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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종루 돌파

좁은 목을 빠져나오자 종루 안쪽 공간이 확 넓어졌다.

등 뒤 경사로는 사람 하나가 옆으로 돌아야 겨우 지나올 틈이었다. 그 틈 아래에서는 기사단식 호출과 짧은 성도식 구령이 바람에 찢겨 올라왔다. 앞은 반원형 작업칸이었다. 왼쪽 벽에는 허리 높이에 유리병 홈이 층층이 파였고, 오른쪽에는 납패와 서판을 세워 두는 얕은 받침이 길게 이어졌다. 바닥 한가운데에는 사람 발자국보다 병 받침이 남긴 둥근 자국이 더 많았다. 누군가를 눕혀 치료하는 방이 아니라, 병과 기록과 사람을 정해진 순서로 맞춘 뒤 위로 넘기던 절차실이었다.

천장 가까이에는 가는 창 셋이 있었다. 창틈마다 먼지가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누군가 위쪽에서도 우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안쪽 정면에는 둥근 철문이 닫혀 있었고, 문 앞 바닥에는 반원형 발자리 네 개가 같은 줄에 새겨져 있었다. 그 바깥으로 조금 떨어진 다섯째 선 하나만 반 발 앞에 나와 있었다. 넷은 같은 줄. 마지막 하나는 앞으로 밀려난 자리.

세라는 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방패를 돌려 뒤쪽 틈 절반을 가렸다. 복귀 명령서는 아직 방패 끈 안쪽에 반쯤 접힌 채 꽂혀 있었다. 브론은 왼쪽 선반 아래로 무릎을 넣고 돌받침을 두드렸고, 미리엘은 오른쪽 받침 앞에 앉아 먼지에 묻힌 점각을 손톱으로 걷어 냈다. 리에트는 활을 비껴 들고 천장 창 셋의 각도를 차례로 재며 섰다. 나는 철문 앞 발자리와 병 홈, 서판 받침의 간격을 눈으로 이었다.

누가 무슨 말을 먼저 하기도 전에 방 전체가 우리에게 자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브론이 첫 번째 받침을 두드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속 빈 칸이 섞였어. 병 숨기는 데가 아니야. 아래에서 위로 줄을 올리는 도관이 붙었다.”

미리엘은 납가루에 덮인 글자를 손끝으로 닦았다.

“`병막 분획 전, 기록 담당 확인.`”

그녀가 다음 줄을 다시 문질렀다.

“`반응자 이격 시 내용 흔들림.`”

브론이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욕을 눌러 삼키는 소리였다.

“사람을 고치는 방이 아니라네. 흐트러지지 않게 묶어 두는 방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발자리를 더 살폈다. 앞줄 왼쪽은 발바닥 전체가 깊게 닳아 있었다. 무게를 오래 버틴 자리였다. 뒤줄 오른쪽은 발뒤꿈치 쪽만 파였다. 몸을 반쯤 틀어 뒤를 보며 서 있던 사람 자리였다. 다섯째 선은 얕았다. 자주 밟은 자리가 아니라, 필요할 때만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자리였다. 그 앞 손홈 가장자리는 손가락으로 닳은 모양이 아니었다. 납작한 판을 끼워 넣고 빼며 매끈해진 홈이었다.

아래쪽 쇳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누군가 좁은 목 아래에서 쇠막대를 끼워 틈을 넓히고 있었다. 세라는 그 소리를 듣고도 뒤를 보지 않았다. 방패를 반 치 아래로 내려 바닥에 물렸다. 밀려도 바로 뒤로 튕기지 않게 버티는 자세였다.

나는 짧게 말했다.

“둘로 나눠야 해.”

세라가 바로 받았다.

“말해.”

“세라와 브론은 뒤쪽을 버티면서 왼쪽 선반의 각도를 바꿔. 분획부터 확보해야 해. 미리엘은 오른쪽 글자를 읽고, 리에트는 위 창 시야를 끊어. 나는 안쪽 문 반응을 본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손은 사람보다 병과 기록부터 노릴 거야.”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오늘도 사람보다 물건이 먼저냐.”

“그래서 우리가 먼저 집어야 해.”

세라는 방패 모서리를 바닥 원형 자국에 맞췄다. 그녀의 선택은 말보다 먼저 자세로 드러나 있었다. 복귀 명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직 현장 지휘를 놓지 않은 사람의 자리였다.

“셋에 맞춰 나눈다. 브론, 내 왼쪽. 리에트, 둘째 창이나 그 위쪽에서 손이 보이면 바로 끊어. 미리엘, 필요한 줄만.”

리에트는 대답 대신 화살 두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미리엘은 이미 얇은 납 조각 하나를 받침 아래에서 빼내고 있었다.

“분획 순번표예요. `본체 전`, `유예용`, `이송 전 안정`, `왕좌 기록 동반 시 재확인`.”

왕좌 기록.

그 말에 내 시선이 안쪽 철문으로 달라붙었다. 나는 품 안에서 뒤속판 조각을 꺼냈다. 상단 정리칸에서 건진 조각이었다. 문장을 고칠 권한은 다섯 줄 동시 증명 때만 열린다고 새겨진 판. 손홈 폭과 거의 맞았다.

“`왕좌 기록` 뒤에 더 있어?”

미리엘이 눈을 찌푸렸다.

“먼저 열리는 쪽을 맞춰야 보여요. 글자 절반이 받침 안으로 들어가 있어요.”

세라가 짧게 물었다.

“버틸 시간.”

브론은 왼쪽 선반 밑 돌받침 둘을 발로 차 보며 말했다.

“지금은 버텨. 지키는 건 오래 못 해. 선반이 미끼고, 진짜 물건은 뒤쪽 칸에 있을 가능성이 커.”

그 말이 끝나자 아래 좁은 목 안쪽에서 갈퀴가 돌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단순 돌파 소리가 아니었다. 손부터 뻗어 물건을 낚아채려는 소리였다.

“지금 연다.”

세라의 말과 동시에 우리는 갈라졌다.

브론은 왼쪽 선반 첫 줄 아래로 몸을 밀어 넣어 돌받침 하나를 비틀었다. 세라는 방패로 바람목 입구와 작업칸 사이를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아래에서 튀어나오는 손이 곧장 선반이나 내 쪽으로 뻗지 못하게 각을 죽이는 자세였다. 리에트는 천장 둘째 창 아래로 옮겨 섰고, 미리엘은 오른쪽 받침 앞에 납 조각들을 줄맞춰 놓았다.

나는 발자리 네 개 바깥을 한 번 돌았다. 긁힘 방향이 서로 달랐다. 앞줄 왼쪽은 발끝이 안쪽을 향했고, 뒤줄 오른쪽은 발뒤꿈치가 바깥으로 비틀려 있었다. 문이 열릴 때 누군가는 전면 하중을 받고, 누군가는 뒤를 보며 기습을 막았다. 다섯째 자리는 앞으로 뛰어나가는 자리라기보다, 네 사람의 줄이 맞았는지 확인하는 마지막 반응자가 서는 자리였다.

“세라. 앞줄 왼쪽.”

“브론.”

“세라 오른쪽 뒤. 발끝 말고 뒤꿈치부터.”

브론이 투덜거리면서도 그대로 섰다.

“사람 발도 기계 부품처럼 쓰는군.”

“미리엘, 리에트는 뒤 줄.”

미리엘은 납 조각을 쥔 채 뒤쪽 반원 발자리에 섰고, 리에트는 창을 보다가 한 박자 늦게 뒤쪽 마지막 자리에 올라섰다.

“왜 내 자리가 제일 불편하지?”

“위 보는 사람 자리야.”

리에트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나는 다섯째 선에 섰다. 발끝이 다른 넷보다 반 발 앞으로 나갔다. 손홈에 뒤속판을 끼워 넣자 철문 안에서 묵직한 금속 마찰음이 났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쪽 어디선가 잠금쇠가 반쯤 걸린 채 버티는 소리만 났다.

미리엘이 받침 글을 더 훑었다.

“`병막, 기록, 반응선 동시 접촉.` 손만으로는 안 돼요. 왼쪽 첫 칸도 채워야 해요.”

브론이 선반 안쪽을 들춰 보며 욕을 삼켰다.

“병 칸부터 비어 있단 말이지.”

왼쪽 첫째 줄 가운데 홈은 유리병 하나가 정확히 들어갈 크기였다. 그러나 비어 있었다. 홈 둘레에 은가루 얼룩만 남아 있었다. 오래전에 사라진 자국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도 뭔가가 꽂혀 있었던 자리였다.

세라가 방패를 뒤로 민 채 물었다.

“대신 넣을 건.”

“분획 잔재라도 있으면 반응해요.”

미리엘의 답이 끝나기도 전에 브론이 선반 밑 작은 서랍을 뜯었다. 얇은 석분이 쏟아졌고, 그 안에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은회색 유리관 세 개가 굴러 나왔다. 두 개는 바싹 말라 있었고, 하나에는 달빛처럼 흐린 액체가 손톱만큼 남아 있었다.

미리엘의 눈이 날카롭게 좁아졌다. 그녀는 곧장 집지 않았다. 먼저 손수건을 꺼내 유리관 밑을 받치고, 남은 액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병목을 세웠다.

“완성형은 아니지만 안정화 분획이에요. 오래됐는데도 아직 죽지 않았어요.”

내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엘레나에게 쓸 수 있어?”

“완치는 아니에요.”

미리엘은 그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유리관을 기울이지 않도록 두 손으로 감싸며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시간을 벌 수 있어요. 열이 퍼지는 속도를 늦추고, 다음 재료를 찾을 때까지 버티게 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놓치면, 누가 가져가도 치료보다 보관 절차에 먼저 묶일 거예요.”

희망은 짧았다. 그래서 더 날카로웠다. 나는 왼쪽 첫 홈을 가리켰다.

“넣어.”

미리엘이 유리관을 조심히 홈에 끼웠다. 그 순간 철문 아래 새겨진 선들이 은빛으로 한 번 스쳤다. 손홈 속 뒤속판이 뜨거워졌다. 발자리 네 곳 아래에서도 낮은 울림이 퍼졌다. 다섯 사람이 제대로 섰고, 병과 기록이 같은 줄에 올라왔다.

“한 줄 더.” 내가 말했다. “기록.”

오른쪽 받침 가운데에는 서판 한 장이 빠져 있었다. 브론이 자기 허리주머니를 뒤져 상층에서 챙겨 온 얇은 금속띠를 내밀었다.

“폭은 맞아. 문장은 내가 못 읽지만.”

미리엘이 금속띠를 받침에 끼우자, 철문 오른편에 비어 있던 홈 하나가 덜컥 내려앉았다. 안쪽 공기가 빨려들 듯 울었다.

바로 그때 아래 목 안쪽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기사단 장갑이 아니었다. 성도식 회백색 장갑 위에 철 갈퀴를 덧댄 손이었다. 손은 세라의 다리나 브론의 목이 아니라 왼쪽 선반 홈으로 향했다. 남은 분획관을 먼저 낚아채려는 움직임이었다.

세라의 방패가 옆으로 번쩍 돌았다. 갈퀴가 방패 테두리를 긁으며 튕겨 나갔다.

“브론!”

브론은 대답 대신 운반틀 다리를 선반 아래 끼워 비틀었다. 왼쪽 선반 둘째 줄이 통째로 한 뼘 내려앉으며 아래에서 올라오던 두 번째 손목을 돌기 틈에 끼웠다. 비명은 짧았다. 브론은 거기서 더 누르지 않았다. 손목을 부수는 데 힘을 쓰는 대신, 선반 각을 바꿔 통로 폭을 줄였다.

“막는 건 네 몫, 죽이는 건 나중 일이다.”

리에트의 화살이 둘째 창을 스쳤다. 위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고, 다음 순간 가느다란 쇠침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 벽에 박혔다.

“위 둘, 아래 셋.” 리에트가 말했다. “위는 기록칸을 본다.”

미리엘은 흔들리지 않고 다음 줄을 읽었다.

“`분획 확보 후 반응자 전진.` 에이드리언, 한 발 더.”

나는 발끝을 다섯째 선 끝까지 밀었다. 손홈 안 판이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철문이 손가락 두 개 넓이만큼 열렸다. 그 틈으로 차갑고 마른 냄새가 새어 나왔다. 약 냄새보다 납과 먼지, 오래된 천과 쇳가루 냄새가 먼저 왔다.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병을 기록과 함께 봉함하던 칸의 냄새였다.

브론이 이를 악문 채 선반을 버텼다.

“더 빨리.”

나는 틈에 손부터 넣지 않았다. 안쪽 구조를 먼저 봤다. 문 안에는 또 하나의 작은 받침이 있었고, 거기엔 손이 아니라 표를 밀어 넣는 긴 홈이 있었다. 정면에는 다섯 줄이 새겨진 얇은 벽면이 있었다. 네 줄에는 각기 다른 문양이 옅게 남아 있었다. 맨 아래 한 줄만 지나치게 매끈했다. 세월에 닳은 게 아니라 일부러 갈아 낸 표면이었다.

미리엘이 내 어깨 너머로 숨죽여 말했다.

“비워 둔 게 아니라… 깎아 낸 거예요.”

세라가 뒤를 막으며 물었다.

“읽혀?”

“조금.”

나는 품 안 납패들 중 하나를 꺼냈다. `봉인 서고 외부 인계 금지`가 새겨진 패였다. 안쪽 홈 폭과 맞았다. 패를 밀어 넣자 홈이 정확히 물렸고, 철문이 가슴 넓이만큼 더 열렸다.

그 순간 위 창 셋 중 하나가 크게 열리며 검은 줄이 아래로 떨어졌다. 갈퀴 달린 줄이었다. 줄끝은 내 어깨가 아니라 오른쪽 받침 금속띠를 향했다. 기록부터 빼앗으려는 손놀림이었다.

리에트의 화살이 줄을 반쯤 끊었다.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 줄끝 갈퀴가 금속띠를 긁고 지나가며 받침을 흔들었다. 철문이 다시 닫히려는 소리를 냈다.

“고정이 풀려요!”

브론이 왼손으로 선반을 버티면서 오른손에 든 해머를 받침 쪽으로 던졌다. 해머 자루 끝이 갈퀴 줄을 후려쳐 금속띠를 제자리로 밀었다. 그 짧은 틈을 세라가 파고들었다. 그녀는 방패로 아래에서 뻗은 세 번째 손을 바닥에 눌러 찍고, 빈 왼손으로 흔들리던 받침 모서리를 정확히 눌러 고정했다.

“열어.”

그 한마디에 남은 망설임이 사라졌다. 미리엘은 금속띠를 더 깊이 밀고, 리에트는 위 창을 향해 두 번째 화살을 걸었다. 나는 손홈의 뒤속판을 끝까지 눌렀다.

철문이 완전히 젖혀졌다.

안쪽 칸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좁았다. 그런데도 벽 네 면에는 병 홈보다 기록 홈이 더 많았다. 중앙 받침에는 작은 수정 원통 두 개와 얇은 서판 셋, 은실로 감은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유리병 안 액체는 완전히 맑지 않았다. 바닥에는 가는 은가루가 가라앉아 있었고, 그 위로 희미한 빛이 느리게 돌았다.

미리엘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분획 본체에 가장 가까운 거예요.”

브론이 뒤에서 물었다.

“옮기면 죽냐.”

“잘못 옮기면요. 순서 맞추면 살아요.”

“그럼 순서 말해.”

미리엘은 유리병부터 손대지 않았다. 먼저 수정 원통 둘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아래 깔린 얇은 받침천을 살폈다. 천에는 작은 화살표가 박음질되어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이 아니라,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옮기라는 표시였다.

“병을 먼저 들면 흔들려요. 원통 하나를 병 바닥에 붙이고, 받침 천째로 들어야 해요. 다른 원통은 기록 대조용. 둘 다 가져갈 수는 없어요.”

“어느 쪽.” 세라가 물었다.

나는 벽면 네 줄을 봤다. 흐릿한 왕관 문양이 남은 줄 옆 원통에만 금속 가장자리를 따라 같은 흠이 나 있었다.

“왕관 문양 있는 쪽.”

미리엘은 바로 그 원통을 유리병 밑에 붙였다. 은가루가 병 안쪽에서 잠깐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는 받침천까지 감싸 유리병을 품에 넣었다. 완치라는 단어를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의 시간이 조금 늘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손끝이 떨렸다.

나는 첫 서판을 들었다. 먼지를 털자 문장이 나타났다.

`성흔열 유사 분기. 본체 전 분획은 반응자 동반 시 안정.`

둘째 줄.

`치료라 적지 말 것. 지연과 고정만 허한다.`

셋째 줄.

`왕좌 기록 대조 전, 이름 결정 금지.`

이름 결정 금지.

나는 곧장 고개를 들지 않았다. 먼저 벽면 다섯 줄을 다시 봤다. 넷째 줄 곁에는 흐릿한 왕관 문양이 남아 있었다. 다른 줄에는 각기 다른 도장 자국과 문양의 선이 희미하게 버텼다. 마지막 줄만 문양이 없었다. 대신 너무 매끈했다. 뭔가가 남을 때마다 다시 갈아 없앤 표면 같았다.

미리엘이 낮게 말했다.

“다른 줄은 세월에 흐려졌어요. 이 줄은 흐려진 게 아니에요. 남지 못하게 계속 밀어낸 것 같아요.”

세라가 문밖에서 버티며 말했다.

“핵심만.”

나는 서판과 양피를 먼저 챙겼다. 유리병은 미리엘 품 안에, 왕관 문양과 같은 흠이 있는 수정 원통은 그 옆에 고정했다. 얇은 양피 한 장에는 이름이 아니라 절차 순서가 적혀 있었다.

`왕좌 앞 다섯 줄 확인.`

`넷은 기록한다.`

`하나는 비운다.`

`비운 줄만이 문장을 다음 시대에 남긴다.`

내 손끝이 잠깐 멈췄다. 다섯째는 줄 밖으로 밀린 사람이 아니었다. 줄을 비워야 다음 기록이 남는 자리였다. 비운다는 말이 숨긴다는 뜻인지, 살려 둔다는 뜻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성도와 왕국이 그 빈 자리를 지웠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리에트가 위쪽을 보며 낮게 경고했다.

“더 온다.”

이번에는 위만이 아니었다. 아래 목 안에서도 장비 부딪히는 소리가 거칠게 올라왔다. 기사단식 발소리와 성도식 짧은 구령이 뒤섞였다. 서로 손발이 맞는 소리는 아니었다. 누가 먼저 잡을지 다투면서도, 결국 같은 칸을 향해 몰려오는 소리였다.

세라가 방패를 뒤집어 잡았다.

“브론, 선반 버리고 오른쪽 각 깨.”

“좋지.”

브론은 더 버티지 않았다. 버티던 선반을 일부러 놓아 아래에서 올라오던 팔 둘을 함께 처박은 뒤, 운반틀 다리로 오른쪽 받침 기둥을 후려쳤다. 서판 받침이 비스듬히 꺾이며 통로 폭이 줄었다. 사람 둘이 나란히 올라올 수 없게 만드는 한 번의 타격이었다.

리에트는 위 창 셋을 훑더니 마지막 화살을 가장 좁은 틈에 꽂아 넣었다. 깃이 걸리며 창 하나가 절반쯤 막혔다. 완전한 봉쇄는 아니었지만, 위에서 아래를 보는 시야를 깨뜨리기엔 충분했다.

“지금 내려와도 한 줄로밖에 못 와.”

세라가 턱짓했다.

“그럼 우리도 한 줄로 빠진다.”

“어디로.” 브론이 물었다.

나는 안쪽 칸 벽면 끝을 가리켰다. 기록 홈 아래, 먼지에 덮인 좁은 문틀 자국이 있었다. 철문이 열리며 드러난 틈이었다. 이 작업실은 칸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보관칸 뒤에 더 좁은 인계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저 뒤.”

미리엘이 문틀 윗면을 빠르게 훑었다.

“`상위 문서고 전, 외부 보고 분리.`”

브론이 짧게 웃었다.

“또 사람보다 종이가 먼저 지나가던 길이군.”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좁은 문틀 밑에는 바퀴 홈 두 줄이 살아 있었다. 최근까지도 뭔가가 끌려 나간 흔적이었다. 홈 사이 간격은 사람이 아니라 좁은 운반틀이 지날 너비였다. 한 줄은 깊고, 다른 한 줄은 얕았다. 빈 틀은 아래로 내려오고, 가득 찬 틀은 위로 올라간 자국처럼 보였다.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이 안쪽 통로를 썼다.

나는 문틀 오른쪽 받침을 눌러 봤다. 돌 하나가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안쪽에서 얇은 금속 울림이 길게 번졌다.

“멈춰.”

세라가 즉시 방패를 더 단단히 세워 버텼다.

“함정?”

“아니. 알림.”

브론이 와서 발등으로 문틀 밑을 두드렸다. 좌우 소리가 달랐다. 왼쪽은 꽉 찬 돌 소리였고, 오른쪽은 안이 비어 있고 금속을 덧댄 듯한 소리였다.

“문 하나 더 있다. 바로 뒤에서 떨어지는 식이야. 모르면 허리 잘린다.”

미리엘은 유리병을 품에 안은 채 문틀 글을 더 읽었다.

“`분획선 통과 후, 기록 우선.` … 그 다음은 닳아서 안 보여요. 잠깐.”

그녀가 손끝으로 먼지를 밀어 냈다.

“`공적 초안 상행 전 대조.`”

브론 얼굴이 일그러졌다.

“약도 올리고 기록도 올리고, 칭찬문도 같이 올렸단 소리냐.”

나는 품 안 서판 모서리를 눌렀다. 방금 챙긴 서판 뒷면에도 비슷한 홈이 손끝에 걸렸다. 뒤집어 보니 앞면 문장 아래에 더 얇은 줄이 새겨져 있었다.

`왕좌 기록 보고 초안 - 벨로네 생환 공적 우선.`

아직 우리가 이 방을 빠져나가지도 못했는데, 세라 이름이 먼저 올라간 보고 초안이 준비돼 있었다. 생환, 공적, 영웅. 사람들보다 빨리 올라가는 말들이었다.

세라는 뒤를 막은 채 물었다.

“뭐가 나왔지.”

“우릴 데려갈 말.”

“짧게.”

“수액보다 빨리 올라가는 보고서.”

세라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방패를 한 번 비틀어 아래에서 올라오는 갈퀴를 다시 튕겨 냈다. 금속 긁히는 소리와 함께 성도식 짧은 욕설이 터졌다.

그 순간 위쪽 둘째 창 바깥에서 다른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회수 기록 우선. 병 손대지 마라, 표부터—”

기사단 말투도, 성도 말투도 아니었다. 딱딱하게 줄만 읽는 낯선 목소리였다. 리에트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셋째 손.”

“위냐 아래냐.” 내가 물었다.

“둘 다 아니고, 먼저 가져가는 쪽.”

브론이 혀를 찼다.

“좋네. 다들 사람보다 표가 먼저라 말이 통하는군.”

나는 안쪽 좁은 문틀 밑 바퀴 홈을 다시 봤다. 가득 찬 틀이 지나간 깊은 홈과 빈 틀이 내려온 얕은 홈. 오른쪽 받침이 먼저 울린 이유도 이제 보였다. 꽉 찬 쪽이 지나갈 때만 안쪽 경첩이 반응하도록 짜여 있었다. 그렇다면 빈 틀 각으로 속이면 알림을 늦출 수 있었다.

“브론. 오른쪽 홈 밑 판 하나 들어 올릴 수 있어?”

브론이 한 번 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 수는 있지. 대신 통로 각이 바뀐다.”

“그게 필요해. 가득 찬 틀이 지나는 각도를 빈 틀이 지나는 각도로 꺾으면 알림이 늦어.”

세라가 짧게 말했다.

“해.”

브론은 운반틀 다리 끝을 바퀴 홈 틈에 끼워 지렛대처럼 눌렀다. 돌판이 완전히 들리진 않았지만 오른쪽 홈이 손가락 하나만큼 어긋났다. 안쪽 금속 울림이 한 번 끊기더니, 대신 문틀 위에서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미리엘이 바로 말했다.

“맞아요. 정답을 바꾼 게 아니라 순서를 늦췄어요.”

“얼마나.”

“문 하나 열 시간.”

세라가 턱을 세웠다.

“충분하다.”

아래쪽 압박은 더 세졌다. 눌린 손목을 빼낸 누군가가 통로 아래서 쇠고리를 세 번 연달아 울렸다. 그 신호에 맞춰 바람목 쪽에서 짧게 돌진하는 소리가 났다. 한 줄로만 지나갈 수 있는 통로에서 세라의 방패를 통째로 뒤로 밀어내려 했다.

세라는 버티기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발을 반 뼘 옮겨 바닥에 남은 원형 병 자국과 방패 끝을 맞췄다. 방패 아래가 미끄러지지 않는 자리였다.

“브론.”

“알아.”

브론은 떨어진 선반 널판 하나를 세라의 발목 뒤쪽에 끼워 넣었다. 뒤로 밀려도 한 번 걸리도록 만든 임시 버팀목이었다. 리에트는 그 박자에 맞춰 위 창 가장 좁은 틈으로 화살을 쏘았다. 이번엔 사람 비명이 아니라 줄 하나가 끊기며 장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위 한 놈은 기록 못 잡는다.”

미리엘은 유리병을 품은 채 내 옆으로 붙었다.

“에이드리언, 서판 마지막 줄 더 보여요?”

나는 품 안 서판을 반쯤 빼 그녀에게 기울였다. 그녀는 한 번 읽고 바로 말했다.

“`벨로네 생환 공적 우선` 뒤에 아주 얇게 덧쓴 글줄이 있어요. `반응자 기여는 보관자 확인 후 재분류.`”

보관자 확인 후 재분류.

내 이름을 지우는 식이었다. 아니, 이름조차 올리지 않고 필요할 때만 다른 칸으로 옮겨 적는 식이었다. 세라에게는 영웅담을 남기고, 나에게는 확인이 끝날 때까지 이름 없는 기여만 남긴다. 그러면 엘레나 치료에 필요한 절차도, 로웬이 남긴 줄도, 파티가 함께 버틴 싸움도 모두 다른 사람의 말로 옮겨진다.

세라가 뒤에서 물었다.

“내 이름으로 썼나.”

나는 숨기지 않았다.

“그래.”

세라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그럼 더 빨리 가져간다. 안쪽.”

그 말뿐이었다. 죄책감도 변명도 없었다. 방패가 한 번 더 앞으로 나갔다. 아래에서 밀어붙이던 손들이 동시에 주춤했다. 세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질 공적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 공적이 우리를 잡는 끈이 되기 전에 원본을 빼앗기로 했다. 그게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나는 안쪽 좁은 문틀 옆 벽을 더듬었다. 먼지에 덮였지만 손마디에 걸리는 선이 있었다. 세로로 길게 파인 얕은 홈, 그 옆에 아주 작은 점 세 개. 상단 바람목 봉쇄문에서 봤던 배열과 닮았지만, 이 선은 사람의 자리보다 물건과 사람이 닿는 순서를 읽었다.

“미리엘. 유리병 잠깐.”

“여기서요?”

“완전히 놓는 거 아니야. 닿기만.”

그녀가 망토를 조금 열어 유리병 바닥을 홈 끝에 가볍게 대자, 점 세 개 중 가운데만 희미하게 빛났다.

“기록축도.”

미리엘이 수정 원통을 옆 점에 갖다 대자 두 번째 점도 켜졌다.

브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남은 하나는 사람인가.”

나는 손을 홈 끝 매끈한 부분 위에 올렸다. 세 번째 점이 늦게 살아났다. 바로 다음 순간 문틀 안쪽에서 가는 돌기 하나가 접히며 얇은 문이 사람 한 명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큼 열렸다.

안쪽은 더 어두웠다. 그러나 먼지 냄새 외에 새로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잉크가 오래 마른 냄새. 문서고로 이어지는 길 냄새였다.

브론이 짧게 웃었다.

“약, 기록, 사람.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여는군.”

“그러니까 치료가 아니라 절차예요.” 미리엘이 말했다.

바로 그때 아래에서 다시 큰 충격이 올라왔다. 세라가 한 발 뒤로 미끄러졌다가 버팀목에 걸려 멈췄다. 방패 위로 갈퀴 두 개가 번쩍 올라왔다.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그중 하나를 방패 모서리로 끊어 냈다.

“안으로.”

세라는 명령처럼 말했다.

“브론 먼저 확인. 리에트 뒤 시야. 미리엘 중앙. 에이드리언, 서판 놓치지 마.”

브론이 좁은 틈에 상체를 먼저 밀어 넣고 안쪽 바닥을 두드렸다.

“발판 세 칸. 가운데 비었다. 왼쪽으로 붙어.”

리에트가 위 창을 향해 화살을 겨눈 채 물었다.

“안쪽에서 쏠 자리 있나.”

“문턱 지나면 오른쪽 틈.”

미리엘은 유리병과 수정 원통을 품에 안은 채 세라 어깨를 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망토 자락에 묻은 은가루가 어둠 속에서 짧게 빛났다. 나는 서판과 양피를 품 안 깊이 밀어 넣고 마지막으로 작업칸을 돌아봤다.

선반은 무너졌고, 받침은 기울었고, 병 홈에는 하나의 빈 자리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안쪽 칸 벽면 다섯 줄 중 깎여 나간 한 줄만은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해 보였다. 문양이 없어서 더 오래 남는 자리 같았다.

`넷은 기록한다.`

`하나는 비운다.`

그 뜻을 아직 다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다섯째는 밀려난 누락자가 아니었다. 비워 두는 방식으로만 다음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자리였다. 누군가가 그 자리를 왕좌 앞에서 직접 보았고, 누군가는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매번 갈아 냈다.

세라가 아래에서 다시 밀려 올라오는 충격을 버티며 말했다.

“에이드리언.”

나는 고개를 들었다.

“먼저 들어가.”

브론이 안쪽에서 낮게 외쳤다.

“여기 위로 바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문서고 쪽이다. 그런데 누가 먼저 다녀갔어. 바퀴 홈이 아직 살아 있다.”

미리엘이 품 안 원통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럼 위도 이미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바깥이 아니라 위였다. 누군가는 우리가 이 칸에서 무엇을 찾을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슨 이름으로 우리를 부를지도 먼저 정해 두고 있었다. 생환, 보호, 공적, 영웅. 사람보다 빨리 올라가는 말들이었다.

나는 품 안 서판 모서리를 한 번 더 눌렀다. 손끝에 얇게 덧쓴 글줄이 다시 걸렸다.

`왕좌 기록 보고 초안 - 벨로네 생환 공적 우선.`

`반응자 기여는 보관자 확인 후 재분류.`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일을 누군가 먼저 완성해 두려 하고 있었다.

나는 서판을 접어 넣고 말했다.

“서두르자. 위에서 우리 이름을 먼저 정하기 전에.”

세라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하라 그래.”

방패가 아래에서 올라오는 갈퀴를 한 번 더 튕겨 냈다.

“우리가 먼저 원본을 가져가면 된다.”

그 말에 미리엘이 유리병을 품에 더 깊이 묻었고, 리에트는 마지막 화살을 안쪽 오른쪽 틈에 걸었다. 브론은 문턱 너머에서 손을 내밀어 미리엘이 가운데 빈 칸을 밟지 않게 잡아 주었다. 누구도 서로를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 하나씩 들고, 막고, 읽고, 보는 일을 맡았다. 그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가장 정확한 믿음이었다.

우리는 무너진 작업칸과 기울어진 선반 사이를 스치며 보관칸 뒤에 숨은 더 좁은 인계 통로로 몸을 밀어 넣었다. 뒤에서는 회수하러 뻗은 손들이 여전히 사람보다 기록과 병을 먼저 찾았다.

인계 통로 안쪽 벽에는 작은 금속 표찰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대부분은 뒤집혀 있었고, 몇 개는 빈 채였다. 그런데 가장 앞 표찰 하나만 새 밀랍으로 다시 붙어 있었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름이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고, 그 앞에는 이미 한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영웅 후보.`

나는 그 표찰을 뽑지 않았다. 지금 뽑으면 뒤쪽 알림이 다시 울릴 가능성이 컸다. 대신 위치만 기억했다. 이름보다 먼저 붙은 칭호. 공적보다 먼저 준비된 목줄.

위쪽 어둠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이미 영웅의 이름표를 고르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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