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Y 1
눈을 뜬다.
천장이 하얗다. 모르는 천장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기억이 없다.
몸을 일으킨다. 어깨가 뻐근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침대 옆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이 있다. 볼펜이 그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글씨다.
내 글씨라는 걸 안다. 이 글씨를 본 기억은 없는데, 내 글씨라는 걸 안다. 이상한 일이다.
[메모]
네 이름은 하루.
나이는 스물다섯. 직업은 없다.
이 아파트에 산다. 유나랑 같이.
유나는 너의 연인이다.
까만 머리에 잠이 많고, 커피를 좋아한다.
아침에 너보다 늦게 일어난다. 보통은.
너는 매일 아침 기억이 없다.
어제 뭘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뭘 먹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이 메모를 읽으면 된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 어제의 너
종이를 내려놓는다.
기억이 없다. 진짜로. 어제라는 게 없다. 잠들었다가 지금 여기에 있다. 그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 하얗다.
근데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다.
메모가 있으니까. 어제의 내가 남겨놓은 것. 이름이 있고, 사는 곳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부엌에서 소리가 난다. 물 끓는 소리.
나간다.
여자가 서 있다. 까만 머리. 너무 큰 티셔츠. 맨발.
나를 본다.
"일어났어?"
목소리가 부드럽다. 자연스럽다. 매일 하는 말 같다.
"...유나?"
"응."
웃는다. 아주 조금.
"커피 줄까?"
"응."
받아든다. 머그잔이 따뜻하다. 손이 익숙하게 감긴다. 이 잔을 잡아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기억은 없는데.
유나가 맞은편에 앉는다. 자기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호호 분다.
"오늘 뭐 하고 싶어?"
"...모르겠어."
"그럼 같이 나가자. 날씨 좋대."
"좋아."
유나가 웃는다. 또. 같은 웃음인데 처음 보는 웃음이다.
이상한 기분이다. 이 사람을 모른다. 메모에 적혀있는 이름이고, 내 연인이라고 적혀있고, 까만 머리에 잠이 많고 커피를 좋아한다고 적혀있다.
근데.
웃는 걸 보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건 메모에 안 적혀있는 건데.
밖에 나왔다.
가을이다. 바람이 차갑지 않게 분다. 나뭇잎이 빨갛다.
유나가 내 왼쪽에서 걷는다. 팔짱은 안 꼈다. 나란히 걷는다.
"여기 자주 와?"
유나가 나를 본다. 뭔가 말하려다가, 웃는다.
"응. 자주 와."
"둘이?"
"응."
대답이 짧다. 근데 짧은 게 불친절한 게 아니다. 짧은 게 편한 거다.
벤치에 앉는다. 유나가 주머니에서 뭘 꺼낸다. 젤리.
"먹어."
"고마워."
곰 모양이다. 빨간색. 씹으면 딸기 맛이 난다.
유나가 자기도 하나 집어먹는다. 노란색. 뭔 맛인지는 모르겠다.
"유나."
"응?"
"나 매일 이래?"
"..."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메모 읽고, 너한테 누구냐고 물어보고."
"..."
유나가 하늘을 본다. 구름이 느리게 간다.
"매일은 아니야."
"?"
"가끔은 안 물어봐."
"그럼?"
"그냥 커피 달라고 해."
"...기억이 있을 때?"
"아니. 기억은 없어. 근데 그냥, 아는 것 같을 때가 있대."
"내가 그랬어?"
"응. 어제 네가 그랬어."
어제의 나. 기억에 없는 나. 근데 유나를 보고 그냥 커피 달라고 한 나.
뭔가 목이 뜨거워진다.
집에 돌아왔다. 유나가 씻으러 들어갔다. 샤워 소리가 난다.
메모를 다시 본다. 아침에 읽었던 그 종이.
볼펜을 든다.
뭘 적어야 할까. 내일의 나에게. 기억 없이 깨어날 나에게.
쓴다.
[메모]
네 이름은 하루.
유나라는 사람이 있다.
오늘 같이 산책했다. 가을이었다. 젤리를 먹었다. 곰 모양.
유나가 말했다.
가끔은 기억 없이도 아는 것 같을 때가 있다고.
어제의 네가 그랬대.
나도 오늘, 그런 것 같았다.
기억은 없는데. 가슴이 따뜻했다.
내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 오늘의 너
볼펜을 내려놓는다.
샤워 소리가 멈춘다.
유나가 나올 거다. 젖은 머리에 너무 큰 티셔츠. 내일 아침이면 나는 이걸 잊는다.
근데 괜찮다.
메모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