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1-2화. 퇴근 카드와 죽은 자의 잔향 일러스트

1-2화. 퇴근 카드와 죽은 자의 잔향

제목: 1화. 퇴근 카드 찍고 사망 플래그를 주웠다

퇴근 버튼은 언제나 아름답다.

특히 월요일 오후 여섯 시 정각, 오른손 엄지가 앱 화면 위에서 떨고 있을 때는 거의 종교적이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신을 믿는다. 신이 있다면 제발 오늘은 나를 집에 보내달라고.

그리고 신은 대체로 알림음으로 대답한다.

띠링.

[긴급 의뢰: 마포구 은성상가 지하 2층 주차장형 소형 던전 출구 사후 정리]

[사망자 1명]

[잔류 마력 낮음]

[하급 정리 가능]

[야간 수당 적용]

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하급 정리 가능이라.”

그 말은 대체로 이런 뜻이다. 위험한 건 윗분들이 다 가져갔고, 더럽고 찝찝하고 책임 소재 애매한 것만 남았으니 네가 와서 닦아라.

나는 전직 헌터협회 감식반 계약직이다. 현직은 프리랜서 현장 정리 헌터. 공식 등급은 F급. F는 Fantastic의 F가 아니라, ‘프린터 토너도 못 바꾸는 놈한테 주는 등급’의 F에 가깝다.

그래도 월세는 등급을 가리지 않는다.

나는 퇴근 버튼 대신 수락 버튼을 눌렀다. 엄지는 배신을 배웠고, 통장은 박수를 쳤다.

은성상가는 지도 앱에서도 한숨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1층 간판은 반쯤 꺼진 치킨집, 폐업한 노래방, ‘맞춤 수선’이라고 쓰인 유리창 안쪽에는 먼지가 맞춤으로 쌓여 있었다. 지하 주차장 입구에는 협회 노란 테이프가 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축축한 콘크리트 냄새와 던전 특유의 비린 오존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서울에는 던전보다 더 귀찮은 것이 있다. 야근, 월세, 그리고 죽은 헌터가 남긴 영수증.

테이프 옆에 서 있던 협회 직원이 내 신분증을 훑었다. 나보다 어려 보였고, 나보다 덜 피곤해 보였으며, 그 점이 가장 수상했다.

“강도윤 씨?”

“네. F급이지만 마음만은 정규직입니다.”

그는 웃지 않았다. 공무원 계열 웃음 방지 훈련을 받은 얼굴이었다.

“감식반은 철수했습니다. 몬스터 사고로 1차 분류됐고요. 잔여물 회수랑 오염 제거만 해주시면 됩니다.”

“사망자는요?”

“이민재. E급 헌터. 임시 파티로 들어갔다가 출구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입니다.”

직원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 안의 증명사진 속 남자는 젊었다. 아직 얼굴에 ‘나는 이 일을 오래 하면 안 되겠다’는 표정이 덜 묻어 있었다. 스물아홉. 나보다 두 살 어렸다.

나는 농담을 삼켰다. 삼킨 농담은 대체로 속이 쓰리다.

“파티원들은?”

“부상자 둘은 병원. 진술은 확보 중입니다.”

“확보 중이라는 말은 보통 아무도 제대로 말 못 하고 있다는 뜻이죠?”

직원은 이번에도 웃지 않았다.

“현장 훼손하지 마세요. 특이 사항 있으면 앱으로 보고하시고요.”

“제가 특이 사항입니다만.”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아, 웃음 방지 훈련에 독설 과목도 있구나.

지하 2층은 낮은 천장과 긴 그림자로 가득했다. 형광등 몇 개가 깜빡거렸고, 기둥에는 오래된 누수 자국이 검은 지도처럼 번져 있었다. 주차선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찢겨 있었다. 그 끝에 소형 던전 출구가 있었다.

던전 출구는 문이 아니다. 균열에 가깝다. 공기가 얇아지고, 벽이 젖은 비닐처럼 일그러지며, 안쪽에서 여름 하수구 같은 바람이 나온다. 지금은 닫힌 뒤라 콘크리트 벽에 타다 만 얼룩만 남아 있었다.

그 앞에 피가 있었다.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몬스터 사고라면 더 지저분해야 했다. 특히 보고서에 적힌 몬스터가 ‘그림자개’ 계열이라면. 놈들은 물어뜯는 쪽이지 예쁘게 처리하는 쪽이 아니다.

시신은 이미 수습됐다. 바닥에는 흰색 분필선, 부러진 방어봉, 깨진 스마트워치, 찢어진 편의점 영수증, 반쯤 밟힌 커피 컵, 그리고 검은 비닐 조각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장갑을 꼈다. 정리 헌터의 장갑은 전투용보다 두껍고, 감식용보다 싸다. 세상은 언제나 애매한 사람에게 애매한 장비를 준다.

“자, 민재 씨.”

나는 낮게 말했다.

“빨리 끝내고 싶어서 대충 보진 않겠습니다. 대신 제가 중간중간 헛소리를 해도 이해해 주세요. 겁나서 그렇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죽은 사람은 대답하지 않는다. 적어도 사람의 목소리로는.

나는 부러진 방어봉을 먼저 집었다. 잔류 마력이 식은 철 냄새처럼 손끝에 묻었다. 귀 안쪽이 간질거렸다. 이 느낌이 오면 나는 숨을 천천히 쉰다. 아니면 지난주처럼 자동문이 내게 “열려라 참깨는 노동 착취다”라고 외치는 걸 듣고 쓰러질 수도 있다.

잔향청취.

거창한 이름은 내가 붙인 게 아니다. 협회 감식반에서 붙였다. 정식 능력 등록은 안 됐다. 검사 기계 앞에서는 침묵하고, 월세 낼 때만 선명해지는 능력이라서다.

방어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깨진 스마트워치를 들었다. 화면은 거미줄처럼 갈라졌고, 심박 기록은 사망 추정 시각 직전에서 끊겨 있었다.

찌직.

귀 안에서 오래된 라디오가 켜졌다.

—오늘도 만 보 달성! 축하합니다! 사용자님은 방금 생애 마지막 스텝을 밟으셨습니다!

“와, 건강 앱 인성 봐라.”

나는 이를 악물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마지막 스텝. 위치 기록은 던전 출구 바로 앞에서 끊겼다. 문제는 그 전이었다.

스마트워치는 마지막 3분 동안 같은 좌표 안에서 여섯 번 심박 급상승을 기록했다. 도망친 게 아니다. 제자리에서 겁먹었다.

그림자개한테 쫓겼다면 발자국이 남아야 한다. 최소한 긁힌 자국이라도.

바닥은 너무 깨끗했다.

깨끗해서 더러웠다.

나는 커피 컵을 집었다. 편의점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은 녹아서 갈색 물이 조금 남아 있었다. 컵 옆면에는 손가락 자국이 두 겹으로 찍혀 있었다. 하나는 굵고, 하나는 가늘었다.

컵이 내 손에서 찌그러지는 순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죽아는 죄가 없다. 죄는 빨대 구멍으로 들어온다. 왼쪽, 왼쪽, 왼쪽 손이 두 번 저었다.

“커피가 진술을 하면 판사님이 뭐라고 하실까.”

나는 컵을 투명 봉투에 넣었다.

왼쪽 손. 두 번 저었다. 커피에 뭔가 탔다는 뜻일 수 있다. 사망자 이민재가 왼손잡이였는지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컵의 굵은 지문은 오른쪽에서 잡은 모양이었다. 가는 지문은 컵 뚜껑을 눌렀고.

누군가 커피를 건넸다.

혹은 받아든 뒤 뭔가를 넣었다.

나는 영수증을 펼쳤다. 찢어진 종이는 젖어 있었지만 글자는 일부 남아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1]

[검정 장우산 1]

[우산 비닐 1]

[결제 시각 18:42]

나는 시계를 봤다. 사망 추정 시각은 19:05에서 19:12 사이.

그날 서울에는 비가 왔다. 내가 상가에 도착할 때도 비는 주차장 입구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던전 출구 주변 바닥에는 물자국이 없었다. 젖은 발자국은 파티원들이 끌려나간 통로 쪽에만 있었다.

나는 검은 비닐 조각을 바라봤다.

편의점 우산 비닐이었다. 긴 장우산에 씌우는, 얇고 잘 찢어지는 것. 보통 비 오는 날 지하철 입구에서 무료로 뽑아 쓰는 바로 그 물건. 그런데 이 비닐은 젖지 않았다. 먼지는 묻었지만 물기가 없었다.

비 오는 날, 지하 주차장 입구를 지나온 우산 비닐이 젖지 않았다.

그건 농담으로도 별로였다.

나는 비닐을 집었다.

순간 귀 안쪽이 차가워졌다. 다른 물건들과 달랐다. 보통 잔향은 냄새와 소리와 헛소리가 뒤섞여 온다. 그런데 이건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누가 내 귀에 검은 천을 덮은 것 같았다.

그러다 속삭임이 났다.

—비 맞으면 들킨다. 안 젖은 척해. 검은 건 밤이 아니라 계산서야. 접어, 접어, 접어. 민재야, 뒤돌아보면 할인 끝난다.

나는 손을 놓칠 뻔했다.

“민재야?”

목소리는 우산 비닐에서 났다. 그런데 이민재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농담처럼 생겼지만, 속은 칼이었다.

뒤돌아보면 할인 끝난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뒤돌아봤을까.

나는 바닥을 살폈다. 던전 출구 오른쪽 기둥 밑, 물때가 낀 콘크리트에 기다란 자국이 있었다. 우산 끝으로 찍은 것 같은 원형 눌림. 하나, 둘, 셋. 이상한 건 그 주변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있었다면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자국 주변은 말라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던 것처럼.

검은 우산.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면 사건은 커진다. 사건이 커지면 협회가 온다. 협회가 오면 나는 다시 계약직 시절처럼 야근을 한다. 야근은 사람을 망친다. 가끔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나는 스마트워치의 파편을 하나 더 집었다. 작은 유리 조각이 장갑 끝에 붙었다.

—사용자님, 긴급 연락처를 연결할까요? 사용자님, 넘어지셨나요? 사용자님, 농담 하나 할까요? 강도윤은 아직 안 왔는데 왜 먼저 죽어?

피가 머리에서 발끝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뭐라고.”

스마트워치는 더 말하지 않았다. 화면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기계는 죽은 사람보다 더 완고하게 침묵한다.

강도윤은 아직 안 왔는데.

내 이름.

나는 이민재를 모른다. 적어도 기억에는 없다. 하급 헌터들끼리 마주칠 일은 많지만 이름을 알 정도로 엮인 적은 없었다. 감식반 계약직 시절 자료에서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물건의 잔향은 인터넷 검색 결과를 읊지 않는다.

누군가 죽기 직전 내 이름을 들었거나, 생각했거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말했단 뜻이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협회 앱 알림이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 발신 지역 표시 없음.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도윤 씨.”

여자 목소리였다. 낮고 또렷했다. 피곤함을 잘 다듬어 칼처럼 만든 목소리.

“누구십니까?”

“윤서하입니다. 헌터협회 특별감찰과.”

아, 인생이 드디어 장르를 바꾸기 시작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미리 말씀드리면 세금은 나눠서 냅니다.”

“은성상가 지하 2층 현장에서 즉시 나오세요. 그 사건은 정리 의뢰에서 제외됐습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노란 테이프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광등은 계속 깜빡였고, 던전 출구 자국은 말라 있었다. 내 장갑 안쪽은 식은땀으로 젖었다.

“제외요? 이미 수락했고 현장 들어왔는데요.”

“그래서 전화한 겁니다. 더 이상 만지지 마세요. 보고서도 올리지 마시고요.”

“사망자 물품은요?”

잠깐 침묵.

그 침묵은 답보다 친절했다.

“강도윤 씨. 지금 들고 있는 것 내려놓으세요.”

나는 손 안의 검은 우산 비닐을 봤다.

“제가 뭘 들고 있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통화 너머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닫힌 던전 출구 쪽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똑.

비가 닿을 수 없는 지하 2층, 말라 있던 검은 우산 자국 한가운데에서 물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귀 안쪽에서, 죽은 헌터의 마지막 웃음도 울음도 아닌 목소리가 다시 재생됐다.

—강도윤은 아직 안 왔는데, 왜 네가 먼저 왔어?

제목: 2화. 죽은 자의 잔향 속 이름

“강도윤 씨의 현장 정리 권한은 현재 시각부로 정지되었습니다. 들고 계신 것 전부 내려놓고 주차장에서 나오세요.”

수화기 너머 윤서하의 목소리는 지하 2층의 공기만큼이나 차갑고 건조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천장 구석, 먼지가 뽀얗게 쌓인 비상구 표시등 옆에서 붉은 불빛이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감식반이 철수하면서 달아놓은 임시 감시 카메라였다.

지켜보고 있었군.

역시 세상에 공짜 야근 수당은 없다. 프리랜서 헌터인 내가 협회 특별감찰과의 심기를 건드려봐야 얻을 것은 징계와 면허 정지뿐이다. 나는 즉시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꼬리 치기였다.

“아, 네. 분부대로 해야죠. 그런데 제 일당은 쳐주시는 겁니까? 퇴근길에 헐레벌떡 뛰어왔는데 차비는 주셔야죠. 요즘 가솔린 가격이 던전 마석 값보다 가파르게 오르고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짐짓 억울하고 찌질한 소리를 내며 손을 털었다. 들고 있던 깨진 스마트워치 파편과 검은 우산 비닐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내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빗자루질을 밥 먹듯이 하는 정리 헌터의 손기술은 생각보다 정교하다. 나는 쓰레기를 줍는 척하며, 바닥의 물때에 젖어 눅눅하게 달라붙어 있던 편의점 영수증 조각을 슬쩍 슬리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손끝이 영수증의 거친 종이 표면에 닿는 순간, 차가운 마력이 정수리까지 찌릿하게 타고 올라왔다.

두 번째 잔향청취였다.

귀 안쪽에서 고장 난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이내 익숙하고 축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삑. 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우산 비닐만요. 우산은 검은색인데 왜 안 젖어요? 밖에 비 엄청 오는데.

—아, 손님. 계산은 카드로 하실 건가요? 영수증은 버려주…… 어? 윽!

그것은 사망자 이민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아주 낯설고, 쇠가 긁히는 듯한 불쾌한 저음이었다.

—원래 검은 건 물이 안 묻어. 영수증은 찢어 버려라. 도윤이가 청소하러 올 때 귀찮아지니까.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몸 안의 피가 일시에 식는 느낌이었다.

그자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우연히 얽힌 사고가 아니었다. 이민재를 죽인 범인은 내가 이 은성상가 지하 2층 던전 출구를 정리하러 올 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를 이 자리에 불러들이기 위해, 이민재를 이곳에서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

왜? 내가 대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나는 그저 퇴근길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꿈꾸는 평범한 생계형 F급 헌터일 뿐이었다. 협회 감식반 시절에도 늘 서류 구석에 처박혀 온갖 허드렛일이나 하던 계약직이었다. 그런 나를 노리고 판을 짰다고 생각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컸다.

쿠구구궁.

주차장 진입로 쪽에서 묵직한 엔진음이 들려왔다.

헤드라이트의 강렬한 백색광이 기둥 사이의 긴 그림자들을 한순간에 밀어내며 들이닥쳤다. 먼지 섞인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협회 소속의 검은색 세단이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서고, 뒷좌석 문이 열렸다.

회색 정장 바지에 네이비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여자가 내렸다. 잘 다듬어진 단발머리 아래로 차가운 눈매가 인상적인 여자. 특별감찰과 소속 윤서하 경위였다. 그녀의 뒤로 무장을 갖춘 협회 요원 둘이 신속하게 내려 던전 출구 주변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구두 굽 소리가 뚜벅, 뚜벅, 주차장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민트 향이 지하 주차장의 썩은 오존 냄새를 덮었다.

“네, 경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전히 현장에서 빛이 나시네요. 그 눈빛에 쏘이면 F급은 마비 디버프에 걸릴 것 같습니다.”

나는 넉살 좋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윤서하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내 주머니와 손끝을 집요하게 훑고 있었다.

“현장을 어디까지 손댔죠?”

“손대다니요. 정리 헌터가 하는 일이 원래 손대서 깨끗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지시하신 대로 위험한 마력 잔여물은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봉투에 쓰레기 몇 개 담은 게 전부입니다.”

나는 바닥에 놓아둔 반쯤 찬 쓰레기봉투를 가리켰다. 요원 한 명이 다가와 그 봉투를 조심스럽게 수거해 특수 보관 상자에 담았다.

윤서하는 미동도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 불신이 가득했다.

“이 사건은 단순 몬스터 사고가 아닙니다. 1차 분류에서 오류가 있었던 걸로 확인되어, 본과에서 직접 수사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강도윤 씨는 오늘 현장에서 본 것, 들은 것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마십시오.”

“물론이죠. 입 무겁기로는 제가 협회 안에서 상위 1%입니다. 계약직 시절 비밀유지 서약서만 스무 번 넘게 쓴 몸이니까요.”

“보고서도 올리지 마세요. 오늘 일당은 특별 활동비 명목으로 내일 오전 중에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

“일단 입금만 된다면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 환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윤서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길이 기둥 밑, 내가 아까 쳐다보고 있던 말라붙은 우산 끝 자국으로 향했다.

“거긴 뭐가 있었습니까?”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평온함을 유지했다.

“아, 저거요? 물때가 껴서 나중에 락스 청소라도 해야 하나 보고 있었습니다. 주차장에 누수가 심하면 헌터들이 미끄러지기 십상이라서 말이죠. 직업병입니다.”

“……그래요?”

윤서하는 내 대답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요원들에게 현장 보존을 지시하며 나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어서 꺼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는 굽신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을 벗어나는 발걸음이 무거우면서도 빨라졌다.

지하 주차장 입구를 나서자,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네온사인 불빛들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알록달록하게 번졌다.

나는 길가에 세워둔 내 낡은 SUV에 올라탔다. 차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핸들에 이마를 대고 한참을 숨을 골랐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살인범이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도윤이가 청소하러 올 때 귀찮아지니까.’

그 말은 마치 나를 이 사건의 뒤처리 전담반으로 지정해 둔 것 같은 뉘앙스였다. 내가 현장을 대충 청소하고 덮어버리길 바란 걸까? 아니면, 내가 잔향청취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단서를 남긴 걸까?

어느 쪽이든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깊은 늪에 발을 들였고, 가만히 있으면 다음 차례는 내가 될 것이다.

주머니에서 슬쩍 훔쳐 온 편의점 영수증 조각을 꺼냈다. 빗물에 젖어 글씨가 반쯤 번진 종이 조각.

자세히 보니 영수증 맨 밑바닥에 찍힌 카드 승인 번호와 가맹점 명칭이 보였다.

[가맹점: CU 마포은성점]

[법인카드: (주)블랙 가드]

블랙 가드.

국내 3대 헌터 길드 중 하나이자, 민간 군사 기업을 표방하는 거대 조직이었다. 죽은 이민재는 분명 소속이 없는 하급 프리랜서 헌터였다. 그런 그가 왜 블랙 가드의 법인카드로 결제된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까?

그때, 조수석 시트 위에 던져둔 스마트폰의 진동음이 차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징이이잉.

갑작스러운 소리에 흠칫 놀라며 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발신 번호 제한 표시가 떠 있었다.

망설임 끝에 수락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오직 규칙적인 호흡 소리와, 빗방울이 무언가에 부딪혀 탁탁 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십니까? 장난전화면 끊겠습니다. 저 오늘 야근하고 퇴근하는 길이라 피곤하거든요.”

내가 퉁명스럽게 뱉어내자, 마침내 나직한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자동 음성 변조기를 거친 듯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강도윤 선배님.

가슴이 쿵광거렸다. 선배님이라니.

—이 전화를 받고 계시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겁니다.

이민재였다.

기계음 속에서도 그의 떨리는 목소리 톤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죽기 전에 미리 예약해 둔 발신 시스템이 작동한 모양이었다.

—저는 블랙 가드의 비밀 장부를 우연히 손에 넣었습니다. 그들이 던전 부산물을 불법 유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협회 감찰과도 그들과 한패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과거에 감찰 부서에서 일했던 선배님뿐입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민재는 내가 협회 감식반 출신인 것을 알고 줄을 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범인에게 덜미를 잡혔고, 결국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제 개인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확보해 주세요. 차량은 은성상가 건너편 유료 주차장에 있습니다. 차 키는…… 제가 편의점 영수증 뒤에 적어둔 주차권 번호로 스마트키 원격 인식이 가능하게 설정해 두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제 억울함을…….

뚝.

전화는 허무하게 끊겼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영수증 조각을 뒤집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작은 숫자들이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빗물에 번져서 마지막 두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씨…….”

그때, 내 차 앞 유리창 위로 툭, 하고 무언가 떨어졌다.

와이퍼 바로 위, 젖은 유리창을 타고 검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피였다.

그리고 어두운 빗속에서, 내 차 전면 유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검은색 장우산을 깊게 눌러쓴 사내였다. 우산 위로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우산 표면은 물기를 전부 튕겨내며 완전히 말라 있었다.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산 그늘 아래로 붉게 빛나는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작가의 말

첫 사건입니다. 도윤의 퇴근은 당분간 쉽지 않을 예정입니다. / 도윤의 이름이 왜 현장에 먼저 있었는지, 이제부터 조금씩 풀립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