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9화. 젖은 보관자 칸의 환불 불가
409화. 젖은 보관자 칸의 환불 불가
축축한 냉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하 보관소의 공기는 단순히 습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눅눅한 절망을 머금은 채 정체되어 있었다. 로웬은 발걸음을 멈추고 정면에 놓인 거대한 보관함을 응시했다. 그것은 나무로 짜인 듯했으나 표면은 금속처럼 매끄러웠고, 다시 보면 썩어가는 고목의 껍질처럼 물러 보이기도 했다. 보관함의 중심부, 유독 짙은 습기를 내뿜는 구획이 바로 젖은 보관자 칸이었다.
로웬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옆에 서 있던 이네스가 매몰차게 그 팔을 잡아챘다. 이네스의 손길에는 평소보다 훨씬 강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이미 가느다란 손가락 위에 가죽 장갑을 끼고, 그 위를 다시 거친 질감의 천으로 두 겹이나 감싸고 있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이네스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로웬은 멈춰 선 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칸의 모서리마다 맺혀 있는 액체는 투명한 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잉크가 희석된 것처럼 탁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공중에서 증발하듯 다시 칸 속으로 스며들기를 반복했다.
“저건 단순한 습기가 아닙니다. 이곳에 접수되었다가 주인을 잃었거나, 혹은 강제로 지워진 이름들의 잔여물입니다. 피부에 닿는 순간 그것은 당신의 피부를 종이 삼아 새로운 이름을 새기려 들 겁니다. 일단 묻으면 육신을 도려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네스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덜렁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피핀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내용물을 뒤적이는 소리였다. 피핀의 가방 안쪽 도구들은 평범한 수리 도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녹슨 철자, 겹겹이 꼬인 붉은 실, 결정이 비정상적으로 큰 말린 소금 조각,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얇은 흑연 막대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핀은 흑연 막대 하나를 집어 올리며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띄웠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닦아낼 수도 없고, 불을 피워 말릴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칸 전체를 태워버릴 수도 없는 아주 까다로운 물건이라는 뜻이군요? 맞죠?”
“대체로 그렇습니다. 물리적인 힘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네스의 대답에 피핀이 혀를 짧게 찼다.
“좋네요. 이번 임무가 끝나면 심부름 난이도 기록표에 새 줄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어요. ‘젖어 있지만 닦으면 즉사함’이라고 말이죠.”
그때였다. 정적만이 가득해야 할 보관소 내부에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똑, 똑, 똑.
정확히 세 번. 문밖 박자였다. 문은 분명히 굳게 닫혀 있었고, 그 너머에는 아무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소리는 문 외부에서 안으로 전달되는 타격음이 아니었다. 마치 보관소 내부의 공기가 문이라는 매질을 통과해 바깥으로 터져 나가며 발생하는,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박자였다.
베라가 즉각 반응했다. 그녀는 창 하나 없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리며 허리춤의 검을 반쯤 뽑아 올렸다. 금속이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축축한 공기를 갈랐지만, 박자는 멈추지 않았다. 베라는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기류를 살피며 검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밖에 누군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피핀의 물음에 베라가 짧게 답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생명력도, 죽은 자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박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게 더 소름 끼치는데요.”
피핀이 어깨를 으쓱하며 흑연 막대를 로웬에게 건네려던 찰나, 젖은 보관자 칸의 표면이 격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무 같던 재질이 순식간에 진득한 액체처럼 변하더니, 그 위로 흐릿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환불 불가]
문구는 단호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훨씬 작고 조밀한 글씨들이 바늘처럼 돋아났다.
[자동 지정 대기 중. 보관 조건만 접수.]
이네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서둘러 품 안에서 두꺼운 장부를 꺼내 펼쳤다. 장부의 책장들이 습기를 머금어 쩍쩍 달라붙는 소리를 냈다.
“안 됩니다. 자동 지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어요. 이름이 없는 보관물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의 권리를 강제로 점유하려 듭니다. 이대로 두면 이 칸은 당신들을 보관물의 소유자로, 혹은 보관물 그 자체로 인식해버릴 겁니다!”
로웬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허파를 타고 들어오는 공기가 차갑고 무거웠다. 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실체가 있는 물리적 하중처럼 로웬의 어깨를 짓눌렀다. ‘보관 조건만 접수’라는 상태는 가장 위험했다. 그것은 내용물이 무엇인지, 누구의 것인지 확정하지 않은 채 오직 ‘보관되어야 한다’는 당위성만 남은 상태를 의미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칸은 끊임없이 주변의 존재를 유혹하고 삼키려 들었다.
로웬이 입을 열었다.
“자동 지정은 거절합니다.”
그 선언과 동시에 칸이 물결처럼 크게 흔들렸다. 젖은 잉크들이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쏠리며, 가운데에 커다란 빈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를 적어 넣으라는 듯 입을 벌린 이름 칸이었다. 그 검은 구멍 같은 공간이 로웬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거절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네스가 소리쳤다. “권리 보존 절차를 밟아야 해요. 하지만 여기는 일반적인 구역이 아닙니다. 보류선 세 줄이 필요합니다. 한 줄은 단순한 임시 거절, 두 줄은 대리 보관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세 줄은… 이 지정 자체를 보류하겠다는 뜻입니다.”
“세 줄을 그으면 안전해지는 겁니까?”
로웬의 질문에 이네스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늦추는 겁니다. 이 칸이 요구하는 대가를 당장 지불하지 않고 뒤로 미루는 것뿐이죠. 하지만 그 대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자가 붙듯 무거워질 겁니다.”
로웬은 이네스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이곳의 모든 절차는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장 누구의 목을 칠지 결정하지 못했을 때, 단두대의 칼날을 잠시 멈춰 세우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다시 문밖 박자가 울렸다. 이번에는 네 번이었다.
똑, 똑, 똑, 똑.
박자가 늘어날 때마다 베라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패였다. 그녀는 이제 검을 완전히 뽑아 문틀 앞바닥에 검 끝을 박아 넣었다.
“박자가 늘어나고 있다. 공간의 밀도가 변하고 있어.”
피핀이 흑연 막대를 로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줄 긋기 담당은 누구죠? 전 손재주는 좋지만, 이런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선은 긋고 싶지 않거든요.”
이네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젖은 보관자 칸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피핀 쪽으로 기우뚱하게 쏠렸다. 칸 중앙의 빈 이름 칸이 피핀의 그림자를 자석처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피핀의 그림자 끝부분이 액체처럼 변해 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피핀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웬이 망설임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림자의 인력이 로웬의 발끝으로 옮겨왔다.
“성자 승인 아님.”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그 한마디에 요동치던 칸의 표면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성자 승인 아님.” 로웬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것은 심부름꾼의 확인이다. 보관 조건만 접수하되, 이름 지정은 보류한다.”
이네스의 시선이 로웬의 뒷모습을 보며 거세게 흔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웬의 방식은 절차상 가능했으나, 지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성자의 권능을 빌려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일개 심부름꾼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담보로 보류를 거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가 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장부의 가혹한 추궁으로부터 면책 사유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평범한 인간이기에 장부는 더 집요하게 그의 본질을 요구할 것이었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 보류의 책임은 온전히 당신에게 남게 됩니다. 환불 불가라는 조건이 당신의 영혼에 귀속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이네스의 외침에도 로웬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럼 남겨 두십시오. 환불이 불가능하다면, 그저 가지고 있으면 될 일입니다.”
“환불 불가입니다. 돌려줄 방법이 없단 말입니다!”
“애초에 받은 적 없는 것을 돌려줄 필요도 없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피핀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 저 장부가 딱 좋아할 만한 궤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로웬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젖은 보관자 칸 아래쪽에서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보관함 밑바닥에서부터 검은 줄 자국이 번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물이 고여 생긴 틈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이내 세 갈래로 정교하게 갈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로웬이 그어야 할 보류선 세 줄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미 아주 오래전에 그어 두었다가, 억지로 지우려 한 듯한 희미하고 지저분한 흔적이었다.
이네스가 그 자국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선행 기록이 있어요. 누군가 이미 이곳에 보류를 걸려고 시도했었습니다.”
“누구의 기록이지?”
베라가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이름이… 이름 부분이 너무 젖어 있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아니, 마치 누군가 이름을 적기도 전에 습기에 녹아버린 것 같아요.”
문밖 박자가 다섯 번 울렸다. 이번에는 박자와 박자 사이에 금속을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베라는 이제 문틀을 어깨로 막아선 채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문을 밀고 들어오려는 듯 문틀이 비명을 질렀다.
“더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이 없어!”
베라의 외침에 로웬은 피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구 줘.”
피핀은 재빨리 흑연 막대와 붉은 실을 건넸다.
“흑연은 절대로 긋는 게 아닙니다. 젖은 표면 위에 꾹 눌러서 자국을 새겨야 해요. 그리고 이 붉은 실은 줄이 번지지 않게 가이드 역할을 해줄 겁니다. 설명서에는 ‘절대 숨을 불어 넣지 말 것’이라고 강조되어 있었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고, 당신도 영원히 모르길 바랍니다.”
로웬은 피핀이 건넨 붉은 실을 왼손 가락에 감았다. 피가 통하지 않아 손가락 끝이 보라색으로 변할 만큼 꽉 조였다. 이네스는 장부의 빈 면을 양손으로 붙잡아 로웬이 선을 그을 위치를 고정했다.
“첫 번째 줄, 권리 보존.”
이네스의 유도에 따라 로웬이 흑연 막대를 칸의 표면에 눌렀다. 닿는 순간, 칸은 로웬의 손가락을 빨아들이려 했다. 끈적하고 차가운 점성이 손등을 덮쳤다. 선은 똑바로 그어지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서 글씨를 쓰는 것처럼 흑연의 궤적이 흐릿하게 휘어졌다. 로웬은 팔 근육이 파들거릴 정도로 힘을 주어 막대를 고정했다.
“두 번째 줄, 자동 지정 보류.”
똑, 똑, 똑, 똑, 똑, 똑.
문밖 박자가 여섯 번 울렸다. 베라가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검집 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문 너머의 존재와 기 싸움을 벌이는 그녀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보관소 내부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며 숨을 쉬기조차 힘들어졌다.
“세 번째 줄!” 이네스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졌다. “여기에 반드시 ‘성자 승인 아님’의 의지를 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부가 당신의 생명력을 제물로 삼아 승인자로 등록해버릴 겁니다!”
로웬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흑연 막대를 눌렀다. 그 반동으로 칸 안에 고여 있던 검은 물이 로웬의 손등에 튀었다. 그것은 예상과 달리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갓 뽑아낸 피처럼 미지근하고 기분 나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성자 승인 아님.”
로웬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세 번째 줄을 완성했다.
그 찰나, 젖은 보관자 칸이 거대한 입을 벌리듯 위아래로 벌어졌다. 중앙의 빈 이름 칸이 로웬의 손목까지 타고 올라오며 그의 존재를 삼키려 들었다.
“지금이야!” 피핀이 붉은 실을 강하게 잡아당겼고, 이네스는 장부의 모서리를 칸의 틈새에 끼워 넣었다. 베라는 문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검집 끝으로 바닥을 연달아 세 번 내리쳤다.
쾅, 쾅, 쾅!
베라가 만든 인위적인 박자가 문밖 박자의 흐름을 순간적으로 흐트러뜨렸다. 공간을 지배하던 기묘한 리듬이 깨지는 순간, 로웬은 박차고 나가듯 손을 뺐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가 그어놓은 보류선이 끊어지며 칸 속으로 영원히 매몰되었을 것이었다.
“보관 조건만 접수.”
로웬이 숨을 몰아쉬며 확언했다. 칸은 분노한 듯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서서히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름 지정 없음. 환불 불가 조건 확인. 권리 보존 유지.”
로웬의 선언이 끝나자, 아까 보았던 의문의 검은 줄 자국이 로웬이 그은 세 줄 밑에서 다시 한번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것은 글자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깊이는 로웬이 방금 새긴 것보다 훨씬 깊었다. 누군가의 손가락이, 혹은 누군가의 의지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누르고 버텼던 것처럼 깊고 좁은 홈이 파여 있었다.
이네스가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덮었다.
“됐습니다. 일단은… 지금은 멈췄습니다.”
피핀이 손가락에 감겼던 실을 풀어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이라는 말, 정말이지 이 바닥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네요.”
베라가 문에서 천천히 발을 떼며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문밖 박자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문 아래 좁은 틈새를 통해, 짙은 잉크 한 방울이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그 방울은 정확히 로웬의 발끝 앞에서 멈추더니, 스스로 바닥에 납작하게 눌러 붙으며 작은 표식을 형성했다.
[환불 불가]
로웬은 발밑에 새겨진 그 글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것을 밟아 지우려 하지도,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가져가지 않는다.”
로웬의 말에 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젖은 보관자 칸 안쪽의 빈 이름 칸이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색조로 변하며 정적에 잠겼다.
이네스가 장부를 품에 안고 로웬의 곁으로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다음 절차를 밟기 전에는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이 칸에 누가 먼저 보관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그 검은 줄 자국을 남긴 자가 누구인지 말입니다.”
“확정하지 마십시오.”
로웬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지금은 그저 제시된 조건만 봅니다. 원인을 찾는 것은 그다음의 일입니다.”
피핀이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메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건만 살피다가 그 조건한테 잡아먹히는 직업은 생전 처음 겪어보네요. 정말이지 수지타산이 안 맞는 일이라니까요.”
베라는 여전히 문쪽을 노려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응수했다.
“처음은 아닐 거다. 단지 그런 일을 겪고 살아남아 기록을 남긴 자가 적을 뿐이지.”
로웬은 손등에 튄 검은 물자국을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닦아내지 않았다. 이네스의 말대로, 이것을 닦아내는 순간 잉크에 담긴 잔여물이 어디로 튈지, 혹은 어떤 새로운 계약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관소의 공기는 여전히 축축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 이상의 이름은 요구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젖은 보관자 칸의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공백이 누군가의 이름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보관자 칸 비고: 잉크는 말랐지만, 이름이 들어갈 자리는 끝내 젖은 채 남아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