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225화. 동쪽 종루 지하 / 같은 목소리의 보관인 / 젖은 서명의 역청
223화. 동쪽 종루 지하
동쪽 종루는 수도원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었다. 한때는 시간을 알리는 거대한 종소리가 계곡 전체를 울렸겠지만, 지금은 그저 거대한 돌기둥처럼 죽어 있었다. 층계마다 쌓인 먼지는 누군가의 발걸음을 거부하듯 두터웠고, 차가운 산바람이 깨진 창살 사이로 비명처럼 파고들었다.
로웬은 램프의 불빛을 아래로 비추었다. 222화에서 확인했던 압흔의 지시대로라면, 이 낡고 버려진 종루의 지하야말로 ‘회색 심부름꾼’이 숨겨둔 진실이 잠든 곳이었다.
“여기에요. 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만 유독 바람이 안 통해요.”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는 짐승처럼 예민하게 공기의 흐름을 읽어냈다. 일행이 멈춰 선 곳은 종루 1층 구석, 썩은 가마니가 쌓여 있던 자리였다. 로웬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리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돌판 아래가 비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열자, 훅 끼쳐 오는 공기는 지상의 것과 달랐다. 피핀이 미간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냄새가 이상해요. 아주 오래된 향유 냄새가 나는데, 그 밑에 젖은 석회 냄새가 섞여 있어요. 마치… 무언가를 급하게 덮어버린 것처럼요.”
그녀의 감각은 틀린 적이 없었다. 로웬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신발 바닥에 닿는 감촉이 눅눅했다. 습기가 가득한 지하 통로는 램프의 빛조차 제대로 반사하지 못할 만큼 어두웠다.
통로 초입, 작은 탁자 위에 버려진 듯 놓인 ‘지하 출입 장부’가 보였다. 이네스가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그녀의 시선은 날카롭게 기록을 훑어 내려갔다.
“로웬 님, 이것 좀 보세요.”
이네스가 손가락으로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가리켰다.
“마지막 세 줄이에요. 날짜도 다르고 방문 목적도 제각각이지만, 필체가 똑같아요. 펜을 누르는 압력이나 획의 끝처리가 완벽하게 일치해요. 한 사람이 한꺼번에 몰아 썼거나, 누군가 가짜 기록을 남겼다는 뜻이죠.”
“성자를 대신해 침묵을 지키던 자들이 이곳을 관리했다면, 기록조차 침묵의 일부였겠군.”
로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더 깊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계단 난간은 금속이 아닌 낡은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베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난간의 틈새를 살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낚아채듯 움직였다.
“실이에요. 검은색.”
베라의 손가락 사이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얇고 질긴 검은 실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 침입자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인지, 아니면 이곳을 드나들던 자의 옷가지에서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베라는 말없이 그 실을 챙겨 품에 넣었다. 이곳은 단순히 버려진 창고가 아니라,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 아래 있는 공간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통로 끝에는 거대한 철제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자물쇠는 녹슬어 있었지만, 그 구조는 기괴할 정도로 복잡했다.
그때, 모르그가 문바닥에 귀를 대더니 숨을 죽였다. 일행 모두가 숨을 멈췄다. 적막한 지하 공간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무언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였다. 아주 일정하고 차분한, 서두르지 않는 손길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리고 있었다.
“안에 누가 있습니다.”
모르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깊은 지하, 수십 년간 닫혀 있어야 했을 공간 안에 누군가 살아서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은 기괴함을 넘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모르그가 무기를 다잡으며 문을 부술 기세를 보이자, 로웬이 그의 어깨를 눌러 제지했다. 로웬은 성자식 예언자처럼 기적을 부리거나 무력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가진 ‘권한’과 ‘절차’를 떠올렸다.
로웬은 품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그것은 성자청의 공식 인장이 찍힌 청구서였다. 그는 문 너머의 존재가 들을 수 있도록, 명료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성자청 행정관 로웬이다. 교황령 특별 조사 규칙 제14조 3항에 의거, 이곳에 보관된 ‘침묵 서약서 원본’에 대한 열람을 공식적으로 청구한다. 보관 관리인은 문을 열고 절차에 응하라.”
그것은 전장의 함성보다 차가웠고, 어떤 주문보다 실질적이었다. 로웬은 신비주의에 기대지 않았다. 그는 오직 시스템의 이름으로 상대의 정체를 끌어내고자 했다.
사각거리는 종이 소리가 멎었다.
지하의 무거운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정지했다. 일행은 각자의 무기를 쥔 채 문이 열리기를, 혹은 문 너머에서 공격이 날아오기를 기다리며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잠시 후, 육중한 철문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구를 수락합니다. 행정관 로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일행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문 안쪽에서 들려온 대답은 로웬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억양, 성량, 심지어 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방금 문 밖에서 법령을 낭독했던 로웬 자신의 목소리가 문 안쪽에서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224화. 같은 목소리의 보관인
동쪽 종루의 지하, 습기 찬 공기가 내려앉은 철문 앞에서 로웬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환청도, 단순한 메아리도 아니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음성은 로웬이 방금 내뱉었던 성량과 고저, 심지어는 미세한 비음의 떨림까지도 똑같이 모방하고 있었다.
“……청구를 수락합니다. 행정관 로웬.”
문 안쪽의 존재가 내뱉은 문장은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마치 정해진 규격에 맞춰 대답하는 기계 같으면서도, 그 질감만큼은 로웬 본인의 것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일행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네스가 가장 먼저 손에 든 촛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는 품에서 방금까지 조사하던 낡은 장부 한 권을 꺼냈다. 장부의 마지막 장에 적힌 필체와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구조를 머릿속으로 대조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단순한 따라 하기가 아니에요.”
이네스가 낮게 읊조렸다.
“방금 저 목소리가 한 말, 로웬 씨가 낭독했던 행정 문구의 반복 구조와 완벽하게 일치해요. 주어와 목적어의 배치, 그리고 서술어의 종결 어미까지요. 이 장부에 적힌 기록 방식이 그대로 음성으로 치환된 것 같아요.”
로웬은 대답 대신 철문의 틈새를 살폈다. 육중한 철문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틈새로 기묘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문 가까이 다가갔다. 수인 특유의 예민한 후각이 공기 중의 미세한 입자를 포착했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피 비린내도 아니고, 곰팡이 냄새도 아니에요.”
피핀이 인상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아주 오래된, 하지만 동시에 금방 쏟아낸 것 같은…… 식은 잉크 냄새예요. 철 냄새가 섞인 아주 진한 잉크요.”
잉크 냄새. 그것은 이 어두운 지하 종루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향이었다. 뒤이어 베라가 바닥을 가리켰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흐릿한 검은 실 끝이 뱀처럼 기어와 문 아래 좁은 틈새로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문 안쪽의 존재가 외부의 정보를 빨아들이는 빨대처럼 보이기도 했고, 혹은 안쪽의 무엇인가가 밖으로 뻗어 나온 촉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실, 문 안쪽으로 이어져 있어요.”
베라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모르그가 거대한 도끼를 고쳐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근육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있나. 목소리가 같든 잉크 냄새가 나든,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확인하면 그만이지.”
모르그가 도끼날을 문틈에 박아 넣으려던 찰나, 로웬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로웬의 눈빛은 냉정했다.
“멈추십시오, 모르그 씨. 함부로 물리력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왜지? 안에 있는 게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데.”
“이 안은 종루의 기록 보관소입니다. 만약 저 문이 내부의 보존 마법이나 기계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면, 강제로 파괴하는 순간 내부의 모든 ‘원본’이 훼손될 가능성이 큽니다. 행정관으로서 원본의 파괴를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로웬은 모르그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다시 철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가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간에 이곳이 ‘행정적 절차’가 살아있는 곳이라면 대응 방식 또한 그에 맞춰야 했다.
로웬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는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명확한 행정적 요구였다.
“제2지역 행정관 로웬이다. 보관 관리 규정 제14조에 의거, 해당 구역 보관인의 인수인계 대장 열람을 청구한다.”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문 너머에서 다시금 로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고, 조금 더 깊은 울림이었다.
“……청구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보관인 인수인계 대장, 열람 번호 0-22-A.”
철문 내부에서 덜컥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무거운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고,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지하의 고요를 깨뜨렸다. 일행은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곧 문이 열릴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철문 중간 높이에 있는 좁은 배식구 같은 슬릿이 소리 없이 열렸다.
“원본 열람 전, 절차에 따른 대리자 서명을 요구합니다.”
차갑고 건조한 요구였다. 슬릿 사이로 낡은 양피지 한 장과 펜 한 자루가 미끄러지듯 밖으로 나왔다. 양피지는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은 듯 누렇게 바래 있었지만, 그 위에 놓인 펜촉에서는 방금 잉크를 적신 듯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로웬은 천천히 양피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핀이 맡았던 그 ‘식은 잉크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이네스와 베라도 숨을 죽인 채 로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로웬은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서명을 하려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로웬 씨? 왜 그래요?”
베라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로웬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양피지의 하단, ‘서명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행정관 로웬 ]
유려하고도 단정한 필체. 그것은 로웬 자신의 필체와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더욱 기괴한 것은 그 서명이 방금 써 내려간 것처럼 아주 진하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는 점이다. 마치 로웬이 펜을 들기도 전에, 종이 너머의 ‘누군가’가 미리 서명을 마친 것처럼.
로웬의 손끝에 묻은 잉크가 검게 번져 나갔다. 아직 마르지 않은 자신의 이름이 그를 비웃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225화. 젖은 서명의 역청
로웬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은 서늘했다. 방금 막 기록을 마친 듯 선명한 잉크는 아직 종이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지 못한 채, 역청처럼 검고 진득한 빛을 내뿜으며 일렁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적은 글씨체가 맞았다. 자획의 끝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가는 습관부터, 'L'과 'o' 사이의 좁은 간격까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그러나 로웬은 오늘 이곳에 도착한 이후 단 한 번도 펜을 든 적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떼고, 손가락에 묻어난 검은 얼룩을 문질렀다. 잉크는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피부 사이의 미세한 주름을 타고 기괴한 문양처럼 번져 나갔다.
로웬은 고개를 들어 굳게 닫힌 기록 보관소의 철문을 응시했다. 차가운 금속 너머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뒷덜미를 훑는 기분이었다. 그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서류의 서명 접수 시각을 요구한다. 정확히 몇 분 전인가?"
로웬의 질문은 실무적이었다. 당혹감이나 공포를 드러내는 대신, 그는 절차상의 허점을 먼저 파고들었다. 만약 이 서명이 예언적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이라면, 반드시 기록된 시간과 실제 행위 사이에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이네스가 눈등을 찌푸리며 종이 위로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예리한 눈이 서명란의 미세한 결을 훑었다.
"로웬, 이 잉크 번짐을 보세요. 흔적이 이상해요."
이네스가 가리킨 곳은 서명의 끝부분이었다. 보통 사람이 종이 위에 글씨를 쓰면 잉크는 펜촉이 나아가는 방향, 즉 몸의 바깥쪽으로 미세하게 튀거나 흐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종이 위에 남은 흔적은 정반대였다.
"잉크가 문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흐르고 있어요. 마치 누군가 문틈 사이로 펜을 밀어 넣어 쓴 것처럼, 혹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잉크를 끌어당긴 것처럼요."
이네스의 지적에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연금술적 감각이 예민한 그녀는 종이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에 집중했다. 피핀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으, 독해. 이거 그냥 잉크가 아니야. 로웬, 잉크 냄새 속에 아주 지독한 산(酸) 냄새가 섞여 있어. 일반적인 서기들이 쓰는 재료가 아냐. 무언가를 강제로 부식시키거나, 유기물의 성질을 변형시킬 때나 쓰는 독한 약품 냄새라고."
피핀의 말대로라면 이 서명은 단순한 위조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그때, 조용히 주변을 살피던 베라가 서류철의 모서리 부분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에는 아주 가느다란 검은 실 한 올이 걸려 있었다.
"이게 서명지 모서리에 감겨 있었어요."
베라는 조심스럽게 실을 풀어서 들어 올렸다.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얇은 실이었지만, 로웬의 눈에는 그것이 단순한 실타래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실은 서류의 모서리를 아주 정교하게 옭아매고 있었으며, 잉크가 묻은 자리마다 미세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술사가 종이 위에서 펜을 조종한 흔적처럼 보였다.
로웬은 다시 철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문 안쪽의 어둠 속에서 낮고 껄끄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접수 시각은 무의미하다. 이 서류를 가져온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할 뿐.
"그게 누구지?"
로웬의 물음에 문 너머의 존재가 쇳소리 섞인 웃음을 뱉어냈다.
그는 자신을 '회색 심부름꾼'이라 칭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자. 오직 전달해야 할 서류와 정당한 위임장만을 가진 자였다.
회색 심부름꾼. 그 명칭은 로웬이 알고 있는 어떤 공식 조직이나 정보 길드의 이름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로웬은 턱을 괴며 머릿속의 행정부 데이터베이스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정체불명의 심부름꾼이 대리인으로 서명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를 증명할 행정적 근거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 심부름꾼이 제시했다는 위임장 번호를 요구한다."
로웬의 목소리는 더욱 단호해졌다.
"대리 서명이 유효하려면 본인의 승인 번호나 상응하는 위임 번호가 기록에 남아야 한다. 그 번호를 지금 당장 확인해라. 만약 번호가 없다면 이 서류는 행정적으로 무효이며, 보관소의 관리 책임을 묻겠다."
성자로서의 권위가 아닌, 철저한 실무가로서의 압박이었다. 문 너머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육중한 철문 아래의 좁은 틈새로 작은 양피지 조각 하나가 밀려 나왔다. 거칠게 찢긴 종이 위에는 갈겨쓴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로웬은 그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옆에서 번호를 같이 보던 이네스와 피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로웬은 그 숫자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다. 그것은 단순한 위임 번호가 아니었다.
그 번호는 로웬이 행정관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급한 적이 없는 특수 분류 번호였다. 아니, 정확히는 발급될 수 없는 번호였다.
그 번호의 체계는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 행정망에서 이미 말소된 자들, 즉 '사망자 등록번호'의 형식과 완벽히 일치했다.
더욱 기괴한 것은 그 번호가 가리키는 대상이었다. 로웬은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하며 숫자를 다시금 되짚었다. 번호의 끝자리는 7로 끝났다. 그것은 로웬 자신이 직접 서명하여 처리했던, 수년 전 실종되어 사망 처리된 어느 고위 인사의 고유 식별 번호였다.
로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회색 심부름꾼이 들고 왔다는 위임장은, 죽은 자의 이름으로 발행된 것이었다.
"이 번호는..."
로웬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철문 안쪽에서 기괴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마치 수백 마리의 벌레가 벽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심부름꾼은 말했다. 주인께서 오래전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계셨다고.
로웬은 젖은 서명지가 놓인 바닥을 보았다. 검은 잉크가 어느새 종이를 넘어 석재 바닥으로 스며들며, 마치 거대한 입처럼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