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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선의 균열

산길은 밤새 얼었다가 새벽 햇빛 한 줄에 다시 풀리고 있었다. 바퀴가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 진창이 고랑처럼 패였고, 그 옆에선 얇은 얼음막이 깨진 사기 조각처럼 떠올랐다. 왕궁행 수레 셋은 굽이 아래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맨 앞엔 왕실 상자가 실린 수레, 그 뒤엔 군수실 검인표가 달린 긴 궤짝 수레, 맨 마지막엔 양피 통과 봉함 상자를 싣는 낮은 수레였다. 사람보다 칸이 먼저 정해진 줄이었다.

나는 둘째 수레 뒤에서 말 고삐와 바퀴 자국 사이 간격을 보고 있었다. 세라는 앞 수레 난간 곁에 섰고, 미리엘은 양피 통을 팔 안쪽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브론은 자기 못판 조각이 든 상자를 두 번이나 눌러 묶더니 매듭 끝 각도까지 다시 훑었다. 리에트는 길 바깥 사면만 보고 있었다. 왕궁 사절은 우리 다섯보다 표찰과 도착 시각을 더 자주 내려다봤다.

표찰도 그랬다. 앞 수레 난간엔 `왕실 입회 전 개봉 금지`, 둘째 수레 옆판엔 `군수실 대조 후 재봉함`, 마지막 수레 양피 통엔 `판정문 / 반응 기록 / 별도 인계`가 먹으로 적혀 있었다. 사람 이름은 거의 없고 칸 이름만 또렷했다. 어느 수레에 누가 타는지가 아니라, 어느 줄이 어느 손으로 넘어가는지가 먼저 적힌 행렬이었다. 피난민들이 이 줄 한복판으로 들이닥치는 순간 뒤집힐 건 길이 아니라 순서였다. 누가 먼저 내려서고, 무엇을 나중으로 밀고, 어떤 이름을 장부에서 지우는지까지 한꺼번에 드러날 자리였다.

그때 아래 굽이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처음엔 말 울음인 줄 알았다. 곧 사람 목소리라는 걸 알았다. 아이 우는 소리, 짐보퉁이가 바위에 쓸리는 소리, 얼음물에 미끄러진 발이 짧게 터뜨리는 욕설. 흰 안개를 헤치고 사람들이 한 줄로 쏟아져 올라오고 있었다. 어깨엔 젖은 담요, 품엔 아이, 손엔 자루와 냄비, 등엔 겨우 묶은 나무틀. 피난민들이었다.

왕궁 호위 병사 둘이 먼저 사람 쪽으로 가지 않았다. 수레 쪽으로 붙어 간격부터 닫았다. 앞 수레 말머리가 안쪽으로 꺾이고, 둘째 수레 바퀴가 바깥 턱으로 밀렸다.

나는 그 손보다 먼저 길목을 봤다.

피난민들이 올라오는 줄은 산길 한가운데가 아니었다. 북벽에서 시작된 떨림이 산길 바닥으로 번질 때마다 흙이 먼저 풀리는 자리였다. 어젯밤 지도에서 짚었던 진동선이 사면 위로 드러나는 자리. 사람 줄과 수레 줄이 여기서 엉키면 누가 먼저 구를지 뻔했다.

"간격 닫지 마."

내가 외치기도 전에 세라가 먼저 앞 수레 옆으로 나갔다. 검집 끝이 얼음막을 짧게 깨뜨렸다.

"사람 줄부터 열어. 수레는 그대로 세워."

병사 하나가 왕궁 사절을 돌아봤다. 사절은 눈썹을 찌푸렸다.

"후보님, 상자부터 안쪽으로 붙여야 합니다. 길이 좁습니다."

세라는 수레 난간을 잡은 채 몸을 반쯤 틀었다. 완전히 비키지도, 정면으로 막지도 않는 각도였다.

"알아. 그래서 사람 먼저 뺀다고."

피난민 줄 맨 앞에서 아이를 안은 여자가 미끄러졌다. 뒤에서 밀리던 노인이 그 등을 받치다 같이 주저앉았다. 그 순간 길 아래에서 두 번째 진동이 올라왔다. 깊지는 않았다. 대신 짧고 정확했다. 굽이 아래 흙이 한 박자 들썩였고, 둘째 수레 오른쪽 바퀴가 진창 홈에 비스듬히 박혔다.

브론이 이를 갈았다.

"젠장. 자연 붕괴가 아니야."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세라, 앞줄 고정. 사람들 왼쪽으로 세워. 브론, 바퀴 턱부터 빼. 상자 손대지 마. 미리엘, 다친 사람부터 갈라. 리에트, 위 사면 봐. 또 흔들면 먼저 알려."

세라가 앞 수레를 몸으로 비껴 세웠다. 검집이 아니라 어깨와 팔로 난간을 밀었다. 수레가 반 뼘쯤 안으로 물러나며 사람 둘이 비집고 지날 틈이 생겼다.

"아이부터! 짐은 나중이야!"

그녀 목소리가 터지자 병사 둘 손도 따라 움직였다. 아까까지 상자 간격만 보던 손이었다.

나는 바퀴와 사람 사이에 남는 폭을 눈으로 재면서, 굽이 안쪽 돌출부와 배수 홈 사이를 머릿속에서 곧게 그었다. 아이를 안은 사람은 안쪽 바위로, 짐을 든 사람은 바깥 턱 말고 뒤로, 다리를 다친 사람은 바퀴축에서 두 걸음 떨어진 평평한 자리에 먼저 묶어야 했다. 한 칸만 잘못 세우면 뒤에서 밀려오는 줄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세라가 앞 수레를 반 뼘 비켜 세워 만든 틈은 사람 하나가 겨우 빠지는 길이었지만, 그 한 사람 폭이 흐름을 갈랐다. 병사 둘이 그 틈을 알아듣자 뒤에서 밀리던 어머니 둘과 아이 셋이 먼저 빠졌다. 그다음에야 노인 둘과 짐보퉁이 하나가 같은 박자로 따라나왔다.

브론은 바퀴를 빼내며 계속 욕을 삼켰다. 받침목 하나를 잘못 대면 상자 무게가 바깥 턱으로 더 쏠린다는 걸, 그는 손으로 이미 읽고 있었다. 미리엘은 피를 많이 흘리는 사람보다 먼저 숨이 꼬이는 사람을 갈랐다. 울다가 호흡이 뒤집힌 아이, 발목을 접질렸는데도 짐자루를 놓지 못하는 남자, 뒤에 가족이 남았는지 계속 몸을 돌리는 노파. 리에트는 사면 위를 훑다가 돌멩이 하나가 늦게 굴러 내려오는 순간만 따로 집어냈다. 누가 아까 거기 서 있었다는 뜻이었다. 움직임은 제각각이었는데, 그 모든 손이 결국 한 자리를 비워 냈다. 사람이 먼저 빠져나갈 자리.

브론은 군수실 궤짝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바퀴 아래 고임목부터 걷어내고, 진창에 박힌 돌을 뒤집어 받침으로 박았다. 손등이 흙과 얼음물에 금세 젖었다.

"바퀴 세우면 상자는 안 굴러! 그 전에 사람부터 빼!"

미리엘은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넘어져 정강이를 찢은 노인을 길 안쪽으로 끌어내고, 어깨를 삔 소녀를 바람막이 바위 쪽으로 보내고, 아이를 놓지 못하는 여자에겐 숨부터 고르게 했다. 손은 빨랐고, 눈은 더 빨랐다. 아이 하나의 손등에 번진 가는 붉은 결을 보는 순간 미리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에이드리언. 이 아이, 추위만 탄 게 아니에요."

나는 반걸음 다가갔다. 손등에 엷은 열상처럼 퍼진 흔적이었다. 성흔열만큼 깊진 않았다. 그래도 낯익었다. 봉인선 떨림에 피부가 스치고 지나간 뒤 남는 얕은 반응선.

그때 성도 서기가 미리엘 곁으로 붙었다. 말투는 낮았고, 손은 먼저 양피 통으로 갔다.

"하센 수녀, 민감 물품부터 안쪽으로 모아야 합니다. 사람 정리는 병사들에게 맡기시죠."

미리엘이 고개도 들지 않았다.

"사람부터요."

"기록 물품이 흩어지면 책임이 커집니다."

"숨이 끊기면 책임으로도 못 붙잡아요."

왕궁 사절은 전혀 다른 얼굴로 내 쪽으로 왔다. 진창 묻는 걸 싫어하는 걸음이었다.

"베일. 왕궁 도착 시각이 밀리면 입회 순서가 꼬입니다. 앞 수레는 지금—"

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다친 사람과 멀쩡한 사람부터 나눕니다. 수레는 그다음입니다."

사절 얼굴이 바로 식었다.

"그 판단은 당신 권한이 아닙니다."

세라가 곧장 끼어들었다.

"지금 내 앞에서 쓰러지는 사람부터가 내 권한이야."

그 말이 병사들 귀를 먼저 때렸다. 후보 칭호가 저런 데 쓰이는 걸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미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 하나는 아이를 받아 들었고, 다른 하나는 노인 어깨를 붙잡아 길 안쪽으로 옮겼다. 세라는 검집이 든 앞 수레 곁에 그대로 선 채 피난민 줄을 반으로 갈랐다. 왕궁행 얼굴이 아니라 길을 버티는 말뚝 같았다.

리에트는 이미 사면 위였다. 녹은 흙을 손끝으로 훑더니 낮게 불렀다.

"위에 손 있었어. 짧은 끌개 자국. 검은 재도 묻었고."

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사면은 비어 보였지만 돌 틈 몇 군데가 이상하게 얕았다. 눈이 저절로 미끄러진 자리가 아니라 발이 버티고 간 자리였다.

누군가 피난민 줄이 이리 몰릴 걸 알고 흔들었다.

***

산길 안쪽 바람막이 바위 곁에 사람들을 몰아세운 뒤에야 수레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둘째 수레는 반쯤 기운 채 멈춰 있었고, 브론이 받침을 다시 박아 둔 덕에 더는 밀리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숨을 돌리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봤다. 북사면 아래 임시 대피막이 밤새 두 번 흔들렸고, 그 뒤 군인들이 길을 비우라며 밀어붙였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피난민들 말도 제각각 흩어지는 것처럼 들렸지만, 겹치게 놓아 보니 한 줄이 잡혔다. 막사가 흔들린 시간, 아래 계곡 쪽에서 먼저 말이 놀라 울었던 시각, 병사 셋이 길을 비우라며 언덕 쪽으로 사람을 몰던 방향, 그리고 그 직후 위 사면에서 돌이 두 번 굴러내린 박자. 누군가는 사람들을 살리러 온 얼굴로 서 있었고, 누군가는 그 틈에 수레 줄을 더 좁혔다. 왕궁 사절은 피난민이 몇인지보다 언제 다시 출발할 수 있는지만 물었고, 성도 서기는 누가 다쳤는지보다 누가 `반응`했는지를 먼저 적으려 했다. 말은 달라도 손이 먼저 가는 칸은 정해져 있었다.

미리엘이 아이 손등의 붉은 결을 젖은 천으로 덮는 동안, 성도 서기는 양피 끝에 작은 표시를 남기려 했다. 나는 그 손을 직접 막진 않았다. 대신 아이 어머니를 안쪽 바위 곁으로 더 붙이고 병사 하나를 그 앞에 세웠다. 기록을 적으려면 몸을 비틀어야 하는 자리였다. 세라는 그걸 보고 곧장 다른 병사 둘을 불렀다. `사람 셋은 여기 남고, 수레는 뒤로.` 후보 칭호가 명령으로 들리는 순간이었다. 왕궁 사절은 그 말을 고치지 못했다. 지금 그가 사람을 밀어내면, 피난민들뿐 아니라 병사들 눈에도 자기 우선순위가 그대로 찍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여자는 젖은 장갑으로 아이 귀를 막고 있었고, 어떤 노인은 빈 자루를 가슴에 껴안은 채 계속 발밑 흙만 내려다봤다.

"대피막만 흔든 게 아니야."

리에트가 말했다.

"사람이 몰릴 자리 골라 친 거야."

나는 피난민 줄이 올라온 각도, 수레 바퀴가 박힌 자리, 사면 위 짧은 발디딤 흔적을 머릿속에서 겹쳤다. 북벽 진동선이 산길 위로 튀어나오는 박자와 딱 맞았다. 전초 안에서 보던 그 떨림이 여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박자를 알고 있었다.

미리엘은 다친 사람들 사이를 돌다가 다시 내 옆으로 왔다. 손등엔 아직 아이 체온이 남은 듯 미세한 떨림이 돌았다.

"저 아이는 잠깐이라도 다른 칸에 두면 안 돼요. 더 깊진 않지만, 떨림이 몸에 닿은 흔적이 있어요."

성도 서기가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다시 다가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분리 관찰이 필요합니다. 반응 기록도 남겨야 하고요."

"분리하면 더 빨리 망가질 수도 있어요."

미리엘이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은 기록보다 붙들어 두는 쪽이 먼저예요."

왕궁 사절은 여전히 왕실 상자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피난민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병사 둘을 불러 세웠다.

"앞 수레 봉인을 다시 확인해. 누구도 열지 마라."

그 말이 끝나자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이 굴러도 상자 봉함이 먼저네."

나는 둘째 수레 뒤로 돌아갔다. 브론 자료 상자는 겉보기엔 멀쩡했다. 그런데 브론은 이미 무릎을 꿇고 잠금쇠 아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그가 손가락으로 얇은 틈을 짚었다.

"부순 게 아냐. 벌린 거야. 필요한 만큼만."

잠금은 깨지지 않았다. 대신 얇은 금속판을 넣어 비틀어 연 자국이 정확히 남아 있었다. 상자 안을 확인하자 더 선명해졌다. 못판 조각 몇 개, 성도 인장 금속 둘, 북방 고정선 합금 파편이 사라져 있었다. 양피 메모 묶음은 남아 있었다. 병사 재배치 도식도, 내가 그어 둔 진동 박자 표시도 그대로였다.

미리엘도 자기 양피 통을 열어 봤다. 문장 해독 메모는 남아 있었다. 대신 성도 인장이 박힌 작은 금속편 하나가 빠져 있었다.

"글은 두고 물건만 가져갔어요."

브론이 곧장 고개를 저었다.

"글은 나중에 지우면 돼. 지금은 죄가 박힌 물건부터 치운 거지."

리에트는 수레 아래 진흙을 쓸어 냄새를 맡았다.

"손이 하나는 아니야. 셋, 어쩌면 넷. 그런데 다 같은 짓을 했어. 식량도 안 건드리고, 피난민 보퉁이도 안 뒤졌어. 이 상자들만 골라 열었어."

왕궁 사절이 그제야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눈길은 남은 종이보다 빈자리에 먼저 꽂혔다.

"무슨 일이지?"

브론이 고개도 들지 않았다.

"당신네가 제일 아파할 만한 것들만 빠졌지. 그게 무슨 일인지 진짜 모르면 더 큰일이고."

사절 얼굴이 굳었다. 성도 서기도 한 박자 늦게 상자 쪽으로 붙었다. 둘 다 남은 메모보다 빠진 금속부터 세었다. 그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상자 안에 남은 것의 배열도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깔끔했다. 못판 조각 가운데서도 북방 고정선과 상관없는 보강편은 남아 있었고, 성도 금속 가운데서도 문양이 마모돼 출처를 흐릴 수 있는 조각은 그대로였다. 빠진 건 각 줄의 책임을 바로 찍을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북방 고정선 합금 파편은 브론이 출처를 단정할 수 있는 결을 가진 조각이었고, 성도 인장 금속은 미리엘이 회색 종루와 같은 계열이라고 바로 이어 말할 수 있는 모서리였다. 봉함 못표식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봉함했다`가 아니라 누가 어떤 순서로 상행시켰는지 읽히는 표식만 사라졌다.

남은 양피를 다시 펼치자 오히려 줄이 더 잘 보였다. 내가 그어 둔 진동 박자 표시 옆에는 병사 둘이 수레 간격을 줄인 시각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엔 피난민 줄이 올라온 방향이 급하게 덧그려져 있었다. 미리엘 기록엔 아이 손등 반응이 오른쪽이 아니라 왼손부터 번졌다는 메모가 남아 있었고, 브론 상자 바닥엔 진흙이 아니라 검은 가루가 얇게 눌어붙어 있었다. 리에트가 사면에서 주워 온 돌조각 끝에도 같은 재가 묻어 있었다. 흔든 손, 훔친 손, 길을 막은 손이 따로 논 게 아니었다. 서로 같은 주인을 섬기지 않더라도, 적어도 같은 결과를 원한 손들이었다.

세라는 문장 끝줄을 보여 준 뒤에도 한동안 종이를 놓지 않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종이 가장자리가 조금 더 젖어 들었다. 그 문장 하나가 의미하는 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세라를 앞줄 얼굴로 세우고, 브론을 군수 자료 쪽으로 빼고, 미리엘을 판정 참고 칸으로 밀고, 나와 리에트를 `동행 인원`으로 눌러 적겠다는 뜻이었다. 오늘 산길에서 병사들이 본 것도 바로 그 분리 절차였다. 사람을 구하는 동안 누군가는 물건만 빼 갔고, 누군가는 그 틈에 우리 이름표를 다시 붙일 준비를 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잃어버린 금속을 아까워하는 일이 아니었다. 누가 어떤 증거를 먼저 치우는지, 어떤 위기에서 어떤 문장을 먼저 접는지, 그리고 사람을 앞세웠을 때 어느 기관이 가장 불편해하는지 기억하는 일이었다. 물증은 다시 생길 수 있어도 손버릇은 쉽게 안 바뀐다. 오늘 드러난 건 그 손버릇이었다.

브론은 남은 보강편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 빛에 비췄다. 같은 상자에 남아 있는데도 아무도 이건 가져가지 않았다. 결이 흐리고, 어디 공방에서 만든 물건인지 단번에 못 박기 어려운 조각이라서다. 그는 그걸 다시 상자에 넣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건 안 훔쳐.` 미리엘도 자기 양피에서 문장 없는 빈 표식을 하나 떼어 보였다. 성도 서기가 아까 흘깃 보고도 그냥 둔 조각이었다. 기호만 남고 인장이 닳아, 어느 서고에서 왔는지 단정하기 어려운 물건. 반대로 모서리 하나만 봐도 회색 종루 줄과 이어 말할 수 있는 금속편은 사라졌다. 사람들 눈엔 다 비슷한 파편이어도, 죄를 직접 이어 붙일 수 있는 모양만 골라 빠진 셈이었다.

그 사실이 확인되자 리에트는 오히려 사면보다 아래 길을 먼저 봤다. 피난민 발자국 사이로 병사 장화 자국이 두 번 겹쳐 들어간 자리, 그리고 그 곁에서 다시 빠져나온 좁은 자국. 누군가는 위에서 흔들고, 누군가는 아래에서 길을 비우고, 마지막 손은 우리 상자 앞에 섰다. 손 셋이 같은 패턴으로 엮였다면, 다음에도 흔드는 자리와 빼 가는 물건은 따로 놀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남은 건 상실이 아니라 예고였다.

나는 그 예고를 종이 위에 짧게 옮겨 적었다. 흔드는 손은 사람을 한데 몰고, 가르는 손은 그 틈에 이름표를 다시 붙인다. 그리고 빼 가는 손은 늘 죄가 가장 또렷한 물건부터 집는다. 그 셋이 다시 만나면, 다음엔 잃어버린 조각보다 먼저 그 순서를 끊어야 한다. 그래야 왕궁 안에서 누가 어떤 문장을 앞세우는지도 역으로 잡아낼 수 있다.

왕궁 문턱은 아직 멀었는데도, 누가 먼저 사람을 뒤로 밀고 누가 먼저 물건을 감추는지는 이미 다 보였다. 그걸 본 이상, 다음엔 우리도 빈손으로 끌려가진 않는다. 적이든 기관이든 먼저 내민 손부터 잘라 본다. 순서부터. 이번엔. 반드시. 먼저. 꼭. 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 바닥 위에 남은 것부터 다시 펼쳤다. 수맥 방향이 적힌 메모, 병사 재배치 기록, 피난민들이 말한 대피막 흔들림 시각, 진동 박자, 사면 위 끌개 흔적.

"에이드리언."

세라가 내 옆에 섰다. 방금까지 피난민 줄을 붙잡던 사람의 숨이었다. 짧고 뜨거웠다.

"뭘 먼저 보는데?"

나는 종이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

"뭘 잃었는지보다, 누가 뭘 먼저 가져갔는지."

브론이 바로 받았다.

"합금 이름을 아는 쪽."

미리엘이 그 위에 말을 얹었다.

"문장 뜻은 뒤에 바꿀 수 있으니까, 먼저 물건을 치워야 하는 쪽."

리에트는 사면을 본 채 말했다.

"그리고 사람보다 우선순위를 흔들어서, 우리가 어느 칸부터 붙잡는지 보고 싶은 쪽."

나는 고개를 들었다. 피난민들은 아직 바람막이 바위 곁에 몰려 있었고, 병사들은 수레를 다시 세우느라 욕을 삼키고 있었다. 왕궁 사절과 성도 서기는 서로 말을 아끼는 척했지만 시선은 같았다. 사람보다 물건, 글보다 금속, 공적보다 입회 순서. 이 길목은 그 우선순위를 흔들어 보려 골라진 자리였다.

사절이 젖은 장갑으로 문서 가장자리를 훔쳐 접는 순간, 세라 시선이 그 손끝에 멈췄다. 접히기 직전 마지막 줄이 잠깐 드러났다. 그녀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했다.

조금 뒤, 세라가 말없이 그 문서를 내밀었다. 빗물과 진창이 묻은 모서리 아래 끝줄만 펴 놓은 상태였다.

"아까 봤어."

그녀 목소리는 더 낮아져 있었다.

"후보 편입 거부 시 동행 인원 재분류 가능."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다시 위를 봤다. 아직 왕궁 문턱도 밟지 않았는데 벌써 우리를 떼어 놓을 줄부터 준비해 둔 셈이었다. 사람 줄, 물건 줄, 공적 줄, 해석 줄. 전부 따로 묶어 올릴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다.

브론이 상자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좋네. 훔쳐 간 놈이랑 문장 적은 놈이 같은 속도로 급해 보여서."

미리엘은 피난민 쪽을 돌아봤다. 붉은 결이 번진 아이는 이제 어머니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 얼굴을 본 뒤에야 다시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들부터 붙들지 않았으면, 지금쯤 우린 뭘 잃었는지도 모른 채 끌려갔겠죠."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나는 남은 종이들을 접었다. 잃은 건 컸다. 그래도 남은 자국은 더 노골적이었다.

합금 조각을 먼저 치운 손. 성도 인장 금속을 먼저 숨긴 손. 사람을 밀어내고도 입회 순서를 더 걱정한 손. 피난민 줄이 몰릴 자리를 알고 진동선을 건드린 손.

각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증거가 달랐다.

그 다름이 곧 길이었다.

나는 남은 종이 셋을 따로 겹쳤다. 하나는 병사 재배치 도식, 하나는 미리엘이 급히 남긴 반응 메모, 하나는 브론이 상자 바닥에서 떼어 낸 검은 가루 자국이었다. 셋을 포개니 이상하게도 같은 줄이 살아났다. 흔들린 자리, 사람을 밀어낸 자리, 그리고 증거가 빠져나간 자리가 전부 한 박자씩 어긋나 있었다. 우연한 붕괴라면 이런 식으로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누군가는 먼저 길을 흔들고, 누군가는 그 틈에 사람 줄을 좁히고, 마지막 손은 정확히 상자만 벌렸다. 셋 중 하나라도 늦었으면 합금 조각은 아직 여기 있었을 것이다.

왕궁 사절은 여전히 `출발만 재개하면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성도 서기는 `민감 물품 점검표`를 새로 쓰겠다고 했다. 둘 다 지금 뭘 잃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론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차이도 메모할 가치가 있었다. 왕궁 쪽은 늘 순서와 입회,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를 붙들었다. 성도 쪽은 분리와 판정, 누가 어떤 이름으로 묶이는지를 붙들었다. 물건을 빼 가는 손은 하나처럼 보여도, 장부를 닫는 방식은 달랐다. 그 차이를 놓치면 다음엔 또 같은 틈을 내줄 것이다.

수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빛이 산등성이에 걸리며 바퀴 자국과 발자국을 한데 눌렀다. 같은 길 위인데도 누구는 왕궁으로 간다고 적힐 거고, 누구는 호송 대상이라 적힐 거고, 누구는 자료 인도 대기라 적힐 거였다. 하지만 오늘 이 길에서 먼저 드러난 건 장부 이름이 아니었다.

누가 어디서 가장 아파하는가.

세라가 내 옆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거부하면 우리를 떼어 놓을 거야."

나는 앞서 가는 왕실 수레를 봤다. 그 뒤로 군수실 궤짝 수레가 흔들리고, 맨 마지막 성도 양피 통 수레가 깊은 홈을 비켜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사람보다 물건 줄이 더 또렷한 행렬이었다.

"그럼 그 문장부터 먼저 빼앗아야겠네."

세라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웃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까 길을 막아 서던 얼굴과는 달랐다. 이제 그녀도 알았다. 왕궁으로 올라가는 길은 포상길이 아니었다. 저 끝줄을 먼저 끊지 못하면, 우리는 각자 다른 이름으로 같은 칸에 갇힌다.

수레 바퀴가 다시 진창을 갈랐다. 나는 젖은 장갑 안에서 남은 메모를 한 번 더 눌렀다. 뺏긴 물증 대신 손에 남은 건 패턴이었다. 누가 무엇을 먼저 숨기는지, 어떤 줄이 흔들리면 기관이 먼저 손을 뻗는지. 그리고 오늘 사람을 먼저 붙든 선택이, 내 인정 욕망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는 사실까지.

왕궁에 닿으면 포상 따위부터 보지 않는다. 나는 문장 끝줄부터 다시 뜯어낼 생각이었다.

세라는 앞을 보면서도 손에 쥔 종이를 끝까지 접지 않았다. 병사들이 보기엔 그냥 젖은 문서를 정리하는 모양새였지만, 나는 그녀 엄지손가락이 딱 그 끝줄만 덮지 않고 남겨 둔 걸 봤다. 나중에 왕궁 안으로 들어가면 저 문장은 더 번듯한 양피로 다시 옮겨 적힐 것이다. `동행 인원 재분류 가능.` 오늘 산길에서 사람 줄과 수레 줄을 갈랐듯, 내일은 우리 다섯을 그렇게 갈라 적겠지. 세라는 그걸 안다. 그래서 아까 피난민들 앞에서 자기 이름을 쓴 방식도, 결국 그 문장에 맞서는 준비였다. 앞줄 얼굴을 버리지 않고도 안쪽 줄을 지키는 법.

나는 남은 메모를 접어 장갑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다음에 노려야 할 건 합금 조각 하나가 아니었다. 왕궁 사절이 가장 자주 보는 봉서 끝, 성도 서기가 먼저 접는 점검표 모서리, 군수실이 출처를 흐리려고 바꿔 적는 품목명. 오늘 산길에서 드러난 건 물건보다 손순서였다. 그 손순서를 먼저 읽으면, 빼앗긴 증거보다 더 깊은 줄을 따라갈 수 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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