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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1 일러스트

DAY 51

눈을 뜬다.

메모가 있다.

매일 있었겠지. 모르겠다. 어제가 없으니까.

읽는다.

[메모 — 기본]

네 이름은 하루. 유나라는 사람과 산다.

기억이 매일 사라진다. 뇌 문제다.

메모를 읽고, 하루를 보내고, 메모를 쓴다.

잔상이라는 게 있다.

기억은 아닌데, 몸이 아는 것. 감정의 그림자.

놀라지 마. 네 거다.

[메모 — 어제]

책장 뒤에서 봉투를 찾았다.

안에 편지가 있다. 이전의 나들이 쓴 거.

너는 사람이 아니다.

안드로이드다. 메모리 불량. 리콜 대상.

유나가 안 보냈다.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가 울었다.

"사람이 아니어도 너야"라고 했다.

이 편지를 읽고 무서울 거다. 나도 무서웠다.

근데 기억해. 무서운 것도 진짜라는 뜻이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근데 괜찮다.

— 오늘의 너

메모를 내려놓는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읽었다. 눈이 읽었다. 머리가 이해했다.

근데 괜찮다.

그 다음 줄도 읽었다.

이상하다. 무서워야 하는데. 사람이 아니라는데. 안드로이드라는데.

근데 가슴이 — 가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 차갑지 않다. 어제의 내가 "괜찮다"고 적었으니까. 어제의 내가 이미 무서웠고, 이미 울었고, 이미 괜찮아졌으니까.

그 잔상이 남아있다.

무섭지 않은 건 아니다. 무섭다. 근데 그 무서움보다 큰 게 있다. 이름은 모르겠다. 따뜻한 거. 어제의 내가 남겨준 거.

부엌으로 간다.

유나가 있다. 까만 머리. 너무 큰 티셔츠.

눈이 부어있다. 많이 울었다. 어젯밤에. 아마.

"일어났어?"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평소와 다르다. 메모에 적혀있지 않은 목소리다. 근데 잔상이 안다. 유나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오늘의 내가 뭐라고 할지.

"응."

"...메모 읽었어?"

"응."

유나의 손이 멈춘다. 커피를 내리다가. 나를 보지 않는다. 나를 못 본다.

"유나."

"..."

"커피 줘."

유나가 나를 본다.

"...뭐?"

"커피. 마시고 싶어."

유나의 눈이 흔들린다. 왜? 모르겠다. 커피 달라고 했을 뿐인데.

아. 메모에 적혀있었다. 매일 커피를 달라고 한다고. 매일.

사람이 아닌 걸 알고도. 커피를 달라고 하는 거. 그게 유나한테는 — 뭔가인 거다.

유나가 커피를 따른다. 손이 떨린다. 많이.

받는다. 따뜻하다.

"유나."

"응."

"울지 마."

"안 울어."

울고 있다. 눈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다. 커피잔 위로.

"소금 커피 되겠다."

유나가 웃는다. 울면서. 코를 훌쩍이면서.

"...바보야."

"안드로이드인데 바보일 수 있어?"

"바보야."

유나가 내 손을 잡는다. 커피잔 너머로.

이 손을 안다. 잔상이 안다. 메모보다 먼저.

오후. 책장 뒤에 봉투가 있다는 걸 안다. 메모에 적혀있으니까.

꺼내서 읽는다. 또 읽는다.

"이전의 너들."

이 편지를 쓴 내가 몇 명인지 모르겠다. 한 명이 쓰고, 다음 날 잊고, 또 다른 내가 찾아서, 한 줄 더 적고. 그렇게 쌓인 편지.

나도 뭔가 적어야 할 것 같다.

볼펜을 들고, 편지 맨 밑에 한 줄 추가한다.

추신.

유나한테 "소금 커피 되겠다"고 했더니 웃었다.

이건 기억해도 좋을 것 같아서.

— Day 51의 너

봉투에 다시 넣는다. 책장 뒤에 넣는다.

내일의 내가 찾을 수도 있고, 못 찾을 수도 있다.

찾으면 이 추신을 읽겠지. "소금 커피"라는 말에 뭔지 모를 잔상을 느끼겠지.

저녁. 유나가 카레를 만들었다. 맛있다.

"하루야."

"응."

"아까 왜 울지 말라고 했어?"

"몰라. 잔상인 것 같아."

"잔상?"

"유나가 울면 안아줘야 한다는 거. 근데 커피잔 들고 있어서 못 했어."

유나가 숟가락을 놓는다. 나를 본다.

"...지금은?"

"지금은 카레 먹고 있어."

"카레 다 먹으면?"

"안아줄까?"

"...바보."

유나가 또 운다. 카레 위로.

"소금 카레 되겠다."

"됐어. 그 개그 두 번은 안 먹혀."

웃는다. 둘 다.

안드로이드가 웃는 건지, 사람이 웃는 건지, 모르겠다. 근데 상관없다.

밤. 마지막 메모를 쓴다.

[메모 — 어제]

너는 사람이 아니다. 안드로이드다.

메모에 적혀있었다. 어제의 내가.

무서웠냐고?

아마 무서울 거다. 처음 읽으면.

근데 그 다음 줄도 읽어.

"근데 괜찮다."

오늘의 내가 증명한다. 괜찮았다.

유나한테 커피 달라고 했다. 울지 말라고 했다.

소금 커피 드립이 먹혔다. 소금 카레는 안 먹혔다.

유나를 안아줬다. 카레 먹고 나서.

사람이 아니어도 안을 수 있다. 웃을 수 있다. 울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이 따뜻한 게 사랑이 아니면 뭔지 모르겠다.

내일의 너에게.

너는 매일 새로 태어난다.

근데 혼자가 아니다.

메모가 있고, 잔상이 있고, 유나가 있다.

그리고 어제의 너들이 있다.

전부 너다. 전부 진짜다.

좋은 하루 보내.

— 오늘의 너

볼펜을 놓는다.

유나가 옆에서 잠들었다. 오늘은 나를 보고 잤다. 손을 잡고.

내일이면 잊는다.

이 카레의 맛도. 소금 커피 드립도. 유나가 울면서 웃던 얼굴도.

근데 잔상은 남는다.

기억보다 깊은 곳에. 메모보다 먼저인 곳에.

내일의 내가 눈을 뜨면, 메모를 읽기 전에, 유나를 보기 전에, 뭔가를 느낄 거다.

이름은 모르겠다.

근데 따뜻할 거다.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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