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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329화 합본. 회수 불능 직인의 빈 자리에서 수취인을 고르지 않은 자까지 일러스트

328-329화 합본. 회수 불능 직인의 빈 자리에서 수취인을 고르지 않은 자까지

328화. 회수 불능 직인의 빈 자리

최초 보관자의 직인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보관소 바닥, 차가운 석재 위로 짙은 인주 자국이 번져 나갔다. 마치 마르지 않는 피가 스며드는 것처럼, 붉고 검은 흔적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바닥의 결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회수 불능.

그 네 글자가 허공에 명멸할 때마다 보관소 내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만 개의 보관함이 일제히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천장에 매달린 도르래들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회전하며 금속성 마찰음을 내뱉었다. 시스템의 경고음은 들리지 않았으나,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압박감이 로웬의 어깨를 짓눌렀다.

[ 최초 보관자 권한 공백 감지. ]

[ 회수 대리인 임시 위임을 제안합니다. ]

로웬의 시야 앞에 반투명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평소보다 더 선명하고, 더 집요하게 명멸하는 문장이었다. 그 제안이 나타남과 동시에 바닥에 번지던 인주 자국이 로웬의 발끝을 향해 구불구불 기어 왔다. 마치 주인을 잃은 그림자가 새로운 숙주를 찾는 듯한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로웬, 건드리지 마세요!”

이네스가 다급하게 외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보관소의 마력 흐름을 쫓으며 가늘게 떨렸다. 이네스는 바닥에 번진 인주 자국과 로웬의 발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긋듯 지팡이를 내밀었다.

“저건 단순한 권한이 아니에요. 수락하는 순간, 최초 보관자가 남긴 그 거대한 ‘공백’이 로웬에게 전이될 거예요. 계약서의 빈 칸을 당신의 영혼으로 채워 넣겠다는 뜻이라고요.”

이네스의 경고는 지극히 타당했다. 시스템이 제안하는 위임은 배려가 아니라 고육책이었다. 관리자가 사라진 시스템이 붕괴를 막기 위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합한 객체를 붙잡아 구멍 난 부품 대신 끼워 넣으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그때, 피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허공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은 천장에서 비처럼 쏟아지다 멈춰버린 반송 종이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상해요. 소리가 거꾸로 들려요.”

피핀이 손을 뻗어 근처를 부유하던 종이 한 장을 낚아챘다. 종이는 기묘하게 접혀 있었다. 보통의 접지 방식과는 반대로, 안쪽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모서리가 비틀린 형태였다. 피핀은 그 종이를 귀에 대고 눈을 감았다.

“종이들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아요. 아니, 나간 적이 없어요. 회수 경로가 시작되기도 전에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고 있어요. 로웬 씨, 이건 밖에서 거절당한 게 아니에요. 애초에 나가는 문이 잠겨 있었던 거예요.”

피핀의 감각은 정확했다. 회수 경로가 외부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 보관소 내부에서 무언가 경로를 왜곡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주변의 보관함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육중한 나무 궤짝들과 강철 보관함들이 로웬의 주변으로 서서히 거리를 좁혀 왔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로웬의 그림자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베라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녀는 로웬의 그림자 위로 드리워지는 보관함들의 기괴한 압박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 물건들이 네 그림자를 탐내고 있군. 직인 틀이 사라지니, 살아있는 놈의 그림자를 깎아서 도장을 새로 팔 생각인가 본데.”

베라의 말대로였다. 보관소의 시스템은 ‘회수 불능’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로웬을 새로운 직인으로 주조하려 들고 있었다. 권한 위임을 수락하면 그의 존재는 이 거대한 서고의 부속품으로 전락할 터였다.

로웬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인주 자국과 일렁이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차분하게 응시했다. 그는 이 상황을 운명적인 각성이나 정체의 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배송 전문가로서, 이 말도 안 되는 배송 사고를 처리해야 하는 작업자의 관점으로 접근했다.

“위임은 거절한다.”

로웬의 목소리가 서고의 진동을 뚫고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하지. 보관소 관리 규정에 따라, 미회수 물품의 ‘회수 처리 경로’와 ‘반송 사유 코드’를 열람하겠다.”

시스템이 잠시 멈칫했다. 예상치 못한 접근법이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그에게 권력을 제안했으나, 로웬은 절차를 요구했다. 주인이 되어 이 혼란을 수습하라는 유혹 대신,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겠다는 업무 보고 형식을 취한 것이다.

바닥에 번지던 인주 자국이 부르르 떨렸다. 로웬의 발치를 적시려던 붉은 액체들이 뒤로 물러나며, 새로운 기하학적 지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회수 경로의 시각화였다. 본래라면 성자의 길이나 신성한 제단으로 이어져야 할 빛의 경로가 보관소 바닥 위에서 굴절되고 있었다. 이네스와 피핀은 그 경로의 끝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경로는 위로 향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관소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밑바닥, 가치가 소멸한 것들이 모이는 ‘폐기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성자에게 전달되어야 할 물품이 쓰레기 처리장으로 직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수 경로가 오염됐어. 누군가 수취 주소를 폐기장으로 바꿔치기한 거야.”

베라의 말에 로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단순한 시스템 오류가 아니라, 명백한 배송 방해 행위였다. 누군가 최초 보관자의 직인을 무력화하고, 회수되어야 할 보관물들을 영구히 폐기하려 한 흔적이었다.

로웬은 폐기장으로 이어지는 붉은 선의 끝을 밟았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시스템 창이 기괴한 소음과 함께 뒤틀리더니, 마침내 최종적인 사고 보고서를 출력해 냈다.

보관소 전체가 침묵에 잠겼다. 피핀이 들고 있던 거꾸로 접힌 종이가 바스라져 가루가 되었다. 바닥의 인주 자국이 차갑게 식어가는 가운데, 로웬의 눈앞에 나타난 코드는 이 배송 사고의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 반송 사유 코드: 수취인이 아직 선택되지 않음 ]

329화. 수취인을 고르지 않은 자

검은 종이는 물을 한껏 머금은 천 조각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가장자리에서는 잉크가 밑으로 흐르지 않았다. 대신 종이 위에 새겨진 낱낱의 글자가 얇은 문틀처럼 벌어졌고, 문장이 품은 심연이 깊은 복도처럼 안쪽을 드러냈다. 종이의 질감은 식어버린 피부처럼 서늘했으며, 그 위로 흐르는 공기는 성무청 지하 분류실의 습기를 빨아들여 비정상적으로 무거워졌다.

[ 반송 사유 코드: 수취인이 아직 선택되지 않음 ]

마지막 문장이 종이의 표면 아래로 가라앉은 순간, 성무청 지하 우편 분류실을 채운 수백 개의 벽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낡은 석조 벽면 사이로 흐르는 냉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로웬은 서류함 위에 얹은 손을 떼지 않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오래된 나무가 아주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것은 단순한 떨림이 아니라, 거대한 기계 장치가 작동을 멈추기 직전에 내뱉는 마지막 마찰음과 같았다. 낡은 분류함 안쪽, 수천 명의 이름표가 꽂혀 있어야 할 칸들이 텅 빈 입처럼 일제히 열렸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수백 개의 수취인 칸이 차례로 열린 소리가 파도처럼 이어졌다.

딱.

딱.

딱.

그것은 관의 뚜껑이 닫힌 소리였고, 동시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바닥을 두드린 소리였다. 분류실 내부의 먼지는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천장 쪽으로 천천히 부유했다. 공기 중에는 젖은 종이의 텁텁한 냄새와 더불어, 아주 오래전 방치된 성유 찌꺼기의 달큼하면서도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로웬의 혀끝에 서늘한 쇠맛이 번졌다.

피핀은 로웬의 등 뒤에서 두 손으로 귀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소리는 고막을 타고 들어온 진동이 아니었다. 종이의 내면에서, 이름이 쓰여야 할 자리가 지워질 때 발생한 기괴한 파열음이 그녀의 정신을 직접 긁어내렸다.

“이상해요.”

소녀의 목소리가 바늘처럼 가늘게 떨렸다.

“펜이 종이를 긁으며 기록한 소리가 아니에요. 지우개가 살아 있는 살점을 긁어낸 소리예요. 저 안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베라는 짧게 혀를 찼다. 지팡이 끝에 매달린 마른 방울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지만, 분류실 바닥에 쌓인 먼지는 거센 돌풍을 맞은 것처럼 한 방향으로 쏠려 나갔다. 텅 빈 수취인 칸들이 일제히 로웬을 응시했다. 칸마다 이름표는 부재했다. 하지만 비어 있다는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어둠 속에는 누군가가 몸을 웅크린 채, 본인의 이름을 불러줄 이를 굶주린 짐승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이네스가 검은 장부를 펼쳤다. 촛불조차 존재하지 않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장부의 모서리가 핏빛으로 번뜩였다. 그녀는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장부의 최상단을 짚었다. 그러자 장부의 종이가 손가락을 피해 스스로 접혔다가, 억지로 펼쳐진 짐승의 귀처럼 파르르 경련했다.

“절차적 제안이 수신됩니다.”

“제안이라니요?” 로웬이 물었다.

“행정상 구제책입니다. 현재 이름이 소실된 반송물의 수취인을 임시로 지정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로웬의 눈앞, 허공의 대기가 일그러지며 차가운 금속판 같은 문장이 형상화되었다.

[ 임시 수취인 지정권을 행사하시겠습니까? ]

[ 지정된 대상은 본 반송물의 수취인 후보로 우선 등록됩니다. ]

[ 예 / 아니오 ]

피핀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가 벽에 닿기도 전에, 가장 가까운 빈 수취인 칸 한 개가 안쪽에서 기괴하게 확장되었다. 칸 속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이름 첫 획이 선명한 백색으로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로.

그다음 획이 이어지려던 찰나, 베라의 지팡이가 공중을 강렬하게 휘저었다.

쨍!

보이지 않는 유리가 박살 난 듯한 파편음이 분류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로웬의 발밑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반쯤 들려 올라갔다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석에 끌리듯 다시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림자의 끝부분은 이미 형태가 짓뭉개진 채, 가장 가까운 빈 수취인 칸 쪽으로 가늘고 길게 늘어져 있었다. 베라는 지팡이 끝으로 그 그림자의 말단을 짓밟듯 꾹 눌러 고정했다.

“정신 차려. 발목에 힘을 주지 않으면 네 그림자가 저 구멍 속으로 먼저 기어들어 갈 테니까.”

“그림자가 육신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곳은 성무청의 지하다. 지금은 그림자조차 제 말을 듣지 않는 공간이야. 더 이상 어리석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로웬은 발을 조금 벌려 무게 중심을 잡았다. 분류실 바닥의 차가운 돌 틈이 장화 밑창을 타고 뼛속까지 전해졌다. 그림자는 여전히 경련하며 빈 칸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베라의 지팡이가 내뿜은 압력 아래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이네스가 장부를 응시하며 긴박하게 말을 이었다.

“이 지정권은 구제책으로 위장된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행정 처리상 ‘선택권 확정 계약’으로 분류될 수 있어요.”

“선택권 확정 계약이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합니까?”

“누군가를 수취인 후보로 등재하는 순간, 그 존재는 반송물의 종착지로 확정됩니다. 반송물은 본인의 목적지를 찾았다고 판단할 것이고, 그 대상에 맞춰 과거의 모든 기록을 재편하려 들겠죠.”

피핀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물었다.

“재편한다는 것이, 존재의 흔적을 지운다는 뜻인가요?”

이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장부 위에 번진 붉은 얼룩이 대답보다 선명하게 위험을 알렸다.

로웬은 허공에 떠 있는 금속판을 주시했다. 예와 아니오. 단 두 가지의 길만을 제시하는 형식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성무청에서 경험한 모든 일 중, 이토록 친절하게 선택을 강요하는 절차는 예외 없이 파멸을 동반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 선택을 촉구하는 문장은 더욱 밝게 점멸하며 다가왔다.

[ 선택 지연은 자동 거부로 처리될 수 있습니다. ]

[ 자동 거부 시 미선택 상태는 보존되지 않습니다. ]

“자동 거부와 ‘아니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로웬이 이네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네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다릅니다. ‘아니오’는 권한의 행사를 명시적으로 거부했다는 기록입니다. 반면 자동 거부는 응답 불능 상태로 인한 기록의 소실을 의미합니다. 양자 모두 수취인 미지정이라는 결과를 도출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증거의 보존 여부가 달라집니다.”

“미선택 상태는 어떻게 됩니까?”

“소멸합니다. 선택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록에서 배제됩니다.”

그 순간 로웬은 빈칸들로부터 전해진 시선을 더욱 선명하게 느꼈다. 그들은 이름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 그 자체를 원했다. 누가 선택을 수행했는지, 누가 거절했는지, 누가 침묵했는지를 기록하여 그 인과관계 속에 대상을 묶어두려 했다. 빈칸은 비어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지를 삼키기 위해 벌려진 구멍이었다.

로웬은 차갑게 식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다면 본인은 ‘예’도 ‘아니오’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금속판의 가장자리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진동했다.

[ 유효하지 않은 입력입니다. 정해진 절차를 준수하십시오. ]

“입력 자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지정된 양식에 본인의 의지를 맞추지 않겠습니다.”

[ 선택 절차는 반드시 종결되어야 합니다. 수취인을 지정하십시오. ]

“지정하지 않습니다. 이 선택 자체를 거부합니다. 또한 이 절차를 강제로 종료하지도 않겠습니다.”

피핀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로웬의 소매 끝동을 붙잡았다. 소녀의 손끝은 동상에 걸린 것처럼 차가웠다.

“로웬 씨, 그런 식으로 대응해도 괜찮은 건가요? 성무청의 법칙이 노할 것 같아요.”

“아마 매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시는 거예요?”

“정해진 길 중에 안전한 것이 단 한 개도 없다면, 절차의 모순을 찔러서라도 새로운 틈을 벌려야 하니까요.”

베라가 입가를 뒤틀며 거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성무청의 생리를 이해하기 시작했군. 규칙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그 규정의 모서리를 물어뜯어 파괴하는 법을 말이야.”

로웬은 금속판의 최하단을 면밀히 살폈다. 예와 아니오라는 커다란 문구 아래, 실금처럼 가느다란 줄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초기에는 단순한 장식적 요소로 보였지만, 분류실을 떠도는 미세한 먼지들이 그 선 위에서만은 움직임을 멈추고 비껴갔다. 마치 그곳에도 보이지 않는 문장이 존재하지만, 아직 발현되지 않았다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네스.”

“네, 말씀하십시오.”

“성무청의 규정 중에, 어떠한 선택도 내리지 않은 상태 그 자체를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양식이 존재합니까?”

이네스가 숨을 멈췄다. 그녀의 품에 안긴 검은 장부가 비명을 지르듯 거칠게 펄럭였다.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인출되지 않습니다. 선택권자가 권한을 남용하거나 감찰 대상이 되었을 때, 오직 상태를 고정하기 위해서만 열리는 극비 보존 양식입니다.”

“그 양식의 정식 명칭은 무엇입니까?”

“미선택 상태 보존 증거 사본.”

그 문장이 로웬의 입술을 통해 분류실의 공기 속으로 흩어진 순간, 금속판 아래의 가느다란 실금이 유리 깨진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 미선택 상태 보존 증거 사본을 발급하시겠습니까? ]

[ 발급 시 현재의 선택 절차는 무기한 보류됩니다. ]

[ 보류 절차에 따라 반송 경로 봉인 기록의 열람 권한이 일시 부여됩니다. ]

분류실 벽면을 가득 채운 수취인 칸들이 일제히 닫혔다. 그러나 그것은 안도에 의한 폐쇄가 아니었다. 굶주린 맹수의 이빨이 먹잇감을 놓친 분노를 담아 한꺼번에 맞물린 소리였다.

피핀이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읊조렸다.

“방금은... 저 구멍들이 화를 낸 것 같아요. 원하던 제물을 얻지 못해서.”

“정확한 판단입니다.” 로웬이 답했다. “그들은 확답을 원했지, 이런 법적 보류를 원한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베라가 고정하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로웬의 그림자는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채 한동안 형상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림자의 끝부분에는 검은 종이 조각 같은 잔상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이름표도 아니고 봉인도 아니었다. 어떤 선택도 하지 않았다는 차가운 사실만을 얇게 도려낸, 존재하지 않는 증거의 파편이었다.

로웬은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예와 아니오가 적힌 중앙이 아니라, 방금 표출된 ‘보존 증거 사본’ 문구의 모서리였다. 손끝이 허공의 문장에 닿은 순간, 얼음장 같은 물속에 팔을 깊숙이 집어넣은 듯한 감각이 손목을 타고 어깨까지 치올랐다.

분류실 바닥에 거대한 원형 도장이 마력의 빛을 내뿜으며 전개되었다.

[ 미선택 상태 보존 증거 사본: 발급 완료 ]

[ 임시 수취인 지정권: 미행사 상태로 고정 ]

[ 선택 절차: 행정 보류 ]

이네스가 장부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아니, 장부가 이네스의 손을 강제로 이끌며 스스로의 페이지에 기록을 새겼다. 글자는 잉크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유해의 재를 짓이겨 만든 듯한 회색빛으로 기록되었다.

“반송 경로 봉인 기록이 열립니다.”

분류실 가장 안쪽의 견고한 벽이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천천히 갈라졌다. 그 너머에는 통상적인 복도나 방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수만 장의 검은 우편 봉투가 층층이 사슬에 묶인 채 매달려 있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우물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봉투마다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고, 수취인의 이름 또한 공백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봉투의 입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기울어졌다.

그것들은 모두 로웬을 지향하고 있었다.

피핀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신체는 떨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 수많은 봉투들이... 전부 로웬 씨를 바라보고 있어요.”

“주소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도 말입니까.”

“주소가 없기 때문에 더욱 집요하게 찾고 있는 거예요. 들어갈 자리를 찾지 못한 유령들처럼요.”

베라가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수취인을 고르지 않은 자. 그 기묘한 상태 덕분에 길이 열린 것이다. 선택을 마친 자는 이미 목적지가 되어 소모되고, 거부한 자는 문밖으로 축출되지만, 고르지 않은 채 상태를 보존한 자만이 반송 경로의 가장 깊은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법이지.”

이네스의 장부가 마지막 페이지를 격렬하게 토해냈다. 장부의 마지막 줄에는 피처럼 붉은 글씨가 서서히 떠올랐다.

[ 봉인 기록 열람 조건: 수취인을 고르지 않은 자만 통과 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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