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우는 자는 누구
그날 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고 덮어둔 지 정확히 2주가 지났다.
2098년. 텍사스 COSMOS 연구단지 지하 4층 데이터 분석실.
평소와 다름없이 메인 서버의 냉각팬이 토해내는 건조한 백색소음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식어버린 커피 잔을 옆으로 밀어내며, ByM과 연관된 메타데이터들의 파편을 내부 은닉망에서 조심스럽게 재배열하고 있었다.
가장 안전한 위장은 일상에 섞여드는 것이다. 데이터 분석 총괄로서 내게 할당된 표면적인 기후 모델링 변수 정리 작업을 백그라운드에 띄워둔 채, 나는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과거의 흔적들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백그라운드에서 돌아가고 있던 시스템의 메인 보안 로그 화면이 일순간 푸른색으로 반전되었다.
[ 시스템 알림 : 하위 디렉터리 일괄 정리 프로토콜 가동. ]
[ 대상 : 지정된 격리 스토리지 외곽의 임시 폴더 및 훼손된 아카이브 파일. ]
내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화면 위로 무수한 파일명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실시간으로 '삭제됨(DELETED)' 처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단순한 정기 점검 알림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지워내고 있는 타깃 경로들은, 2주 전 내가 로버트의 뇌 스캔 기록을 역추적해 찾아냈던 바로 그 'ByM'의 47개 미완 파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명령자 필드를 재빨리 확인했다.
공란이었다.
이 거대한 COSMOS의 중앙 시스템이 '서버 용량 최적화를 위한 자동 정리'라는 명목으로 위장하여 파일을 소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70년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심연의 파일들이, 내가 그 껍질을 건드리고 돌아선 지 불과 2주 만에 시스템 자동 청소의 대상이 되었다고?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그 파일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사실을 눈치챘거나, 최소한 그 파일 주변에 누군가 접근했다는 시스템의 미세한 파장을 감지하고 서둘러 꼬리를 자르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건조한 욕설을 뱉어내며 나는 즉각 우회 터미널을 열었다. 지금 당장 삭제 프로세스를 강제로 멈추면 내 존재가 시스템의 역추적에 걸려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은, 사냥감이 불타 없어지기 직전에 남은 뼛조각이라도 건져내는 것뿐이었다.
나는 삭제 명령을 우회하여, 소거되고 있는 파일들의 본문 대신 껍데기인 '헤더(Header) 파일'과 찌꺼기 메타데이터만을 캐시 메모리로 은밀하게 캡처해 끌어오기 시작했다.
1초가 1시간처럼 길게 느껴지는 찰나의 줄다리기 끝에, 시스템의 삭제 프로토콜이 종료되었다.
[ 일괄 정리 완료. 31개 파일 완전 삭제됨. ]
나는 숨을 멈추고 로그를 확인했다. 47개의 미완 파일 중 31개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 아래에 출력된 시스템의 미세한 오류 코드에 꽂혔다.
[ 오류 : 16개 파일 포맷 인식 불가. 삭제 실패. ]
삭제에 실패했다.
누군가 권력을 동원해 날려버리려 했던 47개의 망령 중 16개가 살아남았다.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기적적인 시스템의 맹점 덕분이었다. 살아남은 16개의 파일은 2020년대 중반에 사용되던 극도로 폐쇄적인 구형 에뮬레이션 이미지(Emulation Image) 형식으로 패키징되어 있었다. 최첨단 양자 연산으로 무장한 2098년 현재의 COSMOS 삭제 루틴이, 이 구시대의 낡고 조잡한 파일 포맷 자체를 데이터가 아닌 '더미(Dummy) 섹터'로 오인하고 건너뛰어버린 것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나는 살아남은 16개 파일의 메타데이터를 내 개인 암호화 스토리지로 모조리 추출해냈다. 본문을 열 수 없어도, 껍데기에 묻은 지문만으로도 추적은 가능하다. 디코딩 스크립트를 물리자, 낡은 파일들의 숨겨진 이력서가 화면 위로 줄줄이 출력되었다.
[ 파일 생성일 : 2028년 ]
[ 최종 이동 및 접근 : 2086년 (User: Robert) ]
[ 파일명 코드 : ISR-BYM-ENC-01 ~ 16 ]
분석가의 직감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반복되는 코드명 'ISR-BYM-ENC'. 여기서 BYM은 이미 뇌 스캔에서 확인했던 그 은폐된 조직망의 이름이다. ENC는 암호화(Encryption)의 약어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앞의 세 글자, 'ISR'은 무엇인가. 이것은 파일을 최초로 생성한 사람의 이름(Initial)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그림자 기관의 약어인가.
나는 파일 헤더에 걸린 암호화 알고리즘의 뼈대를 해체해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COSMOS 같은 민간 기후 연구소나 기업 단위에서 사용하는 보안 수준이 아니었다. 이중, 삼중으로 교차 결합된 난수 배열은 명백히 21세기 초반의 군용 등급, 혹은 국가 정보기관급에서나 다루던 비대칭 암호화 기술이었다.
질문이 꼬리를 물고 뇌리를 강타했다.
국가 안보와 관련된 수준의 군용 암호화 데이터가, 어째서 텍사스의 민간 기후 연구소인 COSMOS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에 잠들어 있었던 것인가? 이 연구소는 정말로 겉으로 표방하는 것처럼 '인류의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순수한 과학 프로젝트'가 맞기는 한 걸까.
의심의 싹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려던 찰나, 터미널을 강제 종료하고 모니터 전원을 껐다.
심야의 분석실은 다시 적막 속에 잠겼다. 심장 박동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니다. 살아남은 단서들을 철저히 소화하고 다음 경로를 찾아야 했다.
나는 분석실을 빠져나와 어둡고 서늘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 코너를 도는 순간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인영(人影)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
연구단지 총괄 책임자, 유리모프였다.
서늘한 LED 보안등 빛이 그의 창백하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비췄다. 표정 변화조차 철저히 통제된 그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어내렸다.
"아키코.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군."
그의 목소리는 서버의 냉각팬 소리만큼이나 고저가 없고 건조했다. 나는 미세한 신경의 떨림마저 연산으로 짓누르며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기후 모델링 변수 최적화 작업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열정은 칭찬할 만하지만, 불필요한 과부하는 시스템 효율을 떨어뜨리지." 유리모프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내 눈동자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본업에 집중해라. 네게 할당된 연산 영역을 벗어나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
그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야근에 대한 지적이었지만, 내 감각은 즉각적으로 짙은 감시와 경고의 냄새를 맡아냈다. 방금 전 시스템에 내려진 일괄 삭제 명령과, 이 시간에 하필 내 분석실 앞 복도를 지나가는 유리모프.
그와 나는 2089년, 진유미라는 한 인간의 실험실에서 합성 복제 기술로 거의 동시에 생성된 '쌍둥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기원도, 유전자를 조합한 배열 방식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톱니바퀴 안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관리자인 상사와 부하 직원이라는 권력 관계로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삭제 명령의 배후에 그가 서 있을지도 모른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짧게 목례를 한 뒤 그를 스쳐 지나갔다. 등 뒤에서 유리모프의 구두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나는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다시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암호화된 내부망에 접속했다. 어제 직면한 경고를 무시하고 멈출 생각 따위는 애초에 내 신경망에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16개의 파일 본문이 아니라, 그 파일을 이 안으로 밀어 넣은 '전달자'의 궤적을 쫓기로 했다. 로버트. 2년 전 뇌 스캔 실험 도중 사망한 그 가엾은 프로그래머가, 2086년에 대체 무슨 일을 벌였던 것인가.
나는 시스템 깊숙한 곳의 인사 기록과 접근 권한 로그를 교차 대조했다. 로버트는 내부 직원이 아니라 프리랜서 보안 점검 계약직이었다. 2086년 당시 그가 맡았던 업무는, COSMOS가 사유화되기 전 굴러다니던 구형 하청업체의 백업 이미지들과 휴면 스토리지를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무결성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로버트는 그 낡은 백업 이미지의 심연을 청소하던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용 암호화 아카이브—ByM의 봉인된 47개 파일—를 우연히 발견했을 것이다.
[ 2086년 11월 4일. User: Robert. 데이터 이관 기록. ]
[ 대상 경로 : 구형 아카이브 서버 → 메인 프레임 하위 섹터 D-4 (격리 스토리지) ]
터미널에 출력된 경로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격리 스토리지'.
COSMOS의 데이터 분석 총괄인 나조차도 접근은커녕 그 물리적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했던 미지의 공간이었다. 로버트 같은 말단 프리랜서가 멋대로 시스템 최심부의 격리 구역에 데이터를 이관할 권한이 있을 리 없었다.
누군가 로버트의 뒤에서 문을 열어준 자가 있다. 로버트를 안내하고 이 데이터의 은폐를 사주한 의뢰자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관 프로세스에 결재된 상위 권한의 디지털 서명을 역추적했다. 복잡하게 얽힌 우회 경로들을 세 시간 동안 하나씩 잘라낸 끝에, 마침내 그 서명의 진짜 주인을 찾아냈다.
[ 승인 권한자 : 진유미 (Jin Yumi) ]
화면 위로 떠오른 세 글자의 이름 앞에서, 나는 숨쉬는 법을 잊어버린 기계처럼 얼어붙었다.
진유미.
2092년에 과로로 사망한 이 연구소의 전 소장.
그리고, 나와 유리모프를 비롯한 이 연구소의 모든 합성 복제 인간들을 배양액 속에서 빚어낸 창조주. 나를 '만든 사람'이었다.
퍼즐의 끔찍한 윤곽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만든 사람이, 자기가 고용한 프리랜서가 죽기 10년 전에 그를 시켜, 정체를 알 수 없는 과거의 유령 같은 데이터를 연구소의 가장 은밀한 곳으로 옮겨 숨겼다. 그리고 진유미가 죽고 난 뒤, 이제는 누군가가 그 데이터를 흔적도 없이 시스템에서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
이 거대한 은폐와 삭제의 소용돌이 중심에 내 존재의 기원이 맞닿아 있었다.
어쩌면 내 뇌 신경망 어딘가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저 암호화된 파일의 흔적이 부품처럼 조립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로버트의 죽음에서 ByM을 발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진유미가 내 유전자 안에 새겨놓은 어떤 빌어먹을 목적지였던 것일까.
흉곽 안쪽에서 기원 모를 서늘한 불안과 감정의 파편들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두 눈을 강하게 질끈 감고 심박수를 낮추는 연산을 강제로 수행했다.
감정에 잡아먹히면 죽는다. 진실은 생존의 수단이어야지, 파멸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가까스로 흔들리는 이성을 붙잡고 터미널 창을 모두 지워버렸다.
이 기록을 남긴 자와 지우려는 자들 사이의 전쟁. 그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일 아침 이 연구소에 출근하는 무해하고 완벽한 부속품으로 연기해야만 한다.
어둠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내 개인 스토리지 한구석에서, 살아남은 16개의 암호화된 찌꺼기들이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미세한 전류를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