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 후보 제안
북방 전초 중앙 회의실은 승전 축하를 하기엔 너무 좁았다. 정면 창밖으로는 첫 말뚝선이 보였고, 오른쪽 벽에는 아직 피와 진흙 냄새가 빠지지 않은 외투들이 걸려 있었다. 왼쪽 문간 분류대에는 빈 이름표와 봉함끈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긴 탁자 가운데엔 어젯밤 우리가 다시 고쳐 쓴 현장 기록, 북방 부관이 가져온 승전 정본 사본, 새로 도착한 왕궁 편입 제안서가 서로 닿지 않게 놓였다.
사람들은 종이보다 뒤에 섰다. 세라는 탁자 정면, 검집을 의자 등받이에 걸친 채 창문 쪽 빛을 등지고 있었다. 브론은 왼쪽 분류대 옆에서 금속 상자와 저울의 간격을 재고 있었고, 미리엘은 촛불 가까운 안쪽에서 성도 봉함끈을 눈으로 쫓았다. 리에트는 문틀 그늘에 붙어 복도 발소리를 세었다. 나는 탁자 끝에 서서 문서 사이에 일부러 남겨 둔 빈 칸을 보았다.
위험은 칼이 아니라 칸에서 올라왔다. 빈 이름표 넷이 먼저 세워져 있었다.
`세라 벨로네.`
`브론 카르트.`
`미리엘 하센.`
`에이드리언 베일 외 동행 인원.`
마지막 줄의 `외`가 가장 작았다. 그런데 그 작은 글자가 우리 중 누구를 뒤로 밀지 이미 정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회의실 안 공기가 더 눌렸다. 왕궁 직속 사절이 먼저 들어왔다. 은실 문양이 들어간 긴 외투가 문턱을 스칠 때마다 빛이 짧게 흔들렸다. 그 뒤로 북방 부관, 기록관 둘, 군수실 서기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얼굴보다 탁자 위 물건 위치를 먼저 보았다. 세라 앞 검집, 브론 옆 금속 상자, 미리엘 손가락 밑 성도 양피, 내 앞 빈 공간. 순서를 세는 눈이었다.
사절은 인사를 길게 하지 않았다. 편입 제안서를 펼치는 손이 더 빨랐다. 첫 장은 일부러 여백이 넓었다. 굵은 글씨가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박혀 있었다.
`왕궁 숙소 제공.`
`왕실 명의 보호.`
`전담 보급 배정.`
`정식 포상 심사 우선 편입.`
`공인 영웅 후보단 예비 등록.`
북방 부관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전초 공적을 정당하게 보전할 길이다. 중앙이 직접 챙기면 소문도, 시비도, 뒤늦은 말바꾸기도 줄어든다."
좋은 말만 골라 놓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말보다 손을 보았다. 사절은 첫 장을 펼쳐 보이면서도 마지막 장 모서리를 엄지로 눌러 놓고 있었다. 기록관 둘은 아직 아무도 진술하지 않았는데 이미 새 장부 첫 칸에 선을 그었다. 축하라면 박수부터 나와야 했다. 지금은 보관 칸부터 열렸다.
세라는 첫 장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선은 큰 특전을 건너뛰고 아래에 붙은 작은 분류표로 내려갔다.
`반응 무구 보유자 - 세라 벨로네.`
`현장 배치 참고 - 에이드리언 베일.`
`군수 자료 동반 - 브론 카르트.`
`성성력 판정 협조 - 미리엘 하센.`
`외부 증언 대조 가능 - 리에트 아르셸.`
브론이 자기 줄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동반이라. 내가 자료의 짐꾼이 됐군."
그는 웃지 않았다. 금속을 읽은 사람을 자료와 붙여 부르면, 나중엔 자료만 남고 판독한 손은 지워진다. 브론이 화를 낸 건 대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읽은 북방 고정 장치의 이름이 군수실 말로 다시 적힐 냄새를 맡은 것이다.
리에트는 문간에서 낮게 말했다.
"내 이름은 대조 가능. 필요할 때만 꺼내고, 필요 없으면 늦게 부르기 좋겠네."
기록관 하나가 펜끝을 세웠다. 리에트 말은 적지 않았다. 대신 `외부 증언` 칸에 작은 점만 찍었다. 말을 들은 흔적이 아니라, 나중에 부를 수 있다는 표시였다.
세라는 자기 이름 옆 붉은 끈을 집어 들었다. 끈 끝은 아직 봉하지 않았지만, 이미 어딘가를 묶은 것처럼 팽팽했다.
"편입이면 같이 들어가는 거지. 왜 사람마다 묶는 말이 다르죠?"
사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온도 없이 반듯했다.
"역할이 분명할수록 보호가 쉽다. 왕궁 안에서는 특히 그렇다."
보호. 회의실 안에 있던 모두가 그 말을 다르게 들었다. 세라는 이름값을 미끼로 세우는 말로, 브론은 자료를 빼앗는 말로, 미리엘은 성도 문서를 봉하는 말로, 리에트는 뒤로 밀리는 말로 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반나절 늦게 움직이게 만드는 문장으로 들었다.
나는 마지막 장을 가리켰다.
"그 장부터 보겠습니다."
사절의 눈이 처음으로 나를 정확히 향했다.
"첫 장을 다 읽기도 전이다."
"좋은 대우는 이미 보였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줄은 뒤에 있겠죠."
북방 부관이 헛기침을 했다. 사절은 잠시 나를 보다가 마지막 장을 넘겼다. 작은 글씨가 줄 맞춰 쏟아졌다.
`단독 조사 금지.`
`반응 물품 무단 열람 금지.`
`후속 현장 이동 시 왕실 승인 필수.`
`공적 관련 발언은 기록관 입회하에만 허용.`
`왕궁 체류 중 외부 접촉 즉시 보고.`
`소지 자료 사전 제출 및 임시 보관.`
문장은 짧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북벽 아래에서 우리는 누가 어느 방향을 볼지 반걸음 단위로 정해 살았다. 판석 통로 앞에서는 브론이 금속 결을 읽고, 미리엘이 성성력 반응이 사람을 감싸는지 바닥으로 내려가는지 구분했고, 리에트가 바깥 추적 눈을 끊었다. 그런 판단은 현장에서 먼저 움직여야만 나온다. 그런데 여기선 모든 움직임 앞에 승인, 입회, 제출, 보관이 붙었다.
나는 한 줄을 짚었다.
"후속 현장 이동 시 왕실 승인 필수. 이게 붙으면 다음 문턱은 현장에서 못 엽니다. 먼저 발을 놓아 봐야 읽히는 자리가 있는데, 그걸 왕궁 복도에서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사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무질서한 탐색은 더 큰 손실을 부른다."
"우리가 북벽에서 산 건 무질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창밖 첫 말뚝선을 보았다. 해가 기울며 말뚝 끝에 남은 쇠테만 흐리게 빛났다.
"누가 먼저 어느 틈을 막고, 누가 뒤로 빠지고, 어느 길을 일부러 비워 둘지 제때 골랐기 때문입니다. 그 판단을 전부 승인 밑으로 넣으면 다음엔 늦습니다."
세라가 바로 다른 줄을 짚었다.
"공적 관련 발언은 기록관 입회하에만 허용. 그럼 내가 북벽에서 검집이 어디서 울렸는지도 혼자 말하지 못하게 되는 거네."
"정본은 정확해야 한다."
사절 말이 끝나자 리에트가 문틈에서 몸을 뗐다. 복도 바닥을 밟는 소리조차 낮았다.
"정확한 건 현장에 있었고, 정본은 벌써 한번 우리를 잘랐지."
기록관 펜끝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도 문장은 적지 않았다. 대신 리에트 옆 칸에 작은 괄호가 생겼다. 말의 뜻보다 말한 사람의 위치를 표시하는 손이었다.
미리엘은 아직 한마디도 보태지 않았다. 그녀는 왕궁 편입안보다 그 밑에 밀려 들어온 얇은 양피 묶음을 보고 있었다. 성도 봉함끈이 감긴 별첨이었다. 회색 종루 하층에서 음성 결정 좌표를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조용하지만, 손끝이 종이 모서리를 너무 세게 눌러 하얗게 변했다.
사절은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양피 묶음을 앞으로 밀었다.
"성도 쪽과 충돌을 피하기 위한 협조 각서다. 민감 물품과 판정문이 섞였으니 실무 조율이 필요하다."
"실무가 제일 먼저 문을 닫을 때가 많죠."
미리엘은 봉함끈을 풀었다. 얇은 양피가 펼쳐지며 건조한 소리를 냈다. 첫 장에는 왕궁과 성도가 서로를 존중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둘째 장부터 글자가 작아졌다. 셋째 장 아래쪽에서 미리엘의 숨이 아주 짧게 멈췄다.
`봉인 서고 접근은 상위 허가자 동행 시에만 허용.`
`문서고 하층 대체 분류열 열람 금지.`
`성성력 판정문 독자 보관 금지.`
회의실 안 촛불이 한번 흔들렸다. 누가 문을 연 것도 아닌데 불꽃 끝이 기울었다. 그 줄들이 북방 전초 정리와는 거리가 멀어서였다. 전초 승전을 기록하려고 왔다면서 성도 문서고 하층을 먼저 막는다. 그건 이미 다음 길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벌써 잘라 놨네요."
미리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건 북방 정리안이 아니에요. 성도 문서고 쪽 길부터 막는 문서예요."
브론이 고개를 들었다.
"왕궁 포상 자리에 왜 서고 이야기가 끼어 있지?"
미리엘은 별첨 끝 주석을 손끝으로 밀어 보였다. 작은 기호 셋과 긴 선 하나가 묶인 표기였다. 회색 종루 하층 음성 결정 좌표 끝에서 보았던 배열과 닮아 있었다. 완전히 같은 표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체계 안에서 자란 표시처럼, 짧은 선의 방향과 길게 뻗은 끝선의 버릇이 같았다.
"이거, 종루에서 봤어요."
기록관 한 명의 펜끝이 멈췄다. 아주 짧았다. 사절은 그보다 빠르게 말을 잘랐다.
"그런 추정은 왕궁 도착 뒤 검토한다."
검토. 또 늦추는 말이었다.
나는 사절의 손을 보았다. 그는 별첨을 다시 접으려는 듯 손바닥을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세라의 검집 끝이 먼저 탁자 아래쪽을 가볍게 쳤다. 작고 낮은 소리였다. 회의실 안 모두가 들을 만큼은 충분했다.
세라는 사절을 향해 말했다.
"그 양피는 아직 안 접어."
"성도 문서는—"
"내 이름을 첫 장 앞줄에 올렸죠. 그럼 그 앞줄에 오른 내가 보는 동안은 접지 마."
사절의 입가가 굳었다. 세라는 처음으로 그들이 내민 이름값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수락이 아니었다. 방패였다. 자기 이름을 앞세워 미리엘 손의 양피를 조금 더 오래 펼쳐 두는 선택이었다.
브론은 그 틈에 별첨 아래쪽 기호를 자기 손바닥 안쪽에 손톱으로 눌러 외웠다. 리에트는 문간에서 복도 쪽을 보며 속삭였다.
"오른쪽 끝에 군수실 둘. 왼쪽 모서리엔 귀족가 수행원 셋. 방 안 말이 밖으로 새는지 듣고 있어."
현장 위기는 칼 없이 다가왔다. 우리가 무엇을 읽었는지 아는 순간, 각 세력은 자기 줄을 당길 것이다. 왕궁은 승인으로, 성도는 봉함으로, 군수실은 보관으로, 귀족가는 이름값으로. 한쪽만 막으면 다른 쪽에서 손이 들어온다.
나는 탁자 위 빈 종이를 당겼다. 그 위에 큰 글씨로 네 칸을 나눴다.
`받을 말.`
`넘기지 않을 원본.`
`외부에 흘릴 미끼.`
`지금 바로 숨길 줄.`
사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을 하는 거지?"
"왕궁 양식에 맞춰 정리합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쓸 양식이었다.
나는 먼저 `받을 말` 아래에 `공인 후보 편입 명분`, `왕궁 이동권`, `세라 앞줄 이름이 벌어 줄 시간`을 적었다. 브론이 바로 `넘기지 않을 원본` 칸에 손을 뻗었다.
"북방 고정 장치 계열 이름 원문. 내 손에서 바로 안 나간다."
미리엘도 이어 적었다.
"문서고 하층 표기 해석 전부. 성성력 판정문 원본도요."
리에트가 문간에서 말했다.
"외부 증언은 한 번에 다 내지 마. 내가 늦게 불릴수록 늦게 꺼낼 말도 있어야 해."
세라는 마지막으로 `외부에 흘릴 미끼` 칸을 봤다.
"내 이름은 흘려도 돼."
브론이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을 네 입으로 하다니."
"내 이름을 저들이 쓰게 둘 수밖에 없다면, 어느 방향으로 쓰일지는 내가 고른다."
세라는 붉은 끈을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묶지 않고 손가락 사이에 걸었다.
"앞줄은 내가 선다. 대신 그 앞줄 아래에 너희를 밀어 넣는 건 안 둬."
그 말이 회의실 한가운데 박혔다. 세라는 더는 칭찬을 거절하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칭찬이 덫이라면 그 덫의 첫 줄을 잡아 비틀겠다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얻은 첫 선택이었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끌려가며 잃는 것보다, 끌려가는 척하며 잡는 시간이 더 많을 수 있다.
사절은 제안서 첫 장을 천천히 접었다.
"결정은 왕궁 이동 뒤 정식 절차에서 받겠다. 오늘 밤 안으로 이동 준비를 마친다."
"사람과 물건을 따로 실을 겁니까?" 내가 물었다.
군수실 서기가 먼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망설임만으로도 충분했다.
사절이 말했다.
"필요한 보관 절차가 있다."
브론이 웃음기 없이 말했다.
"그럼 먼저 훔친다고 말하지."
북방 부관이 얼굴을 굳혔다.
"말을 가려라."
브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금속 상자를 자기 발치로 당겨 놓았다. 세라도 의자 등받이의 검집을 들어 자기 허리에 다시 묶었다. 미리엘은 성도 별첨을 접는 대신 얇은 종이 한 장을 아래에 덧대 기호 부분만 그늘지게 가렸다. 리에트는 문간에서 오른손을 뒤로 보냈다. 손가락 둘이 펴졌다. 복도에 더 들어온 사람이 둘이라는 뜻이었다.
회의실은 더 이상 회의실이 아니었다. 각 세력이 자기 손을 조금씩 안쪽으로 넣어 보는 좁은 전장으로 바뀌었다. 사절은 왕궁 이름을 앞세웠고, 성도 양피는 미리엘의 손을 노렸고, 군수실 상자는 브론의 자료를 따라 움직였고, 귀족가 수행원들은 세라 혼자 응접칸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 나는 그 움직임을 한 줄로 묶었다. 지금 당장 싸우면 문이 닫힌다. 지금 전부 내주면 다음 문을 못 찾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둘 사이에서 가장 늦게 끊길 줄을 고르는 것이었다.
사절 일행이 물러간 뒤에도 회의실 문은 곧바로 닫히지 않았다. 복도 오른쪽에서 벨로네 가문 수행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장 단추가 달린 장갑을 끼고, 응접칸 쪽을 향해 몸을 살짝 돌린 자세였다. 세라를 데려가려는 위치였다. 이번엔 왕궁 문장도 성도 봉함도 아니었다. 이름값이었다.
응접칸은 회의실보다 따뜻해 보였다. 전초 안에서 그 방에만 벽등이 많았고, 문틀에는 황동 장식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놓인 의자 배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면 가운데 넓은 의자 하나, 그보다 낮은 의자 둘, 문밖 대기 자리 셋. 누가 중심에 앉고 누가 기대 서야 하는지까지 이미 정해 둔 방이었다.
벨로네 가문 전달인은 세라를 보자마자 반쯤 일어났다.
"세라 아가씨. 왕실 공인 후보단 예비 편입은 기회입니다. 먼저 이름을 굳혀야 북방 공적도 안전합니다."
세라는 문턱 안쪽에 한 발만 들였다. 검집은 허리 옆에 있었고, 손은 손잡이에 닿지 않았다. 싸우러 들어간 게 아니라 배치를 읽으러 들어간 몸이었다.
"내 이름만 굳으면 다른 건 안전해지나?"
전달인은 준비해 둔 듯 부드럽게 답했다.
"앞줄 이름이 살아 있어야 뒤줄 공도 따라옵니다. 실무 인력들 몫은 나중에 얼마든지 챙길 수 있어요."
문밖에서 브론 숨이 거칠게 끊겼다. 리에트는 응접칸 안이 아니라 밖 수행원 둘을 보고 있었다. 그 둘은 우리 쪽을 의식하지 못한 채 낮게 속삭였다.
"왕궁 들어가면 외부 증언은 천천히 다뤄도 된다."
"중앙 검인만 먼저 넘기면 돼."
리에트가 그림자에서 말했다.
"난 이미 늦게 부를 말로 정해졌군."
전달인 입가의 웃음이 아주 잠깐 내려앉았다. 수행원 둘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세라는 그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앞줄 이름이 살아 있으면 뒤줄 공도 따라온다. 그 말을 믿고 앉아 있으면 결국 뒤줄 사람들은 전부 장부 밑으로 밀리겠지."
"정치는 원래 복잡한 이야기를 한 얼굴로—"
"그만."
세라가 잘랐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응접칸 안 벽등 불빛이 흔들린 듯했다.
"내가 앞줄에 서는 건 내가 정한다. 누구에게 기대 설지도 내가 정해."
그녀는 봉서 위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대신 돌아서기 직전 검집 끝으로 봉서 모서리를 아주 조금 밀어냈다. 거절장처럼 밀어낸 것도 아니고, 수락처럼 품은 것도 아니었다. 네가 만든 자리 한가운데 얌전히 앉진 않겠다는 힘이었다.
응접칸을 나와 회의실로 돌아가는 복도에는 짐수레 두 대가 서 있었다. 하나에는 파란 밀랍이 붙은 왕궁 보관 상자가 실렸고, 다른 하나에는 군수실 검인표가 매달렸다. 아직 빈 수레였다. 그런데 수레 옆 병사들은 이미 우리 쪽 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과 물건을 따로 실을 준비가 눈으로 먼저 보였다.
브론은 자기 가죽 가방 끈을 더 짧게 묶었다.
"내 자료가 저 수레에 먼저 올라가면 끝이야. 다시 받더라도 이미 저쪽 장부 말로 돌아온다."
미리엘은 별첨 양피를 옷 안쪽에 넣지 않았다. 일부러 겉에 보이는 서류철 사이에 끼웠다. 대신 기호가 있는 얇은 종이는 손목 붕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겉으로는 성도 문서를 잘 들고 있는 사람, 안쪽으론 핵심 줄만 따로 숨긴 사람. 그녀답게 조용하고 정확한 선택이었다.
리에트는 복도 끝 창가에 섰다. 밖으로는 경비 교대가 보였고, 마당 건너편엔 왕궁 마차 축이 점검되고 있었다.
"귀족가 수행원은 세라를, 군수실은 브론 가방을, 성도 서기는 미리엘 손목을 보고 있어. 에이드리언, 네 쪽은 아직 비어 있어."
"비어 있는 칸이 제일 위험하지."
나는 내 기록 묶음을 품 안쪽으로 옮겼다. 현장 배치 판단은 물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빼앗기는 순간도 늦게 알아차린다. 나중에 `참고` 한 줄로 적히고 나면, 그 판단을 누가 언제 했는지 되찾기 어렵다.
밤이 내려앉자 우리는 숙영칸 안쪽 작은 탁자로 모였다. 창문은 북쪽으로 나 있었고, 문은 남쪽 복도를 향했다. 문 앞에는 리에트가 서고, 창 아래에는 브론 가방이 놓였고, 촛불 가까운 안쪽에는 미리엘의 서류철이 펼쳐졌다. 세라는 탁자 오른쪽에 서서 검집을 세워 두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한 번에 종이를 덮을 수 있는 위치였다.
탁자 위엔 네 얼굴을 한 압박이 놓였다. 왕궁 편입 제안서. 성도 협조 각서. 벨로네 가문 봉서. 군수실 임시 보관 통지.
나는 빈 종이를 다시 펼쳤다. 회의실에서 급히 나눈 네 칸 아래에 더 짧은 줄을 덧붙였다.
`받을 것.`
`안 줄 것.`
`늦게 줄 것.`
`끝까지 같이 볼 것.`
세라가 먼저 말했다.
"받을 것. 후보 편입 명분. 왕궁 이동권. 내 이름이 벌어 줄 시간."
브론이 이어 적었다.
"안 줄 것. 북방 고정 장치 계열 이름 원문. 금속 약호 전체. 군수실이 먼저 이름 붙일 틈."
미리엘은 성도 별첨 끝 주석을 손끝으로 눌렀다.
"문서고 하층 표기 해석. 성성력 판정문 원본. 그리고 이 기호가 종루 좌표와 닿는다는 말은 아직 전부 내지 않아요."
리에트가 문밖 발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늦게 줄 것. 외부 증언. 내가 늦게 불릴수록 저쪽도 내가 뭘 봤는지 늦게 알아야 해."
마지막 줄은 내가 적었다.
`끝까지 같이 볼 것 - 다음 문턱에서 누가 어느 이름으로 불리는지.`
브론이 그 줄을 보고 혀를 찼다.
"이름 부르는 순서까지 싸움이라니. 피곤한 나라군."
"던전에서도 순서가 생사였잖아."
내가 말했다.
"여긴 칼 대신 호명 순서가 먼저 움직일 뿐이야. 세라가 앞줄, 브론이 군수, 미리엘이 성도, 리에트가 외부 증언, 나는 참고. 그 순서대로 대답하면 저쪽이 원하는 장부가 완성된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순서를 바꿔야 해."
세라는 검집 끝을 탁자에 가볍게 댔다.
"왕궁에 가면 내가 먼저 말한다."
"무슨 말을?"
"편입을 거절하지 않는다고. 대신 전원 동석, 물품 단독 보관 금지, 성도 별첨 원문 대조 전 서명 보류."
브론이 눈썹을 올렸다.
"꽤 귀족답게 더러운 조건을 거는군."
"귀족 말투로 덫을 걸 거면, 나도 그 말투를 써야지."
세라 말에 아주 짧은 웃음이 돌았다. 피곤해서 나온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 그 짧은 틈이 우리를 조금 붙들었다. 따뜻한 믿음이 아니라, 각자 어디서 물러서지 않을지 아는 합의였다.
미리엘이 종루 메모와 성도 별첨을 나란히 놓았다. 기호 셋과 긴 선 하나가 촛불 아래에 겹쳐 보였다.
"정확히 같은 표식은 아니에요. 하지만 분류하는 습관이 같아요. 지운 이름 대신 줄을 남기는 방식. 성도 문서고 하층에 그 원본이 있으면, 북방 전초와 회색 종루가 왜 같은 손놀림으로 묶였는지 볼 수 있어요."
브론이 자기 약호 메모 절반을 접어 구두 밑창 안쪽에 밀어 넣었다.
"내 쪽 장비 이름도 거기 걸렸겠군. 좋아. 마음에 안 드는 길일수록 먼저 봐야지."
리에트는 창밖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마차는 둘. 앞쪽은 사람용, 뒤쪽은 보관용. 경비는 앞쪽보다 뒤쪽이 많아. 사람보다 상자를 더 지키겠다는 뜻이지."
그 말에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왕궁이 우리를 보호하려 한다면 사람 쪽 경비가 더 많아야 했다. 그런데 상자를 더 지킨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저들은 우리를 데려가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해석의 조각을 먼저 나누어 싣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짐을 다시 꾸리는 순서부터 바꿨다. 먼저 겉가방을 세 개 만들었다. 세라 가방에는 왕궁 제안서 사본과 깨끗한 붕대, 일부러 눈에 띄는 붉은 끈을 넣었다. 누가 열어도 `앞줄 후보`에게 어울릴 물건만 보이게 했다. 브론 가방 겉칸에는 부러진 못과 수량표를 넣고, 진짜 약호가 적힌 얇은 종이는 가죽 끈 안쪽 심지 밑으로 밀었다. 미리엘은 성도 서류철 겉장에 협조 각서 첫 장을 끼웠지만, 하층 표기와 종루 기호가 겹치는 조각은 손목 붕대 안쪽, 피부에 닿는 쪽으로 접어 넣었다.
리에트는 창 아래 빈 물통 둘을 바꿔 놓았다. 하나는 문가 가까이에 두고, 하나는 침상 밑 그림자에 숨겼다. 누가 급히 들이닥치면 문가 물통을 발끝으로 차서 소리를 내고, 그 틈에 침상 밑 물통 안쪽에 감춘 빈 봉서들을 빼내기 위한 배치였다. 그녀는 말없이 세 번 손가락을 접었다. 문이 열릴 때 버릴 것, 품 안에 넣을 것, 그대로 보이게 둘 것. 세 갈래 순서였다.
세라는 그 움직임을 다 본 뒤에야 자기 외투 끈을 조였다. 왕궁 사절 앞에 설 때 먼지 묻은 전초 외투를 그대로 입겠다는 뜻이었다. 귀족가가 원하는 반듯한 앞줄 얼굴로 들어가되, 북벽에서 굴렀던 흔적까지 지우진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나는 그 선택을 빈 종이에 짧게 적었다. `세라 - 앞줄 수락, 현장 흔적 유지.` 나중에 누가 세라를 단정한 왕궁 후보로만 적으려 들 때, 이 줄이 반박을 시작한다.
브론은 내가 적는 걸 보고 자기 몫을 덧붙였다. `군수 자료 제출 전 현장 대조 요구.` 미리엘은 그 아래에 `성도 별첨 원문 열람 전 판정문 보류`라고 썼다. 리에트는 오래 망설이다가 `외부 증언은 마지막에, 그러나 혼자 하지 않음`이라고 적었다. 그 줄을 보는 순간 방 안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모두가 뭔가를 숨기기로 한 게 아니었다. 숨길 것과 함께 말할 사람을 정한 것이다.
나는 빈 종이 아래에 마지막 줄을 적었다.
`다음 싸움터: 성도 문서고 원본 줄.`
세라가 그 글자를 오래 보았다. 검집은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북벽 아래에서 검집이 울렸을 때보다 더 흔들리지 않았다.
"왕궁에 가더라도, 저 줄부터 본다."
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지선부터 걸었다는 건 거기가 제일 아픈 자리라는 뜻이에요."
리에트가 문간에서 짧게 말했다.
"그럼 앞줄 얼굴은 미끼고, 뒷줄 증언은 칼집이군."
브론이 가방끈을 단단히 묶었다.
"군수 자료는 미끼에 절대 안 넣는다. 그건 내 쪽 칼날이야."
나는 편입 제안서 마지막 장을 접었다. 특전 문구가 겉으로 나오고, 작은 금지선이 안쪽에 숨도록 접었다. 밖에서 보면 우리가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안쪽에선 저들이 제일 먼저 가린 길이 드러난다.
복도에서 짐수레 바퀴가 삐걱거렸다. 왕궁으로 향할 준비가 전초 전체를 조금씩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탁자 위에 남은 줄들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싸움은 북벽 아래에서 끝나지 않았다. 검과 장치 대신 이름, 보관함, 승인, 증언 순서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이다.
나는 종이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저들이 제일 먼저 막은 길부터 연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금지된 서고의 이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