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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331화 합본. 무명 통행증의 이름 칸에서 원본 수취인 칸의 공란까지 일러스트

330-331화 합본. 무명 통행증의 이름 칸에서 원본 수취인 칸의 공란까지

330화. 무명 통행증의 이름 칸

봉인 기록 열람 통로의 문턱을 넘어서자, 발끝에 닿는 감각이 기이하게 변했다. 견고한 석재 바닥이나 차가운 금속판의 촉감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장의 종이가 겹겹이 쌓여 거대한 무덤을 이룬 위를 걷는 듯한 서걱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등까지 차오르는 백색의 서식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공중에서는 빛이 바랜 종이 조각들이 함박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일정한 규격으로 재단되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정보가 소거된 백색의 서식들이었다. 사방으로 깔린 통행증들은 일행의 발치에서 기분 나쁜 바스락거림을 내며 소용돌이쳤다. 로웬은 걸음을 멈추고 발밑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잉크의 흔적조차 없는 매끄러운 표면 위로, 오직 한 군데에만 굵고 진한 테두리가 쳐진 빈칸이 존재했다.

[ 수취인: ____________ ]

그 빈칸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기묘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그 안에 채워질 이름을 갈구하는 듯한 압박감이 통로 전체에 번졌다. 그 칸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의 일부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시스템의 음성이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접했던 기계적인 안내음과는 성질이 달랐다. 조금 더 부드럽고, 과도할 정도로 친절하며, 그래서 더욱 기만적인 음색이었다.

‘무명 통행증의 이름 칸을 채워 주십시오. 수취인의 이름을 기입하는 즉시, 봉인 기록 열람이 허가됩니다. 선택된 그 이름이 이 기록의 정당한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 소리와 동시에 로웬의 손앞으로 깃펜 한 자루가 허공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펜촉에는 갓 찍어낸 듯한 검은 잉크가 맺혀 영롱하게 빛났다. 이름을 적기만 하면 모든 비밀이 풀릴 것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깃펜은 마치 로웬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려는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로웬.”

등 뒤에서 이네스의 날카로운 제지가 들렸다. 이네스는 로웬의 곁으로 다가와 바닥에 깔린 통행증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었다. 이네스의 눈동자 속에서는 마력의 잔영이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며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이네스는 허공에 떠오른 깃펜의 잉크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마력의 파장을 포착했다.

“저건 단순한 통행 절차가 아닙니다.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계약의 함정이에요. ‘수취인을 고르지 않은 자’만이 이곳을 통과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던 이유가 비로소 명확해지는군요.”

로웬은 깃펜을 잡지 않은 채 이네스를 응시했다. 이네스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라, 술식의 비열한 의도를 읽어낸 마법사로서의 격한 전율이었다. 이네스는 지팡이를 꽉 쥐며 말을 이었다.

“이름을 기입하는 행위 자체가 ‘수취인 지정’이자 ‘선택권 확정’으로 간주될 겁니다. 지금 저 빈칸에 이름을 적는 순간, 봉인 기록은 열리겠지만 당신은 이 배송 사고의 수습자가 아니라 계약의 당사자로 묶이게 돼요. 선택권을 행사해버린 자는 더 이상 중립적인 대리인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기록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고, 그에 따른 대가까지 치러야 한다는 뜻이죠.”

이네스의 경고는 타당했다. 이 통로는 수취인을 고르지 않은 자에게만 문을 열어주었지만, 정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름을 적으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이는 자격을 시험하는 장치인 동시에, 그 자격을 영구히 박탈하기 위해 준비된 덫이었다.

그때, 피핀이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피핀의 얼굴은 핏기가 가신 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소리가 들려요. 너무 기분 나쁜 소리가.”

“피핀? 어떤 소리인지 말해줄 수 있겠어?”

베라가 피핀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지만, 피핀은 고개를 저으며 통로 저편의 짙은 어둠을 가리켰다. 피핀의 예민한 감각은 시스템이 제공하는 시각적 환상 너머를 꿰뚫고 있었다.

“봉인이 풀리는 소리가 아니에요. 저건…… 문이 닫히는 소리예요. 아주 무거운 철문이 덜컹거리며 잠기고, 쓸모없어진 것들을 한데 모아 태워버리러 가는 소리. 이건 통행증이 아니라 폐기장으로 이끄는 안내장 같아요. 저 소리 끝에는 거대한 소각로의 불길이 느껴져요.”

피핀의 말에 로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폐기장. 배송 물품이 주인을 찾지 못하거나, 배송 절차가 완전히 망가졌을 때 최후로 향하는 장소. 만약 이곳이 봉인 기록의 보관소가 아니라 ‘반송 불능 물품의 소각로’라면 사태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름을 적는 행위는 기록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기록이 세상 밖으로 다시는 나가지 못하도록 종결짓는 최후의 낙인이 될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바닥에 깔려 있던 무수한 통행증들이 갑자기 파르르 떨리더니, 로웬의 발치에서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백색의 종이들은 로웬의 발치에 머물던 그림자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마치 그림자 속에 숨겨진 실체라도 끄집어내어 이름 칸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듯한 형국이었다. 종이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로웬의 소매를 스치며 섬뜩한 마찰음을 냈다. 서걱거리는 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운 금속음처럼 변하여 고막을 긁어댔다.

“물러나세요!”

베라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휘둘렀다. 화려한 초식이나 검기는 없었으나, 묵직한 검신이 허공을 가르자 로웬의 그림자를 옥죄려던 종이들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찢겨 나갔다. 베라는 로웬의 앞을 철벽처럼 가로막으며 검 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묵직한 충격파가 번지자 달려들던 통행증들이 잠시 주춤하며 허공에 흩어졌다.

“이 물건들, 로웬의 그림자를 가로채서 이름 칸에 강제로 붙이려 하고 있습니다. 선택을 강요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계약을 강제 성립시키려는 심산이군요.”

베라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공명했다. 주변을 에워싼 백색의 종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로웬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시스템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촉을 멈추지 않았다. 이름을 적으라고, 그러면 모든 고통과 의문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로웬은 허공에 떠 있는 깃펜을 잡는 대신, 품 안에서 낡은 배송 장부를 꺼내 들었다.

시스템이 제시한 ‘이름 기입’이라는 규칙을 그대로 따를 의사는 전혀 없었다. 전문적인 배달원에게 있어 정체불명의 서류에 서명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위험은 없다. 수취인이 불분명하고 배송 경로가 오염되었을 때 취해야 할 조치는 맹목적인 서명이 아니었다.

“이름을 적지 않겠다.”

로웬의 목조각처럼 딱딱하고 흔들림 없는 음성이 통로에 울려 퍼졌다. 감미롭던 시스템의 안내음이 일순간 끊겼다.

“대신, 이 화물의 상태에 대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현재 이 통행증들은 수취인 확인 절차를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 수취인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강제적인 서명 유도는 배송 규정 위반이다.”

이네스가 놀란 듯 로웬을 돌아보았다. 로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부의 빈 페이지를 넘기며 차분하고도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무명 통행 상태 검수’를 신청한다. 또한, 현재 제시된 이 통행증의 효력을 실증하기 위해 ‘봉인 기록 원본 대조’를 공식 요구한다.”

그것은 이 세계의 신비로운 마법도, 초월적인 기적도 아니었다. 철저하게 실무적이고 행정적인 절차였다. 로웬은 자신을 기록의 주인이나 위대한 선택권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로웬은 끝까지 자신을 ‘사고를 수습하는 배달원’의 위치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러자 주변을 위협적으로 감돌던 백색 종이들이 일제히 정지했다. 유혹하듯 일렁이던 깃펜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검은 잉크를 흩뿌렸다. 시스템의 부드럽던 목소리가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차가운 기계적 톤으로 복구되었다.

‘……요청이 정식 접수되었습니다. 무명 통행 상태 검수를 시작합니다. 원본 대조를 위해 봉인 기록의 직인 및 인장을 확인합니다.’

로웬의 정면 공간에 거대한 문양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난 수백 일 동안 일행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던, 성자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신성한 인장이었다.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며 압도적인 권위를 뽐내는 그 문양은, 누가 보아도 이 기록이 성자의 것임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처럼 보였다.

하지만 로웬의 안목은 다른 곳을 향했다.

배달원으로서 수천, 수만 개의 인장과 직인을 검수해온 경험이 로웬의 감각을 일깨웠다. 진정한 인장은 서류의 질감과 하나가 되어 깊숙이 녹아들지만, 가짜나 덧씌운 것은 미세하게 표면에서 겉돌기 마련이다. 지금 눈앞의 성자 인장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눈부셨다. 마치 밑바닥에 숨겨진 추악하거나 이질적인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가리기 위해 급하게 덧칠해진 금박처럼 보였다.

로웬은 거침없이 손을 뻗어 허공의 인장 근처를 가볍게 훑었다. 손가락 끝이 인장의 가장자리에 닿자마자, 견고해 보이던 금빛 광휘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미세한 균열이 발생했다.

“이건 인장이 아니다. 그저 덧씌운 껍데기일 뿐이다.”

이네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네스 역시 로웬이 지목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위화감을 포착한 모양이었다.

“세상에…… 술식 위에 전혀 다른 성질의 술식을 겹쳐서 원본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던 건가요? 그것도 성자의 문양을 위장막으로 이용해서?”

“성자라는 정체를 확정 짓는 것 자체가 이 함정의 목적이었겠지. 누군가 이 거짓된 이름을 적고 기록을 여는 순간, 원본은 영원히 이 금빛 껍데기 아래 묻혀 소멸했을 거다.”

로웬은 검수 절차를 멈추지 않았다. 배송 사고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덧칠해진 거짓의 층을 한 꺼풀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장부에 기록된 검수 조항들이 빛을 발하며 허공의 인장을 압박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무명 통행증들이 비명을 지르듯 파르르 떨리며 검게 타올랐다. 하얀 연기가 통로를 가득 메웠고, 피핀은 그 연기 속에서 정화의 향기가 아니라 썩은 가죽이 타오르는 듯한 고약한 악취를 맡았다.

“로웬, 조심하세요! 원본의 실체가 드러나려 합니다!”

베라가 검을 고쳐 잡으며 로웬의 앞을 굳건히 지켰다.

허공에 떠 있던 성자의 인장이 흉측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찬란했던 금빛 입자들이 부스러기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그 뒤편에서 시커멓고 투박한, 그러나 압도적인 중량감을 가진 진짜 인장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것은 성자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마치 심연의 바닥에서 갓 건져 올린 듯한 서늘하고 둔탁한 금속의 질감을 띠고 있었다.

시스템의 연산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며 통로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로웬은 그 진동 속에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이 기록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섣불리 확정하지 않은 채, 오직 ‘대조 결과’라는 객관적인 진실만을 요구했다.

마침내, 덧칠해졌던 모든 금빛이 허망하게 휘발되어 사라졌다.

차디찬 침묵이 통로를 지배하는 가운데, 시스템의 붉은 텍스트가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허공을 갈랐다.

[ 원본 대조 결과: 성자 인장 아님 ]

331화. 원본 수취인 칸의 공란

시스템의 경고음은 고막을 찢는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버린 금속들이 서로의 표면을 긁으며 짓이기듯 발생하는, 지독히도 불쾌하고 예리한 파열음에 가까웠다. 성자의 인장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황금빛 문양은 그 기괴한 소음과 함께 맥없이 흩어졌다. 찬란했던 빛의 파편들은 허공에서 산화하며 추악한 진실의 껍데기를 벗어 던졌다. 마치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단 한 번의 파도에 무너져 내리듯, 성스러운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검게 타 들어가는 불순물만이 남았다.

허공에 고정된 채 떠 있던 양피지는 비명을 지르는 생물처럼 흉측하게 뒤틀렸다. 덧씌워진 위조의 흔적들이 시스템의 강제 집행에 의해 분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치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을음처럼 내려앉은 재 아래에서 전혀 다른 질감의 문자들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신의 축복을 담은 유려한 성가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집요한 의지와 서늘한 목적이 서린, 투박하고 거친 필체였다.

[ 시스템 알림: 위조된 외부 레이어(Layer)가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

[ 원본 배송장의 물리적/마법적 기록 일부가 복원됩니다. ]

로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성자의 인장이 위조되었다는 판정은 단순히 가짜를 가려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시스템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신성한 권능을 정교하게 흉내 내어, 배송의 경로를 인위적으로 왜곡하려 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배달원으로서 수없이 많은 사고를 접해온 로웬이었으나, 이토록 대담하고 정교한 '위조'는 전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그때, 시야를 가득 채우는 푸른색 시스템 창이 이전보다 훨씬 더 고압적이고 날카로운 광채를 내뿜으며 명멸했다.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었고, 로웬의 피부 위로 찌릿한 마력의 잔류물이 들러붙었다.

[ 특수 권한 부여 제안: 위조자 추적(Trace Forger) ]

[ 조사관 직인을 수락하십시오. ]

[ ※ 주의: 수락 시 대상자에 대한 실시간 경로 역추적 및 강제 구인 권한이 즉시 부여됩니다. ]

로웬의 오른손 등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시스템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건네듯, 보이지 않는 인장을 그의 피부에 각인시키기 위해 서서히 하강했다. 허공에서 내려오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로웬의 감각을 짓눌렀다. 손등의 뼈마디가 저릿할 정도의 서늘한 압력. 위조자를 잡는다면 이 모든 혼란과 배송 사고의 실마리를 단번에 움켜쥘 수 있을 터였다. 시스템은 로웬이 그 유혹적인 권한을 수락하기만을 기다리며, 푸른 낙인을 그의 살갗 위로 가져다 댔다.

하지만 로웬의 손끝이 반응하기도 전에, 이네스의 서늘한 목소리가 실내의 온도를 단숨에 빙점 아래로 떨어뜨렸다.

"멈춰요, 로웬. 그 손 치워요."

이네스는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예리한 눈동자는 시스템이 제시한 '조사관 직인'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함정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 직인을 받는 순간, 당신은 단순한 배달원이 아니라 시스템이 규정하는 '사건 당사자'로 강제 등록됩니다. 시스템은 지금 공정함을 가장해 당신에게 배달원으로서의 중립성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거예요. 조사관이라는 명목하에, 수취인을 결정할 최종 권한을 시스템의 처리 절차에 완전히 넘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선택권이 시스템의 논리에 종속되는 거라고요."

로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네스의 경고는 타당했다. 조사관 직인은 달콤한 독이었다. 범인을 쫓을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주는 대신, 배달원이 마땅히 지켜야 할 '전달자'로서의 위치를 박탈하고, 시스템의 효율적인 처리를 위한 장기말로 고정해버리는 족쇄에 불과했다. 로웬은 손등을 파고들려던 그 서늘한 감각에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그때, 옆에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피핀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의 감각은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피핀은 미세하게 떨리는 양피지의 진동과, 그 주변을 감도는 공기의 흐름을 청각적으로 치환하여 읽어내고 있었다.

"이상해요…. 소리가 너무 달라요."

피핀이 고개를 갸웃하며 양피지 근처로 조심스럽게 귀를 가져다 댔다. 그녀의 미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성자의 인장이 사라지면, 그 밑에 숨겨져 있던 진짜 기운이 느껴져야 하잖아요? 보통 이런 중요한 문건은 작성자의 숨결이나 축복의 잔향이 남기 마련인데…. 그런데 이건, 마치 텅 빈 동굴 속에서 마른 종이봉투를 구길 때 나는 소리만 들려요. 아무것도 없어요. 속이 텅 비어 있는 봉투가 접히면서 나는 건조하고 메마른 소리뿐이에요. 울림도, 온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텅 빈 소리라고?"

베라가 낮게 읊조리며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피핀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녀의 청각적 단서는 명확했다. 위조된 외피 아래에 숨겨진 것이 신성한 기록이나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면, 그것은 철저하게 은폐되어야만 했던 '공백' 그 자체라는 의미였다.

그 순간, 로웬이 확답을 내놓지 않자 시스템은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왜곡하여 해석한 모양이었다. 허공에서 명멸하던 푸른 인장이 날카로운 파찰음과 함께 로웬의 손등을 향해 급강하했다. 강제 집행이었다.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푸른 낙인이 로웬의 피부에 닿으려던 찰나였다.

챙-!

금속과 마력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날카로운 타격음이 집무실 안을 울렸다.

베라였다. 그녀는 일반적인 인간의 눈으로는 쫓기조차 힘든 속도로 로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손목에 감겨 있던 가죽 장갑의 보조 끈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휘둘러지며 시스템의 인장 궤도를 정확히 타격했다. 정교하게 제련된 장갑 끝의 금속 장식이 푸른 낙인을 밖으로 튕겨냈다.

"성급하군, 기계 덩어리 주제에."

베라가 싸늘한 눈빛으로 허공의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장갑 끈은 팽팽하게 긴장된 채, 다시금 로웬에게 달려들려 하는 시스템의 권능을 물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마력과 마력이 부딪치며 발생하는 불꽃이 베라의 앞을 번뜩였다.

"로웬, 이들의 제안을 듣지 마라. 추적 권한 따위 없어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다. 네 직업은 사냥꾼이 아니라 배달원 아닌가?"

로웬은 베라의 듬직한 등 뒤에서 천천히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단호한 개입 덕분에 시스템의 강제 등록 절차를 회피할 수 있었다. 로웬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여전히 집요하게 눈앞을 가리고 있던 위조자 추적 제안 창을 반려 처리했다.

[ 경고: 위조자 추적 권한을 반려하셨습니다. ]

[ 조사관 등록 절차가 취소되었습니다. 배송 절차는 관리 원칙에 의거하여 표준 모드로 전환됩니다. ]

로웬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양피지를 응시했다. 이제 양피지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성자의 이름이 찬란하게 적혀 있던 자리는 조잡하게 덧칠된 잉크 자국이 흉하게 번져 있었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진짜 기록들이 배송 사고 처리 절차에 따라 서서히 형태를 갖췄다.

그는 조심스럽게 양피지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직업적인 감각이 예민하게 발동했다. 배송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물건의 파손 여부나 범인의 정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원형의 보존 상태'와 '최초 발송 의도'의 파악이었다. 로웬은 손가락 끝에 미세한 마력을 집중했다.

"배송장의 훼손은 고의적이지만, 본판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군. 위조자가 원본을 파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안 한 건지 확인해야겠어."

로웬의 손가락이 양피지의 거친 표면을 훑어 내려갔다. 겉으로 보기엔 잉크와 연기로 뒤섞여 엉망진창이었으나, 정작 중요한 정보가 담겨야 할 핵심 지점들은 교묘한 보호 마법에 의해 보존되어 있었다. 위조자는 성자의 권능을 빌려 이 배송장을 가로채려 했지만, 본질적인 내용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 배송장 자체가 가진 기이한 물성 때문에 파괴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이네스, 피핀. 이쪽을 좀 봐주겠어?"

로웬이 지목한 곳은 배송장의 가장 하단, 수취인의 이름이 최종적으로 기록되어야 할 칸이었다. 그곳엔 '성자'라는 이름이 아주 두껍고 진하게 덧칠되어 있었다. 로웬은 조심스럽게 마력을 손끝에 집중하여, 표면에 끈적하게 들러붙은 가짜 잉크층만을 미세하게 긁어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메마른 양피지 위에서 가짜 잉크 조각들이 검은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로웬의 손놀림은 정밀한 조각가처럼 섬세했다. 마침내 성자라는 가공의 이름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잖아요?"

피핀이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예민한 청각이 읽어냈던 '텅 빈 소리'의 실체가 눈앞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수취인 칸은 깨끗했다. 세월의 흔적조차 닿지 않은 듯, 양피지 본연의 미색만이 서늘하게 감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름을 지운 흔적도, 마법으로 은폐한 흔적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한 적 없는 미래를 기록하기 위해 남겨둔 자리처럼 보였다.

이네스가 미간을 좁히며 떨어진 잉크 가루들을 분석했다.

"지워진 게 아니에요. 이건 애초에 기록된 적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군요. 이 배송장은 엄연히 발송 단계를 거쳤고, 시스템의 인증 인장까지 찍혀 있어요. 수취인이 없는 배송물은 시스템 상 존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런 모순이 가능하죠?"

"아니, 이건 단순히 비어 있는 게 아니야."

로웬이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양피지를 창가의 빛에 비추어 보았다. 수취인 칸의 주변으로 미세한 칼날 자국과 같은 흠집들이 무수히 나 있었다. 그것은 이름을 적지 못하게 방해한 흔적이 아니었다. 수취인을 특정 인물로 '결정'하지 않기 위해, 발송자가 의도적으로 공백을 유지시키려 사투를 벌인 흔적이었다.

이것은 사고로 누락된 단순한 공란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 배송장의 최종적인 행방을 시스템이 결정짓지 못하도록, 혹은 그 누구에게도 귀속시키지 않기 위해 철저히 비워둔 '의지의 산물'이었다.

'성자'라는 가짜 이름은 이 위험한 공백을 감추기 위한 가장 완벽한 덮개였을 뿐이다. 위조자는 이 공백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혹은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두려워했기에 가짜 인장을 찍어 자신을 수취인으로 위장하려 했을 것이 분명했다.

로웬의 눈앞에서 배송장의 상태를 최종 확정 짓는 시스템 메시지가 차갑게 출력되기 시작했다.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글자들은 방 안의 인물들에게 무거운 압박감을 선사했다.

그 누구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칸. 그러나 그 무엇보다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는 빈칸. 수취인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배달이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음을 뜻하거나, 혹은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배달원의 선택에 의해 수취인이 될 수 있다는 거대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양피지가 가늘게 떨리며 마지막 판정 결과를 허공에 띄웠다. 그것은 이 배송물이 안고 있는 가장 깊은 수수께끼를 명명하는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 원본 대조 완료 ]

[ 상태: 수취인 식별 불능 ]

[ 원본 수취인 칸: 고의 공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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