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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지 못하는 이유 일러스트

자르지 못하는 이유

증거를 손에 넣는 것과,

증거가 가리키는 사람을

끝까지 살려 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황궁결계 최심부의 외곽 노드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아델린은 그 차이를

뼈에 새기듯 깨달았다.

수정판 위에

직원번호 0001은 1차 봉인축이라는

공식 문장이 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회랑 아래에서는

오래 잠들어 있던 갑옷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문장은 늦는다.

위기는 늘 더 빨랐다.

“나가죠.”

세린이 먼저 말했다.

“지금 여기서 더 측정하면,

증거는 남아도

사람은 안 남습니다.”

카시안은 이미

원판 가장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중앙 축에서 발을 뗀 뒤에도

최심부의 빛기둥들은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 번 정확히 맞물린 반응선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아델린은 수정판을

품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도로시 씨.

기록판 챙기세요.”

“제가 이럴 줄 알고

도망용 가방도 가져왔죠.”

도로시는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손은 빨랐다.

그녀는 회랑 쪽을 힐끗 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아,

저건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회랑 아래 어둠 속에서

갑옷 하나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 기사단 장비와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오래된 판금 위에

왕조 초기 문장이 반쯤 닳아 남아 있었고,

투구 틈새로는 사람 눈이 아니라

붉은 각인선만

희미하게 타고 있었다.

카시안이 아주 낮게 말했다.

“예비 기사단.”

세린이 수정봉을 들었다.

“완전 각성은 아닙니다.

명령선만 깨어난 상태예요.”

“그게 더 나쁩니다.”

카시안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사람이 남아 있으면

망설임이라도 있는데,

저건 명령만 남았으니까.”

첫 번째 갑옷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자가 이어졌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문제는 방향이었다.

그들은 최심부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증거를 확보한 곳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델린은 곧장

결론을 냈다.

“라우렌스가 입구를 읽었습니다.”

세린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혹은 애초에

이 길 자체를 알고 있었겠죠.”

카시안은 회랑 중앙으로

한 발 나섰다.

오래된 갑옷들의 붉은 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아델린은 직감했다.

저것들은 단순히

침입자를 향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기들과 같은 계통의 축을 향해

반응하고 있다.

“카시안,

뒤로.”

그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뒤로 물러서면

저것들이 팀장님 쪽으로 갑니다.”

“그럼 다른 길을 찾죠.”

“시간 없습니다.”

첫 번째 예비 기사가

검을 들었다.

녹이 슨 장식검처럼 보였지만,

칼날을 따라 흐르는 건

녹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명령 문자였다.

카시안이 검집도 없이

맨손으로 그 궤적을 흘려 막자,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결계가 찢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세린이 욕설을 삼켰다.

“최심부에서 싸우지 마십시오.

파형이 더 꼬입니다.”

“저도 압니다.”

카시안은 한 문장으로 대답하고,

두 번째 갑옷의 팔을 비틀어

회랑 바깥 난간 쪽으로 밀어냈다.

그런데도 그는 칼을

끝까지 내리치지 않았다.

파괴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끊는 순간

그 반동이 최심부에

튈 수 있다는 걸 아는 움직임이었다.

아델린은 그걸 보는 순간

이해했다.

이 남자는 지금

자기 몸 하나로 싸우는 게 아니었다.

황궁결계,

휴면 계약선,

오래된 기사단 잔재,

그리고 지금 막 증명된 봉인축까지

전부 감안하고 움직이고 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사람이 아니라

궁 전체가 다친다.

그녀는 수정판을

도로시에게 넘겼다.

“먼저 올라가세요.

이건 잃으면 안 됩니다.”

“그럼 팀장님은요.”

“저는 여기 남습니다.”

도로시는 반사적으로 반박하려다,

아델린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세린에게

기록판을 넘기며 말했다.

“실무관님,

이거 목숨보다 귀하게 들고 가세요.”

“원래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세린과 도로시가

후방 회랑으로 물러나는 사이,

세 번째 예비 기사가

카시안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카시안이 검날을 비틀어 흘렸지만,

그 반동이 원판 바닥 각인 하나를 스쳤다.

아래 빛줄기가 거칠게 흔들리며

황궁 전체 축선 모형이

한순간 붉게 뒤집혔다가 돌아왔다.

세린이 뒤에서 소리쳤다.

“더 늦으면

상부 회랑까지 반응이 번집니다.”

아델린은 회랑 벽면에 남은

유지 문장을 빠르게 읽었다.

축 관리자 입회,

강제 분리 금지,

현장 증인 우선 보호.

경고문뿐이다.

하지만 맨 아래

아주 흐린 선이 하나 더 있었다.

원축이 귀환을 명할 때

잔선은 일시 복종한다.

아델린이 바로

카시안을 봤다.

“귀환 명령.”

카시안도 동시에

같은 문장을 읽은 듯

고개를 들었다.

“팀장님,

한 번만 정확히 읽어 주십시오.”

아델린은 회랑 전체가 들리도록

또렷하게 읽었다.

“원축 명의.

예비 기사단 전원 귀환.

최심부 접근 정지.

외곽 노드 대기.”

그 순간 예비 기사들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완전히 멈추진 않았지만,

검날 끝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붉은 선이 카시안을 향해

흔들리다가,

오래된 습관처럼

한 발 반쯤 물러났다.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좋습니다.

지금 올라가죠.”

그들은 후퇴에 가까운 속도로

최심부를 빠져나왔다.

뒤쪽에서 갑옷들이

완전히 쫓아오진 않았지만,

귀환 명령이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었다.

계단을 두 층쯤 올라와

결계국 중간 제어실에 도착했을 때,

세린이 곧장 출입문을 닫고

봉인판을 세 겹으로 잠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모두가 잠깐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도로시가 벽에 기대며 말했다.

“이제 저는

급여 장부가 그리워졌어요.”

세린은 답 대신

수정판을 중앙 탁자 위에 펼쳤다.

최심부 실측 결과와

외곽 노드 이상 반응이

한 화면에 함께 떠 있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수준의 증거였다.

“지금 당장 상신해야 합니다.”

“네.”

아델린이 말했다.

“황제,

파면심사실,

결계국 수뇌부,

감찰조정팀까지 전부.”

도로시가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면 라우렌스도 보겠네요.”

“이미 알고 시작한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어실 바깥에서

느리고 정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세린이 얼굴을 굳혔다.

“너무 빠르군요.”

문이 열리기 전부터

아델린은 누군지 알았다.

라우렌스 헤일은 늘

상황이 완전히 기울기 직전,

가장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흠 없는 제복 차림으로

문 안으로 들어오더니,

잠긴 제어실과 수정판,

숨이 고르지 않은 카시안과 아델린을

차례로 훑었다.

“실무가 과감하군요.”

그가 말했다.

“결계국 최심부를

개인 조사처럼 쓰다니.”

세린이 먼저

차갑게 쏘아붙였다.

“비상 발령권으로

휴면 계약선을 건드린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라우렌스는 그녀를

잠깐 바라봤다.

“결계국 실무관이

정치적 추측을 하시네요.”

“추측이 아니라 파형입니다.”

아델린이 끊어 들어갔다.

그녀는 수정판을

탁자 중앙으로 돌렸다.

“최심부 실측 결과,

직원번호 0001은

황궁결계 1차 봉인축입니다.

그리고 동일 시각

외곽 휴면 계약선 일부가

조달-안정 복합 권한에 의해

인위적으로 기동했습니다.”

라우렌스는 수정판을

내려다보았다.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예상보다 조금 이른 결과를 본 사람의

표정뿐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자유롭게 둘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델린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이 사람은 끝까지 같은 방향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방향.

오래된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 하나를 필요한 축으로

고정해 두는 방향.

“반대로 읽으셨군요.”

“정말 그럴까요.”

라우렌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왕조는 누군가가 묶일 때 유지됩니다.

그게 군주든,

기사든,

실무자든.

자유는 늘 귀한 말이지만,

제국을 지탱한 적은 드물지요.”

아델린이 냉정하게 받았다.

“그래서 제 가족도

정리하셨습니까.

유지에 필요 없는 사람이라서.”

처음으로 대화가

완전히 멈췄다.

도로시가 숨을 삼켰고,

세린은 시선을 들었다.

카시안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델린의 오른쪽 뒤에서

아주 미세하게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라우렌스는 여전히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다만 답이

한 박자 늦었다.

“개인사를

이 자리에 섞는 건

현명하지 않습니다.”

“개인사였습니까.”

아델린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평평해졌다.

“가계 전체 인사 노선 정리.

대시종가 내규에 따른 추가 열람 금지.

헤일 가문 도장.

그 문서들이 다

개인사로 보이십니까.”

라우렌스 눈빛이

아주 얇게 차가워졌다.

“당신은 여전히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군요,

팀장.”

“아뇨.

이제는 압니다.”

아델린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이 말하는 큰 그림이란,

제국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부품으로 고정해 두는 방식이죠.

잘못을 덮기 위해 가족을 정리하고,

죽은 직위를 남겨 예산을 돌리고,

필요하면 잠든 충성까지

다시 깨우는 방식.”

카시안이 뒤에서

아주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헛숨에 가까웠다.

“이쯤 되면

거의 고백인데요.”

라우렌스는 그제야

카시안을 보았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자신이 예외라고 생각합니까.”

카시안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가벼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뇨.”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예외였던 적은 없죠.

늘 가장 오래 쓴 부품이었을 뿐.”

그 문장이 너무 쉽게 나와서,

오히려 아델린은

가슴 한가운데가 서늘해졌다.

그는 농담처럼

자기 문제를 축소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농담조차 아니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라우렌스는 마치 설득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러니 쓸모에 맞게

자리 잡으면 됩니다.

제국은 당신을 없앨 수 없고,

당신은 제국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안정적인 묶음을 택하는 것이

상식이지요.”

아델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선명하게

어떤 감정을 알아차렸다.

분노보다 먼저 온 것은 공포였다.

이 사람이 카시안을

다시 안정적인 묶음으로 만들면,

그는 정말로 살아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카시안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영원히 부품으로 남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델린은 그 가능성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정확한 문장을

마음속에서 들었다.

나는 이 사람을

살리고 싶다.

제국의 축으로가 아니라.

정리 불가한 위험물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오히려 머릿속이

차갑게 정리됐다.

“당신 방식으론 안 됩니다.”

아델린이 말했다.

라우렌스가 묻듯

고개를 기울였다.

“감정이 판단을 대신하는군요.”

“아뇨.”

그녀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제야 판단이 정확해진 겁니다.”

세린이 그 틈을 타

상신용 복제판을 세 부 더 뽑아냈다.

라우렌스가 손짓하자

뒤늦게 도착한 대응반 두 명이

문가에 섰다.

그러나 아직은 움직이지 못했다.

최심부 실측 결과가 이미

제어실 판 위에 떠 있었고,

세린 역시 결계국 실무관으로서

발언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라우렌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정확한 판단으로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해 보시죠.

외곽 노드 셋이 이미 깨어났고,

예비 기사단 계통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황제의 권한 조정안은

곧 통보될 겁니다.

그전에 당신이

모든 걸 막을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은 조롱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못 막으면,

결국 그가 준비한 방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확신.

세린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최심부 1차 축을 기준으로

역기동 억제는 가능합니다.

다만 시간이.”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수정판 하단 수치가

갑자기 튀었다.

북동 회랑 예비 기사단 대기선이

완전 활성 직전까지 치솟고 있었다.

도로시가 소리쳤다.

“이거 지금 올라와요.”

카시안은 즉시

문 쪽으로 돌아섰다.

“제가 막겠습니다.”

아델린이 반사적으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는 잠깐 놀란 듯

그녀 손을 내려다봤다.

아델린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회의장도,

서류 위도 아닌 곳에서,

너무 직접적으로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손을 놓지 않았다.

“혼자 가지 마세요.”

카시안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

지금은 그런 말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라서 하는 겁니다.”

아델린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나가면

저 사람은 그걸 바로 씁니다.

보라,

위험이 움직인다.

더 강하게 묶어야 한다고.”

라우렌스는 미소도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지금

둘 중 누가 먼저 무너질지

보고 있었다.

카시안은 아델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는지,

아주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방법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는 반박이 아니라

진짜 물음이 담겨 있었다.

시간을 벌 다른 방법이 있는지.

자기를 또 써서 막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있는지.

세린이 조용히 말했다.

“있긴 있습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최심부 1차 축을

임시 재고정하면,

외곽 노드 예비 기동을

일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아델린은 곧장

이해했다.

“재고정.”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해,

봉인축을 다시 더 강하게 묶는 겁니다.

오래된 충성선을

응급 봉합하는 방식이죠.”

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아델린은 그 말의 뜻을

너무 잘 알았다.

임시라고 해도,

더 강하게 묶는 순간

카시안이 그토록 싫어하던

왕좌의 검 쪽으로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

바로 지금까지

함께 부정해 온 방식이다.

라우렌스가 아주 작게 웃었다.

“보십시오.

결국 답은

오래된 계약 안에 있습니다.”

아델린은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올라왔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른 길을 찾겠다고.

절대 이 사람을

다시 묶지 않겠다고.

그러나 북동 회랑 수치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도로시가 들고 있는 기록판이

떨릴 정도였다.

카시안은 아델린 손에서 소매를

천천히 빼냈다.

도망치듯이도,

체념하듯이도 아닌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팀장님.”

아델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카시안이 한 걸음 가까이 와,

오직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말했다.

“그러니 나를 다시 묶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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