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303화. 감사관의 우산과 퇴근 카드
301화. 감사관의 우산
출석 요구서에 적힌 날짜는 오늘이었다.
보통 공문이라는 건 최소한 며칠의 유예를 준다. 인간적인 기관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사망관리국 감사실은 인간적인 기관이 아니었고, 내 어머니는 살아 있을 때도 약속 시간에 늦는 걸 싫어했다.
[출석 시각: 즉시]
[불응 시 존재 가용성 제한]
“존재 가용성이라니. 이놈들은 협박도 왜 이렇게 사무용어로 하냐.”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복도 바닥은 아직 미수금 정산 구역의 잔해로 축축했다. 검은 잉크는 증발하지 않고, 오래된 장례식장 향처럼 벽 틈에 달라붙어 있었다.
윤서하는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흰 실은 더 이상 검게 번지지 않았다. 대신 손목에는 아주 가느다란 은색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서윤이 남긴 계약의 마지막 흉터. 반가온은 백연의 외투를 뒤집어쓴 채 졸고 있었고, 백연은 부서진 카메라를 품에 안은 채 계속 셔터 버튼을 눌렀다. 이미 렌즈는 깨졌지만, 그녀는 버릇처럼 기록을 포기하지 않았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나를 불렀다.
“또 혼자 가려고 하죠.”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방금 떠올린 변명 세 개가 전부 그녀의 눈빛 앞에서 폐기 처분됐다. ‘위험하니까’, ‘금방 다녀올 테니까’, ‘이건 내 가족 일이니까’. 셋 다 내가 싫어하는 시스템 문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제외시키는 말.
“솔직히 말하면 그럴 생각이었어요.”
“솔직해서 더 짜증 나네요.”
“장점으로 봐주면 안 됩니까?”
“단점입니다.”
윤서하는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는 아직 떨렸지만, 그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 이름이 반품 대상에 올라갔고, 내 어머니가 당신 어머니를 지키려고 계약했고, 당신이 그걸 뒤집었어요. 그러면 이건 당신 혼자 갈 일이 아니에요.”
반가온이 외투 속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요. 저 죽었다 살아났는데 출석 체크는 해야죠.”
“너는 좀 자라.”
“형 혼자 가면 또 이상한 서류에 도장 찍을 거잖아요.”
백연도 깨진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증언에는 목격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 카메라는 망가졌지만, 메모리는 살아 있어요.”
나는 셋을 차례로 보았다. 이상했다. 몇 달 전의 나는 이런 장면을 상상조차 못 했다. 퇴근 카드 하나 잘못 주웠다가, 사망 플래그와 우산과 보험 약관 사이에서 구르다 보니 어느새 혼자 죽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좋습니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출석 요구서의 확인 버튼을 눌렀다.
“다 같이 갑시다. 단, 엄마가 나오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세요. 우리 엄마, 첫인상에 민감합니다.”
확인 버튼이 눌리는 순간, 복도 끝에 검은 우산 하나가 펼쳐졌다. 이번에는 우리를 삼키려는 우산이 아니었다. 우산 안쪽에는 금색 글자가 잔잔히 떠올랐다.
[감사실 임시 출입구]
[증언자 동반 허가]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우리 엄마. 단체 손님 받아본 솜씨가 있어.”
우리가 우산 안으로 발을 들이자 세상이 뒤집혔다. 잉크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비 온 뒤 골목의 흙냄새가 났다.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낡은 행정복지센터 같은 공간에 서 있었다. 형광등은 반쯤 깜박였고, 벽에는 오래된 표어가 걸려 있었다.
[죽음은 행정이 아니라 증언이다]
창구 너머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 정장, 검은 우산,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얼굴.
한희주.
나의 어머니.
“왔니, 도윤아.”
그녀는 너무 태연하게 말했다. 마치 내가 학교 끝나고 늦게 귀가한 것처럼.
나는 준비해 둔 멋진 말들을 전부 잊어버렸다. 욕도, 농담도, 원망도 혀끝에서 엉켰다. 결국 나온 건 아주 형편없는 한마디였다.
“엄마, 왜 또 공무원이 됐어?”
한희주는 잠깐 눈을 깜박이더니, 어릴 적 내가 밥그릇을 엎었을 때처럼 웃었다.
“누가 해야 하잖아.”
그 말에 가슴이 무너졌다.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지 않았다. 대신 창구 위에 서류 뭉치를 올려놓았다. 제목은 [사망관리국 전면 감사 개시 명령서]였다. 아래에는 내가 미수금 정산 구역에서 억지로 쑤셔 넣은 문장들이 증거 번호로 분류되어 있었다.
[증언 보존]
[내부 감사 청구]
[반품 대상자의 권리 회복]
“네가 문을 열었다.”
한희주가 말했다.
“나는 안쪽에서 도장을 빼앗았고.”
“그럼 끝난 거야?”
내 질문은 아이처럼 튀어나왔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제발 이제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된다고, 제발 엄마가 집에 온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협회 사망관리국은 무너질 거야. 하지만 무너지는 동안 많은 기록이 튀어나올 거다. 누군가는 그 기록들을 사람의 이름으로 돌려놔야 해.”
그녀의 시선이 나를 지나 윤서하, 반가온, 백연에게 닿았다.
“너희가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윤서하가 조용히 물었다.
“저희 어머니의 계약도… 끝낼 수 있나요?”
한희주는 서류 한 장을 꺼냈다. [한서윤 대체 보호 계약 해지 승인서]. 그 아래에는 이미 검은 우산 모양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네 어머니는 충분히 버텼다. 이제 그 사람의 이름은 부품이 아니라 보호자로 기록될 거야.”
윤서하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한 방울이 떨어졌다. 검은 잉크가 아니라 투명한 눈물이었다.
반가온은 자기 목덜미의 붉은 도장 자국을 만지작거렸다.
“저는요?”
“검수 완료 도장은 무효 처리했다. 너는 물건이 아니니까.”
가온이는 입을 벌렸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제 미수금도 없어져요?”
“그건 도윤이한테 물어봐.”
“엄마!”
내가 항의하자 한희주는 처음으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사람이 아직 내 어머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백연은 떨리는 손으로 메모리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에 전부 있습니다. B-04, 정산 구역, 협회 사망관리국의 문서들.”
한희주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건 네가 가지고 있어. 기록자는 기록을 넘기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서 증언하는 사람이다.”
백연은 고개를 숙였다. 깨진 카메라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나를 보았다.
“도윤아.”
“응.”
“이제 그만 나를 구하려고 해.”
그 말이 가슴 한복판을 찔렀다.
“엄마는 아직 저 안에 있잖아.”
“나는 갇힌 게 아니야. 내가 선택한 자리다. 네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동안, 너는 계속 시스템의 언어에 묶여 있을 거야.”
한희주는 창구 너머에서 손을 뻗었다. 투명한 유리벽이 우리 사이를 갈랐지만, 그녀의 손끝이 내 손바닥의 흉터 위에 닿는 느낌이 났다.
“너는 보호자가 아니라 증언자야. 사람을 대신 죽는 방식으로 지키지 말고,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고 끝까지 말하는 방식으로 지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구멍에 오래된 비가 고였다.
어머니는 서류 마지막 장을 내밀었다.
[강도윤 사망 예정 통지서 — 폐기]
[강도윤 보호자 계약 — 종료]
[강도윤 증언자 등록 — 확정]
세 줄짜리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세 줄을 읽는 순간, 몇 달 동안 목에 감겨 있던 보이지 않는 목줄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퇴근해도 돼, 도윤아.”
한희주가 말했다.
나는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엄마도 같이 가면 안 돼?”
“감사 끝나면.”
“그거 공무원들이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인데.”
“이번엔 진짜야.”
어머니는 검은 우산을 접었다. 감사실의 형광등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민원은 접수됐어. 아주 지독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러니까 이제 네 삶을 살아. 내 것까지 말고, 네 것만.”
세상이 다시 뒤집혔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뻗었다.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떨어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우산 밖으로 밀려나기 직전,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밥은 챙겨 먹고.”
나는 결국 울면서 웃었다.
“진짜 마지막까지 너무 엄마답네.”
302화. 증언자 등록
우리가 돌아온 곳은 던전 입구가 아니었다.
서울헌터협회 본관 1층 로비였다. 정확히는 새벽 네 시 십칠분, 청소 로봇 두 대가 서로의 동선을 막고 멍청하게 삐빅거리는 바로 그 로비 한가운데였다.
평소라면 출입증 없는 민간인이 이 시간에 협회 로비로 떨어지는 순간 경보가 울리고, 보안팀이 달려오고, 나는 또 체포될 뻔한 헌터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우리가 바닥에 나뒹굴자마자 천장의 전광판이 번쩍 켜졌다.
[사망관리국 전면 감사 개시]
[관련 부서 업무 정지]
[증언자 보호 절차 발동]
로비 전체가 얼어붙었다. 야간 당직 직원이 커피를 들고 나오다 컵을 떨어뜨렸고, 보안요원 두 명은 우리를 잡으러 오다가 전광판을 보고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저거… 진짜 협회 시스템 공지 맞습니까?”
한 보안요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바닥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몰라요. 근데 우리 엄마가 보냈으면 진짜일 겁니다.”
“예?”
“가족 업무라 설명이 깁니다.”
윤서하가 내 팔을 잡고 일어났다. 그녀의 손목에 남아 있던 은색 흉터가 희미한 빛을 냈다. 더 이상 계약의 표식이 아니라, 무효화된 족쇄의 흔적처럼 보였다. 반가온은 로비 바닥에 엎드린 채 깊은 숨을 들이켰다.
“와… 공기가 던전 냄새 안 나요.”
“그럼 일어나. 공짜 산소 마신 값으로 진술서 써야 해.”
“형은 진짜 감동을 오래 못 가게 해요.”
백연은 아무 말 없이 깨진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그녀의 손은 떨렸지만, 눈빛은 선명했다.
“이제 공개해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협회 로비의 모든 스크린이 동시에 검게 변했다. 그리고 우리가 봤던 기록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B-04 민원실]
[미수금 정산 구역]
[헌터협회 사망관리국 비인가 사망 플래그 운용]
[반품 대상자 임의 지정]
[보호자 계약을 통한 존재 자산화]
백연의 영상이었다. 깨진 렌즈 너머로 기록된 장면들은 흔들리고 찢겨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진짜 같았다. 윤서하가 잉크 속에서 버티는 모습, 반가온이 검수 도장을 떼어내는 모습, 내가 하얀 반품 서류를 찢어 고치는 모습, 그리고 B-00 기록에 찍힌 한희주와 한서윤의 이름.
로비 곳곳에서 직원들이 하나둘씩 멈춰 섰다. 누군가는 입을 막았고, 누군가는 곧장 전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모든 내부 통신망 위에 새 문구가 떠 있었다.
[감사 중 증거 인멸 시도는 즉시 기록됩니다]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엄마, 일 잘하네.”
윤서하가 작게 웃었다. 웃음 끝에 울음이 묻어 있었지만, 그래도 웃음이었다.
그때 로비 반대편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헌터협회 감찰부, 안전관리팀, 언론 대응실,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부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중년 남자가 얼굴을 굳힌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강도윤 헌터.”
“네. 이번엔 또 무슨 죄목입니까. 무단 출입? 공문 훼손? 가족 동반 감사실 방문?”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협회 감찰부장 오명진입니다. 지금부터 당신과 동행인 전원은 증언자 보호 대상입니다. 또한 사망관리국 관련 기록에 대한 1차 증언을 요청드립니다.”
“보호 대상이라.”
나는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예전 같으면 그 단어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보호라는 말 뒤에 얼마나 많은 족쇄가 숨어 있는지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전광판 한쪽에 작게 떠 있는 문구 때문이었다.
[보호는 대리 죽음이 아니라 증언권 보장이다]
누가 썼는지 너무 뻔했다.
“좋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오명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말씀하십시오.”
“첫째, 윤서하 씨와 반가온 씨의 모든 반품·검수 기록 폐기. 둘째, 한서윤 씨를 포함해 보호자 계약으로 묶인 사람들의 이름 복원. 셋째, 백연 기자의 원본 영상과 증언권 보장. 넷째, 사망관리국 피해자 명단 전수 공개.”
“그건 절차상—”
“절차요?”
나는 웃었다.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그 절차라는 말로 사람을 물건처럼 반품해온 부서가 지금 감사받는 중 아닙니까. 절차 얘기는 장부에 이름 돌려놓고 합시다.”
로비가 조용해졌다. 오명진은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들을 감사 요청서에 포함하겠습니다.”
“요청서 말고 명령서로 해요.”
그 순간, 전광판이 번쩍였다.
[감사관 한희주: 조건 승인]
[감찰부는 즉시 집행하라]
오명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엄마 성격 급합니다.”
그날 새벽, 헌터협회는 처음으로 자기 심장부를 향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했다. 사망관리국이라는 이름은 공식 조직도 어디에도 없었지만, 지하 서버실 가장 깊은 층에서 그들의 장부가 발견됐다. 살아 있는 사람을 사망 예정자로 밀어 넣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마석 유통 지표로 환산하며, 보호라는 단어로 가족과 동료의 목을 조르던 오래된 시스템.
그 장부의 첫 페이지에는 한희주의 이름이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강도윤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반품 대상이 아니었다.
[증언자 0001: 강도윤]
그 밑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이어졌다. 한서윤, 윤서하, 반가온, 백연, 그리고 우리가 B-04와 미수금 정산 구역에서 들었던 목소리들. 장례식장 육개장이 싱겁다고 불평하던 헌터, 보험금을 마석으로 달라던 헌터,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던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은 더 이상 미수금이 아니었다. 통계도 아니었다. 시스템의 연료도 아니었다.
증언이었다.
사흘 뒤, 협회 앞 광장은 기자들로 가득 찼다. 백연은 부목을 댄 손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의 카메라는 아직 수리 중이었지만, 이번에는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이 기록은 괴담이 아닙니다.”
백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헌터협회 내부 사망관리국이 실제로 운용한 비인가 사망 플래그 시스템의 증거입니다. 피해자들은 죽어서도 부채로 분류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협박당했습니다.”
기자들이 술렁였다. 누군가 질문을 외쳤다. 백연은 대답 대신 우리 쪽을 바라봤다.
윤서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오래도록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제 어머니 한서윤은 도망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름을 빼앗긴 보호자였습니다. 저는 오늘 그 이름을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반가온은 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말해야 해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아뇨. 해야죠.”
그녀는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 목덜미의 붉은 도장 자국을 보여주었다.
“저는 검수 완료된 물건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 같은 애들한테 도장 찍는 놈들 있으면, 저희 형이 민원 넣을 겁니다.”
기자회견장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얼굴을 감쌌다.
“야, 왜 나를 무기로 팔아.”
가온이가 씩 웃었다.
“잘 팔리게 생겼잖아요.”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마이크 앞에 서자 수십 개의 렌즈가 나를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농담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저는 강도윤입니다.”
이름을 말하는 일이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한때 사망 예정자였고, 보호자였고, 반품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증언자로 섰습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장부에서 지우지 마십시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대신 죽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보호라는 말로 사람을 묶지 마십시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나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잘했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협회에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기자들이 펜을 들었다. 오명진 감찰부장이 멀리서 아주 불안한 얼굴을 했다.
나는 마이크를 조금 당겼다.
“사장 나오라고 하십시오. 영수증 아직 다 못 봤습니다.”
그날 이후, ‘사장 나오라’는 말은 헌터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그리고 사망관리국의 문은, 아주 오래 닫혀 있던 장부와 함께 마침내 세상 앞에 열렸다.
303화. 퇴근 카드
한 달 뒤, 나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컵라면 뚜껑을 누르고 있었다.
세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컵라면 조리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사망관리국이 감사받고, 헌터협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국회 청문회에서 누군가 물컵을 던지고, 백연의 특집 보도가 연일 조회수 1위를 찍어도 물은 여전히 3분을 기다려야 면발이 먹을 만해졌다.
그게 조금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게 바뀌어도, 어떤 것들은 그냥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사실이.
“형, 계란 넣었어요?”
반가온이 편의점 문을 밀고 나오며 물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있던 검수 도장 자국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작은 밴드가 붙어 있었다. 사실 다 나았는데도, 그녀는 가끔 일부러 밴드를 붙였다. ‘나 이제 물건 아니고 환자 취급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였다.
“네 건 네가 사.”
“치사해. 저 미수금 탕감됐잖아요.”
“그래서 이제 정상 채무자가 된 거지, 무상 급식 대상자는 아니야.”
“와, 증언자 0001 인성 보소.”
가온이가 투덜거리면서도 계산대에서 삶은 달걀 두 개를 사 왔다. 하나를 내 컵라면 위에 툭 올려놓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옆자리에 앉았다.
“하나는 형 거.”
“왜?”
“그냥요. 살아 있으면 계란 정도는 나눠 먹어야죠.”
나는 대답 대신 젓가락으로 뚜껑을 눌렀다.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했다. 계란 하나에 감동하는 인간이 되다니, 사망 플래그보다 더 무서운 변화였다.
편의점 유리창 너머로 윤서하가 걸어왔다. 그녀는 더 이상 검은 실을 감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손목에는 한서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은색 팔찌가 있었다. 협회가 복원한 공식 기록의 첫 번째 사본을 녹여 만든 것이라고 했다. 취향 한번 무겁다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그게 가장 가벼운 장신구일지도 몰랐다.
“둘 다 여기 있었네요.”
“서하 씨도 컵라면?”
“아뇨. 저는 밥 먹고 왔어요.”
“배신감 드네요.”
“강도윤 씨가 밥을 챙겨 먹는지 감시하러 온 거라서요.”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
“혹시 우리 엄마가 시켰습니까?”
윤서하는 아주 잠깐 눈을 피했다.
“감사관님께서 협조 요청을 하셨습니다.”
“와, 사망관리국 감사실이 이제 내 식단까지 관리해?”
“정확히는 증언자 건강 유지 권고입니다.”
반가온이 웃다가 사레가 들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사이로 아주 평범한 저녁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빛 어딘가에서 한희주가 서류철을 들고 내 식사 여부를 체크하고 있을 것 같았다.
백연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새 카메라를 어깨에 멘 채였다.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신발끈을 대충 묶고 다녔다.
“최종 보도 나갔어요.”
그녀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사망관리국 해체 확정]
[피해자 이름 복원 특별법 통과]
[보호자 계약 전면 무효]
[한희주 감사관, 내부 시스템 잔존 기록 정리 중]
마지막 줄에서 나는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는?”
“공식 발표로는 감사관 한희주가 잔존 장부를 정리한 뒤 시스템 권한을 반납할 예정이래요. 비공식적으로는…”
백연이 살짝 웃었다.
“퇴근 준비 중이랍니다.”
나는 컵라면 국물을 마시려다 멈췄다. 뜨거운 김 때문에 눈이 매웠다. 절대 울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컵라면 김은 원래 공격적이다.
“공무원 퇴근은 믿는 거 아니랬는데.”
윤서하가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믿어도 될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단단해서, 나는 괜히 더 농담하고 싶어졌다.
“서하 씨가 그렇게 말하면 좀 신뢰가 가긴 하네요. 시스템보다 무서운 분이라.”
“칭찬인가요?”
“생존자식 찬사입니다.”
우리는 편의점 앞에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보기도 하고, 못 알아보기도 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멀리서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사망 예정자냐고 묻지 않았다. 아무도 반품 대상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내 주머니 속에서 낡은 카드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모든 일이 시작된 그 퇴근 카드였다. 모서리는 닳고, 바코드는 반쯤 지워졌고, 뒷면에는 이제 시스템 문구 대신 아주 희미한 손글씨가 남아 있었다.
[퇴근 가능]
나는 그 카드를 꺼내 한참 바라보았다.
반가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버릴 거예요?”
“글쎄.”
예전의 나라면 당장 불태웠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카드 하나 때문에 죽을 뻔했고, 울 뻔했고, 엄마를 다시 잃을 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 카드가 저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증거였다.
내가 사망 예정자였다는 증거. 누군가 나 대신 죽으려 했다는 증거. 그리고 결국 아무도 대신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했다는 증거.
“보관하려고.”
“왜요?”
“나중에 내가 또 혼자서 멋있는 척하다가 죽으러 가려고 하면, 이걸 보고 정신 차리게.”
윤서하가 작게 웃었다.
“그럼 제가 압수해도 되겠네요.”
“왜요?”
“강도윤 씨는 자기 물건을 증거물이라고 부르면서 위험한 곳에 들고 가는 습관이 있으니까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순순히 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 윤서하는 그것을 자기 팔찌 옆에 잠시 대 보더니, 다시 내 손에 돌려주었다.
“가지고 있어요. 대신 혼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나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보호자가 아니라 증언자.
혼자 대신 죽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살아남은 일을 말하는 사람.
“약속합니다.”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가벼웠다. 목줄이 아니라, 그냥 문장 하나가 내 안에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그때 편의점 자동문이 열렸다. 익숙한 전자음이 울렸다.
띵동.
그리고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스피커 잡음 사이로 섞여 들렸다.
[강도윤 고객님, 주문하신 삼각김밥이 준비되었습니다.]
나는 굳었다. 반가온도, 윤서하도, 백연도 동시에 나를 보았다.
편의점 직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카운터에서 삼각김밥을 들어 올렸다.
“손님, 전자레인지 돌리신 거요.”
나는 천천히 카운터로 걸어갔다. 삼각김밥 포장지 위에는 작은 검은 우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장난처럼, 하지만 너무나 분명하게.
스티커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밥 챙겨 먹으라니까.]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참았던 것들이 그 웃음 사이로 조금씩 풀려나갔다. 원망도, 그리움도, 살아남았다는 죄책감도, 끝내 하지 못한 작별 인사도.
“엄마, 진짜 너무하네.”
삼각김밥은 참치마요였다. 내가 어릴 때 제일 좋아하던 맛.
편의점 밖으로 나오자 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온은 내 삼각김밥을 반쯤 노리는 눈빛이었고, 백연은 그 장면을 조용히 찍고 있었고, 윤서하는 내가 울었는지 묻지 않는 방식으로 옆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앉았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검은 우산도 펼쳐지지 않았다. 번호표도, 장부도, 사망 예정 통지서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저녁이었다.
퇴근 후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먹고, 삼각김밥을 나눠 먹고, 내일 해야 할 진술서와 귀찮은 병원 예약과 밀린 월세를 걱정하는, 몹시 시시하고 그래서 눈물 나게 소중한 저녁.
나는 낡은 퇴근 카드를 지갑 안쪽에 넣었다.
카드는 더 이상 나를 어디로도 끌고 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자.”
내가 말했다.
“어디로요?”
가온이가 물었다.
나는 편의점 불빛 너머, 아직 잠들지 않은 도시를 바라보았다.
“집.”
너무 평범해서, 몇 달 전의 나라면 웃어넘겼을 단어.
하지만 이제 나는 알았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가장 어려운 생존 판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판정을 통과했다.
윤서하가 내 옆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연은 카메라를 내렸고, 반가온은 내 삼각김밥을 기어이 한 입 베어 물었다.
“야.”
“살아 있으면 나눠 먹어야죠.”
나는 어이없어서 웃었다.
그래, 살아 있으면.
우리는 웃으며 편의점 앞을 떠났다. 등 뒤에서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띵동.
그 소리는 더 이상 경고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냥 하루가 끝났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퇴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