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말라 있는 우산과 뒷좌석의 검은 우산
제목: 3-4화. 말라 있는 우산과 뒷좌석의 검은 우산
제목: 3화. 말라 있는 우산 밑의 남자
그때, 내 차 앞 유리창 위로 툭, 하고 무언가 떨어졌다.
와이퍼 바로 위, 젖은 유리창을 타고 검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피였다.
그리고 어두운 빗속에서, 내 차 전면 유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검은색 장우산을 깊게 눌러쓴 사내였다. 우산 위로 세차게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우산 표면은 물기를 전부 튕겨내며 완전히 말라 있었다.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산 그늘 아래로 붉게 빛나는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송풍구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에어컨 필터의 눅눅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내 입김 때문에 흐려지는 차창 안쪽으로 빗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우두두둑, 타타탕. 마치 양철 지붕 아래 갇힌 것만 같은 밀폐감이 온몸을 조여 왔다.
"철컥."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운전석 문 옆의 도어록 버튼을 눌렀다.
F급 헌터의 가장 위대한 생존 비결은 자신의 전투력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기껏해야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5만 원짜리 반지하에 사는 프리랜서 청소부인 내가, 저런 괴물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이길 확률은 복권에 연속으로 당첨될 확률보다 낮았다.
사내가 천천히 보닛 앞으로 다가왔다. 물방울이 전혀 맺히지 않는 검은 우산의 뾰족한 끝이 내 차 앞유리를 톡, 하고 건드렸다.
그 가벼운 접촉과 동시에, 내 고유 권능인 ‘잔향청취’가 벼락처럼 뇌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두 가지의 기묘한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하나는 내 앞유리에 번진 피에서 흘러나오는 이민재의 마지막 단말마였고, 다른 하나는 사내의 말라붙은 우산에서 튀어 오른 마른 물방울의 잔향이었다.
[아니, 우산에 피 묻는 거 싫다고 사람 목을 그렇게 깔끔하게 따냐? 이 미친…… 내 옷 다 젖었잖아!]
숨이 막힐 정도로 생생한 이민재의 억울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우산 끝에서 튕겨 나간 마른 물방울의 잔향이 지직거리는 무전음처럼 겹쳐 들렸다. 그것은 기계적으로 변조된 차가운 음성이었다.
[블랙 가드 특제 ‘나노 방수 코팅 원단’ 성능 검증 완료. 마력 전도율 120%. 특수 효과: 물리 및 마법 오염 완벽 방지. 단가 대비 효율 극상.]
블랙 가드. 아까 편의점 영수증 법인카드 명의에서 봤던 그 이름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쳤다. 이 우산쟁이는 단순한 미치광이 연쇄살인마가 아니었다. 국내 3대 길드 중 하나인 블랙 가드가 직접 장비를 쥐여주어 보낸 전문 사냥개였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우산 손잡이 안쪽에 내장된 소형 아티팩트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잔향이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타겟 강도윤. 전 감식반 소속 F급. 잔향청취 권능 보유자로 강력 의심됨. 확보가 불가능할 시 즉시 제거할 것.]
‘어?’
내 등줄기로 얼음물이 쏟아지는 듯한 소름이 돋았다.
내 진짜 권능명을 알고 있다고?
나는 협회에 능력을 등록할 때, 그저 현장의 기운을 조금 민감하게 느끼는 'F급 육감 증폭' 정도로 얼버무려 제출했었다. 잔향청취라는 진짜 이름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들이 어떻게 내 능력의 정식 명칭을 알고 있단 말인가.
사내가 천천히 우산 끝에 힘을 주었다. 쩌적, 쩌적. 강화유리로 제작된 전면 유리에 순식간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우산 끝을 통해 흘러드는 무지막지한 밀도의 마력이 유리를 부수고 있었다.
"강도윤 씨."
사내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차창을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젖은 모래를 비비는 것처럼 서늘하고 무거웠다.
"이민재가 죽기 전에 뭘 넘겼지?"
"예? 이민재요?"
나는 짐짓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운전대를 꼭 쥐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날뛰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최대한 비굴하게 쥐어짜 냈다.
"그…… 은성상가 이씨 아저씨 말씀이십니까? 그분 아까 퇴근하셨는데…… 저, 저기 손님, 혹시 대리운전 부르셨습니까? 아쉽게도 제 차는 똥차라 뒤에 자리가 없는데……."
"연기는 그쯤 해두지."
사내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우산 끝에 실린 마력의 압력이 배로 강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이민재의 블랙박스고 나발이고 내 머리가 먼저 깨질 판이었다.
나는 조수석 아래쪽에 던져두었던 노란색 분무기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던전 현장 정리용으로 사용하는 ‘마력 잔류 제거제 4종’ 액체였다. 일반적인 마력 흔적을 지울 때 쓰는 고농축 강산성 화학 약품으로, 피부에 닿으면 3도 화상을 입히는 위험 물질이다.
"저기, 손님! 제 차 앞유리가 얼마짜리냐면요!"
나는 창문을 아주 미세하게, 딱 1센티미터만 내렸다. 그리고 그 틈새로 분무기 노즐을 밀어 넣고 방아쇠를 끝까지 당겼다.
치이이이익!
동시에 기어를 후진(R)으로 때려 박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마력 제거제 액체 가스가 사내의 마력 우산과 부딪히는 순간, 격렬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며 시야를 가리는 자욱한 백색 연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마력과 화학 물질이 만나 일으킨 일종의 마력 중화성 연막이었다.
"아우, 매워! 이게 프리랜서 청소부의 화학 공격이다, 이 자식아!"
타이어가 빗물 고인 아스팔트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헛돌았다. 차체 뒤쪽이 크게 흔들리며 골목길을 따라 무서운 속도로 역주행했다. 백미러 너머로 자욱한 흰 연기 속에서 붉은 두 눈이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저 연기 너머에 우뚝 선 채, 도망치는 내 차를 지켜볼 뿐이었다.
대로변으로 차머리를 격하게 돌린 순간, 조수석에 던져둔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윤서하 경위였다.
나는 핸들을 꺾으며 블루투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윤 경위님! 지금 통화할 타이밍이 아닙니다! 방금 내 차 유리에 빨간 눈을 한 우산쟁이가—"
"강도윤 씨, 지금 당장 은성상가 뒤편에서 벗어나! 근처에 고농도 마력 반응이 검출됐어. 협회 타격대가 가고 있으니까 움직이지 마!"
윤서하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묘하게 정형화된 대사를 읊는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크게 말하는 것처럼.
"움직이지 말라뇨! 나보고 그냥 저 우산쟁이 밥이 되라는 겁니까?"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윤서하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수화기 저편에서 아주 미세하게, 송수신기를 손으로 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도윤 씨, 내 말 똑바로 들어. 이민재의 차량은 건너편 은성주차타워 3층 B-4 구역에 있어. 주차권 뒷면의 일련번호 뒷자리가 주차장 차단기 비밀번호야. 협회 요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거기로 가. 거기서…… 그걸 확보해."
"예? 아니, 당신 협회 감찰과 소속이면서 나한테 뭘 찾으라는—"
"끊어. 협회 내부에도 그들의 개가 있어. 아무도 믿지 마."
뚝.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나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머릿속이 산산조각 난 유리창처럼 어지러웠다. 윤서하 경위, 그녀는 나를 감시하는 적인가, 아니면 협회 내부의 부패를 캐기 위해 나를 장기말로 이용하려는 아군인가? 분명한 건, 지금 나에게 선택지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민재가 남긴 블랙박스를 찾지 못하면, 나는 평생 저 붉은 눈의 우산쟁이에게 쫓기며 살아야 할 터였다. 다음 달 월세를 내기도 전에 제명에 못 죽고 향나무 냄새를 맡게 될 것이 뻔했다.
"젠장, 월세 45만 원짜리 인생이 왜 이렇게 스펙터클해진 거야."
나는 세차게 와이퍼를 작동시키며 건너편의 '은성주차타워'로 차를 몰았다. 콘크리트 외벽이 군데군데 갈라진, 오래되고 침침한 5층짜리 사설 주차장 건물이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굳게 닫힌 차단기가 길을 가로막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아까 몰래 챙긴 편의점 영수증 조각을 꺼냈다. 이민재의 피가 묻은 영수증 뒷면에는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숫자가 있었다.
[9928-04]
나는 차창을 열고 차단기 옆 키패드에 숫자 992804를 차례대로 입력했다.
띠리릭— 쿵.
경고음과 함께 차단기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주차장 내부는 낮게 웅웅거리는 환풍기 소리와 함께 습한 시멘트 냄새가 진동했다. 어두컴컴한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3층으로 올라가 B-4 구역을 찾았다. 구석진 자리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구형 은색 세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민재의 차였다.
나는 내 똥차를 옆 칸에 대충 구겨 넣고 내렸다. 비는 피했지만, 주차장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톡, 톡 하고 내 어깨를 적셨다.
은색 세단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내 스마트폰의 원격 주차 앱을 켜고 영수증에 적힌 바코드 번호를 스캔했다. 이민재가 말한 대로 차량의 스마트키 시스템이 내 폰의 원격 인식 기능과 연결되어 있었다.
삑삑—
가벼운 전자음과 함께 은색 세단의 사이드미러가 스르륵 펴지며 문잠김이 풀렸다.
"휴…… 일단 들어왔고."
나는 빠르게 운전석 문을 열고 안으로 슬라이딩하듯 탑승했다. 차 안은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냉기가 뚝뚝 떨어졌고, 묵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곧바로 앞유리 중앙에 매달린 블랙박스로 손을 뻗었다. 마이크로 SD 카드만 빼내서 도망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블랙박스에 손을 대기도 전에, 꺼져 있던 블랙박스의 소형 LCD 화면이 스스로 파지직 소리를 내며 켜졌다.
뿌연 노이즈가 화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어떤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로 주행 영상이 아니었다.
"어……?"
화면 속에 나타난 것은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풍경이었다. 좁아터진 반지하 방, 굴러다니는 소주병과 먼지 쌓인 책상. 그리고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사내.
나였다.
내 자취방 내부를 실시간으로 촬영한 몰래카메라 영상이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전율이 일었다. 이민재의 차량 블랙박스에 왜 내 자취방 영상이 들어 있는 거지?
영상이 재생되는 화면 아래로 붉은색 자막이 빠르게 흘러갔다.
[관찰 대상: 강도윤 (F급 감식반)]
[특이 사항: 고유 권능 '잔향청취' 각성 징후 포착. 타겟의 인지 여부 확인 중.]
[조치 사항: 던전 사고사 위장 후 시체 수거 또는 포섭.]
그리고 블랙박스의 스피커에서 치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조금 전 길거리에서 들었던 그 낯선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도윤. 잔향청취 권능 확인 완료. 관찰을 종료하고 제거 단계로 이행한다."
철컥! 철컥! 철컥!
동시에 은색 세단의 모든 문이 강제로 잠겼다. 계기판의 불빛이 전부 붉은색으로 변하며 차 안의 산소가 희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마력의 온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은색 세단의 어두운 뒷좌석.
그 좁고 캄캄한 공간 속에서, 빗속에서 마주쳤던 그 붉은 안광 두 개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말라붙은 검은 우산의 끝을 내 목덜미를 향해 겨누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찾았다."
작가의 말: 검은 우산이 처음으로 도윤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제목: 4화. 뒷좌석의 검은 우산
사람이 진짜로 놀라면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목덜미에 검은 우산 끝이 닿았고, 백미러 속 붉은 눈 두 개가 어둠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품격 있었다.
"어, 손님. 뒷좌석은 추가 요금인데요."
내가 봐도 죽기 직전 농담치고는 수준이 처참했다. 하지만 F급 헌터가 S급처럼 폼 잡는 순간 장례식장 예약 앱을 켜야 한다. 내 생존 전략은 늘 같았다. 비굴하게 웃고, 더 비굴하게 시간을 벌고, 남들이 검을 뽑을 때 나는 청소도구함을 뒤진다.
검은 우산 사내는 웃지 않았다.
"카드."
"교통카드요? 신용카드요? 제가 현금영수증은 꼬박꼬박 해드리는데."
우산 끝이 살짝 눌렸다. 목 피부 아래로 차가운 마력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숨을 들이쉬자 오래된 차량 방향제 냄새와 묵은 담배 냄새가 같이 폐에 들러붙었다. 바닐라 향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싸구려 플라스틱 냄새였다. 문제는 그 향이 내 능력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귓속에서 방향제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월요일 03:17. 은성주차타워 3층 B-4. 이민재, 운전석. 뒷좌석 승객 1명. 목적지 변경. 폐쇄 던전 D-17. 반복합니다. 폐쇄 던전 D-17.]
나는 눈꺼풀을 한 번 깜박였다.
폐쇄 던전 D-17.
이민재가 죽기 전, 이 차 안에서 누군가와 만났다. 그리고 목적지는 사건 현장이 아니라 폐쇄 던전이었다. 폐쇄 던전은 말 그대로 닫힌 던전이다. 일반인은 못 들어간다. 하급 헌터도 못 들어간다. 공식적으로는 출입 기록이 남아야 한다.
공식적으로는.
"카드."
사내가 다시 말했다. 짧고 낮았다. 설명은 없었다. 협박도 길게 하지 않았다. 사람을 많이 죽여본 놈들의 말버릇이다. 필요 없는 문장을 아낀다.
"블랙박스 SD카드 말씀하시는 거면, 저도 방금 봤습니다. 생각보다 제 방이 더럽더라고요. 충격적인 사생활 침해입니다."
"빼."
"제가요? 이 자세에서요? 목에 우산 꽂힌 채로요?"
"지금."
나는 천천히 양손을 올렸다. 운전석 앞유리 위에 붙은 블랙박스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대신 뒷좌석의 우산 끝은 내 경동맥에서 손가락 두 마디 거리였다. 훌륭했다. 인생은 늘 선택지를 준다.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중에서.
나는 오른손을 블랙박스 쪽으로 뻗는 척했다.
그 순간 블랙박스 화면이 다시 파직거렸다. 내 반지하 방이 보였다. 침대, 구겨진 이불, 바닥에 굴러다니는 편의점 도시락 뚜껑. 부끄러움이 공포보다 한 박자 빨리 올라왔다.
그리고 화면 아래 작은 녹음 아이콘이 깜빡였다.
그 아이콘을 본 순간, 잔향청취가 다시 귀를 물었다.
[음성 패턴 샘플 014. 대상자 강도윤. 잔향청취 발동 직전 호흡 변화, 성대 진동, 무의식 발화 수집 완료. 단서 인지 시 농담 빈도 증가. 패턴 안정적.]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감시가 아니었다.
놈들은 내 방을 훔쳐본 게 아니라, 내가 능력을 쓸 때 나는 소리를 모으고 있었다. 죽은 물건의 목소리를 듣기 직전, 내가 어떻게 숨 쉬고, 어떤 헛소리를 내뱉고, 목 안쪽이 어떻게 떨리는지. 그걸 모아서 내 권능을 판독하려 했다.
세상에. 내 사생활보다 더 수치스러운 게 있었다. 내 생리적 반응 데이터였다.
"이 정도면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 신고하면 되나요? 아니면 장례지도사협회 쪽이 빠를까요?"
"입."
"예?"
"닫아."
사내의 왼손이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우산을 들지 않은 손이었다. 검은 장갑 낀 손가락이 내 뒤통수 쪽으로 뻗었다. 그 순간 나는 운전석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딸깍.
안전벨트가 잠기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우산 끝이 내 목 대신 헤드레스트 가죽을 찢었다. 찢어진 가죽 속에서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터졌다.
그리고 가죽시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보험금 수익자 변경 완료. 수익자: 백지 위임. 대리 서명 확인. 이민재, 동의하지 않음. 다시 말합니다. 이민재, 동의하지 않음.]
"아, 씨."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이민재는 단순히 죽은 게 아니었다. 죽기 전에 보험금 수익자까지 갈아치워졌다. 백지 위임. 대리 서명. 그 말은 누군가가 그의 죽음으로 돈을 받도록 서류를 만졌다는 뜻이다. 던전 사고사 위장, 보험금, 폐쇄 던전 D-17. 냄새가 났다. 던전 부산물 썩은 냄새보다 더 역한 돈 냄새가.
사내가 움직였다.
나는 안전벨트를 끝까지 잡아당겨 고정시킨 뒤, 버클 쪽에 발을 걸었다. 그리고 운전석 옆 수납함을 발뒤꿈치로 걷어찼다. 수납함이 벌컥 열리며 내 청소 장비들이 쏟아졌다. 마력 잔류 제거제, 혈흔 응고 스프레이, 산성 중화 파우더, 그리고 현장용 접착 폼 캔.
사내가 내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나는 접착 폼 캔의 안전핀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잠깐만요. 이거 사용법에 밀폐 공간 금지라고 적혀 있거든요."
나는 캔을 뒷좌석 발밑으로 던지고 노즐을 밟았다.
푸아아악!
회색 접착 폼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뒷좌석 바닥과 사내의 구두, 우산 천 끝을 한꺼번에 덮었다. 원래는 던전 벌레가 기어 나온 구멍을 임시로 막을 때 쓰는 물건이다. 사람에게 쓰면 안 된다. 그래서 더 잘 붙었다.
사내의 붉은 눈이 처음으로 가늘어졌다.
"잔재주."
"제 직업 설명란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잔재주 및 오염물 제거."
나는 몸을 숙여 블랙박스를 통째로 비틀었다. SD카드 슬롯이 뻑뻑하게 걸렸다. 손톱이 들릴 것 같았다. 뒤에서는 접착 폼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찌이익. 찌이익. 사람이 아니라 두꺼운 고무를 뜯는 소리였다.
주차타워 안내 방송이 갑자기 울렸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협회 긴급 타격대는 현재 4층 C구역으로 이동 중입니다. 반복합니다. 4층 C구역으로 이동 중입니다.]
4층 C구역?
나는 3층 B-4에 있었다. 윤서하가 알려준 위치와 다르다. 일부러였다. 그녀는 누군가 듣는 무전망에 타격대를 잘못된 층으로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나한테 도망칠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30초짜리 할인쿠폰처럼 짧다는 점이었다.
딸칵.
SD카드가 빠졌다.
나는 그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입에 물었다. 주머니에 넣을 시간도 아까웠다. 그리고 운전석 문 손잡이를 당겼다.
잠겨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인생이 그렇게 친절할 리 없지."
나는 혈흔 응고 스프레이를 창문 틈에 뿌리고, 바로 산성 중화 파우더를 던졌다. 두 약품이 젖은 고무 패킹과 만나며 뿌연 열기를 냈다. 강화유리 가장자리가 삐걱거렸다. 나는 무릎으로 문을 두 번 찼다.
쾅. 쾅.
세 번째에 운전석 창문이 통째로 금이 갔다. 네 번째에 유리가 안쪽으로 무너졌다. 팔뚝이 긁히고 피가 났지만, 죽는 것보다는 저렴했다. 나는 깨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콘크리트 바닥이 내 갈비뼈를 반갑게 맞이했다.
"윽, 환영 인사가 과격하시네요, 3층 바닥 씨."
뒤에서 차 문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공포 영화의 법칙상 죽는다. 나는 3층 B구역을 가로질러 좁은 램프로 뛰었다. 습한 콘크리트 냄새가 목구멍에 들러붙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 깜빡거리며 내 그림자를 길게 찢었다. 오래된 환풍기가 천장에서 웅웅 울었다. 마치 건물 전체가 감기 걸린 짐승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2층으로 내려가는 램프와 옥상으로 올라가는 램프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나는 0.5초 고민했다.
아래는 출구. 위는 막다른 길일 가능성.
그래서 위로 뛰었다.
F급 헌터의 생존법 두 번째. 정상적인 선택지는 이미 적도 예상했다.
뒤에서 우산 끝이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가 따라왔다. 사내는 뛰지 않았다. 그런데 거리는 줄어들고 있었다. 아주 불공평한 물리 법칙이었다.
나는 램프 벽면에 붙은 오래된 소화전함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먼지 쌓인 소방호스와 녹슨 밸브가 있었다. 나는 밸브를 있는 힘껏 돌리고 호스를 램프 바닥에 던졌다.
콰아아아!
물과 녹물이 터져 나와 경사로를 적셨다. 나는 바닥에 혈흔 응고 스프레이를 한 번 더 뿌렸다. 물기와 약품이 만나 미끈한 젤처럼 변했다.
"청소업계에서는 이걸 산업재해라고 부릅니다!"
나는 난간을 붙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뒤에서 무언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짧고 낮은 욕설도 들린 것 같았다. 검은 우산 사내도 욕은 하는구나.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옥상 문은 잠겨 있었다.
당연하지. 오늘의 운세가 ‘대체로 사망’인데 문이 열릴 리 없다.
나는 문 옆 키패드에 주차권 뒷면 번호를 다시 눌렀다. 992804. 삑. 빨간불. 아니었다.
그때 입에 문 SD카드가 혀끝에 닿았다. 플라스틱 조각에 묻은 미세한 열기가 귀로 올라왔다.
[백업 파일명: 감식반_야간_서버실_윤서하_책상_03-17. 접근 권한: 블랙 가드 내부 감사팀.]
나는 손가락이 멈췄다.
윤서하의 책상.
내 방이 아니었다. 이민재의 차 안에 있던 영상은 내 감시 자료만 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협회 감식반, 윤서하, 03시 17분. 퍼즐 조각이 갑자기 너무 많이 쏟아져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붉은 안광이 램프 모서리를 돌아 올라왔다.
"카드."
나는 SD카드를 삼킬 뻔했다. 겨우 혀 밑에 숨기고, 키패드 아래의 낡은 비상 개폐함을 주먹으로 쳤다. 유리가 깨지고 손등이 찢어졌다. 안쪽 레버를 당기자 옥상 문이 덜컹 열렸다.
찬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비는 그쳤지만 옥상 바닥에는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멀리서 협회 사이렌이 엉뚱한 4층 방향으로 울렸다.
나는 옥상으로 뛰쳐나가며 뒤돌아봤다.
검은 우산 사내가 문턱에 서 있었다. 접착 폼이 뜯긴 구두와 찢어진 우산 끝에서 회색 찌꺼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찾았다."
그가 아까와 똑같이 말했다.
나는 혀 밑의 SD카드를 손바닥에 뱉었다. 빗물에 젖은 작은 칩 위로 휴대폰 플래시를 비췄다. 파일 목록 하나가 자동 실행된 미리보기처럼 떠올랐다. 잔향인지, 내 공포가 만든 환각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파일명만큼은 또렷했다.
`감식반_윤서하_책상_월요일0317.mp4`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검은 우산은 나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이미 우리 사무실 안에 앉아 있었다.
작가의 말: 4화입니다. 도윤은 SD카드를 얻었지만, 감시의 방향이 자기 방에서 협회 내부로 뒤집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