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220-222화. 귀 없는 청지기 대행 / 성자 접견용 봉인 / 잿불 심부름꾼 대리 조회 일러스트

220-222화. 귀 없는 청지기 대행 / 성자 접견용 봉인 / 잿불 심부름꾼 대리 조회

220화. 귀 없는 청지기 대행

북문 종루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로웬의 시선은 종소리 운용표의 한 구석에 고정되었다. 누렇게 바랜 양피지 위, 유독 이질적인 글자가 그의 눈을 찔렀다.

‘귀 없는 청지기 대행.’

단순한 별칭이라기엔 너무나 명확한 칸에 기입되어 있었고, 공적인 직무명이라기엔 지나치게 기괴했다. 로웬은 깃펜 끝으로 그 글자를 천천히 덧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성 내의 모든 직제는 엄격한 행정 절차를 따른다. 예언자의 직관 이전에, 로웬은 이 성의 관료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정식 직무라면 인사 기록에 남아야 했고, 은어라면 이 운용표 자체가 오염되었다는 뜻이었다.

“단순한 낙서는 아니군요.”

로웬의 목소리에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수인 특유의 예민한 후각이 양피지 위를 훑었다. 피핀은 미간을 찌푸리며 운용표의 특정 부분에 코를 바싹 들이밀었다.

“로웬, 여기서 여러 가지 냄새가 섞여 있어. 아주 오래된 종줄 기름 냄새…… 그리고 이건 좀 눅눅한데, 밀랍 귀마개 냄새야. 그리고 낡은 철쇠 냄새도 나. 열쇠 꾸러미 같은 거.”

피핀의 분석은 명확했다. 종소리를 관리하는 자가 귀마개를 사용한다는 모순, 그리고 그가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 로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때, 옆에서 기록을 살피던 이네스가 서늘한 목소리로 지적을 덧붙였다.

“이건 규정 위반이에요. 청지기 대행이라는 직책은 성내의 열쇠권, 즉 문 개폐 권한을 가집니다. 하지만 종소리 운용은 전령과 신호의 영역이죠. 한 사람이 종소리와 문 개폐 권한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어요. 신호자가 멋대로 문을 열어버릴 위험이 있으니까요.”

이네스의 말대로였다. 성의 방어 체계는 철저히 권한의 분산에 기초한다. 종을 치는 자는 문을 열 수 없고, 문을 여는 자는 종을 칠 수 없다. 그것이 성의 보안을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귀 없는 청지기 대행’은 그 금기를 정면으로 깨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베라가 종루 난간 너머를 가리켰다. 그녀는 이미 북문의 구조를 머릿속에 다 그려 넣은 듯했다.

“이곳 북문 종루에서 아래쪽 하역문까지는 성인 남성의 발걸음으로 서른 걸음도 안 됩니다. 한 사람이 종을 치고 곧바로 내려가 하역문을 개방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소리죠. 만약 그가 ‘귀 없는’ 자라면, 외부에서 들려오는 어떤 경고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문을 열 수 있을 겁니다.”

상황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감시와 통제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로웬은 다시 한번 운용표를 살폈다. ‘귀 없는 청지기 대행’이라는 글자 옆, 무언가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내 지워버린 흔적이 보였다.

모르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가락 끝에 마력을 모아 지워진 문구 위를 조심스럽게 덧씌웠다. 희미한 푸른 빛이 양피지 위를 핥고 지나가자, 눌려 있던 종이의 결이 다시 살아나며 글자가 떠올랐다.

[청각 확인 면제]

“지워진 문구는 이겁니다, 로웬. 이 자는 신체 검사조차 받지 않았어요. 아니,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게 맞겠군요. 면제 승인을 받았으니까요.”

로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각 확인 면제.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결함을 덮어주는 자비가 아니었다. 종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에게 청각 확인을 면제해준다는 것은, 그가 소리가 아닌 다른 ‘신호’에 따라 움직인다는 방증이었다.

로웬은 주저하지 않고 인장을 꺼냈다. 그리고 공무용 서신지에 거침없이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행정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 이 자가 실존한다면, 그를 임명한 근거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로웬이 찍은 인장은 강력했다. ‘청지기 대행 임명서 및 청각 확인 면제 승인 원본 제출 요구’.

행정관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하고도 집요한 압박이었다. 예언이나 추측이 아니라, 성의 시스템 자체를 이용하여 정체를 드러내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로웬은 서류를 말아 쥐며 차갑게 덧붙였다.

“유령이 아니라면, 이 서류에 응답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내부 보관소에서 먼지 쌓인 서류 한 뭉치가 로웬의 앞으로 도착했다. 그것은 ‘귀 없는 청지기 대행’의 정식 임명 서류였다.

로웬은 가장 먼저 서류의 마지막 장, 승인란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승인자의 서명 대신 붉은 봉인 왁스가 눌려 있었다.

서류를 확인하던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피핀과 이네스 역시 그 문양을 확인하고 숨을 들이켰다.

봉인 왁스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문양. 그것은 성내의 일반적인 행정실 인장이 아니었다.

오직 한 곳, 가장 높은 성소에서만 사용되는 특수 인장이었다.

[성자 접견용(聖者 接見用)]

청지기 대행의 신분 뒤에는 성자의 권위가 직접적으로 얽혀 있었다. 붉은 왁스는 마치 굳어버린 핏방울처럼 로웬의 시야에서 기괴하게 번져 나갔다.

221화. 성자 접견용 봉인

붉은 왁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나, 그 위에 새겨진 문양만큼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 선명했다. 로웬은 책상 위에 놓인 청각 확인 면제 승인서 원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서류 하단에 찍힌 봉인 왁스를 응시했다.

단순한 교단 문양이 아니었다. 성소의 가장 깊숙한 곳, 성자가 머무는 지성소의 출입 권한을 상징하는 특수 문양이었다.

“성자 접견용…….”

로웬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손가락 끝으로 문양의 테두리를 살며시 훑었다. 일반적인 행정 문서에는 결코 쓰이지 않는 인장이다. 이 문양이 찍힌 종이는 그 자체로 성하의 의지를 대변하는 성물(聖物)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고작 하급 관리들의 청각 검사를 면제해 준다는 서류에 이 귀한 인장이 박혀 있었다.

“로웬, 그거 냄새가 이상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온 피핀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인 특유의 예민한 후각은 종이와 왁스에 스며든 미세한 흔적들을 놓치지 않았다.

“이상하다니? 어떤 냄새가 나는데?”

로웬의 물음에 피핀이 서류 위로 고개를 더 바짝 들이밀었다.

“음, 일단 아주 오래된 향유 냄새. 그리고…… 종이를 태운 듯한 매캐한 탄내도 섞여 있어. 아, 하나 더. 아주 차가운 쇠상자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것 같은 냄새야. 눅눅하고 서늘한 그런 거 있잖아.”

피핀의 묘사는 구체적이었다. 향유와 탄 종이, 그리고 냉기가 느껴지는 철제 보관함. 로웬의 머릿속에서 행정 절차의 연대기가 빠르게 재구성되었다. 정식으로 발급된 문서라면 나서야 할 신선한 잉크 향이나 최근의 왁스 냄새가 아니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네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성자 접견용 봉인은 교단 내에서도 극소수의 문서에만 허가됩니다. 성자의 친필 서신이나, 성물 이운(移運) 허가증, 혹은 이단 심문소의 최종 판결문 정도죠. 행정처의 일반 승인서에 이 인장이 찍혔다는 건, 이 서류를 만든 자가 절차를 무시하고 권위를 도용했다는 증거입니다.”

“어쩌면 권위 도용만이 목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있던 베라가 차갑게 툭 내뱉었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 멀리 보이는 북문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아까 북문 감시병들이 순순히 물러난 이유를 이제 알겠어. 그들이 두려워한 건 로웬 네가 들고 있던 서류의 내용이 아니야. 바로 저 인장이지. 저 문양이 찍힌 서류를 무시하는 건 곧 성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짓이니까. 말단 병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을 거야.”

로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라의 지적은 타당했다. 실무자로 살아가며 배운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은 진실보다 '진실해 보이는 표식'에 더 쉽게 굴복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돋보기를 들고 봉인 왁스를 정밀하게 관찰하던 모르그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로웬, 이것 좀 봐. 여기 인장 가장자리를 자세히 보라고.”

모르그가 가리킨 곳을 로웬이 살폈다. 붉은 왁스의 테두리 부분이 미세하게 층이 져 있었다. 마치 한 번 굳었던 왁스 위에 다시 뜨거운 열을 가해 다른 문양을 덧씌운 듯한 흔적이었다.

“재사용된 인장인가?”

“비슷해. 하지만 더 교묘하지. 기존에 다른 문서에 찍혀 있던 성자 접견용 봉인 부분을 통째로 잘라내서, 이 서류의 왁스 위에 녹여 붙인 거야. 피핀이 말한 탄 냄새는 아마 이 작업을 할 때 가해진 열기 때문이겠지.”

모르그의 분석은 명확했다. 누군가 폐기되었어야 할 과거의 성물급 문서에서 인장만을 추출해, 가짜 승인서에 이식했다는 뜻이다. 이건 단순한 행정 오류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공문서 위조였다.

로웬은 펜을 들었다. 이제 예언자 노릇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실무자의 시간이었다.

“성자 접견용 인장이 이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 문제군.”

그는 매끄러운 종이 위에 정갈한 서체로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그의 펜촉이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사각거림이 방 안을 채웠다.

[수신: 교단 중앙 인장 관리국 및 기록 보존소

발신: 감사 대행 로웬

제목: 성자 접견용 봉인 발급 대장 및 인장 보관함 열람 기록 제출 요구의 건]

로웬은 주저 없이 자신의 직인을 찍었다. 상대가 성자의 권위를 빌려 방어막을 쳤다면, 자신은 그 권위를 지탱하는 시스템의 허점을 찔러야 했다. 인장이 가짜이거나 도용된 것이라면, 반드시 기록에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이걸 지금 당장 보관소로 보내. ‘성자 접견용’이라는 명칭이 붙은 모든 인장의 이동 경로와 사용 허가 대장을 한 시간 내로 내 앞에 가져오라고 해.”

로웬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 평소의 유들유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절차를 무시하는 자들을 상대할 때 그는 가장 무서운 관료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전령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로웬은 지체 없이 대장을 넘겼다.

인장 관리국은 철저한 곳이다. 누가, 언제, 어떤 용도로 인장을 반출했는지 초 단위까지 기록된다. 로웬의 손가락이 최근 며칠간의 기록을 훑어 내려갔다.

“찾았다.”

로웬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발급 대장의 가장 마지막 줄이었다. 문제의 '청각 확인 면제 승인서'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 인장 보관함에 접근한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록의 수령자 칸에는 익숙한 이름도, 고위 사제의 직함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기괴하고 생소한 명칭 하나가 휘갈겨 써져 있었다.

[ 수령자: 잿불 심부름꾼 대리 ]

로웬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잿불 심부름꾼? 교단 내의 공식적인 직책 중에는 그런 이름이 없었다. 게다가 정식 이름도 아닌 '대리'라는 모호한 수식어라니.

“잿불 심부름꾼이라니, 들어본 적 있어?”

로웬이 동료들을 돌아보며 물었지만, 이네스와 베라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록 대장상의 글씨는 유독 그 부분만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마치 잉크가 마르기 전에 누군가 고의로 문지른 것처럼.

로웬은 다시 서류의 수령자 칸을 들여다보았다. '잿불 심부름꾼 대리'. 그 기이한 명칭 뒤에 숨은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 음모는 교단의 공식적인 행정 체계 밖에서, 혹은 그 체계를 완전히 장악한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서늘한 정적이 집무실을 감쌌다. 로웬은 책상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성자의 권위를 훔쳐낸 심부름꾼. 그리고 그 배후.

로웬은 대장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심부름꾼이 누구인지, 가서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222화. 잿불 심부름꾼 대리 조회

성자 접견용 봉인 발급 대장. 그 낡은 종이 위에 휘갈겨진 ‘잿불 심부름꾼 대리’라는 글자는 이질적이었다. 로웬은 손가락 끝으로 그 글자를 천천히 덧쓰다 멈추었다. 당장 관리관의 멱살을 잡고 “이게 누구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는 이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직접 물어보자는 말은 거두겠다.”

주변의 시선이 로웬에게 집중되었다. 로웬은 대장의 앞뒤 페이지를 거칠게 넘기며 날짜와 일련번호를 대조했다.

“관리관이 이 이름을 기억할 리 없어. 아니, 기억하더라도 조작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지. 우선 이 기록이 어떤 경로로 등록되었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발급 승인 도장, 중간 결재자, 그리고 이 장부가 보관되었던 서고의 입출입 명단까지 전부.”

성자식 예언자라면 직관으로 범인을 지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웬은 성국의 실무자로 잔뼈가 굵은 이였다. 그는 기적이 아닌 절차의 허점을 파고드는 법을 알았다.

그때, 코를 킁킁거리며 대장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던 피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해요, 아저씨. 이 잉크 냄새요.”

“냄새?”

“북문 창고에서 쓰는 향유 냄새가 아니에요. 거긴 습기를 막으려고 독한 박하유를 섞는데, 이건…… 훨씬 무겁고 눅눅한 냄새가 나요. 마치 오래된 사원 지하에서나 날 법한 침향 냄새 같아요.”

피핀의 감각은 예리했다. 대장에 쓰인 잉크는 분명 겉보기엔 성국의 공용 규격품이었으나, 그 안에는 미세하게 다른 성분이 섞여 있었다.

이네스가 그 옆에서 장부의 서식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을 보탰다.

“여기 보세요. ‘대리’라는 표기 말이에요. 성국의 정식 직함 체계에는 이런 명칭이 존재하지 않아요. 임시 운반자나 하급 수습생이 물건을 대신 수령할 때만 사용하는 임시 기재란에만 남는 방식이죠. 즉, 이 인물은 정식으로 신분을 밝히지 않고도 봉인을 가져갈 수 있는 ‘투명한 존재’로 취급받았다는 뜻이에요.”

“철저하게 시스템의 빈틈을 이용했군.”

로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때 베라가 로웬의 곁으로 다가와 대장의 수령자 서명 칸을 유심히 살피더니,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대조했다. 그것은 며칠 전 로웬이 직접 작성했던 반납 확인서였다.

“로웬, 이것 좀 봐. 서명의 끝 획이 묘하게 닮았어.”

“내 필체를 흉내 냈다는 건가?”

“단순한 흉내가 아니야. 붓을 멈추는 지점, 압력을 주는 방식까지 네 습관을 그대로 베꼈어. 누군지 몰라도 네 필적을 아주 오랫동안 연구한 놈이야. 네가 직접 수령한 것처럼 보이게 해서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네게 책임을 씌우려 했겠지.”

상황은 생각보다 더 치밀했다. 내부자의 소행이거나, 로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온 자의 짓이었다.

모르그가 묵묵히 지켜보다가 지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잉크와 필체만으로는 부족해. 종이는 기억하고 있을 거다.”

모르그는 대장의 해당 페이지가 아니라, 그 바로 아래 눌려 있던 두 번째 종이에 손을 올렸다. 잉크가 묻지 않은 백지였지만, 위쪽 페이지에 글자를 쓸 때 가해진 힘은 아래쪽 종이에 미세한 굴곡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모르그의 손끝에서 은은한 마력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는 고운 은가루를 종이 위에 뿌린 뒤, 가볍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백지 위에 압흔(壓痕)이 도드라지며 숨겨진 문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장에 적힌 ‘잿불 심부름꾼 대리’라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었다.

“이건…….”

피핀이 마른침을 삼켰다. 은가루가 메운 굴곡을 따라 선명하게 드러난 문장은 기괴할 정도로 정갈했다.

[회색 심부름꾼은 성자를 대신해 침묵한다.]

장부에는 적히지 않았던, 그러나 종이에는 깊게 박혀 있던 그 문장을 보며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잿불이 아니라 회색. 그것은 성국의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이름 없는 봉사자들을 일컫는 은어였다.

“성자를 대신해 침묵한다니. 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이런 서약을 남긴 거지?”

이네스의 물음에 대답하듯, 모르그가 압흔의 가장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 서약의 본질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가 적혀 있었다.

글자의 흔적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종이를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침묵 서약서 원본 보관 위치 : 동쪽 종루 지하]

로웬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성국의 가장 오래된 구역, 지금은 폐쇄되어 종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동쪽 종루가 거대한 묘비처럼 밤하늘에 솟아 있었다.

그곳은 지도상으로는 존재하지만,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성국의 거대한 맹점이었다.

“지하 서고가 아니라 종루 지하라고?”

로웬이 읊조렸다. 시스템의 빈틈을 찾아내던 그의 이성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저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단순한 횡령이나 대리 수령의 문제를 넘어선 무언가와 마주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가자. 그곳에 ‘심부름꾼’이 숨긴 진실이 있을 거다.”

로웬의 발걸음이 무겁게 성당의 복도를 울렸다. 잿불의 흔적을 쫓던 일행의 그림자가 동쪽 종루를 향해 길게 늘어졌다. 잿더미 아래 숨겨진 불씨가 서서히 그들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