 은빛 유도선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마력을 뿜어냈다.

“사람이…… 없는데요?”

피핀이 조심스럽게 속삭이며 로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창구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고여 있던 어둠이, 혹은 아주 오래된 그림자가 벽장 속에 갇혀 헐떡이는 듯한 음산한 숨소리였다. 피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로웬의 등 뒤에 몸을 숨기며, 창구 너머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경계했다.

그때, 공중에서 춤추던 깃펜이 멈췄다. 장부의 마지막 장이 펼쳐졌고, 그곳에는 비어 있는 ‘담당자’ 칸이 로웬을 향해 기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 담당자명: (공란) ]

허공에 뜬 글자들이 일그러지더니,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로웬의 정체성을 빨아들이려 했다. 장부 주위로 소용돌이치는 마력이 로웬이라는 존재를 그 공란에 새겨 넣으려 시도했다. 무인 창구의 시스템이 비어 있는 관리자의 자리를 가장 적합한 후보자로 채우려는 자동 보정 절차였다. 정체불명의 인력이 로웬의 의식을 창구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로웬이 무의식중에 창구로 손을 뻗으려 하자, 이네스가 단호하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함부로 응하지 마세요. 이건 함정입니다.”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로웬의 정신을 깨웠다. 이네스는 안경 너머로 창구의 구조를 날카롭게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 시스템은 지금 담당자의 공백을 메꾸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요. 로웬 씨가 저 장부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당신은 추적자가 아니라 이 창구에 귀속된 ‘부속품’이 될 겁니다. 담당자를 교체하는 절차와 원래 담당자를 조회하는 절차는 엄연히 다릅니다. 시스템의 편의에 휩쓸리지 마세요. 저들이 원하는 것은 로웬 씨의 의지가 아니라, 단지 그 자리를 채울 적법한 데이터일 뿐입니다.”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명패 하나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금속으로 된 명패 위로 ‘로웬’이라는 두 글자가 돋을새김으로 떠오르려 했다. 시스템이 강제로 그를 임시 담당자로 지정하려는 찰나였다.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압축되며 로웬의 전신을 짓눌렀다.

베라가 검 자루를 쥔 채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서늘한 기운이 창구 앞의 탁한 공기를 갈라놓았다. 은빛 검기가 실내의 기괴한 압박감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로웬의 이름을 저런 낡은 고철 덩어리에 새기게 두지는 않겠어.”

베라는 로웬의 앞을 방패처럼 막아섰다. 그녀의 시선은 공중에서 로웬의 이름을 완성하려던 마력의 실가닥들을 꿰뚫고 있었다. 만약 시스템이 강제로 로웬을 구속하려 든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이 창구 자체를 베어 넘길 기세였다. 검의 파동이 지하실 벽면에 균열을 낼 만큼 예리하게 벼려졌다.

로웬은 동료들의 엄호 속에서 평정을 되찾았다. 자신을 집어삼키려 드는 장부의 압박감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기억을 되찾으려는 조급함이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뒤로 미루어졌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각성이나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배송 사고'를 해결하는 관리자로서의 냉철한 대응이었다.

“임시 담당자 지정을 거부한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는 창구의 장부가 아닌, 그 밑바닥에 흐르는 시스템의 논리를 향해 선언했다.

“새로운 담당자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0번 창구’의 원래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사유, 그리고 그 담당자가 남긴 권한의 잔여물을 조회하겠다. 관리자 권한의 승계가 아니라, 배송 사고 접수 당시에 발생한 기록의 열람권을 신청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구를 감돌던 거센 소용돌이가 멈췄다. 로웬의 이름을 새기려던 명패의 글자들이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시스템은 로웬의 요구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시스템의 부품으로 내던지는 대신, 외부의 관찰자이자 상급 절차를 수행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입지를 명확히 확보했다. 강압적인 편입이 아니라 법률적인 요청에 의한 접근이었다.

창구 안쪽에서 들리던 그림자의 숨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잠에서 깨어나 불쾌함을 표하는 듯했다. 하지만 로웬이 제시한 '사고 접수 절차'는 이 경직된 시스템조차 무시할 수 없는 최우선 순위였다.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장소라면, 그 규칙을 가장 완벽하게 다루는 자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 떠 있던 장부가 거칠게 펄럭이며 뒤로 넘어갔다. 방금 전까지 하얗던 종이들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잉크가 아니라, 누군가의 짙은 그림자가 종이 위로 스며드는 모습에 가까웠다. 한 장, 한 장이 넘어갈 때마다 지하실의 마력이 비명을 지르듯 고음의 공명을 일으켰다.

쾅!

마지막 도장이 찍혔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무겁고 둔탁한 소리였다. 지하실 전체가 그 진동에 흔들렸고, 먼지가 천장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로웬과 일행의 눈앞에 있는 장부 위로, 피처럼 붉은 글자들이 하나둘씩 형상을 갖추며 나타났다. 그것은 명확한 문장이 되어 로웬의 시야에 박혔다.

로웬은 그 문구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그것은 그토록 찾던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을지언정, 이 거대한 배송 사고의 기원을 가리키는 첫 번째 이정표이자 명백한 증거였다. 기록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시스템은 마침내 그에게 자격을 부여했다.

창구 0번의 비어 있던 명패 위로, 로웬의 이름 대신 전혀 예상치 못한 칭호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금속판을 긁으며 새겨지는 그 글자들을 확인한 피핀이 짧은 숨을 들이켰고, 이네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떨렸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도, 직책도 아닌,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하는 기묘한 흔적이었다.

[ 창구 0번 임시 담당자: 첫 배달자의 그림자 ]

324화. 그림자가 남긴 수령 거부서

창구 0번의 낡은 명패 위로 검은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만년필에서 쏟아진 잉크처럼, 매끄러운 나무 표면을 타고 흘러내려 ‘첫 배달자의 그림자’라는 글자를 기괴하게 뒤덮었다. 공기 중에 떠돌던 서늘한 기운이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창구 안쪽에서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낸, 그러나 입체감이 전혀 없는 평면적인 어둠이었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딛고 선 바닥 아래에서부터 눅눅한 이끼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향취가 배어 나왔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두꺼운 장부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더니, 그 틈새에서 노랗게 바랜 종이 한 장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수령 거부서였다.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듯 끝부분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그 종이는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로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 창구 0번 임시 담당자가 ‘수령 거부서’를 제시합니다. ]

[ 주의: 대리 수령 확인 시, 해당 물품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이 현 담당자에게 승계됩니다. ]

시스템 메시지가 망막을 때렸다. 로웬이 손을 뻗으려 하자, 옆에 서 있던 이네스가 그의 소매를 강하게 잡아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로웬 씨. 저건 단순한 서류가 아니에요.”

이네스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창구 너머의 그림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권한 승계’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해요. 대리 수령에 동의하는 순간, 로웬 씨는 저 ‘첫 배달자’가 짊어졌던 운명과 직책을 그대로 이어받게 될 거예요. 그것이 축복인지, 아니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배달의 굴레인지는 아무도 모르죠.”

그때였다. 일행 중 가장 귀가 밝은 피핀이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리가 나요…….”

“소리라니? 저 그림자가 말을 하는 거야?”

베라가 검 손잡이를 꽉 쥐며 물었지만, 피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안색은 종이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아니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울음소리도 아니에요. 그냥…… 아주 낡고 무거운 가방 끈이 바닥을 끄는 소리요. 스으윽, 스윽 하고…… 저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절망 같은 게 바닥을 긁고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너무 괴롭다고 하는 것 같아서…….”

피핀의 말대로 그림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미는 수령 거부서 끝단에서 검은 실 가닥 같은 연기가 흘러나와 로웬의 손목을 향해 뱀처럼 똬리를 틀며 다가왔다. 그것은 일종의 구속이자, 계약의 강요였다.

로웬의 손목에 검은 끈이 닿기 직전, 베라의 단검이 허공을 가랐다. 캉! 소름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검은 실 가닥이 힘없이 잘려 나갔다. 베라는 로웬의 앞을 가로막으며 창구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배달자니 뭐니 하는 헛소리에 우리 담당자를 넘겨줄 생각은 없거든. 로웬, 정신 차려. 저건 합리적인 거래가 아니라 억지 부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로웬은 베라의 등 너머로 수령 거부서를 응시했다. 시스템은 계속해서 대리 수령 여부를 묻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거절한다면 이 기괴한 창구는 영원히 닫힐 것이고, 아래층으로 향하는 단서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네스의 경고대로 정체 모를 권한을 덥석 받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로웬은 기억을 더듬는 대신, 철저히 현장 담당자로서의 수칙을 떠올렸다. 배송 사고가 발생했을 때, 혹은 수취인이 수령을 거부했을 때 담당자가 취해야 할 정석적인 절차가 있었다.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시스템 창의 빈 공간을 건드렸다.

“대리 수령은 보류한다.”

로웬의 선언에 시스템 메시지가 일시적으로 점멸했다.

“대신, 규정에 따라 ‘거부 사유 열람’을 신청하지. 수취인이 왜 이 물건을 받지 않았는지, 그 타당한 이유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떤 서명도 하지 않겠다.”

그것은 시스템의 맹점을 파고든 절차적 대응이었다. 그림자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들썩였다. 피핀의 귀에는 가방 끈이 끌리는 소리가 멈추고, 대신 무거운 자물쇠가 풀리는 듯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떠 있던 노란 종이가 불타오르듯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수령 거부서의 하단에 적혀 있던 감춰진 문장들이 하나둘씩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온 힘을 다해 휘갈겨 쓴 절규와도 같은 기록이었다.

로웬의 눈동자에 그 문구가 박혔다. 이네스도, 베라도, 피핀도 숨을 죽인 채 시스템이 출력하는 마지막 문장을 바라보았다.

[ 시스템이 수령 거부 사유를 승인합니다. ]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사실이 적혀 있었다.

[ 수령 거부 사유: 수취인이 먼저 배달자를 선택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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