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족 보상 심의관
유족 보상 심의관
대시종장 보좌실의 우회 압박 서면이
들어온 다음 날,
아델린은 가장 먼저
도로시를 불렀다.
“직명록,
고위 결계,
왕조 초기 문서.”
그녀가 손가락으로
책상 위 세 지점을
차례대로 짚었다.
“이쪽은 당분간
공개 속도를 늦춥니다.”
도로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팀장님이요?”
“겉으로만요.”
아델린은 바로 다음 문서철을
꺼냈다.
GP-008 전몰기사 유족 보상 심의관
도로시가 그 제목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
“표정이 기분 나쁘게 밝군요.”
“좋은 뜻이에요.
이건 건드리기 까다롭거든요.”
도로시는 자리에 앉으며
장부를 펼쳤다.
“왕명 단편이나 결계 원문은
정치가들이 국가 안정을 핑계로
막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전몰기사 보상금 누수는 달라요.
이건 유족 문제고,
민심 문제고,
회계 문제예요.
대놓고 덮으려 들면
표가 너무 나요.”
“정확합니다.”
아델린이 짧게 말했다.
창가에 기대 있던 카시안이
낮게 물었다.
“즉,
조용히 못 막는 사건으로
우회하겠다는 뜻이군.”
“네.”
아델린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 건은
당신도 필요합니다.”
카시안은 별말 없이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아델린은 이미
이 남자가 “필요하다”는 문장에
예전보다 덜 비틀고
반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나빠 보이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문장이 예전과 다르게
들린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를 쓰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지금은 이 사건이
그를 정면으로 건드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같이 보겠다는 뜻이
조금 섞여 있었다.
아델린은 그 차이를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직은 이름 붙이지 않는 편이
더 정확한 감정도 있다.
도로시가 보상금 장부를 넘기며 말했다.
“GP-008은 전몰기사 유족 보상 심의관이라는
유령직위가 사망한 뒤에도
자동 결재 루프를 돌리는 사건이에요.
원래는 전사자 유가족에게
위로금,
잔여 급여,
장례비,
훈장금이 나가야 하거든요.
그런데 일부 금액이
중간에서 사라져요.”
“규모.”
아델린이 물었다.
“최근 확인된 것만 스물한 건.
기간은 오래됐고요.”
도로시는 장부 한 귀퉁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상한 건 금액보다 명단이에요.
다 평범한 말단 기사들이 아니라,
어딘가 묘하게 기록이
지저분한 죽음들만 걸려 있어요.
전사 위치 불명확,
시신 미회수,
공적 정산 지연,
명령 체계 붕괴.”
카시안의 손이 문득 멈췄다.
“전선 붕괴 구간 명단이군.”
아델린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아는 패턴입니까.”
“좋은 패턴은 아니죠.”
카시안은 서류를 넘기며
덧붙였다.
“군대가 질 때
생기는 문장들입니다.”
도로시가 슬쩍 그를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농담을 붙였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델린은 장부 맨 앞장을 펴고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은 보상심의실과
전몰기사 기록창고를 먼저 봅니다.
직위 루프,
유족 미지급,
전사 기록 누락.
세 갈래를 동시에 보죠.”
“감찰조정팀은요?”
도로시가 묻자
아델린은 담백하게 답했다.
“복지 감사라고 적어 두세요.
기디온이 가장 싫어할 종류의 제목입니다.”
“왜죠?”
“지루해서요.”
카시안이 작게 웃었다.
“팀장님이 점점
정치적으로 사악해지는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전몰기사 유족 보상심의실은
황궁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서쪽 부속동에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조용한 행정 창구였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공기가 달라졌다.
잉크 냄새보다 향 냄새가 먼저 났고,
벽면엔 오래전 전사자 명패와
추모 인장이 걸려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창구이면서
동시에 죽은 사람들로
꽉 찬 방이었다.
도로시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속삭였다.
“여긴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요.”
“왜죠.”
아델린이 묻자
도로시는 장부를 품에 안은 채 답했다.
“돈을 다루는 방인데,
들어오면 꼭
늦은 사과를 쓰는 기분이거든요.”
그 표현은 예상보다 정확했다.
아델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방은 숫자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
뒤늦게 도착한 책임을
보관하는 장소에 가까웠다.
죽은 사람은 더는 항의할 수 없고,
남은 사람은 지치거나 가난해져서
창구를 다시 찾지 못한다.
그 틈에서 누군가 돈을 빼갔다면,
그건 단순 횡령이 아니라
패배한 사람들의 마지막 몫을
두 번 훔친 셈이었다.
심의실 실무관들은
아델린의 인장을 확인한 뒤
빠르게 길을 비켰다.
그러나 카시안을 보자
표정이 잠깐 얼었다.
놀람과 경계,
그리고 알아보는 눈빛.
황궁 안에서 오래 살아남은 기사 얼굴은,
결국 소문보다 먼저
기억에 남는다.
“오늘은 GP-008 자료
전부 봅니다.”
아델린이 말했다.
“심의 대장,
유족 지급 기록,
미수령 보상금 창고,
공훈 정산표까지요.”
한 실무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장 확인도 하십니까?”
“네.”
“왜 하필 지금….”
그는 질문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아델린이 이미
서류철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지금인지는
장부가 설명해 주겠죠.”
심의 대장은 예상보다 단순했다.
너무 단순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전사자 이름,
소속,
보상 항목,
지급 여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칸,
심의관 최종 승인란.
문제 건들엔
모두 같은 패턴이 있었다.
승인 자체는 통과.
지급은 일부만.
잔여 금액은 유예.
유예 사유는 짧거나 비어 있음.
그리고 하단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위 도장.
전몰기사 유족 보상 심의관
“유령직위 서명은
여기서도 똑같군요.”
아델린이 말하자
도로시가 이미
다른 장부를 꺼내 들었다.
“네.
그런데 더 이상한 게 있어요.”
그녀는 두 장부를
나란히 폈다.
“이쪽은 지급 장부고,
이쪽은 유족 수령 확인서거든요.
문제 건들 중 절반은
유족 쪽 서명이 아예 없어요.
그런데 돈은 지급된 걸로 찍혀 있어요.”
카시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실물 수령 없는 지급.”
아델린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유예를 가장한 인출.”
그 순간 장부의 숫자들이
단순한 회계 항목으로 보이지 않았다.
누가 받았어야 하는 돈인지가
분명한데도,
서류 안에서는 너무 쉽게
빈칸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더 악질적이었다.
누가 비어지게 만들었는지도 선명했다.
너무 익숙한 방식이었다.
이제는 패턴이었다.
명백했다.
분명했다.
충분히.
이제.
둘 말이 겹치자
도로시가 눈을 깜빡였다.
“이제 진짜
대화가 점점 짧아지네.”
아델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수령 없는 지급 건만
따로 뽑으세요.
그리고 전사 위치 표기 있는 것과
없는 것 나눕니다.”
카시안이 장부를 받아 들며
낮게 말했다.
“전선 붕괴 구간은
보통 위치가 흐립니다.
보고할 사람이
먼저 죽으니까.”
이번엔 도로시가
대꾸하지 못했다.
아델린은 곁눈질로
카시안을 봤다.
얼굴은 여전히 건조했지만,
전사 위치 표기를 읽는 속도가
처음보다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이름이 아니라
죽음의 방식부터
알아보는 사람의 손놀림이었다.
“감시관.”
그녀가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예.”
“괜찮습니까.”
질문은 짧았고,
톤도 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시는
그 문장이 팀장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랐다.
카시안은 한 박자 늦게 웃었다.
“팀장님이
사람 상태도 묻는군요.”
“업무 속도가 떨어지면
확인해야죠.”
“역시 그쪽으로 정리하시는군.”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번에는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괜찮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볼 수는 있죠.”
아델린은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억지 위로나
헛된 배려를 붙이지 않았다.
그 대신 문서를 넘기는 속도만
조금 늦췄다.
카시안이 따라올 수 있을 만큼만.
그 미세한 조절은
말보다 더 정확했다.
카시안도 그 차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감사 인사도,
괜한 농담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봉투를 집을 때
조금 더 천천히 움직였다.
억지로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 속도를
스스로 다시 잡는 사람처럼.
아델린은 그걸 확인한 뒤에도
굳이 그에게서
한 걸음도 멀어지지 않았다.
장부를 펼칠 때도,
봉투를 옮길 때도
늘 그의 시야 안쪽에
자기 손을 남겨 두었다.
위로처럼 보이지 않게,
하지만 혼자 두지는 않는 방식으로.
심의실 안쪽엔
미수령 보상금 보관함이
따로 있었다.
금고처럼 거창하진 않았지만,
오래된 봉투와 훈장 상자,
미전달 공훈장,
확인되지 않은 잔여 급여표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도로시가 봉인 띠를
하나씩 풀며 중얼거렸다.
“이런 건 원래
오래 묵을수록
빨리 정리해야 하거든요.
유족이 끊기거나,
계승권이 없어지거나,
공적 재심으로 넘어가거나.
근데 여긴 그냥 쌓여 있어요.”
아델린은 한 상자를 열어
안쪽 봉투를 살폈다.
대부분 겉면에
이름,
소속,
사망 연도,
유족 접수 여부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특정 묶음만 이상했다.
같은 단위부대 표기.
같은 전선.
같은 시기.
그리고 대부분
미수령 뒤에
작은 붉은 점 하나.
“도로시.”
“네.”
“이 붉은 표식은
뭡니까.”
도로시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정식 회계 표기는 아니에요.
보통 재심 필요나 분쟁 표시는
숫자 코드로 남기거든요.”
카시안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전사 확인 재분류 표식입니다.”
아델린이 그를 봤다.
“군대 쪽 표기군요.”
“오래전엔 그랬죠.”
그는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종이 가장자리를 지나갈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이름을 읽기 전에
이미 기억이 먼저 닿는 것처럼.
붉은 점이 찍힌 봉투는
이상하게도 서로 닮아 있었다.
종이 질감도,
묵은 향 냄새도,
봉인 줄의 닳은 방식도 비슷했다.
같은 시기,
같은 부대,
같은 종류의 죽음.
누군가 행정적으로는
개별 사건처럼 흩어 놓았지만,
실물은 오히려
한 덩어리의 패배처럼 쌓여 있었다.
“같은 부대였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어느 부대.”
카시안은 몇 개의 봉투를 한데 모아
아델린 앞에 놓았다.
제7선봉대.
같은 표식.
같은 시기.
같은 붉은 점.
아델린이 봉투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미전달 훈장 증서와
소액의 잔여 급여표,
그리고 짧은 전사 보고가 들어 있었다.
최종 방어선 유지 중 전사 추정.
시신 미회수.
지휘 계통 단절.
카시안의 시선이
그 문장 위에 멈춰 있었다.
이번엔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방 안이 조용한데도,
어디선가 오래된 금속 냄새와
젖은 흙 냄새가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연 건
한참 뒤였다.
“저 문장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적을 때 쓰는 겁니다.”
목소리는 평평했지만
너무 평평해서
오히려 잘 들렸다.
“끝까지 버티다
무너졌다는 뜻이죠.”
도로시는 장부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감시관님, 혹시….”
카시안은 봉투를 내려다본 채
말을 이었다.
“제7선봉대는
제 휘하였습니다.”
아델린은 눈을 들지 않았다.
대신 봉투를
하나 더 열었다.
또 같은 문장,
같은 붉은 표식.
그리고 다음 것도.
“몇 명입니까.”
그녀가 묻자
카시안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기록에 남은 건
열넷쯤 되겠군요.”
그의 손끝이 아주 가볍게
훈장 증서 가장자리를 눌렀다.
“실제론 더 많았고.”
그 말엔 어떤 농담도
붙지 않았다.
아델린은 그 짧은 문장 안에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공백이
얼마나 큰지 짐작했다.
기록에 남은 열넷.
기록 밖에서 사라진 더 많은 이름.
그리고 몇백 년 뒤에야
보상금 누수 명단 속에서
다시 불려 나오는 죽음들.
황궁은 늘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를 분류했지만,
이 방에선 그 분류가
얼마나 비겁했는지도
같이 드러났다.
도로시는 조심스럽게 장부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전몰기사 유족 보상 심의관이
이 묶음을 일부러 붙잡고 있었던 걸까요?”
“또는.”
아델린이 차갑게 말했다.
“누군가 그 직위를 써서
이 묶음을 오래 묶어 둔 거죠.”
그녀는 상자 바닥에 깔린
오래된 지급 집계표를 꺼냈다.
다른 건들과 달리
이 묶음엔 잔여 보상 재배정이라는
문구가 얇게 덧써져 있었다.
그리고 최종 인출란에는
이름 없는 서명 대신,
이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미세한 압흔이 남아 있었다.
“그림자 칸.”
아델린이 낮게 말했다.
카시안은 질문 없이
다른 봉투들을 뒤집어
추가 흔적을 확인했다.
“여기도 그림자 칸,
여긴 빈칸 둘이군.”
도로시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제 저도 알아듣게 됐어요.
그게 더 무서워.”
아델린은 묶음 전체를
날짜순으로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봉투를 펼치는 순간,
손이 잠깐 멈췄다.
사망 연도는 오래됐지만
다른 봉투보다
비교적 선명했다.
누군가 최근까지
여러 번 열었다 닫은 흔적이 있었다.
겉면 한쪽엔
붉은 점이 두 번 찍혀 있었다.
이름.
마티아스 렌
직위.
제7선봉대 부관
보상 상태.
유족 미수령
/ 재심 대기
/ 잔여금 유예 중
아델린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카시안은 이미
그 이름을 보고 있었다.
이번엔 얼굴에서
농담이 완전히 사라졌다.
도로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는 이름인가요?”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봉투를 받아 들고
안쪽 전사 보고를 펼쳤다.
종이가 바스라질 듯
얇게 떨렸다.
그 떨림이 봉투 탓인지,
손 탓인지
아델린은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마티아스는
제 부관이었습니다.”
방 안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카시안은 눈을 떼지 않은 채
덧붙였다.
“끝까지 남겠다고
한 놈이었죠.”
그는 아주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농담도 비꼼도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입안에서만 굴리던
문장을 꺼내듯 낮게 말했다.
“내가 살아서 돌아가면,
적어도 남은 사람들 몫은
제대로 챙기겠다고 했습니다.”
아델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약속이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 카시안 손에 들린
봉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전몰기사 보상금 누수는
더 이상 장부의 숫자가 아니었다.
카시안이 몇백 년 동안
웃음 밑에 묻어 둔
오래된 부채 하나가
다시 이름을 얻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델린은 봉투를
그에게서 빼앗지 않았다.
대신 바로 옆에 선 채
다음 문장을 조용히 읽었다.
“유족 접수 미완.
잔여금 유예.
재심 대기.”
카시안이 아주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무너지는 소리에 가까웠다.
“끝까지 남은 사람 몫을
챙기겠다고 했는데.”
아델린은 이번에도
섣부른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챙기죠.”
카시안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왔다.
“몇백 년 늦었는데도.”
“네.”
아델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늦었어도,
이름이 남아 있으면
끝난 건 아닙니다.”
그 문장은 위로보다
실무 지시에 가까운 어조였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정확했다.
카시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수 명단에
카시안의 옛 부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