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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3화 합본. 젖지 않은 빵 조각에서 비어 있는 한 그릇까지 일러스트

121-123화 합본. 젖지 않은 빵 조각에서 비어 있는 한 그릇까지

121화. 젖지 않은 빵 조각의 발송인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서늘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지만, 로웬이 품 안에서 꺼낸 빵 조각만은 예외였다.

손바닥만 한 빵 조각. 그 위에는 누군가 꾹 눌러 쥔 듯한 온기 어린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방금 오븐에서 나온 것처럼 따뜻했고, 무엇보다 전혀 젖지 않았다. 방금까지 폭풍우 속 빈 우편함에 처박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피핀이 코를 씰룩거리며 빵 근처로 다가왔다. 평소처럼 이름의 냄새를 맡으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킁킁거리던 피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름 냄새가 아냐, 로웬.”

“그럼?”

“베라의 손 냄새. 그리고 재 냄새랑 아주 오래전에 식어버린 오븐 냄새가 나. 이건 누군가를 부르는 냄새가 아니라, 그냥 여기 남겨진 냄새야.”

피핀의 말에 베라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녀는 로웬이 들고 있는 빵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빵은 로웬이 수취인란을 비워 둔 채 작성했던 ‘미도착 사유서’와 함께 남겨진 유일한 단서였다.

로웬은 빵 조각 밑에 붙어 있던 반쪽짜리 주소지를 다시 확인했다. 수취인란은 여전히 공백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뒷면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발송인이 책임을 인정하면 다음 보관 장소 개봉.]

수취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다. 이 배달이 왜 멈췄는지, 물건을 보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미완의 배달을 방치했는지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베라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으려다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처벌이나 시스템의 압박 때문이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내 이름을 써야 하나요?”

베라가 물었다. 목소리는 힘없이 젖어 있었다.

로웬은 평소처럼 “빨리 쓰고 퇴근합시다” 같은 가벼운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베라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 배달원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이네스가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는 베라의 등 뒤에 서서 주변의 소음과 시선을 차단하듯 공간을 메웠다. 베라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보호였다.

기록관 모르그가 곁에서 나직하게 덧붙였다.

“수취인란이 비어 있어도 발송인의 진술서가 진실하다면 기록으로서의 효력은 충분합니다. 기록은 결과만을 적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이 생긴 이유까지 보존하는 것이니까요.”

로웬은 베라 대신 펜을 들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무언가를 뱉어낼 때까지, 그는 젖지 않은 빵의 온기를 느끼며 침묵을 지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베라가 마침내 펜을 가져갔다. 거칠고 투박한 글씨가 종이 위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살을 깎아내는 듯 무거워 보였다.

그녀가 남긴 문장은 단 세 줄이었다.

내가 구웠다.

폭풍 때문에 보내지 못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끝내 묻지 못했다.

마지막 문장을 적어 내린 순간, 베라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것은 고백인 동시에 자백이었다. 이름을 모르는 아이에게 줄 빵을 구웠지만, 재난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그 아이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려 했던 자신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러자 빵 조각이 기이한 빛을 내며 갈라졌다.

부드러운 빵의 속살 안에서 딱딱한 물체가 툭 떨어졌다. 그것은 낡은 카드 형태의 물건이었다. 로웬이 그것을 집어 들자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이템 획득: 잿빛 보육실 출입증 — 이름 없는 아이 7명]

동시에 귓가를 울리는 서늘한 알림음이 이어졌다.

[첫 이름 5/7 보류 해제 조건 달성: 수취인 강제 기입 금지.]

[알림: 발송인의 진심이 닿지 않은 곳에 수취인의 이름을 함부로 적지 마십시오.]

로웬은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출입증과 베라의 일렁이는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야 길이 보였다.

이 배달은 수취인을 찾아내는 게임이 아니었다. 발송인이 잃어버린 ‘기억의 책임’을 하나씩 되찾아, 저 이름 없는 아이들에게 도달해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로웬은 조용히 출입증을 챙겼다. 아직 다섯 명, 아니 일곱 명의 아이들이 보류된 이름 속에 갇혀 있었다.

122화. 잿빛 보육실의 일곱 빈 침대

육중한 철문 앞에 선 로웬의 손에는 잿가루가 섞인 보육실 출입증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 젖지 않은 빵 조각 속에서 찾아낸 그것은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감촉이었다. 로웬이 출입증을 문 중앙의 홈에 갖다 대자, 허공에 푸르스름한 문자가 떠올랐다.

[수취인 강제 기입 금지 조건 유지 중]

문은 이름을 묻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할 규칙만을 차갑게 상기시켰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가장 먼저 쏟아져 들어온 것은 빛이 아니라 오래된 먼지와 재의 냄새였다. 보육실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곳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누군가를 부르는 다급한 외침도 없었다. 오직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일곱 개의 빈 침대만이 정적 속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베라는 문턱을 넘기도 전에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운 침대로 향했다.

“아무도…… 없나요?”

베라의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공허하게 울렸다. 로웬은 대답 대신 천천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닥에는 잿가루가 얇게 깔려 있어,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미한 발자국이 남았다.

침대 위에는 아이들이 머물렀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어딘가 비정상적이었다.

첫 번째 침대 위에는 입술에 닿는 부분이 닳아 없어진 낡은 숟가락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두 번째 침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진 천 조각이, 세 번째에는 앞다리가 부러진 작은 나무말 인형이 자리했다.

네 번째 침대에는 심지가 거의 다 타버린 양초 토막이, 다섯 번째에는 주인을 잃은 작은 신발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섯 번째 침대 머리맡에는 몇 장이 뜯겨 나간 성가집이 펼쳐져 있었고, 마지막 일곱 번째 침대 옆 협탁에는 바닥에 재가 눌어붙은 물컵이 놓여 있었다.

베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들 사이를 걸었다.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 아이들 중 한 명이었을 거예요. 내가 보낸 빵을 받지 못한 아이가…….”

베라는 어느 한 침대 앞에 멈춰 서려 했다. 그녀의 눈이 찢어진 성가집이 놓인 여섯 번째 침대에 머물렀다. 그 아이가 빵 대신 노래를 삼키며 기다렸을 것이라 단정 지으려는 찰나였다.

지이잉.

공간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베라가 특정한 침대로 마음을 기울이자, 나머지 여섯 개의 침대 위에 놓인 물건들이 신기루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초점을 맞추려 하자 세상의 나머지 부분이 지워지는 듯한 불길한 징조였다.

“베라, 멈춰.”

로웬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베라의 어깨를 잡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침대 사이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르지 마세요. 당신이 누군가를 특정하는 순간, 나머지 아이들의 존재는 이 기록에서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제가 실수한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야 사과라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어야 합니다.”

로웬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는 우편 행정관으로서 수많은 유실물을 다뤄왔다. 확신 없는 기록이 얼마나 많은 진실을 왜곡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로웬은 시선을 돌려 허공에 떠 있는 반투명한 시스템 창을 응시했다.

이름 칸은 여전히 공백이었다. 하지만 로웬은 그 칸을 억지로 채우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름 칸 아래에 숨겨진 하위 항목들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물건 칸’, ‘사용 흔적’, 그리고 ‘미수령 사유’.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모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록의 윤리를 수호하는 자답게 로웬의 판단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름 없는 물건 보관 목록 또한 유효한 기록입니다, 행정관님. 존재했으나 불리지 못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것 또한 기록자의 의무지요.”

이네스는 문가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지도, 기사로서의 맹세를 읊조리지도 않았다. 지금 이 공간에서 물리적인 보호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침묵을 지키며, 외부의 불필요한 간섭이 이 섬세한 조사 과정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문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어떤 말도 덧씌우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이네스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보호였다.

“피핀.”

로웬이 부르자,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탐색하던 피핀이 첫 번째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피핀은 낡은 숟가락에 코를 가까이 댔다. 평소처럼 달콤한 이름의 냄새를 찾으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피핀의 눈이 가늘어졌다.

“행정관님, 이건 이름 냄새가 아니에요.”

“그럼 뭐가 느껴지지?”

“음…… 아주 오래된 배고픔요. 그리고 ‘너 먼저 먹어’라고 말하는 양보의 냄새. 마지막까지 입안에 맴돌던 기다림의 냄새가 나요.”

피핀은 숟가락에서 이름이 아닌, 그 물건에 새겨진 ‘상태’와 ‘감정’을 읽어내고 있었다. 숟가락은 주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주인이 얼마나 굶주렸는지,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차례를 얼마나 뒤로 미뤘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로웬은 피핀이 묘사한 감각들을 기록 창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수취인: 미상]

[물건: 낡은 숟가락]

[사유: 배고픔을 참으며 양보함]

엔터 키를 누르는 로웬의 손끝에 긴장감이 서렸다. 이름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사유만을 접수하는 방식이 통할지 알 수 없었다. 시스템은 잠시 빛을 내며 연산을 반복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알림음을 내뱉었다.

[사유가 확인되었습니다. 배달 오류 기록의 공백을 보존합니다.]

성공이었다. 시스템은 이름을 요구하는 대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부재의 근거’를 정식 기록으로 받아들였다.

로웬은 나머지 여섯 개의 침대도 같은 방식으로 조사해 나갔다.

해진 천 조각에서는 추위를 나누려 했던 온기가, 깨진 나무말에서는 부서진 꿈의 파편이 냄새로 읽혔다. 반쯤 탄 양초는 누군가의 밤을 밝히고 남은 희생이었고, 신발 한 짝은 끝내 걷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었다. 찢어진 성가집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불렀던 기도문이 묻어 있었고, 잿빛 물컵에는 마지막 갈증을 참아낸 인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베라는 로웬이 적어 내려가는 기록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누군가’는 한 명의 아이가 아니었다. 이곳에 머물렀던 일곱 명의 아이들 모두가 그녀가 보낸 빵을 받지 못한 채, 서로의 배고픔을 다독이며 이곳을 떠난 것이었다.

“제가…… 모두를 굶긴 거군요.”

베라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통제 불능의 죄책감에 휩싸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로웬은 마지막 항목의 입력을 마쳤다. 보육실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아까처럼 숨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사라져 있었다. 기록이 완성되자 허공에 새로운 문서 하나가 출력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식단표이자 영수증이었다.

[잿빛 보육실 공동 식사 명단]

배정분: 7인분

수령 완료: 6인분

미수령: 1인분

문서의 하단에는 붉은색 글씨로 다음 배달에 대한 안내가 적혀 있었다. 로웬은 그 문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다음 배달 대상: 이름이 비어 있는 한 그릇.]

로웬의 눈매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다음 배달지는 특정 인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공동체의 뒤편으로 밀려난, 바로 그 ‘비어 있는 자리’ 자체였다.

“이름을 찾는 게 아니라, 비어 있는 그릇을 채우러 가야겠군.”

로웬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곱 개의 빈 침대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이제 그 공간은 버려진 폐허가 아니라 누군가가 반드시 돌아와 채워야 할 ‘예약된 자리’처럼 보였다.

회색 먼지가 소리 없이 가라앉는 보육실을 뒤로하고, 일행은 다시 어두운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다음 배달을 향한 로웬의 발걸음이 이전보다 조금 더 무거워졌으나, 그 방향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했다.

123화. 비어 있는 한 그릇

식당 문은 보육실 뒤편, 가장 어두운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잿빛 보육실의 공기는 이미 충분히 무거웠지만, 식당 입구에 새겨진 공동 식사 명단이 빛을 내뿜자 공간의 무게감은 한층 더 가라앉았다.

[공동 식사 명단: 7인분 중 1인분 미수령 확인.]

시스템의 무미건조한 안내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육중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자,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일행을 맞이했다. 식당 내부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 긴 나무 탁자 하나와 일곱 개의 의자. 그리고 그 위에는 주인을 잃은 일곱 개의 그릇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로웬이 가장 먼저 탁자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그릇들을 훑었다.

여섯 개의 그릇은 지저분했다. 바닥에는 말라붙은 국물 자국이 눌어붙어 있었고,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긁은 흔적이 역력했다. 누군가 치열하게 삶을 이어가려 했던 흔적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가장 끝에 놓인 그릇만은 달랐다.

그 그릇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담긴 적이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채, 식당의 냉기를 그대로 머금어 서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네요.”

이네스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의 손은 습관처럼 검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이내 힘을 뺐다. 이곳에는 베어 넘길 적도, 지켜야 할 대상도 없었다. 오직 침묵하는 빈 그릇만이 그녀의 시선을 붙들 뿐이었다. 분노를 쏟을 곳 없는 공허함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베라가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빵 한 뭉치를 꺼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책감이 서려 있었다. 발송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 비어 있는 자리를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를 움직였다.

“이걸로라도…… 채워 넣으면 기록이 갱신되지 않을까요? 미수령이 아니라, 보상을 받았다고 말이에요.”

베라가 조심스럽게 빈 그릇 위로 빵을 가져갔다. 그러나 빵이 그릇의 테두리에 닿기도 전, 허공에 붉은색 경고 문구가 점멸했다.

[오류: 보상으로 대체 불가.]

[해당 항목은 물리적 질량이 아닌 ‘수령 행위’의 기록입니다.]

그릇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베라의 손길을 밀어냈다. 베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록은 등가교환의 대상이 아니야, 베라.”

모르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허공에 뜬 시스템 창을 분석하며 말을 이었다.

“이 시스템은 단순히 배를 채웠느냐를 묻는 게 아니야. ‘누가, 왜 먹지 않았는가’를 묻고 있지. 수령 거부와 미수령은 완전히 다른 범주로 분류돼. 거부는 의지에 의한 거절이지만, 여기 기록된 건 단순한 미수령이 아니야.”

그때,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빈 그릇이 아닌 다른 그릇들 사이를 헤집었다. 그녀의 예민한 후각이 공기 중에 남은 희미한 분자를 추적했다.

“이상해. 빈 그릇은 그냥 차가운 냄새뿐인데…….”

피핀이 옆에 놓인, 국물 자국이 남은 다른 그릇의 가장자리에 코를 갖다 댔다.

“여기서 ‘나눠 준’ 냄새가 나. 빈 그릇으로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밀어준 냄새. 이건 그냥 굶은 게 아니야. 나머지 여섯 명이 자기 몫을 조금씩 떼어준 거야. 아니, 이 빈 그릇의 주인이 자기 몫을 끝까지 나머지 여섯 명에게 밀어준 거야.”

피핀의 말에 식당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빈 그릇은 누군가의 결핍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 양보가 남긴 결정체였다.

로웬은 말없이 시스템 창을 응시했다. 화면에는 미수령자의 이름을 입력하라는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배달 완료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름을 채워 넣어야 했다. 하지만 로웬은 이름칸을 차갑게 닫아버렸다.

그는 이름 대신 하단의 사유 입력창을 활성화했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시스템이 원하는 건 이 공백의 정체니까.”

로웬의 손가락이 허공의 키패드를 두드렸다.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깊은 힘이 실려 있었다.

“실무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배달 사고가 아니라 ‘수취인에 의한 자발적 양도’지. 기록상으로는 가장 골치 아픈 분류지만…….”

그가 짧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수취인: 미상]

[물건: 빈 그릇]

[사유: 양보로 인한 미수령]

엔터 키를 누르자, 차갑게 식어 있던 빈 그릇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일곱 개의 그릇이 동시에 빛나더니, 하나의 영수증 형태의 홀로그램이 로웬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주방 보관증 — 마지막 따뜻한 국 한 국자]

영수증의 하단에는 짧은 좌표가 찍혀 있었다.

“식당 뒤편 주방이군.”

로웬이 보관증을 갈무리하며 몸을 돌렸다.

“아직 식지 않은 국솥이 남아 있다는 뜻이야. 이 양보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확인하러 가야겠어.”

일행의 발걸음이 주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비어 있는 한 그릇을 뒤로한 채, 그들은 사라진 아이들의 마지막 온기를 찾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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