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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선의 균열

왕궁으로 가는 산길은 왼쪽으로 낮은 벼랑을 두고, 오른쪽으로 젖은 흙벽을 끼고 휘어졌다. 밤새 얼었던 진창은 새벽 햇빛에 풀려 바퀴 자국마다 검은 물을 머금고 있었다. 앞에는 왕실 상자 수레가 길 안쪽을 차지했고, 그 뒤에 군수실 궤짝 수레, 맨 뒤에 성도 양피 통 수레가 한 줄로 섰다. 세라는 앞 수레 난간 옆에 있었고, 미리엘은 뒤 수레 쪽에서 양피 통을 품에 붙들었다. 브론은 둘째 수레 바퀴축을 살피고, 리에트는 벼랑 맞은편 눈사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세 수레 사이, 길이 가장 좁아지는 굽이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위험은 수레 아래가 아니라 길 전체에 깔려 있었다. 왼쪽 바깥 턱은 진창에 무너져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무릎부터 꺾일 각도였고, 오른쪽 흙벽 밑에는 얕은 배수 홈이 얼음물로 막혀 있었다. 바퀴 하나가 그 홈에 걸리면 수레가 벼랑 쪽으로 틀어진다. 사람이 그때 밀리면 피할 틈이 없다. 북방 전초 지도에서 봤던 떨림 자리가 바로 이 굽이 아래로 지나간다는 사실이 발밑의 물결처럼 느껴졌다.

수레에는 이미 사람보다 칸이 먼저 붙어 있었다. 앞 수레 난간엔 `왕실 입회 전 개봉 금지`, 둘째 수레 옆판엔 `군수실 대조 후 재봉함`, 마지막 수레 방수포엔 `판정문·반응 기록·별도 인계`라는 글씨가 흐린 먹으로 적혀 있었다. 그 아래 빈 표찰 몇 장이 젖은 끈에 매달려 흔들렸다. `보호 대상 외 동행`, `임시 참고 인원`, `재분류 대기`. 이름이 아니라 칸이었다. 누가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누구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지가 먼저 적힌 길이었다.

왕궁 사절은 도착 시각이 적힌 봉서를 두 번이나 펼쳐 보았다. 그는 우리 얼굴보다 표찰을 더 자주 봤다. 성도 서기는 양피 통 끈이 젖었는지만 확인했다. 군수실 병사 둘은 브론의 상자 위에 얹힌 못판 조각과 합금 파편을 다시 묶었다. 다들 같은 산길을 보고 있었지만, 손이 먼저 가는 곳은 달랐다.

그때 아래 굽이에서 사람 소리가 올라왔다.

처음엔 말이 놀란 줄 알았다. 곧 아이 울음과 짐보퉁이가 바위에 쓸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안개 아래에서 피난민들이 한 줄로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젖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사람, 아이를 가슴에 묶은 여자, 깨진 냄비와 소금 자루를 양손에 든 노인, 발목에 피가 굳은 소년. 모두 길 안쪽을 찾으려 했지만, 왕궁행 수레 셋이 이미 그 자리를 막고 있었다.

호위 병사 둘이 먼저 사람 쪽으로 뛰지 않았다. 그들은 수레 사이 간격을 닫았다. 앞 수레 말머리가 안쪽으로 꺾였고, 둘째 수레 바퀴가 바깥 턱으로 밀렸다. 사람을 받아들일 틈이 아니라 상자를 지킬 틈부터 만들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보자마자 발밑을 읽었다. 피난민들이 올라오는 자리는 산길 한가운데가 아니었다. 북벽 쪽 떨림이 흙 밑을 타고 오를 때마다 먼저 풀리는 곳이었다. 배수 홈이 길 위로 다시 튀어나오고, 바퀴가 한 번만 틀어지면 사람 줄이 그대로 벼랑 턱으로 쏠리는 굽이. 누군가 이 지점을 골랐다면, 재난보다 혼선을 노린 것이다.

"간격 닫지 마."

내 목소리보다 세라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앞 수레 난간을 잡고 길 안쪽으로 반쯤 밀어 넣었다. 검을 뽑지 않았다. 칼보다 몸이 먼저 필요했다. 세라의 어깨가 수레를 밀자, 앞 수레와 흙벽 사이에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폭이 생겼다.

"사람 줄부터 열어. 수레는 그대로 세워."

병사 하나가 왕궁 사절을 돌아봤다. 사절의 이마가 바로 굳었다.

"후보님, 상자부터 안쪽으로 붙여야 합니다. 길이 좁습니다."

세라는 난간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 먼저 뺀다."

피난민 줄 앞에서 아이를 안은 여자가 얼음물에 미끄러졌다. 뒤따라오던 노인이 그녀를 받치려다 같이 주저앉았다. 그 순간 산길 아래에서 짧은 진동이 올라왔다. 큰 흔들림은 아니었다. 정확히 굽이 아래만 때렸다. 둘째 수레 오른쪽 바퀴가 진창 홈에 걸리며 비스듬히 박혔다.

브론이 낮게 욕을 삼켰다.

"자연 붕괴가 아니야. 박자가 너무 맞아."

나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세라, 앞줄 고정. 아이 안은 사람부터 왼쪽 말고 안쪽 바위로. 브론, 바퀴 턱 빼. 상자는 나중. 미리엘, 다친 사람과 걸을 수 있는 사람을 갈라. 리에트, 위 사면. 돌이 늦게 굴러오면 바로 알려."

명령이 아니라 자리 배치였다. 이 산길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누가 높은 이름을 가졌는지가 아니었다. 누가 어느 폭을 지킬지였다.

세라는 수레와 사람 사이에 몸을 넣었다. 앞 수레가 반 뼘 안으로 더 물러났다. 반 뼘. 그 작은 폭으로 아이를 안은 여자가 빠져나왔다. 세라가 팔꿈치로 난간을 버티고, 검집 끝으로 바닥을 눌러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아이부터. 짐은 뒤로. 발목 다친 사람은 바람막이 바위 쪽."

그녀 목소리가 길 위를 잘랐다. 방금 전까지 상자 끈만 보던 병사 손도 따라 움직였다. 병사 하나는 아이를 받았고, 다른 하나는 노인 어깨를 잡아 길 안쪽으로 끌었다. 세라가 만든 한 사람 폭이 피난민 줄 전체의 방향을 바꾸었다.

브론은 군수 궤짝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진창에 무릎을 박고 바퀴 밑 돌을 빼냈다. 받침목을 그대로 두면 상자 무게가 바깥 턱으로 더 쏠린다. 그는 고임목을 걷어내고, 옆의 평평한 돌을 뒤집어 바퀴 안쪽에 박았다. 손등이 얼음물에 잠겼다.

"수레를 세우면 상자는 안 굴러. 그 전에 사람부터 빼!"

군수실 병사가 반사적으로 궤짝 위에 손을 올리자 브론이 바로 쳐다봤다.

"그 손 놓아. 지금 네가 잡을 건 상자끈이 아니라 바퀴축이야."

병사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손을 바꿨다. 브론의 손이 이미 축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더 잘 아는 손을 밀어낼 명분은 없었다.

미리엘은 길 안쪽으로 무릎을 꿇었다. 넘어져 정강이가 찢어진 노인을 바람막이 바위 곁으로 옮기고, 숨이 꼬인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발목을 접질렸는데도 자루를 놓지 못하는 남자에게는 자루를 빼앗지 않았다. 자루를 그의 발밑에 눕혀 몸을 기댈 받침으로 만들었다. 물건을 버리라고 하면 버티는 사람도, 물건을 디딤대로 바꾸면 한 걸음 움직인다. 미리엘은 그걸 알고 있었다.

리에트는 위 사면을 훑었다. 눈이 녹은 흙은 여러 곳에서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그중 한 자리를 손끝으로 집었다. 돌이 굴러간 흔적보다 짧게 끌린 자국이 먼저 보였다.

"위에 사람이 있었어. 검은 재도 묻어 있어. 돌이 저절로 밀린 게 아니야."

피난민 줄이 셋으로 갈라졌다.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사람, 부축이 필요한 사람, 당장 눕혀야 할 사람. 같은 길 위에 사람을 살리기 위한 분류가 생겼다. 왕궁 수레의 빈 표찰과는 달랐다. 이건 사람을 나중에 떼어 놓기 위한 칸이 아니라, 지금 같이 살려 두기 위한 순서였다.

그 차이를 왕궁 사절도 봤다. 그는 입을 다물었지만, 손은 여전히 봉서 쪽에 있었다. 성도 서기는 미리엘 쪽으로 붙었다. 그의 시선은 아이 얼굴보다 아이 손등에 먼저 닿았다.

아이 손등에는 가는 붉은 결이 퍼져 있었다. 성흔열만큼 깊지는 않았다. 그래도 낯익었다. 봉인선 떨림이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 남는 얕은 반응. 북방 전초에서 엘레나의 기록을 읽을 때, 나는 비슷한 결을 본 적이 있었다.

미리엘이 숨을 낮췄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에요. 떨림에 닿았어요."

성도 서기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리 관찰이 필요합니다. 반응 기록도 남겨야 하니, 아이를 양피 통 수레 쪽으로—"

"아니요."

미리엘은 이번엔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어머니 품에서 떼면 더 흔들립니다. 기록보다 몸이 먼저예요."

"민감 반응자는 별도 관리가 원칙입니다."

"민감한 건 반응이 아니라 아이 숨입니다."

그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손은 아이 등을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말로 밀려도 손은 물러서지 않았다.

왕궁 사절은 이번엔 내 쪽으로 왔다. 진창을 밟는 발끝이 조심스러웠다.

"베일. 출발이 더 늦어지면 왕궁 입회 순서가 꼬입니다. 피난민 처리는 북방 병력에 맡기고, 호송은—"

"다친 사람과 멀쩡한 사람을 먼저 나눕니다. 수레는 그다음입니다."

"그 판단은 당신 권한이 아닙니다."

세라가 바로 끼어들었다.

"내 앞에서 쓰러지는 사람은 내 권한이야."

그 말은 칼보다 빨리 병사들에게 들어갔다. 세라가 후보 칭호를 공적 문서가 아니라 사람 통로를 여는 데 썼다. 병사 둘이 망설임을 끊고 피난민을 안쪽으로 옮겼다. 왕궁 사절은 그들을 말리지 못했다. 지금 사람을 밀어내면, 피난민보다 병사들이 먼저 그 손을 기억할 것이다.

두 번째 흔들림이 멎자, 산길은 갑자기 너무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자리에서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앞 수레 방수포 아래 봉서 통은 단단히 묶여 있었고, 둘째 수레 궤짝은 반쯤 기운 채 멈췄고, 성도 양피 통 수레는 병사 둘이 방수포만 붙잡고 있었다. 방수포를 붙든 손 가운데 아이를 잡은 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바람막이 바위 곁으로 사람들을 옮기는 동안 피난민들의 말을 주워 들었다. 북사면 아래 임시 대피막이 밤새 두 번 흔들렸다고 했다. 첫 번째 때는 군인들이 길을 비우라며 사람들을 더 위로 몰았고, 두 번째 때는 검은 재가 묻은 흙이 천막 뒤로 쏟아졌다고 했다. 누가 쫓아왔는지는 못 봤다. 다만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이 이 산길로 모이게 되었다.

리에트가 내 옆으로 내려왔다.

"사람을 몰 자리부터 만든 거야. 그냥 길이 무너진 게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벽 떨림, 피난민 이동, 수레 간격 축소. 셋이 같은 박자로 맞물렸다. 누군가 사람과 물건이 가장 쉽게 엉키는 자리를 알고 있었다. 그 자리를 흔들면 사람은 무너지고, 기관은 제 본능을 드러낸다. 왕궁은 입회 순서를 지키고, 성도는 반응자를 분리하고, 군수실은 물증을 닫는다.

브론이 둘째 수레 뒤에서 나를 불렀다.

"에이드리언. 여기."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낮아서 더 급했다.

나는 수레 뒤로 갔다. 겉보기엔 궤짝 잠금이 멀쩡했다. 봉함끈도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금쇠 아래에 얇은 금속판이 지나간 자국이 있었다. 부순 게 아니라 벌렸다. 안쪽에서 필요한 만큼만 손을 넣은 흔적이었다.

브론이 뚜껑을 열었다.

사라진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더 나빴다. 북방 고정선 합금 파편 가운데 출처를 바로 단정할 수 있는 결이 살아 있는 조각 둘, 성도 인장 금속 하나, 봉함 못표식 세 개. 반대로 양피 메모, 병사 재배치 도식, 내가 적어 둔 진동 박자 표시는 남아 있었다. 아무 손이나 털고 간 게 아니었다. 무엇을 지우면 누구 입이 먼저 막히는지 아는 손이었다.

미리엘도 자기 양피 통을 열었다. 문장 해독 메모는 남아 있었다. 성도 인장이 박힌 작은 금속편만 빠졌다. 그녀 얼굴에서 피가 조금 빠졌다.

"글은 두고 물건만 가져갔어요."

브론이 상자 바닥을 손톱으로 긁었다. 검은 가루가 손끝에 묻었다.

"글은 나중에 아니라고 우기면 돼. 죄가 바로 박힌 물건부터 치운 거지."

리에트가 수레 아래 진흙을 맡고, 곧장 위 사면의 끌린 자국과 대조했다.

"손이 하나는 아니야. 셋, 어쩌면 넷. 그런데 같은 곳만 봤어. 식량도 안 건드렸고, 피난민 보퉁이도 안 뒤졌어. 이 궤짝과 양피 통만 벌렸어."

왕궁 사절이 그제야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남은 양피보다 빈자리를 먼저 봤다. 성도 서기도 한 박자 늦게 붙었다. 둘 다 메모보다 빠진 금속을 먼저 세었다. 그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잃은 물건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무엇을 먼저 아까워하는지였다.

상자 안에 남은 조각을 다시 펼치자 오히려 줄이 더 또렷해졌다. 못판 조각 가운데 출처가 흐린 보강편은 남아 있었다. 성도 금속 가운데 문양이 닳아 어느 서고의 것인지 바로 말하기 어려운 파편도 남았다. 빠진 건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북방 고정선 합금 파편은 브론이 공방과 규격을 바로 말할 수 있는 결을 가진 조각이었다. 성도 인장 금속은 미리엘이 회색 종루와 같은 계열이라고 이어 말할 수 있는 모서리였다. 봉함 못표식은 누가 어떤 순서로 올려 보냈는지 읽히는 물건이었다.

브론이 남은 보강편 하나를 들어 빛에 비췄다.

"이름 못 붙이는 건 안 훔쳤네. 겁먹은 놈들이 아주 정직해."

그 말이 맞았다. 지금 사라진 건 값비싼 물건이 아니었다. 바로 말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기관이 두려워하는 건 금속의 무게가 아니라, 그 금속에 붙는 이름이다.

미리엘은 빠진 금속 자리를 오래 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가 누워 있는 바람막이 바위 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저 아이를 먼저 붙잡지 않았으면, 우리는 뭘 잃었는지도 모르고 출발했을 거예요."

그녀 말은 조용했지만, 그 안엔 분노가 있었다. 반응자를 분리하라는 말 앞에서 아이를 사람으로 붙들었기 때문에, 상자도 나중에 다시 열 수 있었다. 사람을 먼저 세운 일이 물증을 놓친 실수가 아니라, 남은 증거를 읽을 시간을 벌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남은 종이들을 바닥에 폈다. 병사 재배치 도식, 피난민들이 올라온 방향, 리에트가 표시한 검은 재 묻은 끌린 자국, 브론이 긁어 낸 상자 바닥 가루, 미리엘이 적은 아이 손등 반응. 종이와 가루와 발자국은 서로 다른 물건인데도 같은 박자로 맞물렸다. 먼저 흔든 손이 사람을 굽이로 몰았다. 그다음 수레 간격을 닫는 손이 사람과 물건을 한꺼번에 막았다. 마지막 손이 상자를 벌려 죄가 또렷한 물증만 골랐다.

우연이면 이렇게 차례가 맞지 않는다.

세라는 왕궁 사절이 접으려던 봉서를 붙잡고 있었다. 사절은 봉서를 돌려받으려 했지만, 세라가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끝줄만 펴 둔 채 나를 불렀다.

"봐."

젖은 종이 아래 작은 글씨가 드러나 있었다.

`후보 편입 거부 시 동행 인원 재분류 가능.`

나는 그 문장을 한 번만 읽었다. 두 번 읽을 필요가 없었다. 왕궁 문턱도 밟기 전에 우리 다섯을 다시 갈라 적을 칸을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세라는 후보로 앞세우고, 브론은 군수 자료 쪽으로, 미리엘은 판정 참고 쪽으로, 나와 리에트는 동행 인원으로 밀어내려 한다. 오늘 산길에서 피난민과 수레를 갈라 보던 손이, 왕궁 안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가를 것이다.

왕궁 사절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 조항은 보호 절차가 지연될 경우를 대비한 행정 문구입니다."

"행정 문구가 사람을 떼어 놓을 때가 제일 위험하지."

세라는 봉서를 놓지 않았다. 그녀 손끝엔 진창과 빗물이 묻어 있었다. 깨끗한 서명칸 위에 흙물이 번졌다. 사절 얼굴이 굳었지만, 그는 세라 손을 억지로 떼지 못했다. 피난민들이 보고 있었고, 병사들도 보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후보 손을 쳐 내면 보호라는 말은 더 빨리 무너진다.

성도 서기가 끼어들었다.

"동행 인원 재분류는 위험 반응자와 민간 피해자를 구분하기 위한—"

미리엘이 아이 쪽을 가리켰다.

"그 아이 이름도 그렇게 바꿀 건가요? 민간 피해자가 아니라 위험 반응자라고."

서기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아이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아이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우리 사정을 모른다. 그래도 자기 아이가 어떤 칸으로 바뀔 뻔했는지는 알아들었다.

그 순간 피난민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아까까지 그들은 그저 길을 막은 수레와 칼 든 병사를 두려워했다. 이제는 누가 자기 이름을 다른 말로 적으려 하는지도 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산길의 힘이 조금 달라졌다. 기관이 가장 싫어하는 건 폭로보다 증인이다. 그리고 사람을 먼저 살려 두면, 증인은 늘어난다.

리에트가 아주 작게 웃었다.

"저쪽이 싫어할 얼굴들이 많아졌네."

"그래서 더 빨리 움직일 거야."

나는 남은 메모를 접으며 말했다.

"상자는 다시 묶어. 남은 조각은 따로 나눠 가져간다. 한곳에 두지 마."

브론은 곧장 움직였다. 그는 출처가 흐린 보강편을 상자에 그대로 넣지 않았다. 하나는 자기 장갑 안쪽에 넣고, 하나는 리에트에게 던졌다. 미리엘은 문장 없는 빈 표식을 소매 안쪽에 밀어 넣었다. 세라는 봉서 끝줄을 손톱으로 한 번 눌러 자국을 남겼다. 원문을 가져갈 수 없으면 눌림이라도 남겨야 했다.

나는 병사 재배치 도식 가장자리에 짧게 적었다. `흔드는 손은 사람을 몰고, 닫는 손은 칸을 씌우고, 훔치는 손은 이름 붙는 물건을 먼저 뺀다.` 문장으로 남기기보다 순서로 남겨야 한다. 왕궁 안에 들어가면 그들은 더 매끈한 말로 같은 일을 할 것이다. 포상, 보호, 입회, 참고 인원, 재분류. 말은 달라져도 손이 움직이는 순서는 숨기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출발 전에 한 번 더 자리를 바꿨다. 브론은 남은 조각을 전부 같은 상자에 넣지 않고, 출처가 흐린 것과 바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따로 갈랐다. 바로 말할 수 있는 조각은 그가 직접 들고, 출처가 흐린 보강편은 리에트가 가져갔다. 미리엘은 아이 이름이 적힌 작은 천 조각을 양피 안쪽에 붙였다. 반응 기록 옆에 이름을 붙여 두면, 나중에 성도 쪽이 그 아이를 숫자로 바꾸려 할 때 첫 줄부터 어긋난다.

세라는 병사 둘을 불러 수레 옆 자리를 다시 정했다. 한 명은 왕궁 상자 옆이 아니라 피난민이 빠져나가는 뒤쪽 통로에 세웠고, 다른 한 명은 성도 양피 통 뒤가 아니라 다친 노인들이 누운 바람막이 바위 옆으로 보냈다. 왕궁 사절은 그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세라가 먼저 이유를 붙였다.

"호송이 늦어지는 이유를 적어야 한다면, 부상자 통로 확보라고 적어. 상자 간격 조정이라고 적지 말고."

그 한 줄 때문에 병사들의 어깨가 달라졌다. 명령을 따른 손이 나중에 장부에서 상자 지연으로만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그걸 보며 세라가 방금 빼앗은 게 봉서 끝줄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어떤 말로 남길지까지 한 박자 먼저 붙잡았다.

리에트는 검은 재가 묻은 돌조각을 내 장갑 위에 잠깐 올려 두었다. 재는 젖었는데도 손끝에 묻어났다. 그냥 산불 재가 아니었다. 오래된 봉함끈을 태울 때 나는 매캐한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브론도 그 냄새를 맡고 눈을 좁혔다.

"문서끈 태운 냄새다. 위에서 흔든 놈들이 그냥 산길만 만진 게 아냐. 훔친 조각을 바로 숨기거나 표식을 지우려면 저 냄새가 남지."

미리엘은 아이 어머니에게 물 한 모금을 더 먹인 뒤 내 쪽으로 왔다. 그녀 손등엔 아이 체온과 진흙이 같이 묻어 있었다.

"저 아이의 이름은 제가 기억할게요. 하지만 기록은 혼자 들고 있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이름이 적힌 천 조각을 한 번 접어 세라에게도 보였다.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론은 아이 손등 반응이 시작된 위치를 짧은 못끝으로 나무 조각에 새겼다. 리에트는 피난민들이 올라온 발자국 중 가장 안쪽으로 휘어진 줄을 돌멩이로 표시했다. 나도 도식 가장자리에 그 셋을 나란히 붙였다. 이름, 반응 시작점, 발자국 방향. 물증은 빠졌지만, 몸에 남은 순서와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아직 우리 손 안에 있었다.

수레가 다시 움직일 준비를 했다. 브론이 바퀴 받침을 새로 박고, 병사 둘이 피난민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뒤쪽 길을 잠깐 열었다. 세라는 앞 수레를 완전히 원래 자리로 돌리지 않았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갈 폭을 끝까지 남겨 두었다. 왕궁 사절은 그걸 봤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 폭을 닫으라고 말하는 순간, 방금 구해 낸 사람들을 다시 밀겠다는 뜻이 되니까.

미리엘은 붉은 결이 번진 아이의 손등을 천으로 감쌌다. 아이 어머니에게는 물을 조금 먹이고, 병사 하나에게는 바람막이 바위 안쪽에 남아 있는 노인 둘을 수레 움직임이 끝날 때까지 지키라고 했다. 성도 서기가 다시 표시하려 하자, 미리엘은 이번엔 병사에게 먼저 말했다.

"이름부터 물어 주세요. 반응 말고."

병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냐."

아이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 이름을 말했다. 짧은 이름이었다. 성도 서기의 깃펜이 잠깐 멈췄다. 칸 이름보다 사람 이름이 먼저 나온 자리였다. 그 작고 짧은 순서가, 오늘 산길에서 우리가 지킨 가장 위험한 물건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 이름을 기억했다. 모든 증거가 상자 안에만 있는 건 아니다. 누가 어떤 이름을 먼저 부르느냐도 증거가 된다.

왕궁 사절은 봉서를 다시 접었다. 다만 세라가 눌러 둔 끝줄 자국은 종이 위에 남았다. 그가 그걸 지우려 엄지로 문지르는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저 문장이 그에게도 아프다는 걸. 끝줄이 아무 의미 없는 행정 문구라면 그렇게 문지를 이유가 없다.

브론이 내 옆에서 낮게 말했다.

"빼앗긴 건 합금 두 조각, 인장 하나, 못표식 셋. 남은 건 저놈들 손버릇 전부."

"그리고 끝줄 하나."

세라가 봉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덧붙였다.

"거부하면 우리를 떼어 놓겠다는 끝줄."

미리엘이 아이 쪽을 보며 말했다.

"이름을 반응으로 바꾸고, 동료를 동행 인원으로 바꾸고, 증거를 민감 물품으로 바꾸는 방식이 같아요."

리에트가 위 사면을 한 번 더 훑었다.

"다음에는 흔드는 자리보다 빼 가는 손이 먼저 보일 거야. 오늘은 저쪽이 우리를 시험했지만, 자기들도 습관을 남겼으니까."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다음 싸움의 계산이었다.

수레가 움직였다. 바퀴가 얼음막을 깨며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피난민들은 길 안쪽 바람막이 바위 뒤로 물러섰고, 몇몇은 우리 쪽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 인사를 받을 시간은 없었다. 왕궁행 행렬은 다시 포상 호송처럼 꾸며졌고, 사절은 도착 시각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길은 방금 전과 같지 않았다.

앞 수레는 왕실 상자를 싣고도 사람 한 명 폭을 끝까지 비워 둔 채 움직였다. 둘째 수레 바퀴에는 브론이 새로 박은 받침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수레 방수포 아래에는 미리엘이 빼돌린 빈 표식이 하나 줄었다. 세라의 손가락엔 봉서 끝줄을 누른 감각이 남아 있었고, 리에트 장갑에는 검은 재가 묻은 돌조각이 들어 있었다. 나는 병사 재배치 도식과 피난민 이름 하나를 장갑 안쪽에 넣었다.

잃은 금속은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먼저 쫓을 것은 금속 하나가 아니었다. 누가 사람을 몰고, 누가 칸을 닫고, 누가 이름 붙는 증거를 먼저 치우는지. 그 순서가 우리를 왕궁 안쪽으로 데려갈 것이다. 금지된 서고의 이름은 문 위에만 적혀 있지 않다. 사람을 다른 칸으로 바꾸는 손끝에도 적혀 있다.

세라가 내 옆에서 낮게 말했다.

"거부하면 우리를 떼어 놓을 거야."

나는 앞서 흔들리는 왕실 수레와, 그 뒤 군수 궤짝, 맨 뒤 성도 양피 통을 차례로 봤다. 같은 길 위의 세 칸. 우리를 그 사이에 다시 나눠 끼우려는 손.

"그럼 저 끝줄부터 먼저 빼앗아야겠네."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봉서를 접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었다. 병사들이 보기엔 젖은 문서를 말리는 모양이겠지만, 그녀 엄지는 끝줄을 가리지 않았다. 저 문장이 사라지면 우리도 흩어진다. 그러니 저 문장을 먼저 붙잡아야 한다.

왕궁에 닿으면 포상부터 보지 않는다. 숙소도, 서명대도, 후보 편입 자리도 먼저 보지 않는다. 누가 사람을 어떤 칸으로 다시 적으려 드는지, 누가 반응을 이름보다 앞세우는지, 누가 죄가 박힌 물건부터 숨기는지부터 본다.

산길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제 조용한 길을 믿지 않았다. 조용한 길 위에서도 손은 움직인다. 수레가 흔들릴 때마다 봉서 끝줄이 젖은 빛을 받았다.

그 끝줄이, 왕궁 안에서 우리가 먼저 빼앗아야 할 문이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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