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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도 못 막는 돈줄 일러스트

죽여도 못 막는 돈줄

018화 죽여도 못 막는 돈줄

정현민 이름은 오전이 되기 전에 두 군데에 동시에 걸렸다.

한세린이 먼저 보낸 건 기사 링크가 아니라 질의 발송 기록 화면이었다.

`정현민 이사가 R-417-2 및 B-19 대체 계정 전환 승인과 폐기 승인 완료 라인의 최종 승인자인지 확인 요청`

그 아래엔 수신 부서가 길게 붙어 있었다.

홍보실.

법무.

재무전략실.

잠시 뒤 회사 안쪽 메일 제목도 뒤따라 떴다.

`감사실 요청: 정현민 승인선 관련 원본 제출`

이제 정현민 이름은 바깥 질문선과 안쪽 감사선에 동시에 살아남는다.

한쪽만 막아도 다른 쪽 기록이 남는다. 홍보실이 답을 미뤄도 감사실 문서 제목이 남고, 감사실이 조용히 덮으려 해도 이미 기자 질의 첫 줄에 이름이 박혀 있다. 실무선 몇 겹을 더 깔아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 단계였다.

더 좋았던 건 두 기록의 성질이 서로 달랐다는 점이었다. 질의는 바깥으로 나간 질문이라 회수해도 흔적이 남고, 감사 요청은 안쪽에서 증빙을 끌어오는 제목이라 삭제하려 들수록 누가 손댔는지가 더 또렷해진다. 하나가 공개 흔적을 만들고, 다른 하나가 은폐 흔적을 남긴다. 정현민 이름은 그 사이에 끼어 빠져나갈 틈을 잃었다.

한세린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회사 답 기다리기 전에 짧게 묶어 올릴 수 있습니다.`

`질문만으로도 이름은 이미 공개선에 올라왔어요.`

서도윤은 짧게 답했다.

`지금은 질문선이 먼저입니다.`

`안쪽이 더 흔들리게 두죠.`

그 판단이 맞았다.

기사 제목은 강하다. 하지만 질문선은 더 오래 간다. 답을 안 할수록 기록이 남고, 기록이 남을수록 안쪽은 더 크게 흔들린다. 도윤이 계속 밀어 온 건 바로 그 흔들림이었다. 이름 하나가 밖에 뜨는 게 아니라, 그 이름을 지우려는 손길까지 기록으로 남게 만드는 흐름.

한세린이 곧바로 하나를 더 보내 왔다. 질의 접수 기록 옆에 편집국 공유 메모가 붙어 있었다.

`정현민 실명 유지`

`승인선/감사선 동시 확인 후 단신 가능`

이제는 기자 개인 휴대폰 안에서만 도는 이름이 아니다. 편집국 화면에도 걸리고, 감사실 제목에도 걸리고, 회사 공용 질의함에도 걸린다. 이름 하나가 여러 기록으로 갈라져 살아남는 순간부터는, 누가 한 줄을 지운다고 끝나지 않는다.

편집국 메모, 감사실 제목, 회사 질의함. 셋은 서로 다른 손을 거친다. 기자가 붙잡는 이름, 감사가 붙잡는 승인선, 회사가 억지로 받게 된 공식 문의. 셋 중 하나만 남아도 실명은 다시 살아난다. 셋이 동시에 붙는 순간부터는 실무자 누구도 `처음 본다`는 말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

홍보실 공유 채널은 아침부터 난장판이었다.

`정현민 이사 관련 질의 별도 분리`

`재무전략실 직접 소명 필요`

`기존 대외 대응 문안 사용 중단`

`대외 대응 제외 대상 재분류`

차수빈 댓글이 가장 밑에 붙어 있었다.

`이제는 이름을 숨기는 문장이 아니라 이름을 받는 문장이네요.`

차수빈은 늘 한 박자 늦게 진짜 흔들림을 본다. 그래서 더 정확하다. 누가 옳은지보다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먼저 보는 사람. 홍보실 실무자 눈에도 회사 문장이 이제는 `감춘다`가 아니라 `받는다`로 바뀌었다면, 정현민은 더는 숫자 뒤에 숨은 사람이 아니다.

법무 검토란이 잠깐 열린 화면은 더 노골적이었다. 붉은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현민 이사 관련 질의는 재무전략실 개별 소명으로 전환`

그리고 그 아래.

`홍보실 선 대응 제외`

그 두 줄이면 충분했다.

회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홍보실 말재주로는 못 버틴다는 것. 이제는 말로 넘기는 단계가 아니라, 이름이 붙은 책임선을 누가 직접 받느냐를 정해야 하는 단계라는 것.

그 변화는 실무자 자리 배치에서도 보였다. 평소 같으면 홍보실 쪽에 먼저 자료가 모이고 법무가 뒤에서 승인만 붙인다. 그런데 오늘은 법무가 문장을 쥐고 있고, 홍보실은 빠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가 대답하느냐보다 누가 맞느냐가 더 중요해진 상태였다.

복도 공기까지 달라졌다. 평소엔 홍보실이 먼저 뛰고 법무가 뒤에서 문장을 다듬었다. 오늘은 반대였다. 법무가 먼저 문서를 들고 오갔고, 홍보실은 화면 앞에서 말없이 메일 제목만 새로 고쳤다. 문장이 아니라 사람을 재배치하는 날의 공기였다.

사람 배치가 바뀌었다는 건 문장보다 무섭다. 문장은 고치면 된다. 하지만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건 책임을 떠넘길 시간이 끝났다는 뜻이다. 평소 같으면 홍보실 실무자가 먼저 초안을 짜고 법무가 손질했을 일에, 오늘은 법무가 제목부터 쥐고 재무전략실 이름표를 찾고 있었다. 조직이 자기 방식으로 겁먹을 때 늘 그렇게 움직였다.

회의실 문이 닫혀 있었지만 안쪽 목소리는 선명했다.

"질의 제목에 이름이 들어갔어."

강태준이었다. 낮았고, 그래서 더 차갑다.

"아직 기사화는 안 됐습니다." 정현민이 말했다. "답변선을 통제하면 됩니다."

"감사실 제목에도 이름이 들어갔는데."

짧은 침묵.

"감사실은 안쪽입니다."

"그 안쪽이 지금 밖보다 더 아프다고."

정확히 그 지점이었다.

정현민은 여전히 숫자로 버틸 수 있다고 믿는다. 안쪽 기록은 안쪽에서 정리할 수 있고, 질문은 시간을 벌면 흐려진다고 믿는다. 그런데 강태준은 이미 다른 공포를 보고 있었다. 정리 명령이 나갈수록 더 안쪽 제목이 새로 뜨고, 제목이 뜰수록 자기 사람 얼굴이 같이 드러나는 공포.

강태준 목소리가 한 번 더 내려앉았다.

"오늘부터 그 이름은 여기서 안 받는다."

정현민이 처음으로 말을 놓쳤다.

"무슨 뜻이십니까."

"대외 대응선에서 빠져."

문장 하나가 그대로 떨어졌다.

"질의 답변, 감사실 소명, 원본 제출. 전부 당신 개인선으로 받으라."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게 절단이었다.

정현민을 바로 버리겠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는 품 안에서 감싸지 않겠다는 말이다. 숫자 뒤에서 정리만 하던 사람을 앞으로 끌어내, 자기 이름으로 맞게 하겠다는 말. 강태준이 자기 보호를 위해 자기 편을 밀어내는 순간은 늘 그렇게 왔다. 큰소리나 분노보다 먼저, 보호막이 사라진다.

정현민에게 가장 아픈 건 공개 비난이 아니다. 자신이 늘 숨어 있던 구조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홍보실이 방패를 내리고 법무가 거리 두기를 시작하면, 남는 건 숫자가 아니라 서명이다. 누구도 대신 설명해 주지 않는 자리에 한 번 올라가면, 그다음부터는 장부 한 줄조차 변명으로 안 보인다.

정현민이 겨우 목소리를 되찾았다.

"지금 제 이름을 빼면 더 커집니다."

"이미 커졌어."

강태준 말끝이 날카로워졌다.

"당신이 정리할수록 안쪽이 더 뜬다. 이제 당신까지 감싸면 이쪽 이름도 같이 뜬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정현민은 드디어 강태준 바깥으로 밀려났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자기 이름으로 맞아야 한다. 그동안 장부 끝에서만 읽히던 적이, 이제는 사람 얼굴이 있는 책임선으로 올라왔다.

회의실 밖으로 공지가 돌자 사람들 시선도 달라졌다. 전에는 정현민이 지나가면 다들 먼저 모니터를 내렸다. 오늘은 아니었다. 아무도 대놓고 쳐다보진 않았지만, 아무도 예전처럼 안심한 얼굴도 아니었다. 보호막이 벗겨진 사람을 조직은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잠시 뒤 인사/결재 공지가 돌았다.

`정현민 이사 대외 대응 제외`

`감사 및 소명 관련 자료 직접 제출`

`재무전략실 승인 로그 접근권한 재조정`

실무자 몇 명이 화면을 보는 손길이 멈췄다.

차수빈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곧 댓글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저장하지 않은 문서 창을 오래 띄워 둔 채 가만히 있었다. 홍보실 실무자에게 저 공지는 거의 선고문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름을 감추기 위해 법무를 붙이고 문장을 갈아끼우던 회사가, 결국 그 이름을 떼어내지 못하고 본인 앞으로 밀어낸 셈이니까.

댓글 하나 달지 못한 반응이 오히려 더 노골적이었다. 실무자는 안다. 어떤 공지는 나중에 뒤집힌다. 하지만 어떤 공지는 그 자체로 줄 세우기다. 오늘 공지는 후자였다. 정현민 이름이 박힌 순간, 다들 같은 계산을 한다. 이제 저 사람은 혼자 맞는다.

한세린 통화가 다시 걸려 왔다.

"지금 기사 한 줄 더 붙여도 돼요."

"뭐로 갑니까."

"질문만으로 충분해요. `정현민 이사 승인선 질의`, `감사실 원본 제출 요구`, `회사 직접 소명 전환`. 셋이면 이미 공적 질문 대상입니다."

도윤은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깐 봤다. 그 얼굴을 보며 떠오른 건 자부심보다 계산이었다. 여기서 더 세게 밀면 정현민은 더 빨리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보상은 이미 나왔다. 이름이 돈줄과 함께 살아남았고, 강태준은 정현민을 감싸지 못했다. 그 두 개면 충분했다.

여기서 바로 기사를 키우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너무 빨리 터뜨리면 회사는 또 `왜곡 보도` 한 줄로 버틸 여지를 만든다. 반대로 질문선과 감사선이 먼저 굳으면, 그다음 기사 한 줄은 단순 폭로가 아니라 이미 남아 있는 기록을 이어 붙이는 마감이 된다. 도윤이 지금 원하는 건 소음이 아니라 퇴로 차단이었다.

남은 건 하나였다.

이제 저쪽이 자기를 어떻게 다룰지 확인하는 것.

민재호는 예상대로 빨랐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복도 끝, 사람 눈이 드문 구간에 서 있자 그림자처럼 붙었다. 발소리도 거의 없었다. 손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지만 걸음 간격이 너무 정확했다. 오늘 당장 사람 하나를 없앨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진 거리였다.

서도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민재호 쪽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여기서 뒤로 빠지면 아직도 쫓기는 쪽이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 저쪽이 더 곤란하다. 정현민 이름이 질의 첫 줄에 들어갔고, 감사실 제목에도 박혔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까지 사라지거나 다치면, 회사가 제일 숨기고 싶은 선이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민재호가 멈춘 건 도윤에서 세 걸음 앞이었다.

"혼자 다니는군."

"지금이 아니면 못 건드리니까요."

민재호 눈빛이 아주 조금만 변했다.

"착각하지 마."

"착각 아닙니다."

서도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손대면 `정현민 이름 지우려다 증인까지 건드렸다`는 문장으로 붙습니다. 질문선도, 감사선도, 삭제 시도 기록도 이미 살아 있습니다."

민재호는 말이 없었다.

복도 위쪽 CCTV 불빛이 조용히 깜빡였다. 평소 같으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조그만 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질의 발송 시각, 감사 요청 시각, 출입 기록, 주차장 동선이 한 묶음으로 엮이는 날이었다. 한 번 손대는 순간 폭력은 현장 문제가 아니라 `정현민 실명 질의 직후 벌어진 통제 시도`로 정리된다.

대신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자마자 받았다.

"예."

짧은 정적.

민재호 턱선이 아주 조금 굳었다.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또 정적.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민재호가 겁먹은 건 아니다. 그 사람은 원래 겁으로 물러나는 쪽이 아니다. 멈춘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건드리면 더 큰 손해가 남는다는 계산. 더 안쪽 기록이 뜨고, 더 많은 이름이 붙고, 강태준 쪽 의심이 자기 편으로 더 깊게 파고든다는 계산.

그게 중요했다. 민재호는 힘이 모자라서 손을 못 대는 사람이 아니다. 손을 대는 순간 자기 쪽 장부와 접근 기록, 질문선 시간표가 한꺼번에 묶여 터질 걸 아니까 멈춘다. 물리적 위협이 더는 일방 통행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저 손이 멈춘 순간부터, 도윤은 쫓기는 쪽이 아니라 타이밍을 고르는 쪽이 된다.

더 중요한 건 그 계산이 이미 위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이었다. 방금 통화로 내려온 건 분노가 아니라 보류였다. 사람을 없애라는 선이 처음으로 멈춤을 택했다. 이유는 양심이 아니라 비용이었다. 지금 살아 있는 도윤 하나가 밖에 남길 비용이, 오늘 밤 처리 하나로 얻을 이익보다 더 커졌다는 뜻이었다.

서도윤은 그걸 봤다.

이제는 죽음의 위협도 저쪽 전용 무기가 아니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드러내느냐까지, 자기 설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게 지금 도윤이 올라선 자리였다. 일부러 죽을 자리와 죽일 사람을 고르던 사람에서, 이제는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는 타이밍마저 역으로 써먹는 사람.

민재호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운이 좋군."

"아닙니다."

서도윤은 고개를 아주 조금만 기울였다.

"오늘은 당신들이 제일 손대기 싫은 날이죠."

민재호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걸로 됐다.

저쪽이 한 걸음 멈춘 순간, 이 싸움은 사실상 다 끝난 셈이었다. 정현민 이름은 살아남았고, 강태준은 자기 편을 잘랐고, 민재호는 눈앞에서 손을 못 댔다. 이 셋이 한 줄로 붙으면 더는 예전 방식으로 덮을 수 없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한세린이었다.

`질문 나갔고, 감사선도 확인됐어요.`

`이제 저쪽은 답하거나, 더 지저분해지거나 둘 중 하나예요.`

도윤은 짧게 답했다.

`충분합니다.`

위층 복도는 잠깐 더 조용해졌다. 사람을 없애라는 명령이 아니라 사람을 남긴 채 틀 안에 밀어 넣으라는 명령은 공기부터 달랐다. 칼을 드는 쪽은 짧게 움직이지만, 절차를 드는 쪽은 오래 따라붙는다. 민재호가 멈춘 이유와 정현민이 잘린 이유가 그 한 점으로 모였다.

위층 어딘가에선 이미 다음 문장을 짜고 있을 터였다. 죽이지 못한 증인을 어떻게 망가뜨릴지, 어떤 서류에 어떤 죄목을 붙일지, 저쪽은 이제 사람 대신 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번 틀을 짜기 시작한 쪽은 칼보다 오래 사람을 조른다.

그 흔적도 오래 남는다.

서류는 사람보다 늦게도 끝까지 따라온다.

질기게 남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 위층에서 다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이번엔 회의실 문틈이 아니라 복도 전체에 퍼지는 지시였다.

"죽이지 마."

강태준이었다.

그리고 한 줄이 더 붙었다.

"살아 있는 채로 만들자."

서도윤은 멈추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화면 속 질의 제목이 한 번 더 눈에 들어왔다.

정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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