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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반응을 남긴다 일러스트

돈은 반응을 남긴다

010화 돈은 반응을 남긴다

메모 앱 맨 아래에는 어젯밤 적어 둔 두 줄이 남아 있었다.

`원본은 지워도 결재는 남는다`

`원본은 재무로 간다`

서도윤은 눈을 뜨자마자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제 남은 건 회수에 값을 붙인 사람이었다. 문장을 지우는 사람보다 더 오래 남는 건 숫자다. 이름은 뺄 수 있고 문장은 줄일 수 있어도, 한 번 잡힌 비용선은 누군가가 맞춰야 한다.

도윤은 휴대폰 메모를 아래로 한 줄 더 내렸다.

`질문 다음엔 숫자`

회사 안에서 누군가를 지운다는 건 결국 누군가가 움직였다는 뜻이다. 사람이 움직이면 시간이 들고, 시간이 들면 비용이 붙는다. 서류를 거두고 문장을 고치고 외부 반응을 막는 데도 다 값이 붙는다. 어젯밤 회의실 앞 봉투 표지에서 본 `홍보실 / 총무 / 재무전략실`은 그냥 부서명이 아니었다. 지우는 손이 문장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는 출근길 내내 머릿속으로 어제 본 세 줄을 다시 굴렸다.

`회수본 정리 보고`

`결재 원본 첨부`

`홍보실 / 총무 / 재무전략실`

정답은 이미 반쯤 나와 있었다. 회수본 정리 보고가 붙으면 다음은 비용 정리다. 회사는 사람 이름으로는 오래 말하지 않는다. 대신 `긴급 대응`, `외부 협력`, `폐기 처리`, `예비비` 같은 말로 사건을 다시 부른다. 그 말들이 붙기 시작하면 사람 하나는 장부 위에서 다른 이름으로 바뀐다.

오전 아홉 시 반, 도윤은 회사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전날처럼 다들 말을 줄이긴 했는데, 오늘은 문장보다 종이가 더 많이 움직였다. 총무팀 직원 둘이 평소보다 빨리 오가고 있었고, 프린터 쪽에는 아직 아무도 안 가져간 출력물이 두 번이나 쌓였다가 곧장 사라졌다. 홍보실 메신저 알림은 뜰 때마다 바로 꺼졌고, 보안실 사람들은 이동 경로를 줄이려는 사람들처럼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더 탔다.

답변을 만들고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맞추고 있는 분위기였다.

도윤은 오전 업무를 처리하는 척하면서도 시선은 자꾸 프린터 쪽으로 갔다. 이름과 문장까지만 흔들렸다면 홍보실만 바빠야 맞다. 그런데 오늘은 총무가 먼저 뛰고 있었다. 그건 회수한 종이의 수와 이동 경로, 폐기 여부, 전달 시간까지 수치로 맞춰야 한다는 뜻이었다.

열 시를 조금 넘겼을 때, 기회가 한 번 왔다.

복도 끝 공용 프린터에서 경고음이 짧게 울렸고, 총무팀 여직원이 급하게 달려왔다. 그녀가 종이를 뽑아 들기 직전 옆자리 직원이 불러 세웠다. "문서보관실 키 누가 가져갔어요?" 질문 하나에 그녀가 반쯤 돌아서는 사이, 맨 위 출력본 한 장이 바람에 살짝 들렸다.

도윤은 지나가듯 시선을 낮췄다.

`대외 리스크 긴급 대응 외주비`

`사건번호 R-417`

바로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가 더 박혀 있었다.

`회수본 정리 후 집행`

종이는 곧 여직원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면 충분했다. 외주비. 사건번호. 회수본 정리 후 집행. 질문을 받은 회사가 가장 먼저 손댄 건 답변 초안만이 아니었다. 바깥 입을 막는 데 붙는 돈부터 정리하고 있었다.

도윤은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쳤다. 심장은 빨라졌지만 얼굴까지 따라가게 두면 안 됐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메모를 열었다.

`R-417`

`대외 리스크 긴급 대응 외주비`

`회수본 정리 후 집행`

그리고 바로 아래 빈칸에 적었다.

`답변보다 비용이 먼저 움직였다`

십 분쯤 뒤, 한세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답변은 아직 없습니다`

`대신 질문 넣은 뒤 회사 쪽 연락선이 너무 빨리 닫힙니다`

`안에서 비용 정리부터 들어간 것 같기도 합니다`

도윤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역시 그녀는 말만 듣고 달리는 쪽이 아니었다. 반응을 보고 냄새를 맡는 쪽이었다.

그는 답을 길게 쓰지 않았다.

`비용선 물으세요`

`외부 대응 비용 있었는지`

`회수본 폐기 승인 있었는지`

`누가 승인선 붙였는지`

답은 금방 왔다.

`그 질문은 답변 안 할 가능성이 큽니다`

도윤은 바로 적었다.

`그래서 더 좋습니다`

`답을 못 하면 안쪽이 먼저 움직입니다`

이번에도 한세린은 곧장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삼십 초쯤 지나 아주 짧은 문장 하나를 보냈다.

`좋아요. 비용선으로 좁혀 보죠`

도윤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한세린이 좋은 기자인 이유는 여기 있었다. 시원하게 믿어 주지도 않고, 다정하게 편을 들어 주지도 않는다. 대신 말이 막히는 질문을 고른다. 그리고 회사가 그 질문을 피하려고 어떤 선을 먼저 건드리는지 본다.

그로부터 채 십오 분도 지나지 않아, 회사 안쪽이 먼저 흔들렸다.

홍보실 회람 제목이 한 번 바뀌었다.

법무지원실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총무팀 직원은 문서보관실 키를 다시 찾으러 내려갔고,

재무전략실 쪽 검은 명찰 끈 남자는 이번엔 노트북까지 들고 올라왔다.

도윤은 그 움직임을 차례대로 보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질문은 회사 밖에서 시작됐지만, 지금 회사가 가장 급하게 닫으려 드는 건 대답 내용이 아니라 비용이 새는 순서였다.

오전 열한 시 십이 분.

회의실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먼저 들어왔다. 키가 큰 편도 아니고 걸음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지나갈 때 길을 비키는 방식이 달랐다. 강태준 앞에서 사람들이 비키는 건 두려워서고, 이 남자 앞에서 비키는 건 계산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처럼 보였다.

짙은 회색 정장, 번들거리지 않는 검은 구두, 종이 한 장도 들지 않은 손.

도윤은 복도 유리 너머로 그의 옆얼굴을 보다가 숨을 아주 얕게 삼켰다. 이 남자가 정현민일 가능성이 컸다. 재무전략실 이사. 이름은 이미 문서 어딘가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직접 올라온 모양이었다.

정현민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대신 책상 끝에 놓인 출력본 세 묶음을 한 번에 훑었다. 강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지만, 도윤은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정현민 쪽 목소리는 낮고 또렷하게 복도까지 새어 나왔다.

"홍보 문안은 짧게 가십시오."

잠깐의 정적 뒤, 그가 한마디를 더 붙였다.

"질문은 막히지 않습니다. 비용선부터 닫아야 합니다."

도윤은 회의실 유리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안쪽을 봤다. 차수빈은 노트북을 열어 둔 채 고개를 거의 들지 못하고 있었고, 강태준은 팔짱을 낀 채 정현민을 보고 있었다. 둘 사이 분위기는 비슷한 편이 아니었다. 강태준은 당장 눈앞에서 새는 구멍을 막고 싶어 했고, 정현민은 그 구멍 때문에 남을 숫자를 먼저 맞추려는 얼굴이었다.

정현민이 다시 말했다.

"외주 대응비는 한 묶음으로."

"폐기 승인 건은 분리."

"질문 받은 시각 기준으로 예비비 전용 처리하세요."

한 사람을 치운 뒤 수습을 지시하는 말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마치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월말 정산 항목을 정리하는 것처럼 들렸다. 도윤은 그 순간 등줄기가 한번 서늘해졌다. 칼을 쥔 사람은 민재호 같은 쪽일 수 있다. 그런데 정현민은 그 칼 뒤에 남는 값을 맞추는 사람이었다. 피를 안 묻히고도 사건을 숫자로 묻어 버리는 쪽이 더 길고 더 깊게 남는다.

강태준이 짧게 받아쳤다.

"이름부터 빼야 합니다."

정현민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름은 이미 제목에 남았습니다."

"지금은 얼마가 어디에 붙었는지가 더 위험합니다."

도윤은 그 말을 듣고 거의 확신했다. 정현민은 감정이 아니라 비용선으로 싸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한 번 움직이면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문장은 지울 수 있어도 장부는 서로가 맞춰야 하니까.

회의는 길지 않았다. 오히려 짧아서 더 나빴다. 이미 각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필요한 단어만 서로 건네고 끝냈다. 정현민이 먼저 나왔고, 뒤이어 총무팀 직원이 서류봉투 두 개를 안고 급히 따라 나왔다. 봉투 하나엔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폐기 승인`

다른 하나에는 파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외주비 집행`

둘 다 오른쪽 위에 같은 사건번호가 찍혀 있었다.

`R-417`

도윤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같은 사건번호 아래 폐기 승인과 외주비 집행이 함께 붙었다. 이건 더 이상 감으로 읽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름이 들어간 사건 하나가 이제 두 개의 숫자 항목으로 갈라져 장부에 올라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복도에서 돌아서는 척하며 봉투가 향하는 방향을 봤다. `폐기 승인`은 총무 쪽으로, `외주비 집행`은 재무전략실 쪽으로 갈라졌다. 같은 사건을 둘로 쪼개 놓은 셈이었지만, 사건번호가 같으면 결국 다시 만난다. 누군가 마지막에 둘을 한 건으로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닫는 손이 정현민일 가능성이 컸다.

점심 직전, 차수빈이 잠깐 혼자 프린터 앞에 섰다. 그녀는 출력된 두 장을 겹쳐 본 뒤 곧바로 따로 접었다. 도윤은 지나치듯 한 장 아래쪽을 봤다. 문서 제목은 짧았다.

`질의 대응 문안`

그 아래 하단 참조 줄에는 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관련 비용선 정리 후 배포`

차수빈은 그 줄을 보자마자 종이를 뒤집었다. 그녀 얼굴이 질린 건 문안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이제 자기 문장이 단순 홍보 문안이 아니라 비용선과 묶여 돌아간다는 걸 봤기 때문일 것이다. 문장을 줄이는 실무자였던 사람이, 그 문장이 어떤 장부 항목과 같이 움직이는지 보는 순간부터 공포의 크기는 달라진다.

그녀는 회사를 구하려고 버티는 게 아니었다. 자기 손이 문장에만 묻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숫자에도 묻을 수 있다는 걸 본 얼굴이었다.

도윤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차수빈은 조력자가 아니다. 하지만 저런 사람은 언젠가 자기 살 길을 찾다가 반드시 한 줄을 잘못 건드린다. 그리고 그런 한 줄은 장부에선 더 크게 남는다.

오후 한 시 반, 한세린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외부 대응 비용과 폐기 승인 여부 질의 넣었습니다`

`회신 대신 일정 조정 요청이 먼저 왔네요`

`재무 쪽 결재를 거친다고 합니다`

도윤은 짧게 웃을 뻔했다가 참았다. 질문에 바로 답을 못 하는 이유를 대놓고 말해 준 셈이었다. 재무 쪽 결재. 보안이나 홍보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란 걸 회사가 자기 입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한세린에게 딱 한 줄만 돌려보냈다.

`답 늦을수록 좋습니다`

이번엔 답장이 조금 길었다.

`당신, 처음부터 여기까지 계산한 건 아니겠죠`

`그랬다면 기분 나쁠 것 같네요`

도윤은 잠깐 멈췄다가 적었다.

`정확히는 반응을 계산했습니다`

`숫자는 회사가 스스로 꺼냅니다`

한세린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에 짧게 덧붙였다.

`그럼 난 숫자가 틀어지는 자리만 더 보겠습니다`

좋았다. 지금 필요한 건 믿음이 아니라 역할 분리였다. 한세린은 질문선을 더 좁히고, 도윤은 안쪽 반응을 본다. 그리고 회사는 둘 중 하나만 막아서는 안 되는 상황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오후 두 시를 조금 넘겼을 때, 결정적인 흔적이 튀어나왔다.

재무전략실 앞 공용 프린터에서 종이 한 장이 반쯤 걸린 채 멈췄다. 잉크가 번진 탓인지 출력이 고르지 않았고, 프린터를 지키던 직원은 서둘러 안쪽 덮개를 열었다. 그 짧은 사이, 맨 위 승인 표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예비비 전용 요청`

`사건번호 R-417`

`대외 리스크 긴급 대응 외주비`

`문서 회수 및 폐기 처리 비용`

도윤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외주비와 폐기 처리 비용이 한 장 안에 붙었다. 사람 하나를 지우는 데 드는 값이 이제는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 홍보실 문안 수정, 총무 회수, 폐기 처리, 외부 대응. 전부 숫자로 한 묶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문서 오른쪽 아래, 작은 칸 안에 네 글자가 더 찍혀 있었다.

`정현민 검토`

서명은 아니었다. 도장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네 글자가 더 나빴다. 서명은 급해서 찍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검토`는 읽고 맞췄다는 뜻이었다. 누가 얼마를 어떻게 묶을지, 무엇을 어떤 항목으로 돌릴지, 정현민 손을 한 번 거쳤다는 뜻이었다.

프린터를 보던 직원이 종이를 급히 걷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도윤 눈에는 충분히 들어왔다.

정현민.

검토.

예비비 전용.

외주비.

폐기 처리.

같은 사건번호.

더 필요 없었다. 돈줄 전체를 아직 다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면 됐다. `최동식` 뒤에 숫자가 남았다는 감각이 아니라, 그 숫자에 정현민 손이 묻었다는 사실까지는 왔다.

도윤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메모 앱을 열었다.

`R-417`

`외주비`

`폐기 처리 비용`

`예비비 전용 요청`

`정현민 검토`

그는 마지막 줄 아래에 한 문장을 더 적었다.

`사람은 지워도 값은 남는다`

잠시 뒤, 한 줄을 더 붙였다.

`그 값은 정현민 손을 거친다`

그제야 흐름이 분명해졌다. 강태준은 이름을 지우려 하고, 차수빈은 문장을 줄이려 하고, 총무는 종이를 거두고, 보안은 출입 기록을 쥔다. 그런데 정현민은 그 전부를 숫자로 닫는다. 사람을 없애는 게 아니라, 사람을 비용으로 바꾼다. 그게 이 회사가 더럽게 강한 이유였고, 동시에 언젠가 무너질 자리였다.

휴대폰이 한 번 더 울렸다.

한세린이었다.

`답변은 더 늦어진답니다`

`재무 검토가 남았다네요`

도윤은 그 문장을 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회사는 결국 말보다 숫자를 먼저 닫으려 했다. 그럼 됐다. 이름이 바깥에 살아남았고, 문장이 바깥 질문선에 남았고, 이제 그 이름과 문장을 지우는 데 드는 값까지 잡혔다. 그리고 그 값 위에는 정현민 손이 찍혀 있었다.

도윤은 답장 대신 창밖을 봤다. 재무전략실 쪽 창문 블라인드가 절반만 내려와 있었고, 그 뒤로 회색 정장 어깨선 하나가 잠깐 스쳤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충분했다. 다음부터 쫓아야 할 건 누가 칼을 들었는지가 아니었다. 누가 그 칼값을 장부에 묻었는지였다.

그는 메모 맨 아래에 마지막 줄을 적었다.

`최동식 뒤엔 정현민이 있다`

이번에는 문장을 보고 웃지 않았다. 대신 아주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방향이 잡혔다. 이름을 살리고 문장을 살린 뒤에야 비로소 돈줄이 보였다. 그리고 돈줄 끝에 사람 이름이 처음 붙는 순간, 복수는 한 단계 더 앞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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