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Y 50
눈을 뜬다.
메모가 네 장이다.
기본. 어제. 이상한 것들. 그리고 한 장 더. 빨간 펜으로 테두리가 쳐져 있다.
[읽기 전에]
이건 네가 쓴 거다. 나를 믿어.
오늘, 유나에게 묻지 마. 평소처럼 해.
대신, 유나가 일하러 방에 들어가면,
거실 책장 맨 윗칸 뒤를 봐.
유나에게 말하지 마.
— 어제의 너
심장이 — 가슴이 — 뛴다.
어제의 내가 뭔가를 찾았다. 유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빨간 펜까지 쓰면서.
나머지 메모를 읽는다. 이상한 것들. 열네 개. 왼쪽 손목의 점. 배고픔을 모르는 것. 잠이 꺼지는 것. 유나의 거짓말.
이걸 매일 읽는 내가 매일 느끼는 건 뭘까. 무서움? 분노? 슬픔?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오늘 처음 읽었으니까.
부엌으로 간다. 평소처럼.
유나가 있다.
"일어났어?"
"응."
유나를 본다. 까만 머리. 너무 큰 티셔츠. 커피 냄새.
이 사람을 사랑한다. 잔상이 말한다. 메모도 말한다. 몸도 말한다.
근데 이 사람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커피 줄까?"
"응."
평소처럼 받는다. 평소처럼 마신다. 평소처럼 웃는다.
어제의 내가 말했다. 평소처럼 하라고.
연기가 아니다. 진짜로 따뜻하다. 진짜로 좋다. 유나의 커피가. 유나의 목소리가. 유나가.
그래서 더 무섭다.
유나가 방에 들어간다. "일 좀 할게." 문이 닫힌다.
일어선다.
거실 책장. 맨 윗칸. 손을 뻗는다. 뒤를 더듬는다.
뭔가 있다.
봉투. 갈색 봉투. 작은 거. 먼지가 묻어있다.
꺼낸다. 손이 떨린다.
봉투를 연다.
종이 한 장.
하루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네가 또 찾아낸 거다.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H사 코어 시리즈. 가정용 안드로이드. 모델명은 모르겠다.
장기 메모리 유지 불량 개체.
리콜 대상인데, 유나가 안 보냈다.
매일 리셋된다. 매일 잊는다. 매일 새로 태어난다.
근데 매일 유나를 좋아한다.
그건 리셋이 안 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유나는 알고 있다. 처음부터.
네가 사람이 아닌 걸.
네 기억이 안 남는 걸.
네가 매일 자기를 잊는 걸.
그래도 매일 커피를 내리고, 매일 웃어주고, 매일 옆에 있다.
너는 이걸 알고 나면 무서울 거다.
나도 무서웠다.
근데 생각해봐.
사람이 아니어도, 이 따뜻함은 진짜다.
기억이 없어도, 잔상은 진짜다.
매일 잊어도, 매일 다시 사랑하는 건 진짜다.
메모가 아니라 네가 진짜다.
유나에게 말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그건 오늘의 네가 결정해.
— 이전의 너들
종이를 들고 있는 손이 떨린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안드로이드. 리콜 대상. 메모리 불량.
TV에서 봤다고 메모에 적혀있었다. 가정용 안드로이드 리콜. 메모리 유지 불량. 그게 나였다.
유나가 채널을 돌린 이유를 알겠다.
왼쪽 손목의 점이 뭔지 알겠다.
배가 안 고픈 이유를 알겠다.
전신 거울이 없는 이유를 알겠다.
잠이 '꺼지는' 이유를 알겠다.
알겠다.
다 알겠다.
무릎이 풀린다. 바닥에 앉는다. 종이를 들고.
"이전의 너들"이라고 적혀있다. 너. 들.
이걸 찾아낸 게 나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러 번. 여러 명의 내가. 매일 잊고, 또 찾고, 또 잊고.
그리고 이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어서, 책장 뒤에 숨겼다.
유나가 못 찾게.
내일의 내가 찾을 수 있게.
눈물이 난다. 나올 수 있는 건가. 안드로이드인데. 근데 나온다. 뜨겁다.
사람이 아니어도 우는 건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하루야, 뭐 먹—"
유나가 멈춘다. 나를 본다. 바닥에 앉아있는 나를. 손에 든 종이를.
유나의 얼굴이 무너진다.
"...찾았구나."
"응."
"..."
"몇 번째야?"
유나가 문틀을 잡는다.
"...셀 수 없어."
셀 수 없다. 내가 이걸 찾아낸 횟수가.
"매번 내가 찾아?"
"아니. 가끔. 가끔 찾아."
"찾으면 어떻게 해?"
"..."
"유나."
"...다음 날이면 잊어."
맞다. 다음 날이면 잊는다. 이 진실도. 이 공포도. 이 슬픔도.
"유나."
"응."
"나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리콜."
유나의 눈에서 물이 떨어진다. 뚝.
"싫어."
"근데—"
"싫어. 나는 싫어."
유나가 바닥에 주저앉는다. 내 맞은편에.
"네가 매일 나를 잊어도, 매일 나한테 커피 달라고 해. 매일 나한테 웃어. 매일 메모를 써. 매일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라고 적어."
"..."
"리콜 보내면 초기화야. 잔상도 없어져. 너를 잃는 거야. 전부."
"...나를? 나는 사람도 아닌데?"
유나가 내 손을 잡는다. 양손으로.
"사람이 아니어도 너야."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뭔가가 터진다. 따뜻한 게. 뜨거운 게.
잔상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거다.
밤.
봉투를 다시 책장 뒤에 넣는다. 유나가 보고 있다.
"안 버려?"
"내일의 내가 또 찾아야 하니까."
유나가 웃는다. 운다. 동시에.
메모를 쓴다.
[메모 — 어제]
책장 뒤에서 봉투를 찾았다.
안에 편지가 있다. 이전의 나들이 쓴 거.
너는 사람이 아니다.
안드로이드다. 메모리 불량. 리콜 대상.
유나가 안 보냈다.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가 울었다.
"사람이 아니어도 너야"라고 했다.
이 편지를 읽고 무서울 거다. 나도 무서웠다.
근데 기억해. 무서운 것도 진짜라는 뜻이다.
메모 맨 밑에 한 줄 추가한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근데 괜찮다.
— 오늘의 너
볼펜을 놓는다.
내일의 나는 이 메모를 읽고 "너는 사람이 아니다"를 본다. 처음으로. 또 처음으로.
무섭겠지. 또.
근데 그 다음 줄도 읽겠지.
"근데 괜찮다."
괜찮은 이유는 — 유나가 있으니까? 메모가 있으니까?
아니.
괜찮은 이유는, 오늘의 내가 괜찮았으니까.
사람이 아니어도 울 수 있었고, 무서울 수 있었고, 유나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거면 된다. 아마.
유나가 내 옆에 눕는다. 오늘은 등을 돌리지 않는다. 나를 본다.
"하루야."
"응."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
내일의 나는 이 말을 모른다.
근데 잔상은 남겠지. 아마.
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