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8화 합본. 첫 이름의 봉인문에서 기사단 보급창고의 썩지 않는 빵까지
66화. 첫 이름의 봉인문
피난민의 명단은 낡고 해어져 있었으나, 그 맨 윗줄에 적힌 이름만은 마치 방금 새겨진 것처럼 선명했다. 이네스는 손끝으로 그 글자를 더듬었다. 종이의 질감이 아닌, 누군가의 생애가 남긴 거친 흉터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무덤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은 좁고 습했다. 횃불의 잔상이 벽면에 들러붙은 이끼 사이로 일렁일 때마다, 로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석문이었다. 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비석에 가까운 그것이 통로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누가 감히 기록의 정원을 발로 밟는가.”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문 앞에 앉아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네스가 들고 있는 명단을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깟 이름 따위는 이 성스러운 봉인문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에 새겨질 것은 개별자의 하찮은 호칭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이자 완결된 전공 문장(專攻 文章)이어야 하지. ‘잿불의 연대기 아래 굴복한 무지한 자들의 안식’…… 그래, 이 정도로 고쳐 써야 문이 응답할 것이다.”
그는 이네스의 손에서 명단을 뺏으려 들며, 허공에 기묘한 문장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네스의 눈앞에서 피난민의 이름이 지워지고, 딱딱하고 권위적인 수식어들이 그 자리를 채우려 꿈틀거렸다.
“그만두세요.”
이네스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남자의 지팡이를 손으로 쳐내며 명단을 가슴팍에 끌어안았다.
“이건 당신의 논문을 장식할 문구가 아니에요. 누군가가 평생을 불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었던 삶 그 자체라고요.”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분노를 참는 듯 입술을 깨물다가, 이네스의 기세에 눌린 듯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서야 어둠 속에서 그의 형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그는 무덤의 파수인이자, 제국의 기록관이었던 라울 데센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것은 단순한 사제의 외투가 아니라, 수백 년간 응축된 도서관의 먼지와 잿더미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비단보다 무거운 권위였으며, 소매 끝으로 드러난 손가락은 붓대를 쥐기엔 지나치게 단단하고 칼자루를 쥐기엔 너무도 예민하게 마른 기묘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주름진 눈가 너머로 번뜩이는 안광은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홀로 목도해 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독한 회의와 오만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그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오래된 석실의 벽면을 긁는 차가운 바람처럼 건조하면서도 듣는 이의 척추를 서늘하게 훑고 내려가는 기묘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낡아빠진 관복의 금사는 빛바랜 지 오래였으나 그가 서 있는 자리만큼은 거대한 서고의 중심처럼 정적이고도 압도적인 압박감을 뿜어냈다.
라울 데센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이네스를 응시했다.
“이름 하나에 목숨을 거는군, 성자라 칭송받는 이여. 하지만 봉인문은 오직 완벽한 문장에만 응답한다. 그 보잘것없는 이름으로는 이 문을 단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어.”
이네스는 대답 대신 석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라울이 허공에 띄워 놓은 화려한 전공 문장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마치 벽지를 뜯어내듯, 그 고압적인 글자들을 거칠게 긁어냈다.
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라울의 문장들이 바닥으로 바스러져 내렸다. 이네스는 명단의 첫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에일린.”
그것은 전공 문장도, 위대한 업적도 아니었다. 그저 어느 마을에서 빵을 굽던 여인의 이름이었다. 이네스의 손가락이 석문의 중앙을 훑자, 지워졌던 이름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돌 속에 박혀 들어갔다.
라울 데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봉인문이 거대한 진동과 함께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수사학적 완결성도 없는 이름 하나에 봉인이 풀린단 말인가?”
라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로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례를 범한 이네스를 대신해 기사로서 사과를 요구하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로웬은 라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도 단 한 마디의 사과도 건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짐을 고쳐 메며 담담하게 물었을 뿐이다.
“라울 데센 경. 우리는 지금 사과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이 이름이 배달되어야 할 곳이 이 문 너머입니까? 심부름꾼은 오직 그 좌표만을 확인합니다. 길을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라울은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벌렸다. 로웬은 이네스의 뒤를 따르며, 열린 문 너머의 어둠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성자를 사칭하지 않는 심부름꾼에게, 이름의 무게는 그 어떤 화려한 문장보다 무거운 법이었다.
67화. 두 번째 이름의 빈 침상
육중한 봉인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자, 코끝을 찌른 것은 성스러운 향유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종이가 삭아가는 매캐한 분진과, 주인을 잃고 방치된 철제 침대에서 배어 나온 서늘한 녹슬음의 합주였다.
‘두 번째 이름’들의 구역. 성국이 구원하지 못한, 혹은 구원했다는 기록만 남긴 채 잊어버린 영혼들의 수용소였다.
피핀이 평소처럼 가벼운 농담을 던지려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끝없이 늘어선 빈 침상들의 행렬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목소리는 목구멍 뒤로 말려 들어갔다. 침대 머리맡마다 걸린 것은 환자의 이름표가 아니었다. 밧줄로 칭칭 동여맨 거대한 서류 뭉치들이 마치 시신처럼 침대 위에 안치되어 있었다.
“성자시여, 멈추십시오.”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로웬의 앞을 가로막으며 딱딱하게 굳은 손을 내밀었다.
“이곳은 이름 없는 자들의 안식처입니다. 축복의 의식 없이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예법에 따라 제9장 4절의 위령문을 낭독하시고, 침상마다 성수를 뿌려 이들의 혼을 달래는 절차를 시작해 주시지 않거늘 통행은 불허합니다.”
로웬은 그녀의 요구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는 고지식할 정도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로웬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은제 배지가 희미한 빛을 반사하고 나서야, 로웬은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름의 관리자, 마리안 베크였다.
그녀는 성국의 의전용 사제복과는 거리가 먼, 빳빳하게 풀을 먹인 짙은 감색의 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옷이라기보다 차라리 몸을 구속하는 갑주에 가까워 보였다. 뒤로 바짝 묶어 넘긴 머리카락은 단 한 올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드러난 관자놀이에는 고된 행정 업무와 불면이 새겨놓은 가느다란 핏줄이 돋아 있었다. 수만 장의 서류를 넘기느라 지문이 닳아버린 그녀의 손끝은 잉크 얼룩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으나,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기계 장치처럼 일정한 박자를 새기며 보는 이를 압도했다. 서늘한 서릿발을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는 로웬을 성자가 아닌, 규격에 맞지 않는 불량 물품을 보듯 서늘하게 훑어 내렸다.
로웬은 그녀가 요구한 위령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대신 허리춤에서 성수병이 아닌, 배급표를 묶는 데 쓰이는 질긴 노끈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의식은 나중에 하지. 지금은 이게 더 급해 보이는데.”
로웬이 성큼성큼 다가가 삐딱하게 세워진 침상의 바퀴를 발로 찼다. 잠금장치가 고장 나 제멋대로 구르고 있던 침상이었다. 그는 노끈을 능숙하게 꼬아 바퀴 축에 끼워 넣고,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휠을 고정했다. 끼익거리는 소음이 멈췄다. 이어 그는 통로를 막고 있던 침상들의 동선을 배급 창고의 물류 흐름에 맞춰 효율적으로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성자라는 분이 지금 무슨……!”
“침상이 삐뚤어져 있으면 다음 서류 뭉치를 들여올 때 병목 현상이 생깁니다. 이 구역 전체의 동선이 꼬여 있다는 뜻이죠. 기도문보다는 바퀴 잠금장치가 이들의 안식에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로웬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마리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사이, 모르그는 침상마다 놓인 서류 더미를 훑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시선은 서류에 적힌 배급 숫자와 침대 끝에 새겨진 기사단의 문장에 머물렀다.
“이상하군. 이 문장은 이미 멸문한 북부의 베른 가문 것이다. 그런데 배급표에 찍힌 식량 수치는 현역 기사단 오백 명 분이야. 종이 위의 숫자가 유령을 먹여 살리고 있었나 보군.”
이네스는 묵묵히 서류 뭉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붉은색 잉크로 ‘구조 완료’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네스는 잠시 그 단어를 응시하다가, 품 안에서 자신이 가져온 결재인을 꺼냈다.
쾅!
그녀는 ‘구조 완료’라는 글자 위에 가차 없이 새로운 낙인을 찍었다.
[미도착]
“이름은 이곳에 있는데, 사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완료가 아니라 미도착입니다.”
이네스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류 속에 갇힌 이름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비어있는 처지를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피핀은 평소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문 채, 가장 구석에 있는 빈 침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누군가가 두고 간 듯한 낡은 인형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가벼운 농담 대신, 인형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여긴 정말…… 웃음소리가 끼어들 틈이 없네.”
로웬은 마지막 침상의 위치를 고정하고 마리안 베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로웬의 비상식적인 ‘물리적 축복’에 할 말을 잃은 듯 보였지만, 동시에 질서 정연하게 정리된 병동의 풍경에 묘한 굴복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로웬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묵직한 쇳덩이 하나를 올려두었다. 침상 아래쪽, 서류 더미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것이었다.
“이게 이 모든 서류의 종착지겠지.”
마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성국 기사단 보급창고의 가장 깊은 곳을 열 수 있는, 비밀스러운 봉인이 새겨진 열쇠였다.
“이제 서류 놀이는 끝내고, 진짜 물건을 보러 가야겠어.”
로웬의 시선이 닫힌 보급창고의 방향을 향했다. 67화의 진실은 이제 침상을 벗어나 무기고로 향하고 있었다.
68화. 기사단 보급창고의 썩지 않는 빵
묵직한 철제 열쇠가 자물쇠 구멍 안에서 톱니바퀴를 짓씹으며 돌아갔다. 기름칠이 제대로 되지 않아 비명을 지르는 경첩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열리자, 코끝을 찌르는 것은 성스러운 향유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먼지와 말라붙은 밀가루,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시큼한 약품취가 뒤섞인 불쾌한 공기였다.
로웬이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마른 기침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창고 문을 가로막은 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일행을 훑어내렸다.
“멈추십시오. 이곳은 기사단의 승인 없이는 성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
남자는 로웬의 가슴팍에 달린 성자 대행의 표식을 빤히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잿불 성자 검수관의 직인, 혹은 그에 준하는 축복의 증명을 제시하십시오. 이곳의 물품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전공(戰功)에 따라 분류된 군수품입니다. 당신이 정말 ‘성자’라면, 이 안의 물건들에 깃든 부정함을 씻어낼 성물(聖物)의 기운을 먼저 보여주셔야 마땅하겠지요.”
로웬은 말없이 남자를 응시했다. 축복을 요구하는 남자의 태도는 공손했으나, 눈 속에는 명백한 시험과 조롱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로웬은 품 안에서 성서나 성물 대신, 조금 전 성당 관리인에게서 받아낸 장부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직인이나 축복 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행정적인 불일치를 확인하러 왔을 뿐이니까.”
그제야 남자가 등 뒤의 촛불 아래로 얼굴을 드러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7보급창 검수관, 오드란 케일이었다.
그는 마치 갓 베어낸 차가운 대리석처럼 창백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지니고 있었으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워진 은회색 제복 위로는 실밥 하나 튀어나오지 않은 기사단의 엄격한 규율이 서려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를 빈틈없이 감싼 가죽 장갑은 물건을 만질 때마다 가죽이 쓸리는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고, 그의 움직임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설계된 태엽 인형처럼 극도로 절제되어 기괴한 안정감을 주었다.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회색 눈동자는 상대의 감정을 읽기보다는 수치를 계산하는 계측기처럼 서늘하게 빛났으며, 입을 열 때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잘 연마된 금속판이 서로 맞닿아 긁히는 듯한 신경질적인 명징함을 담고 있었다. 로웬은 그가 빵 냄새보다 납 봉인 냄새에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상자 하나가 살짝 기울 때마다 오드란의 턱이 먼저 굳는 모습에서 이 창고가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오차를 숨기기 위한 관처럼 관리되어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행정적 불일치라니, 무례한 말씀이시군요. 제 장부에는 단 한 톨의 오차도 없습니다.”
오드란이 비켜서자 창고 안의 전경이 드러났다. 선반마다 가득 쌓인 것은 소문으로 돌던 성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급품이라는 이름 아래 방치된, 배송되지 못한 구호품들이었다.
이네스가 묵묵히 걸어가 가장 앞에 놓인 상자를 살폈다. 그녀는 상자 위에 찍힌 ‘전공 보급품’이라는 붉은 도장을 보더니,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온 검수용 인장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쾅, 쾅 소리가 고요한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세 번째 상자에 도장을 찍기 직전, 이네스는 단호한 손길로 기존의 문구를 지우고 그 위에 ‘미배달 구호품’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전공을 세운 기사들에게 갈 물건이 아니군요. 이건 3년 전 대기근 때 전방 마을로 갔어야 할 구호 밀가루입니다.”
모르그가 옆에서 거대한 보급 상자를 발로 툭 건드리며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거 봐라. 수량은 전공 훈장 지급표보다 두 배나 많은데, 정작 장부에는 반토막이 나 있군. 차익은 누가 챙겼을까? 훈장은 껍데기뿐이고, 알맹이는 여기서 썩어가고 있었네.”
“썩지 않았습니다.”
피핀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말투는 간데없었다. 그는 상자 하나를 열어 그 안에 든 딱딱한 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3년이 지났음에도 빵은 곰팡이 하나 없이 갓 구운 것처럼 매끄러운 표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냄새를 맡은 피핀의 미간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이건 빵이 아니야. 왕궁 식량고에서 나던 그 냄새랑 똑같아. 방부(防腐) 마법과 연금술 시약을 들이부어서 억지로 형체만 유지시킨 쓰레기지. 먹으면 배가 부른 게 아니라 내장이 타들어 갈 거야.”
피핀은 농담을 던지려다 말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과거 왕궁 깊숙한 곳에서 보았던, 썩지 않는 시체와 썩지 않는 식량들이 쌓여있던 지독한 기억이 눈동자 안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웬은 오드란이 내민 ‘성자의 검증’을 비웃듯, 바닥에 흩어진 배급표의 끈과 저울추를 집어 들었다.
“이 저울추, 밑바닥이 깎여 있군. 수령인의 이름과 상자 번호도 일치하지 않아. 죽은 병사의 이름을 빌려 보급품을 빼돌린 흔적이다. 오드란 케일, 당신이 관리한 장부는 완벽했을지 모르나, 이 물리적인 증거들은 당신의 무능 혹은 공모를 가리키고 있다.”
오드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웬은 그를 지나쳐 창고 가장 깊숙한 곳, 무너진 선반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낡은 서류 뭉치 하나가 보관함도 없이 처박혀 있었다.
로웬이 집어 든 것은 정식 보고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급하게 찢어 숨기려 한 듯한, 가장자리가 검게 그을린 종이 조각이었다.
그 조각에는 옥새의 일부와 함께 서슬 퍼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본령에 따라 왕궁 식량고의 영구 폐쇄를 명함. 누구든 내부의 ‘가공된 식량’에 손을 대는 자는...]
피핀의 시선이 그 종이 조각에 고정되었다. 소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비리 사건의 끝이 아니라, 피핀이 도망쳐온 그 지옥 같은 왕궁의 그림자가 다시금 그들을 덮쳐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