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120화 합본. 성자라는 이름의 반송 영수증에서 폭풍이 멈추지 않는 빈 우편함까지
118화. 성자라는 이름의 반송 영수증
‘그 아이를 성자라 부르지 말라.’
허공에 머물던 문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 가라앉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집무실 바닥 위로 납빛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 중심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죽은 신들의 물품을 관리하고 그 소유권을 판별하던 고대의 집행 도구, ‘죽은 신의 세관 도장’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납빛 도장은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로웬의 발치까지 기어 왔다. 그것은 로웬의 본명을 묻지 않았다. 영혼에 새겨진 첫 이름을 들추지도 않았다. 도장이 반응하는 것은 오직 하나, 타인들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와 공중에 부유하던 찌꺼기였다.
“……!”
이네스가 신음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환각이 아니었다. 로웬의 어깨와 가방끈, 그리고 그가 쥐고 있던 장부 모서리에 먼지 낀 꼬리표들이 다닥다닥 들러붙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단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성자(Saint)]
그것은 찬양이 아니었다. 축복도 아니었다. 도장은 그 단어를 로웬이라는 존재의 본질로 정의한 뒤, 소유권자가 사라진 ‘유기된 신성 자산’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로웬, 몸에……!”
이네스가 다급히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성자님’이라는 호칭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단어를 삼켰다. 지금 그를 그렇게 부르는 순간, 저 납빛 도장이 로웬의 목덜미에 ‘회수 완료’라는 낙인을 찍어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믿음이, 경외가, 그리고 로웬을 향한 무거운 기대가 실체화되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성자라는 이름의 짐표였다.
모르그는 깃펜을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기록관으로서 그는 지금 벌어지는 초상적인 절차를 기록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양피지에 글자를 적어 넣지 못했다.
“……안 됩니다. 이걸 베껴 쓰는 순간, 제가 이 소유권을 승인하는 꼴이 됩니다.”
모르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문서를 기록하는 행위는 사실을 확정 짓는 행위다. 기록관이 로웬을 성자라고 적는 순간, 로웬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죽은 신의 영역에 귀속되어야 할 분실물’이 된다.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로웬의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냄새가 이상해. 아저씨한테서 아저씨 냄새가 안 나.”
“무슨 냄새가 나는데?”
“오래된 창고에 쌓인 종이 뭉치 냄새. 그리고…… 끈적끈적한 풀 냄새. 이름이 아니라, 물건에 붙이는 딱지 냄새야.”
피핀의 말은 정확했다. 성자라는 호칭은 로웬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로웬이라는 상자 위에 멋대로 붙여놓은 운송장 번호에 불과했다. 그러나 죽은 신의 세관은 그 운송장을 근거로 물건 전체를 회수하려 들고 있었다.
나흐라는 이 기괴한 광경을 지켜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로웬을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실무적인 조언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세관 절차라는 게 원래 이토록 융통성이 없지. 호칭, 물건, 증서…… 눈에 보이는 표식에는 귀신같이 달려들지만, 정작 살아 있는 사람의 진짜 이름에는 손을 못 대거든. 그게 저 고철 덩어리들의 한계야.”
로웬은 자신을 옥죄어오는 납빛 압력을 묵묵히 견뎠다. 어깨가 무거웠다. 수천, 수만 명의 염원이 담긴 ‘성자’라는 단어가 그의 뼈마디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천천히 책상 위에 놓인 공문서 한 장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잉크도 찍지 않은 마른 펜촉으로 서류 위를 긁어 내려갔다.
“주문하신 적 없습니다.”
로웬의 건조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이 호칭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애초에 수취인 불명으로 도착한 물건이니, 본인 소유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로웬은 납빛 도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장이 거칠게 저항하며 그의 손등을 긁었으나, 로웬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자신이 작성한 짧은 문구 아래에 도장을 강제로 찍어 눌렀다.
쾅!
무거운 금속음과 함께 로웬의 몸에 붙어 있던 수많은 ‘성자’ 꼬리표들이 일제히 타올랐다. 하얀 불꽃이 아니라, 서류가 파쇄될 때 나는 듯한 건조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반송 영수증]
[항목: 성자(Saint)라는 이름의 호칭 일체]
[사유: 수취인 거부 및 소유권 부적합]
[조치: 원 발화자 집단으로 전량 반송]
로웬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고, 그 태도는 지극히 실무적이었다. 신비로운 기적도, 숭고한 희생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잘못 배달된 택배를 반품 처리하는 관리인처럼 굴었다.
“성자라는 이름이 그렇게 탐나면, 그걸 부른 사람들에게나 돌려주시지. 난 받을 생각이 없으니까.”
로웬이 도장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힘을 잃은 납빛 도장은 차가운 금속 덩어리로 돌아가 바닥을 굴렀다. 로웬의 어깨를 짓누르던 기분 나쁜 무게감이 사라졌다. 이네스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모르그는 멍하니 로웬이 발급한 ‘영수증’을 바라보았다. 신의 권위와 절차를 이토록 무미건조한 행정 처우로 맞받아친 인간이 있었던가.
로웬은 흐트러진 소매를 정리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등에는 도장에 긁힌 가느다란 상처가 남았지만, 표정만큼은 평온했다.
“다들 뭘 그렇게 봅니까. 업무 복귀하세요.”
로웬이 무심코 영수증 뒷면을 뒤집어 확인했을 때였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야 할 종이 뒷면에, 새로운 문장들이 서서히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첫 이름 4/7]
[베라의 심부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로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반송된 것은 호칭뿐이었다. 아직 그가 짊어져야 할 진짜 ‘배달물’은 길 위에 있었다.
119화. 베라의 미도착 심부름표
반송인이 찍힌 영수증 뒷면의 글귀가 꿈틀거렸다. 잉크가 번지고 종이의 결이 거칠게 일어나더니, 현대적인 서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누렇게 변색되고 손때가 절어 끈적이는, 아주 오래된 종이 한 장이 남았다.
로웬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더 이상 영수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기억에서 채 지워지지 못한, 혹은 지울 수 없어서 장부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심부름 접수표였다.
모르그는 본능적으로 펜을 꺼내 들었다가 멈칫했다. 기록가로서의 직관이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접수표의 수취인란은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는 오직 ‘이름 잃은 아이’라는 희미한 묵흔만이 남아 있었다.
모르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저 빈칸을 아는 이름으로 채우고 싶은 유혹이 강렬하게 일었다. ‘로웬’이라 적으면 이 기묘한 상황이 정리될 것 같았고, ‘성자’라 적으면 이 현상이 신학적인 기적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깨달았다. 확신 없는 추측으로 저 빈칸을 채우는 순간,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도용이 된다. 타인의 잃어버린 자리를 제멋대로 재단하는 오만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펜을 거두었다.
접수표 상단에는 로웬의 새로운 직함이 적혀 있었다. ‘성자’도, ‘구원자’도 아니었다.
[배달 담당: 임시직]
그 투박한 글씨가 로웬에게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세상이 억지로 씌워준 황금관을 벗어던지고, 다시 익숙한 낡은 배달 가방을 멘 기분이었다.
“결국, 그 할멈은 끝까지 이 장부를 안 지웠군.”
로웬이 낮게 읊조렸다.
베라 할멈. 그녀는 로웬에게 처음으로 빵 배달 심부름을 시켰던 동네 노파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성격 고약하고 집착 강한 노인네로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게 꼭 전달되어야 했으나 끝내 닿지 못한 심부름 하나를 평생토록 장부에서 지우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이기도 했다. 실패한 심부름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배달원보다 발송인에게 더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로웬은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안개 너머에서 지팡이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라 할멈의 등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낡은 지붕처럼 낮게 굽어 있었고, 그 위로는 사시사철 가시지 않는 눅눅한 비 냄새와 덜 익은 밀가루 향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수없이 많은 매듭을 지어본 듯 거칠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해진 소맷단 끝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듬으며 과거의 조각을 맞추려는 듯 보였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했으나, 그 안에는 단순히 나이 듦이 아닌,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을 삼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완고한 집념이 서려 있었다.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새어 나오는 숨소리는 마른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처럼 서걱거렸고, 그녀의 발걸음이 닿는 바닥에는 오래된 재가 섞인 흙먼지가 아주 미세하게 흩날렸다.
피핀이 코를 킁킁거렸다. 평소의 맛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피핀이 맡은 것은 젖은 천의 비릿함, 다 식어버려 딱딱해진 빵의 냉기, 그리고 갓 파헤친 아기무덤에서나 날 법한 축축한 흙내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코끝을 찌르는 것은 아주 오래전 타버린 장작더미에서 피어오르는 묵은 재의 냄새였다. 피핀은 꼬리를 말고 이네스의 다리 뒤로 숨어들었다.
이네스는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서서히 풀었다. 눈앞의 노파가 위험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로웬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로웬의 앞을 막아서며 정체를 물었겠지만, 지금 로웬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그녀는 로웬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자신의 보호 욕망을 억누르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로웬이 누런 종이표를 가볍게 털었다.
“이건 성물도 아니고, 거창한 예언서도 아니야.”
로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하급 관리직의 말투와도 같았다.
“그저 너무 오래돼서 곰팡이가 핀, 미도착 심부름 재접수표일 뿐이지.”
그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성자라는 칭호를 반송한 대가로 찾아온 것은 거창한 신의 응답이 아니라, 끝내지 못한 과거의 숙제였다.
“담당자가 아직 퇴근 전이라 다행이네. 연장 근무 수당도 안 나올 텐데 말이야.”
로웬은 쓴웃음을 지으며 베라 할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할멈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낡은 꾸러미 하나를 꺼내 로웬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이번 심부름의 물건이었다.
종이표 뒷면에는 심부름의 최종 목적지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목적지: 폭풍이 멈추지 않는 빈 우편함]
그리고 그 아래, 붉은색 잉크로 덧쓰여진 주의사항이 날카롭게 로웬의 시선을 붙들었다.
[주의: 첫 이름 5/7은 절대로 수취인란에 쓰지 말 것.]
120화. 폭풍이 멈추지 않는 빈 우편함
가방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로웬의 어깨가 뒤로 젖혀질 정도의 강한 힘이었다. 범인은 손에 든 접수표였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 마치 살아있는 짐승처럼 로웬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길 안내자치고는 매너가 엉망이군.”
로웬이 투덜거리며 발을 뗐다. 일행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 뒤를 따랐다.
주변의 풍경이 난도질당하듯 빠르게 변했다. 성소의 정갈한 공기는 어느덧 습하고 비린 바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침내 접수표가 인력을 멈춘 곳은, 세상의 끝자락처럼 황량한 절벽 위였다. 그곳엔 낡다 못해 형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나무 우편함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다.
그 주위를 거대한 폭풍이 감싸고 있었다.
“비가…… 아닌데?”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것은 수분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빗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수만 번 반복된 ‘실패’의 조각들이었다.
로웬은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빗방울에서 기이한 감각을 읽어냈다. 갓 구웠으나 이내 식어버린 빵의 눅눅한 냄새, 폭우에 젖어 무거워진 천 조각의 감촉, 산사태로 막혀버린 길의 막막함.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는, 미처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한 아기 무덤에서나 날 법한 차가운 흙 내음이 났다.
이 폭풍은 배달되지 못한 마음들이 마지막 순간을 되감으며 울부짖는 기록 장치였다.
“베라 할멈, 이게 할멈이 보냈던 것들이야?”
로웬이 뒤를 돌아보았다. 베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일행의 가장 뒤편에 서서, 폭풍의 위세에 짓눌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발송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죄책감이 그녀의 입술을 굳게 닫아걸었다.
그때, 우편함의 틈새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유혹이자 속삭임이었다.
[수취인의 이름을 적어라. 그러면 폭풍은 멈추고, 모든 기록은 완성될 것이다.]
로웬의 품 안에서 ‘이름 조각’이 반응했다. 성자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얻어낸 네 개의 조각 뒤로, 다섯 번째 조각이 태동하고 있었다. 로웬의 손에 들린 깃펜 끝에 잉크가 아닌, 황금빛을 띤 투명한 액체가 맺혔다.
지금 당장이라도 수취인란에 ‘로웬’ 혹은 그와 유사한 무언가를 적어넣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폭풍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 냄새가 아니야.”
피핀이 로웬의 옷자락을 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형, 거기서 나는 건 이름 냄새가 아니라 ‘빈칸’ 냄새야. 엄청나게 깊고 배고픈 빈칸.”
로웬은 멈칫했다. 펜촉이 종이에 닿기 직전이었다. 옆에 서 있던 모르그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차분한 목소리를 얹었다.
“기록학적 관점에서 볼 때, 기입되지 않은 공백 또한 하나의 정보입니다. 억지로 채워 넣은 오기(誤記)보다는 정직한 누락이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이 되기도 하죠.”
로웬은 헛웃음을 삼켰다. 위조는 배달부의 수치다. 수취인이 불분명한 화물에 제 이름을 적어넣는 행위는 배달이 아니라 횡령이다.
이네스가 로웬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로웬의 손목을 잡지도, 펜을 뺏지도 않았다. 그저 들고 있던 우산을 조금 더 기울여, 로웬의 손등과 펜촉에 폭풍의 잔해들이 닿지 않게 가려줄 뿐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젖는 건 내가 막을 테니까.”
그녀의 짧은 선언이 로웬의 정신을 맑게 깨웠다. 로웬은 펜을 고쳐 잡았다. 수취인란의 ‘이름 잃은 아이’라는 글자는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접수표 하단의 여백을 날카롭게 그어 내려갔다.
[미도착 사유서]
로웬은 실무적인 필체로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현지 기상 악화 및 수취인 불분명으로 인한 배달 일시 보류. 본 배달부는 화물의 강제 수령을 거부하며, 규정에 따라 해당 건을 '미도착' 상태로 유지함.]
마지막 글자를 마침과 동시에 로웬은 가방 깊숙한 곳에서 인장을 꺼냈다. 그것은 성자의 인장도, 영웅의 증표도 아니었다. 그저 낡고 투박한 배달부의 도장이었다.
쾅!
서류 위에 선명한 낙인이 찍혔다.
‘첫 이름 5/7 보류.’
순간, 세상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던 폭풍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귀를 찢던 바람 소리가 사라지고, 기분 나쁜 냄새들도 허공으로 흩어졌다. 기록 장치가 정지한 것이다.
로웬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우편함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단 한 가지 물건만이 들어 있었다. 수천 년의 폭풍 속에서도 기적처럼 젖지 않은, 작고 딱딱한 빵 한 조각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로웬이 방금 찍은 도장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주소지가 절반쯤 찢겨나간 낡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로웬이 그 빵 조각을 집어 들자, 그의 손등 위로 새로운 문양 하나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심부름은 아직 안 끝났어, 할멈.”
로웬은 건조하게 농담을 던지며 빵을 가방에 넣었다.
“이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 같으니까, 나중에 제대로 된 걸로 청구할 줄 알아.”
베라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눈가에 맺힌 것은 더 이상 폭풍의 빗물이 아니었다. 로웬은 텅 빈 우편함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세 개의 빈칸이, 다음 목적지를 향해 조용히 맥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