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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 후보 제안

늦은 오후의 북방 전초 중앙 회의실은 전투 뒤보다 더 조용했다. 긴 탁자 위엔 종이 두 무더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창문에서 기울어 들어온 빛이 푸른 밀랍 가장자리만 차갑게 번들거렸다. 한쪽은 막 읽힌 승전 정본 사본이었다. 다른 쪽은 아직 접힌 새 편입 제안서였다. 두 문서 사이엔 짧은 칼 대신 인장 세 개와 봉함끈 한 타래가 먼저 놓여 있었다.

사람을 부르기 전에 줄부터 맞춰 두는 자리였다.

탁자 끝 작은 분류대엔 이름표 넷이 세워져 있었다. 세라 벨로네. 브론 카르트. 미리엘 하센. 에이드리언 베일 외 동행 인원.

`외.`

그 한 글자만으로도 칸막이는 끝났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은 채 분류대를 훑었다. 세라 이름표 옆엔 붉은 끈이, 브론 이름표 옆엔 작은 금속 저울이, 미리엘 이름표 옆엔 얇은 성도 양피 한 장이 먼저 놓여 있었다. 내 칸 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물건도, 잉크도, 무게도 아닌 자리는 늘 제일 늦게 불린다.

문이 열렸다.

왕궁 직속 사절이 먼저 들어오고, 북방 부관 하나와 기록관 둘이 그 뒤를 이었다. 사절 외투 끝 은실 문양이 회의실 불빛을 잠깐 긁고 지나갔다. 그는 탁자 앞에 서자마자 편입 제안서를 펼쳤다. 첫 장은 일부러 넓게 뽑은 듯 여백이 많았다.

`왕궁 숙소 제공.`

`왕실 명의 보호.`

`전담 보급선 배정.`

`정식 포상 심사 우선 편입.`

`공인 영웅 후보단 예비 등록.`

북방 부관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전초 공적을 정당하게 보전할 길입니다. 왕국도, 기사단도, 중앙 군수선도 같은 뜻으로 움직이게 되지요."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같은 뜻이라. 그 말부터 수상하군."

사절은 브론 쪽을 보지 않았다. 시선은 세라 앞에 멈췄고, 목소리는 회의실 안쪽 벽에 박히듯 평평했다.

"세라 벨로네. 북방 전초 승전과 반응 무구 확인이 함께 올라갔다. 중앙은 빠른 정리를 원한다."

세라는 첫 장을 내려다보다가 화려한 특전 문구가 아니라 아래 붙은 얇은 칸표를 먼저 봤다. 큰 글씨 밑에 이미 작은 분류가 달려 있었다.

`반응 무구 보유자 - 세라 벨로네.`

`현장 배치 참고 - 에이드리언 베일.`

`군수 자료 동반 - 브론 카르트.`

`성성력 판정 협조 - 미리엘 하센.`

리에트는 회의실 문간 그늘에 기대 선 채 눈만 좁혔다.

"특전표가 아니라 짐표네."

사절이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왕궁 안에선 역할이 분명할수록 보호가 쉬워진다."

북벽 아래 말뚝선에서도, 감시탑 아래 판석 통로 입구에서도 저런 말은 없었다. 거긴 누가 어느 줄을 먼저 지키느냐가 먼저였다. 여긴 반대였다. 살아남은 순서를 묻기 전에 묶을 순서부터 정한다.

세라가 첫 장을 덮지 않은 채 물었다.

"편입이면 같이 올리는 거지. 왜 사람마다 이름이 다르게 붙지?"

북방 부관이 미소를 흉내 냈다.

"실무상 필요한 표기입니다. 공적은 함께 가더라도 관리 항목은 나눠야 하니까요."

"관리."

세라는 그 단어를 그대로 받아 읽었다. 칭찬문이 아니라 장부 냄새가 나는 말이었다.

브론은 자기 줄을 검지로 톡 쳤다.

"군수 자료 동반? 자료를 들고 들어가는 순간 내 손을 떠난다는 뜻이군."

미리엘은 아직 말이 없었다. 그녀는 제안서 첫 장보다 뒤에 얹힌 별첨 묶음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 성도 봉함끈이 달린 얇은 양피였다. 회색 종루 하층 기록을 처음 읽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조용한데, 손끝만 더 세게 눌린다.

사절이 다음 장을 넘겼다.

"왕궁 숙소는 별채 하나를 통째로 내준다. 이동 중 호위도 붙는다. 후보단 예비 등록이 끝나면 이후 북방 공적과 관련한 외부 시비도 중앙이 막는다."

겉으론 좋은 말뿐이었다. 그런데 좋은 말 밑엔 늘 작은 줄이 붙는다. 나는 탁자 위로 몸을 조금 기울여 마지막 장 모서리를 먼저 봤다. 글자가 촘촘했다. 여백이 없었다. 여기서부터가 본문이다.

"그 장부터 보죠."

사절이 나를 봤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왜지?"

"좋은 말은 이미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한 박자 늦게 마지막 장을 넘겼다.

작은 글씨가 줄 맞춰 쏟아졌다.

`단독 조사 금지.`

`반응 물품 무단 열람 금지.`

`후속 현장 이동 시 왕실 승인 필수.`

`공적 관련 발언은 기록관 입회 하 허용.`

`외부 접촉 시 즉시 보고.`

`왕궁 체류 중 소지 자료 사전 제출.`

작은 줄 아래엔 더 작은 칸이 붙어 있었다. 누구 서명, 누구 입회, 어느 기록관 날인, 어느 보관함 예치. 파란 표찰은 숙소 배정 칸에만 걸려 있었고, 검은 표찰은 이동 승인 줄에, 붉은 실선은 물품 제출 칸에만 달려 있었다. 좋은 대우처럼 보이는 문장은 위에 넓게 눕혀 두고, 실제로 사람을 붙드는 줄은 아래에서 빽빽하게 엮어 놓은 셈이었다. 오늘 밤 잠자리를 어디로 주는지보다 내일 새벽 어떤 손이 우리 짐을 먼저 가져갈지가 이미 적혀 있었다.

브론이 의자를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거 봐라.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라 손발을 묶는 거지."

나는 마지막 장을 끝까지 읽었다. 글은 짧았지만 줄마다 한 가지씩 느려지는 방식이 들어 있었다. 북벽 첫 말뚝선과 판석 통로 입구에서 우리가 따로 움직이며 간격을 쟀던 판단은 이런 문장 하나면 전부 탁자 위 승인을 기다려야 한다. 현장에선 반걸음 늦으면 무너지던 걸, 여기선 반나절 늦추는 줄로 바꿔 놓는다.

"후속 현장 이동 시 왕실 승인 필수."

나는 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게 붙으면 다음 문턱은 현장에서 못 엽니다. 먼저 움직여 봐야 읽히는 자리가 있는데, 그걸 전부 왕궁 복도에서 늦추겠다는 뜻이잖습니까."

사절은 감정 없는 얼굴로 답했다.

"무질서한 탐색은 더 큰 손실을 부른다."

"우리가 북벽 아래에서 산 건 질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회의실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워졌다.

"누가 먼저 어디를 지킬지 제때 고른 덕분이었죠. 그 판단을 다 승인 밑으로 넣으면 다음엔 늦습니다."

세라도 곧바로 다른 줄을 짚었다.

"공적 관련 발언은 기록관 입회 하 허용. 그럼 내가 북벽에서 검집이 어디서 울렸는지도 마음대로 못 말하게 만드는 거네."

"정본은 정확해야 하니까."

사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에트가 웃음기 없는 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건 현장이고, 정본은 늘 나중에 깎이더군."

사절 옆 기록관 하나가 바로 펜대를 세웠다. 말보다 반응을 적는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보며 물었다.

"그 줄도 적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종이 위 칸만 한 칸 옮겼다.

***

회의실 창밖으로 북벽 능선이 기울어 보였다. 어제 우리가 병사 둘을 다시 세웠던 첫 말뚝선은 여기서도 희미하게 보였다. 탁자 위 작은 글씨를 읽을수록 그 말뚝선이 더 또렷해졌다. 북벽 아래에서 한 박자 늦으면 사람이 다쳤다. 그런데 여긴 늦게 만드는 문장들만 빼곡했다.

브론이 마지막 장을 빼앗듯 집어 들고 자기 칸을 다시 읽었다.

"군수 자료 동반." 그가 혀를 찼다. "자료는 내가 들고 들어가고, 장부는 저쪽이 쓰고, 이름은 나중에 자기들 식으로 붙이겠다는 말이지."

미리엘이 별첨 묶음을 손에 들었다.

"이건 왕궁안이 아니라 성도 손이 더 길게 닿는 줄이네요."

사절은 그녀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

"협조 각서다. 왕궁과 성도의 마찰을 줄이기 위한 실무 문서일 뿐이야."

"실무 문서가 늘 가장 먼저 길을 자르죠."

미리엘은 그 자리에서 봉함끈을 풀었다. 회색 띠가 풀리며 양피가 얇은 소리를 냈다. 그녀가 첫 줄을 읽을 때는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 장 아래쪽 작은 주석에 닿자 손끝이 멈췄다.

`봉인 서고 접근은 상위 허가자 동행 시에만 허용.`

`문서고 하층 대체 분류열 열람 금지.`

`성성력 판정문 독자 보관 금지.`

미리엘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벌써 잘라 놨네."

나는 바로 물었다.

"뭘."

그녀는 양피 끝을 더 세게 눌렀다.

"북방 정리안이 아니에요. 다음 길이요. 성도 문서고 들어갈 줄부터."

사절이 말을 받았다.

"민감 구역 접근은 당연히 관리되어야 한다."

브론이 코웃음을 삼켰다.

"이름만 번듯하지. 뜻은 다 같군."

미리엘은 별첨 아래쪽 주석을 한 줄 더 가리켰다.

작은 기호 셋과 긴 선 하나가 묶인 표기였다. 회색 종루 하층 음성 기록 봉함에서 보았던 좌표 끝 배열과 닮아 있었다. 북방 전초 기록칸 끝에 달린 숫자 줄보다 더 깊은, 숨겨 둔 분류 기호였다.

"이거. 종루에서 봤어요."

그녀 목소리는 더 낮아졌지만 오히려 선명했다.

"음성 결정 좌표 끝에 붙던 표기랑 닮았어요. 같은 줄기예요."

사절 옆 기록관 펜끝이 멈칫했다. 아주 짧은 흔들림이었다. 사절은 즉시 말을 잘랐다.

"그런 추정은 왕궁 도착 뒤 검토한다."

나는 그 짧은 끊김을 놓치지 않았다. 회색 종루와 문서고 하층이 같은 줄이라는 말이 실수로 튀어나온 것도 아니었다. 저쪽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별첨 한 장으로 먼저 봉했다.

"검토가 아니라 차단 아닙니까."

내 말에 사절 눈빛이 한층 딱딱해졌다.

"에이드리언 베일."

내 이름 뒤엔 늘 `참고`나 `협조`가 달렸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안 붙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들렸다.

"너희는 북방 전초 승전 관련 인원이다. 국가가 정한 절차를 따르는 게 우선이다."

그 문장은 회의실 공기를 더 눌렀다. 승전 관련 인원. 전초에서부터 붙던 그 장부 말투가 왕궁 직속 사절 입으로 그대로 나왔다. 사람을 부르는 말 같지만, 실은 무엇과 같이 묶을지를 먼저 정하는 이름이다.

그때 기록관 둘이 말도 없이 탁자 아래 나무 상자 셋을 꺼냈다. 하나엔 파란 밀랍이, 하나엔 군수실 검인표가, 마지막 하나엔 성도 봉함끈이 감겨 있었다. 세라 이름표 앞엔 파란 밀랍 상자가 놓였고, 브론 앞엔 검인표가, 미리엘 앞엔 봉함끈이 달린 상자가 밀려왔다. 내 앞엔 빈 받침판 하나만 남았다. 아직 적을 줄을 다 정하지 못한 사람 자리였다. 왕궁으로 데려간다기보다, 각자 어느 상자에 먼저 담을지를 시험 삼아 보여 주는 손놀림이었다.

세라는 별첨을 내 쪽으로 밀었다. 그 손끝이 종이 가장자리를 너무 세게 눌러 푸른 잉크 자국이 조금 번졌다.

"이건 안 놓친다."

미리엘이 받았다.

"놓치면 다음엔 서고 문턱도 못 밟아요."

사절은 다시 첫 장을 덮었다. 화려한 특전문은 이제 얇은 덮개처럼만 보였다.

***

해가 더 기울 무렵 객실 복도 끝 응접칸 불이 먼저 켜졌다. 북방 전초 안에서 그 방만 유난히 금장 장식이 많았다. 벽등 불빛이 문틀 황동에 걸리면 따뜻해 보였지만, 실제로 따뜻한 말을 하는 곳은 아니었다. 복도 바닥엔 새로 닦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문턱 안쪽 작은 탁자 위엔 이미 차잔 셋과 봉서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람보다 접대 모양이 먼저 서는 방이었다.

벨로네 가문 쪽 전달인은 세라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는 세라 손보다 검집부터 보고, 검집보다 외투 어깨 쪽 먼지를 더 오래 살폈다. 전초 전열에 섰던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왕궁 앞줄로 세워도 되는 표정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세라 아가씨."

그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왕실 공인 후보단 예비 편입은 기회입니다. 먼저 이름을 굳혀 두어야 북방 공적도 안전해집니다."

세라는 끝내 앉지 않았다. 문턱 안쪽에만 한 발 들인 채 물었다.

"내 이름만 굳으면 다른 건 안전해지나?"

전달인은 곧장 답했다.

"앞줄 이름이 살아 있어야 뒤줄 공도 따라옵니다. 실무 인력들 몫은 나중에 얼마든지 챙길 수 있어요."

실무 인력.

브론이 문밖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응접칸 바깥 벽에 기대 선 채 안쪽 공기를 읽었다. 전달인은 일부러 에이드리언, 브론, 미리엘, 리에트 이름을 피하고 있었다. 이름을 지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아예 다른 종류로 부르는 거다.

세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되물었다.

"실무 인력?"

"아가씨를 돋운 이들 말입니다."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잔인한 말을 했다.

"전열의 얼굴은 결국 하나면 됩니다. 왕궁은 복잡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지요."

세라는 대답 대신 자기 검집 끝을 쥔 손을 한 번 더 고쳐 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희게 올라왔다가 곧 풀렸다. 바로 그 손이 북벽에서 병사 시선을 붙잡았고, 판석문 앞에선 공명 위치를 맞췄다. 그런데 지금 저자는 그 손까지 `앞줄 얼굴` 한마디로만 남기려 들고 있었다.

그녀는 응접칸 바닥을 한번 내려다봤다. 새로 닦은 바닥 위에 의자 둘은 정면으로, 하나는 약간 비켜 놓여 있었다. 누구를 중심에 두고 누가 기대 앉아야 하는지까지 이미 정해 둔 배치였다. 북벽 아래에서 우리가 다시 세운 병사 간격과 정반대였다. 여긴 자리를 읽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자리를 강요해 이야기 하나만 남기는 곳이다.

"그 얼굴로 뭘 덮을 생각인데."

세라 목소리는 차분했다.

전달인이 찻잔 손잡이를 한 번 돌렸다.

"덮는다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왕국도 기사단도 아가씨의 이름을 신뢰합니다. 그 이름을 먼저 세워 두면 주변 소음은 천천히 정리하면 되지요."

주변 소음.

그 말이 응접칸 밖까지 흘러나왔다. 리에트가 복도 어둠 속에서 숨을 짧게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 걸음 비껴 서서 응접칸 안이 아니라 문밖 수행원 둘을 보고 있었다. 둘은 낮은 소리로 뭔가를 주고받았다.

"왕궁 들어가면 외부 증언은 천천히 다뤄도 된다."

"먼저 중앙 검인만 넘기면 돼."

짧은 속삭임이었지만 충분했다.

리에트가 그림자에서 말했다.

"듣고 싶어 할 말부터 따로 있다는군."

전달인이 처음으로 문밖을 쳐다봤다. 입가에 걸친 웃음이 짧게 내려앉았다. 수행원 둘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외부 증언은 제일 늦게 받아도 되는 칸. 리에트는 처음부터 거기에 밀릴 사람이었다.

세라는 전달인을 똑바로 봤다.

"앞줄 이름이 살아 있으면 뒤줄 공도 따라온다, 그 말 믿고 앉아 있으면 결국 뒤줄 사람들은 전부 장부 아래로 밀리겠지."

전달인은 웃음을 유지하려 애썼다.

"정치는 원래—"

"그만."

세라가 잘랐다.

"내가 앞줄에 서는 건 내가 정한다. 누구 위에 기대 설지도 내가 정하고."

그녀는 끝내 수락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다만 봉서 위에 손도 올리지 않고 돌아섰다. 다리를 돌리기 직전, 세라의 검집 끝이 봉서 모서리를 스치며 아주 살짝 밀어냈다. 받아 든 것도 아니고, 정중히 돌려놓은 것도 아니었다. 네 장부 한가운데 내가 얌전히 앉아 주진 않겠다는 정도의 힘이었다.

응접칸을 나오자 브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실무 인력이라."

"네 이름 불러 주지도 않지?" 리에트가 받아쳤다.

"이름 부르면 나중에 떼기 힘드니까."

미리엘은 아직 별첨 양피를 접지 못한 채였다. `문서고 하층 대체 분류열 열람 금지.` 그 줄이 접히지 않고 계속 눈에 걸려 있는 얼굴이었다.

***

밤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 숙영칸 안쪽 작은 탁자엔 오늘 받은 문서가 전부 펼쳐졌다. 왕궁 편입 제안서. 성도 협조 각서. 벨로네 가문 전달 봉서. 그리고 북방 전초 승전 정본 사본. 바깥 복도엔 짐수레 끄는 소리와 병사 교대 발소리가 지나갔지만, 이 작은 탁자 위에선 더 조용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받을 것과 안 줄 것.

앞줄에 세울 것과 안쪽에 남길 것.

세라는 의자에 앉지 않고 탁자 모서리에 기대 섰다. 브론은 종이를 한 장씩 겹치며 약호가 같은 줄을 찾았고, 미리엘은 성도 별첨 끝 주석과 회색 종루 메모를 나란히 놓았다. 리에트는 문간 쪽 어둠을 반쯤 막은 채 복도 발소리를 세고 있었다.

나는 편입안 마지막 장과 성도 별첨을 나란히 밀어 놓았다.

"얼굴은 다르지만 줄은 하나야."

브론이 턱을 괴고 물었다.

"어떻게."

"왕국은 공인 후보라고 쓰고, 성도는 협조 각서라고 쓰지. 그런데 둘 다 우리를 한 덩어리로 보호하는 척하면서 손발을 먼저 나눈다. 세라는 반응 무구. 넌 군수 자료. 미리엘은 판정 협조. 리에트는 외부 증언. 나는 현장 배치 참고."

"결국 다 찢는군."

리에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찢어야 다음 문턱도 저쪽 장부가 고를 수 있으니까."

세라가 편입안 첫 장 위 특전 문구를 손끝으로 눌렀다.

"이건 받아도 돼."

브론이 눈을 들었다.

"뭘. 왕궁 숙소?"

"앞줄 이름."

세라는 고개를 들었다.

"이름값은 미끼로 쓸 수 있어. 대신 길은 안 넘겨."

그 말이 오늘 처음 나온 확정문처럼 들렸다. 왕국이 세라 이름을 앞세워 반응 무구와 공적을 가져가려 한다면, 세라는 그 이름을 거꾸로 이용해 안쪽 시간을 벌 수 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먼저 읽어 둘지였다.

브론이 종이 아래 약호를 하나 짚었다.

"난 이 줄 안 준다. 북방 고정선 계열 이름은 왕궁 가기 전에 더 읽어 둬야 해. 넘기면 자기들 말로 다시 적을 거다."

미리엘도 바로 받았다.

"문서고 하층 표기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별첨에 금지선이 먼저 붙었다는 건, 저게 다음 줄기 사건이라는 뜻이에요."

그녀는 종루에서 베껴 둔 짧은 메모를 성도 별첨 옆에 붙였다. 기호 셋과 긴 선 하나, 그리고 `하층`이라 적어 둔 작은 표기. 둘은 완전히 같진 않았지만 뼈대가 닮아 있었다. 같은 손이 아니어도 같은 체계에서 나온 기호처럼 읽혔다.

나는 둘 사이를 번갈아 봤다. 회색 종루. 북방 전초. 성도 문서고. 장소는 멀어졌는데 분류 습관은 계속 이어진다. 병과 기록을 따로 묶고, 사람과 해석을 따로 가르고, 이름을 지운 채 줄만 남긴다. 그렇다면 다음 문은 포상 탁자 뒤가 아니라 성도 문서고 원본 줄 쪽에 있다.

"저 금지선이야말로 제일 먼저 숨기고 싶은 길이야."

내 말에 미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봉인 서고 접근 금지. 문서고 하층 대체 분류열 열람 금지. 둘 다 그냥 보안 조항이 아니에요. 여기 닿으면 종루, 북방, 왕도 수맥까지 한 줄로 묶일 가능성이 있어요."

브론이 투덜거리듯 덧붙였다.

"그리고 그 줄에 내 장비 계열 이름도 걸려 있겠지. 아주 마음에 안 드는 조합이군."

리에트는 복도 끝을 한 번 보고 돌아섰다.

"마음에 안 드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 왕궁 들어가면 난 제일 늦게 불릴 거다. 외부 증언은 언제든 밀어도 되는 칸이니까."

"그래서 지금 정한다."

나는 빈 종이 한 장을 당겨 맨 위에 적었다.

`받을 것 / 안 줄 것`

그 아래 두 줄을 나눴다.

받을 것.

- 후보 편입 명분 자체.

- 왕궁 이동권.

- 세라 앞줄 이름이 벌어 줄 시간.

안 줄 것.

- 북방 고정선 계열 이름 원문.

- 문서고 하층 기호 해석 전부.

- 반응 자리와 배치 순서 정본.

- 사람을 떼어 읽게 만드는 대답.

브론은 내 종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북방 고정선`이 적힌 쪽 끝을 접어 버렸다. 글자를 다 지우진 않았다. 대신 바깥에서 보면 약호처럼만 보이게 접는 방식이었다. 미리엘은 성도 별첨 위에 종루 메모를 얹은 뒤, 같은 기호가 찍힌 줄만 따로 얇은 실로 묶었다. 나머지 장은 일부러 눈에 잘 띄는 자리로 빼 두었다. 리에트는 문간에서 그 손놀림을 지켜보다가 빈 봉서 하나를 가져와 겉봉만 남긴 채 접었다. 바깥에서 누가 탁자만 훑어도 `내줄 종이`와 `안쪽에 감춘 줄`이 서로 다르게 보이도록 미리 배열해 두는 작업이었다. 세라는 그사이 자기 검집을 탁자 가장자리에 걸쳐 놓고, 누가 안으로 들어오면 한 번에 종이를 덮을 수 있는 자리를 다시 맞췄다.

세라가 마지막 줄을 보며 말했다.

"앞줄은 내가 선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대신 저들이 북벽에서 무슨 순서로 버틴 건지 입맛대로 적게 두진 않아."

미리엘은 성도 별첨을 접지 않고 그대로 남겨 뒀다.

"저 이름, 종루에서 봤어요."

그녀가 기호 옆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정확히 같은 모양은 아니어도 같은 줄기예요. 문서고 하층 대체 분류열. 저쪽이 금지선부터 걸었다는 건, 거기서 뭔가 큰 걸 막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브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왕궁으로 끌고 가는 길이 문서고 가는 길이기도 하단 소리네."

미리엘은 대답 대신 성도 별첨 맨 아래 주석을 손톱으로 한 번 눌렀다. 얇은 양피가 찢어질 듯 휘었다가 겨우 버텼다. 그녀는 종루 메모에서 기호가 겹치는 부분만 따로 베껴 빈 약병 포장지 안쪽에 끼워 넣었다. 겉으로 보이는 메모엔 일부러 한 줄을 비워 뒀다. 누가 빼앗아 읽어도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한 번에 드러나지 않게 만드는 식이었다. 브론도 그걸 보더니 자기 약호 메모의 절반을 구두 밑창 안쪽으로 밀어 넣고, 겉에 남길 종이엔 장비 수량처럼 보이는 숫자만 다시 적었다. 리에트는 창가 틈에 서서 밖 경비 교대 박자를 세다가 우리가 종이를 접는 순서까지 외우듯 한번 훑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와도 무엇을 먼저 치우고 무엇을 그냥 두어야 할지 이미 정해 두는 눈이었다.

나는 탁자 위 종이들을 훑었다. 왕궁 포상, 후보 편입, 성도 각서, 귀족파 후견, 군수 자료 동반. 얼굴은 달라도 끝은 같았다. 사람과 물건과 해석을 갈라 들고 왕궁 안에서 다시 묶는다. 그 뒤 어둠에 문서고 하층이 숨어 있다.

왕궁으로 끌려가는 길이 곧 금지된 서고로 돌아드는 우회로일 수 있었다.

좋은 길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들이 가장 먼저 막은 길이었다. 더구나 그 길엔 우리를 가를 손도 같이 달라붙어 있다. 세라 이름을 앞세워 문을 열고, 브론 약호를 떼어 내고, 미리엘 해석을 봉함하고, 리에트 증언을 뒤로 미루고, 내 판단을 `참고` 아래 눌러 두려는 손. 그 순서를 먼저 읽지 못하면 왕궁 문턱에 닿기도 전에 이미 반쯤 져 버린다. 반대로 그 손의 순서만 먼저 끊으면, 왕궁 안에서도 아직 우리 차례를 만들 수 있다.

나는 빈 종이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다음 싸움터: 성도 문서고 원본 줄.`

세라는 그 문장을 보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 종일 손에서 돌아오던 검집 울림은 없었다. 대신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왕궁에 가더라도, 저 줄부터 본다."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그럼 이번엔 앞줄 얼굴이 미끼고, 안쪽 길이 본심이군."

"그래."

나는 탁자 위 편입 제안서 마지막 장을 접었다. 특전문이 아니라 작은 금지선이 안쪽에 숨게 접었다.

"저들이 제일 먼저 가리고 싶은 데부터 연다."

복도 밖에선 짐수레 바퀴가 한 번 삐걱거렸다. 왕궁으로 향할 채비가 전초 전체를 조금씩 조이고 있었다. 하지만 탁자 위에 남은 이 얇은 종이들이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보여 줬다. 북벽에서 시작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사람과 물건과 이름을 누가 어떤 줄로 올리느냐의 싸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싸움 끝엔, 금지된 서고의 이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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