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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5화 합본. 증인 초상 경매에서 무덤 문장 회수 명령까지 일러스트

63-65화 합본. 증인 초상 경매에서 무덤 문장 회수 명령까지

63화. 증인 초상 경매

성자 심문장의 공기는 납이 녹아든 듯 무거웠다. 그 무게는 복도 끝 인쇄소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활자틀의 압착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상 위에 놓인 것은 피고인의 죄목이 아니라, 로웬의 곁을 지켰던 동료들의 얼굴이었다.

“다음 경매물은 ‘성자의 웃음을 가장 먼저 목격한 어린 증인’의 초상과 그 진술권입니다. 시작가 500길더.”

은으로 도금된 경매봉이 딱딱한 소리를 내며 책상을 두드렸다. 이름 없는 경매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핀의 얼굴이 그려진 액자를 들어 올렸다. 캔버스 속 피핀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성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웃음이 아니라, 공포에 질려 억지로 빚어낸 일그러진 근육의 흔적이었다.

피핀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지난 시장 거리에서 자신의 웃음이 상품처럼 팔려 나갔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의 소유물로 전락해 낙찰을 기다리는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로웬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로웬 씨, 저건… 내 얼굴인데. 왜 저 사람들이 가격을 매겨요?”

아이의 물음은 비명이 되어 로웬의 심장을 찔렀다. 엘드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로웬을 압박했다.

“부정할수록 값은 올라갈 거다, 로웬. 네가 성자가 아니라고 우길수록, 네 곁에 머물며 너를 증언하는 저들의 목소리는 ‘귀중한 반박 증거’가 되어 더 비싸게 팔릴 테니까. 동료들을 지키고 싶다면 네가 직접 그 가격을 지불하든가, 아니면 스스로를 인정해라.”

그때, 단상 아래에서 대기하던 관리인이 경매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니아브 콜 경매사님, 인쇄소 쪽에서 활자 대조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비로소 이름이 불린 경매사, 니아브 콜이 경매봉을 내려놓고 로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갓 짜낸 얼음물처럼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감색 연미복을 빈틈없이 차려입고 있었으며, 목깃 끝까지 채워진 단추는 타협을 모르는 그녀의 성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손목을 덮은 검은 장갑은 경매봉을 사람의 맥박처럼 정확한 간격으로 두드렸고, 로웬은 그 손놀림에서 산 사람의 얼굴도 장부 칸에 들어가면 곧장 물건이 된다는 차가운 습관을 보았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 위로 흐르는 금욕적인 눈매는 사물의 가치를 꿰뚫는 저울추처럼 정교하게 흔들렸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구두 굽 소리는 심문장의 소음마저 일정한 박자로 재단해 나갔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배어 나오는 목소리는 습기 없는 고서의 종이 질감처럼 건조했으나, 그 속에 담긴 위압감은 청중의 숨통을 조용히 장악하는 기묘한 감각을 선사했다.

니아브는 피핀의 초상화 옆에 놓인 명패들을 가리켰다. ‘성자의 증인들’. 그 위압적인 문구 아래 이네스와 모르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자, 다음은 이네스 폰 벨슈타인의 증언 원문권입니다. 성자의 기적을 옆에서 본 자의 목소리, 그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잠깐.”

이네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니아브의 손에 들린 명패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가문 소유의 원문 권리증을 대조하듯 치켜들었다.

“그 명패에 적힌 ‘증인’이라는 수식어와 내가 기록한 원문의 맥락은 전혀 다르다. 조작된 명패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명백한 도용이다. 니아브 콜, 당신이 공정한 경매사라면 원문 대조권부터 확인해야 할 텐데?”

모르그 역시 품 안에서 입찰 장부와 명패 보관함의 사본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수령인 불일치군요. 이 초상 액자와 명패들은 ‘성자의 추종자’들에게 인도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로웬은 성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고, 우리 역시 누군가의 추종자로 등록된 적이 없죠. 소유주가 불분명한 물건을 경매에 부치는 건 장부 조작입니다.”

엘드의 미소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그는 로웬이 감정에 휘둘려 성자임을 자백하거나, 거액을 들여 동료들의 권리를 사길 바랐다. 하지만 로웬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잿불 심부름꾼으로서 수없이 많은 짐을 배달하며 익힌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떠올렸다.

로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인쇄소의 소음을 뚫고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저는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꾼의 가방에는 주인 없는 짐을 넣지 않죠.”

니아브 콜의 시선이 로웬에게 고정되었다. 로웬은 그녀의 발치에 놓인 장부와 피핀의 초상화를 번갈아 보았다.

“수령인이 틀린 얼굴은 제 가방에 넣을 수 없습니다. 저 초상화와 명패에 적힌 ‘성자’라는 이름이 제 이름이 아니라면, 저 물건들은 배달 사고가 난 물건들입니다. 주소를 잘못 찾은 짐을 경매에 부치는 건,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남의 짐을 훔치는 행위 아닙니까?”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배달 비유를 빌린 로웬의 반박은 복잡한 신학적 논쟁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장내를 파고들었다. 이네스와 모르그가 제시한 장부 불일치와 원문 대조권의 허점이 로웬의 한마디로 인해 ‘배달 사고’라는 명확한 결함으로 규정되었다.

니아브 콜은 로웬을 빤히 바라보다가 경매봉을 거두었다.

“장부의 수령인 정보와 현장의 실제 수취인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군. 이 물건들은 유급 보관함으로 회수하겠다. 소유주 확인이 끝날 때까지 경매는 중단한다.”

엘드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비릿하게 웃으며 인쇄소 쪽 복도를 가리켰다.

“경매는 멈출 수 있겠지. 하지만 로웬, 활자는 이미 새겨졌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서 덜컹거리는 기계음이 고조되었다.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인쇄소의 좁은 투입구를 통해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아 검게 번진 그 교정지 상단에는, 방금 전 로웬이 내뱉은 부정의 말들이 활자가 되어 박혀 있었다.

[부정하는 성자의 첫 번째 고백 — 로웬은 성자가 아님을 증명하다]

그것은 로웬이 스스로를 부정할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역설의 기록물이었다. 64화의 서막을 알리는 인쇄본의 첫 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64화. 부정하는 성자의 첫 인쇄본

납 활자가 부딪히는 소리는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잉크의 역한 기름 냄새가 폐부를 찌르는 교회의 인쇄소 내부, 거대한 기계들이 톱니바퀴를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음 사이로 수만 장의 종이가 백색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그 파도의 중심에서 한 남자가 활자틀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문장들이 한 사내의 인생을 어떻게 뒤틀어버릴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오직 납덩이의 수평을 맞추는 데만 열중했다.

“여기 있었군.”

로웬의 목소리는 기계 소음에 묻힐 듯 낮았으나, 그 내용물만큼은 묵직하게 인쇄소 바닥을 눌렀다. 그의 시선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교정지 상단에 박힌 거대한 글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부정하는 성자의 복음 - 제1장: 나는 성자가 아니다』

자신이 경매장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성소에서 내뱉었던 처절한 부정의 말들이 역설적이게도 성스러운 구절이 되어 활자로 박혀 있었다. 로웬이 부정하면 할수록 그것은 성자의 겸손으로 포장되어 대량 복제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잠깐 멈추게.”

로웬이 손을 뻗어 돌아가는 잉크 롤러의 축을 잡으려 하자, 활자틀을 만지던 남자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로웬의 옷차림이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작업을 방해한 무례한 손길에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성자의 겸손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이 문장은 인류가 맞이할 가장 위대한 역설입니다. 본인이 직접 쓴 반박문이 원문이니, 이보다 확실한 성경의 근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쓴 건 복음이 아니라, 당신들의 망상에 던지는 유서 같은 것이다.”

“그 유서가 세상을 구원한다면 그것이 곧 복음이지요.”

남자는 차갑게 대꾸하며 다시 활자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그때, 뒤편에서 숨 가쁘게 달려온 젊은 견습생이 소리쳤다.

“마일로 페렌 인쇄장님! 경매장에서 보낸 교정지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제야 남자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완전히 들었다. 마일로 페렌. 인쇄소의 모든 공정을 책임지는 그 사내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마일로 페렌은 잉크 얼룩이 훈장처럼 박힌 잿빛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마른 체구는 마치 낡은 인쇄기 부품처럼 위태로우면서도 정교한 긴장감을 풍겼다. 길게 뻗은 손가락 끝은 납독에 절어 검푸른 빛을 띠었으나 그 움직임만은 시계추보다 정확했고,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오직 오탈자만을 잡아내는 서늘한 탐침과도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잘 연마된 금속판이 긁히는 듯 건조하면서도 기묘한 권위를 담고 있었으며,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흐르는 땀방울조차 그가 집착하는 활자들의 간격만큼이나 규칙적으로 턱 끝에 맺혔다. 그는 자신 앞에 선 로웬을 투명한 유령 취급하며 오직 손에 든 장부와 대조하는 데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네스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품 안에서 공식 문서를 꺼내 들었다.

“교구 규칙 제4조 12항에 의거, 원문 대조권과 교정권을 요구합니다. 이 인쇄본의 원문은 성하의 자필 반박문이나, 현재 인쇄 중인 판본은 문맥의 악의적 편집이 의심됩니다.”

“편집은 교회의 권한입니다, 수녀님.”

마일로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 옆에서 모르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장부를 낚아챘다.

“권한 이전에 절차부터 따져야겠지. 이 교정지를 수령한 사람의 서명은 교구청 서기인데, 원문을 보관하고 인도한 자는 경매장의 대리인으로 되어 있군. 그런데 정작 이 활자틀을 최종 승인한 건 인쇄소장, 당신 이름이야. 수령인과 인도자, 승인자의 이름이 삼각으로 어긋나는데? 이건 행정상 명백한 위조 혹은 도용이다.”

그 와중에 피핀이 비명을 지르며 잉크 롤러 앞을 가로막았다. 롤러 사이로 들어가려던 종이에는 과거 피핀이 로웬 옆에서 해맑게 웃던 삽화가 성스러운 어린 양의 미소로 변질되어 찍혀 있었다.

“안 돼! 내 얼굴이 왜 여기 있어! 이거 지워! 당장 멈추라고!”

피핀이 젖은 잉크 통을 붙잡고 버티자 마일로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혼란스러운 현장을 지켜보던 엘드가 로웬의 곁으로 다가가 낮게 읊조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웬? 이 인쇄기를 당신의 힘으로 부수면 세상은 ‘폭력적인 성자’의 강림이라 떠들 것이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당신은 영원히 ‘자신을 부정하는 성자’라는 틀 속에 박제되겠지요. 어느 쪽이든 당신의 본래 의도와는 멀어지는 선택입니다. 비용이 꽤 비싸군요.”

마일로는 엘드의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기계를 가동하려 레버에 손을 올렸다. 그는 로웬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성자여, 당신의 말이 종이 위에 안착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것입니다.”

로웬이 마일로의 손목을 잡았다. 거친 근력이 아니라, 아주 차분하고 서늘한 힘이었다. 로웬은 인쇄기 위에 놓인 자신의 반박문 원본을 내려다보았다.

“내 말은 아직 배달 중인 심부름입니다.”

로웬의 목소리가 소음 가득한 인쇄소를 잠재웠다.

“심부름꾼이 보낸 편지는 수취인에게 정확히 전달되기 전까지는 그저 종이 뭉치에 불과하지. 당신들이 제멋대로 뜯어보고 내용을 고쳐 쓴다고 해서, 그게 배달 완료된 진실이 되는 건 아니란 뜻이야. 장부의 불일치는 이 심부름이 배달 사고가 났다는 증거고.”

로웬은 모르그가 지적한 장부를 마일로의 가슴팍에 밀어 넣었다.

“배달 사고가 난 물건은 회수하는 게 심부름꾼의 규칙이다. 인쇄를 멈춰. 이건 성자의 복음이 아니라, 주소지를 잘못 찾은 오보일 뿐이니까.”

마일로 페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논리가 아니라 행정적 결함과 ‘배달’이라는 기묘한 비유 앞에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타 모르그와 이네스가 승인되지 않은 활자틀을 강제로 고정시켰다. 톱니바퀴가 쇳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하지만 소동의 와중에, 이미 인쇄되어 건조대에 걸려 있던 교정지 몇 장이 열린 창문 너머로 불어온 바람에 휘날렸다. 잉크가 덜 마른 종이들은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인쇄소 밖, 성하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군중들 사이로 떨어졌다.

‘나는 성자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뒷부분이 찢겨 나간 채, ‘나는 성자다’라는 단어만 선명하게 박힌 종이 한 장이 어느 행인의 발치에 떨어졌다. 로웬은 멈춘 기계를 뒤로하고 밖으로 향했지만, 담장 너머로 번지기 시작한 작은 속삭임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것은 훗날 닥쳐올 거대한 균열의 불씨였다.

65화. 무덤 문장 회수 명령

축축하게 젖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이네스 기사단 무덤 입구, 비릿한 습기를 머금은 나무 공고판 위에는 잉크 향이 채 가시지 않은 교정지 한 장이 못 박혀 있었다. 전날 인쇄소의 소란 속에서 기어이 흘러나온 오염된 문장이었다.

[성자의 증인 이네스와 순교 기사단]

그 문구 아래로 수많은 이름이 지워지고 있었다.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각자의 삶을 살다 스러져간 이들의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성자의 증인’이라는 거대한 수식어 아래 부속품처럼 묶여버린 명단이 공고판을 가득 채웠다.

그 옆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잿빛 서기복을 입은 그녀는 무덤 원장을 펼쳐놓고 무언가를 바쁘게 옮겨 적고 있었다. 깃펜이 사각거릴 때마다 누군가의 생애가 ‘성자의 증인록’이라는 새 장부 속으로 편입되었다. 그녀는 곁에 선 이네스의 기척을 느끼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름을 지우고 있군요.”

이네스의 낮은 목소리에 서기가 비로소 깃펜을 멈추었다. 그때 뒤편에서 헐떡이며 달려온 묘지 관리인이 그녀를 불렀다.

“서기 세라스 벨! 이쪽 명단도 확인해야 하네!”

그제야 세라스 벨이라는 이름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묘지의 그늘 아래 선 세라스 벨은 마치 갓 짜낸 무채색의 캔버스 같았다.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을 듯 빳빳하게 풀을 먹인 서기복 소매 끝에는 검은 잉크가 문신처럼 깊게 배어 있었고, 마디가 불거진 그녀의 손가락은 수만 번의 기록을 증명하듯 미세하게 떨리면서도 깃펜을 쥔 순간만큼은 서늘한 정지 상태를 유지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 위로 비치는 푸른 혈관은 그녀가 산 사람임을 겨우 알렸으나, 감정의 동요를 박탈당한 듯한 무기질적인 눈동자는 오직 장부의 행간만을 쫓는 기계적인 냉정함을 머금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습기 머금은 종이가 쓸리는 소리처럼 건조했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몸 주변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차가운 인쇄용 기름 향이 뒤섞여 기이한 압박감을 만들어냈다.

“지우는 것이 아니라 정돈하는 것입니다. 성자의 기적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산발적인 이름보다 통일된 직함이 효율적이니까요.”

세라스 벨의 대답은 무심했다. 그 말에 이네스는 대꾸하는 대신 옆에 놓인 석재 수리공의 가방에서 조각칼을 집어 들었다.

끼이익, 긁히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이네스는 공고판에 붙은 교정지 위, ‘성자의 증인 이네스’라는 문구를 거칠게 긁어내기 시작했다. 종이가 찢어지고 나무판이 패였지만 그녀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분노를 터뜨리는 고함보다 더 서늘한 칼질이었다.

“이네스, 이것 좀 봐.”

모르그가 발치에 놓인 무덤 원장과 피난민 명단함을 번갈아 살피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연대표가 그려진 수첩이 들려 있었다.

“인쇄소에서 나온 교정지의 문장과 이 무덤 원장, 그리고 저기 쌓인 피난민 명단의 날짜가 맞지 않아.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사단원들의 전사 날짜를 성자의 현신 시기에 맞춰 뒤로 밀어버렸어. 죽음의 기록조차 교정되고 있다는 뜻이지.”

피핀이 곁에서 마른세수를 하며 신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근처에서 기도를 올리던 순례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성자의 자취를 마주한 아이의 기쁨”이라며 수군거렸다.

“기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피핀의 눈에 서린 것은 노골적인 혐오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행동이 ‘성자의 기적’으로 해석되는 상황이 그녀를 질식케 했다.

엘드가 이네스의 칼질을 지켜보다 차갑게 덧붙였다.

“네 믿음이 독이 된 거야, 이네스. 네가 성자를 향해 세운 그 견고한 믿음이, 역설적이게도 네 친구들의 진짜 죽음을 덮어버리는 가장 두꺼운 천이 되어버렸지. 저 서기의 깃펜은 네가 준 확신으로 움직이는 거다.”

이네스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조각칼이 나무판 깊숙이 박혔다.

그때,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로웬이었다. 그는 세라스 벨이 들고 있던 ‘성자의 증인록’을 덮어버리며 서늘하게 명했다.

“증인은 산 사람을 세우는 말이지, 죽은 사람의 이름 위에 덮는 천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반송하십시오. 서기 세라스 벨, 당신이 기록해야 할 것은 교회서가 정한 직함이 아니라 이 땅에 발을 붙였던 자들의 흔적입니다.”

이네스는 긁어낸 공고판의 빈자리 위로, 모르그가 찾아낸 피난민 명단함의 첫 장을 붙였다. 세라스 벨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가늘게 떨렸다.

이네스의 손 밑으로, 오염된 문장에 가려져 있던 진짜 이름이 서서히 드러났다.

피난민 명단의 가장 첫 줄, 기사단 무덤에 가장 먼저 도착했어야 할 그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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