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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408화 합본. 권리 보존 시험 복도에서 선납 영수증의 빈 납부자까지 일러스트

407-408화 합본. 권리 보존 시험 복도에서 선납 영수증의 빈 납부자까지

407화. 권리 보존 시험 복도

회색의 석조 벽면이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는 소리를 집어삼키는 기묘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발소리는 바닥에 닿는 순간 비산되어 먼지처럼 흩어졌고, 폐부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호흡 소리조차 벽면의 거친 질감 사이로 스며들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로웬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따라오는 이네스와 피핀, 그리고 베라의 기척이 간헐적으로 느껴졌으나 그것이 물리적인 실체인지, 아니면 이 복도가 만들어낸 잔상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이곳은 권리 보존이 이루어지는 시험의 복도였다. 존재의 증명이 정교한 서류와 서술된 절차로 치환되는 공간이었으며,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가 곧 존재의 영구적인 누락으로 이어지는 서늘한 규율의 현장이었다.

복도의 중간 지점에 도달했을 때, 매끄러운 벽면 한가운데에 이질적인 구조물이 돌출되어 나타났다. 그것은 번호 없는 우편 홈이었다. 보통의 우편함이라면 새겨져 있어야 할 호수나 소유자의 이름표 대신, 그곳에는 오직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틈새만이 기괴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로웬은 그 앞에 멈춰 섰다. 가방 안쪽 도구를 챙기며 주변을 경계하던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이 로웬 님이 말씀하신 그 지점이 맞습니까?”

로웬은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 없는 우편 홈은 특정되지 않은 자들의 권리가 갈 곳을 잃고 임시로 머무는 장소였다. 그 검은 틈새 안으로 함부로 손을 뻗는 것은 존재 자체를 지우는 금기였으나, 그 위에 부착된 대리 수취 확인란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허용된 절차였다. 로웬의 시선이 비어 있는 대리 수취 확인란에 머물렀다. 그 칸을 채우기 위해서는 단순한 잉크가 아닌, 각자의 존재에서 떼어낸 본질적인 무언가를 담보로 한 결단이 필요했다.

이네스는 대리 수취 확인란의 여백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서명은 곧 손실을 의미했다. 만약 이 확인란에 관여한다면, 평생을 바쳐 기록해온 연금술적 비전 중 한 페이지를 영원히 망각하게 될 터였다. 피핀은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잃게 될 것은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섬세한 감각의 일부일지 몰랐다. 베라는 무기를 쥐는 손에 힘을 주었다. 요구되는 비용은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오며 쌓아 올린 직관의 편린일 가능성이 컸다. 누구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정적 속에서 복도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베라는 주변의 공기를 살피며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을 숨기지 않았다. 복도의 조명은 일정하게 깜빡이고 있었고, 그 주기는 마치 누군가의 거대한 맥박이 복도 전체를 통제하는 것과 같았다.

“공간의 압력이 변하고 있어요. 보류선 세 줄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베라의 말대로, 번호 없는 우편 홈 위쪽의 허공에 세 줄의 푸른 빛이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가로로 그어졌다. 보류선 세 줄. 그것은 이 구역에서 진행되는 모든 행정적, 물리적 절차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절대적인 경계선이었다. 이 푸른 선들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붉게 변하거나 가늘게 흩어져 사라지기 전에, 권리 보존을 위한 기초 작업을 완결해야만 했다.

이네스는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내용물을 하나씩 점검했다. 가방 안쪽 도구들은 마치 수술을 앞둔 도구들처럼 정갈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은색의 미세 핀셋, 정밀하게 가공된 봉인석, 그리고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은 빳빳한 양피지 뭉치들이었다. 이네스는 그중에서 이번 시험의 핵심이 될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투명한 광물로 만들어진 접지 않는 보관 틀이었다.

“이 틀에 담기는 권리는 결코 구부러지거나 물리적으로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틀 안에서 보존되어야 할 권리의 원본이 단 1밀리미터라도 흔들린다면, 보존 절차는 그 즉시 파기되고 일행 전체는 이 공간의 일부로 흡수될 것입니다.”

이네스의 경고는 차갑고 무거웠다. 접지 않는 보관 틀은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유리판처럼 보였으나, 그 내부에는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력 회로가 실핏줄처럼 얽혀 있었다. 로웬은 숨을 고르며 품 안에서 빛바랜 한 통의 봉투를 꺼냈다. 수취인의 이름도, 보내는 이의 관직도 적혀 있지 않은 무구의 봉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에게는 생명보다 무거운 권리의 증서가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복도 저편, 차가운 금속으로 마감된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규칙적인 진동이 발생했다.

똑, 똑똑, 똑.

그것은 명백한 문밖 박자였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고막을 두드리는 그 소리는 누군가 정중하게 방문을 알리는 예법 같기도 했고, 혹은 내부의 불청객들을 향해 철수를 권고하는 경고의 신호 같기도 했다. 피핀은 소름이 돋은 팔을 비비며 그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복도 끝에 서 있는 걸까요? 아니면 이 문 자체가 일행에게 말을 거는 걸까요?”

피핀의 떨리는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문밖 박자의 물리적 원인을 규명하려 드는 행위 자체가 이 시험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웬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오직 눈앞의 절차에만 집중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접지 않는 보관 틀 위에 봉투를 올렸다.

순간, 복도를 비추던 모든 마력 조명이 일제히 점멸하며 꺼졌다.

완벽한 어둠이 일행을 덮쳤고, 그 속에서 오직 허공의 보류선 세 줄만이 기괴한 보라색 광채를 내뿜으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던 선들은 급격히 변색되며 마치 끊어지기 직전의 현악기 줄처럼 가늘게 떨렸다. 동시에 접지 않는 보관 틀 안의 봉투가 외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듯,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뒤틀리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절차가 뒤틀리고 있어요! 보류선이 버티지 못합니다!”

베라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네스는 가방 안쪽 도구 중 하나인 납빛의 봉인용 추를 꺼내 틀의 네 모서리에 고정하려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틀 자체가 뿜어내는 강렬한 척력 때문에 손가락 끝조차 닿기 어려웠다. 권리 보존의 절차가 완전히 어긋나고 있었다. 봉투에 담긴 권리가 보존 대상에서 영구히 탈락하여 시스템의 공백 속으로 소멸할 위기였다.

로웬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허공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폐부를 짓눌러왔고, 0번 호흡이라 불리는 기묘한 질식 상태가 현장을 덮쳤다. 숨을 아무리 크게 들이마셔도 대기 중의 산소가 폐 세포에 닿지 않고 증발해버리는 감각. 그것은 존재의 근원이 시스템에 의해 부정당할 때 발생하는 실존적인 현상이었다. 문밖 박자는 더욱 빨라지고 거칠어졌다. 이제는 단순한 노크 소리가 아니라, 복도 전체의 골조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으로 변해 있었다.

“거절 아님을 확인하십시오!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로웬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며 힘겹게 소리쳤다. 절차가 완전히 붕괴하여 파기되기 직전, 시스템의 논리적 빈틈을 파고들었다. 현재의 상황은 명확한 승인이 떨어진 상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거절 처리가 완료된 상태도 아니었다. 허공에서 비명을 지르듯 요동치는 보류선 세 줄이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 유일한 증거였다.

“임시 보증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각자 가진 가치를 던지세요!”

이네스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왼쪽 손목에 감겨 있던 은색 팔찌를 거칠게 풀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수십 년간 쌓아온 연금술적 성취와 가문의 인장을 상징하는 핵심 촉매였다. 베라 역시 단검 자루에 깊숙이 박혀 있던 푸른 보석을 단검 날로 파내어 던졌다. 그것들은 세속적인 가치로도 막대했으나, 이곳에서는 오직 절차를 연장하기 위한 임시 보증금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로웬은 고통스러운 희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리 수취 확인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시야 한구석에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 상태: 성자 승인 아님 ]

로웬은 내면에 잠재된 성자의 권한을 끌어올려 이 불합리한 상황을 단번에 종식시키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성자의 말 한마디라면 이 복도의 모든 규율은 재편될 것이고, 보류선 따위는 확정된 축복의 선으로 변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자의 권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순간, 이 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된다. '성자 승인 아님'이라는 붉은 경고를 유지한 채, 인간으로서 지불할 수 있는 가장 무겁고 비극적인 비용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것은 미래에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일부를,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얻은 명예의 일부를 영구적으로 소멸시키는 행위였다.

임시 보증금으로 던져진 은색 팔찌와 푸른 보석, 그리고 로웬이 지불한 무형의 가치가 하나로 뒤섞여 번호 없는 우편 홈의 검은 틈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간이 그 대가를 집어삼키자, 마치 굶주린 짐승이 포만감을 느낀 듯 복도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요동치던 보류선 세 줄이 다시 안정적인 푸른 빛을 되찾으며 수평을 이루었다. 문밖 박자는 서서히 멀어지더니, 이내 깊은 정적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접지 않는 보관 틀 안에서 꿈틀거리던 봉투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게 안착하여, 틀의 표면과 완벽한 평행을 이루었다.

이네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목은 이제 차갑고 허전해졌으며, 베라의 단검은 중심을 잃고 빛이 바랬다. 그것이 이번 권리 보존 절차를 완수하기 위해 지불한 실질적인 선택의 비용이었다. 평생의 자부심이었을 물건들이 단지 이 복도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한 일회성 통행료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제, 정말로 끝난 것입니까?”

피핀이 마른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웬은 접지 않는 보관 틀 안에서 완벽하게 박제된 듯 보존된 증서를 확인했다. 그것은 이제 그 어떤 물리적, 마법적 압력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상태가 되어, 번호 없는 우편 홈의 가장 깊숙한 심부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복도는 다시 처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막막한 공허함이 감돌았다. 로웬은 대리 수취 확인란의 마지막 칸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누구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으나, 시스템은 절차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녹색 신호를 띄우고 있었다. 성자의 승인을 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존재 가능성을 깎아내어 기어이 길을 열었다.

이네스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가방을 챙겼다. 도구들은 확연히 줄어들었고, 가방의 무게는 물리적으로 가벼워졌으나 표정은 이전보다 수천 배는 더 무거워 보였다. 베라 또한 아무런 말 없이 빛 잃은 단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방금 무엇을 영영 잃어버렸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차마 입 밖으로 내어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권리 보존의 대가는 항상 그러한 법이었다. 보존하고자 하는 대상보다 보존하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들이 때로는 더 무겁게 다가왔다.

로웬은 마지막으로 번호 없는 우편 홈의 입구를 살폈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미세한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영수증이자, 기괴한 시험의 복도를 통과했다는 유일한 증표였다. 하지만 그 영수증의 그 어디에도 지불자의 구체적인 신원이나 희생의 명칭은 기록되지 않았다. 오직 지불된 비용의 총량만이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숫자의 나열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일행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복도는 여전히 길게 뻗어 있었고, 다음 굽이 너머에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방금 지불한 막대한 임시 보증금이 이 거대하고 정교한 시스템의 톱니바퀴 하나를 겨우 한 바퀴 돌렸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로웬의 발걸음이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워졌다. 등 뒤로 다시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문밖 박자가 들리는 듯했으나,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보류 홈 비고: 누구의 이름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비용은 먼저 지불되어 있었음

408화. 선납 영수증의 빈 납부자

공기는 얼어붙은 듯 정체되어 있었고, 방 안의 촛불은 산소 대신 누군가의 긴장을 태우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베라의 손가락이 가죽 가방의 버클을 더듬었다. 가방 안쪽 도구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낮고 둔탁한 금속음이 정적을 찢었다. 평소라면 경쾌하게 들렸을 그 소리가 오늘따라 마치 심해의 괴수가 쇠사슬을 끄는 소리처럼 무겁게 울려 퍼졌다. 베라는 숨을 들이켜며 가방 깊숙한 곳에서 길쭉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은선으로 촘촘하게 테두리를 두른, 결코 접지 않는 보관 틀이었다. 그 틀 안에는 한 장의 종이가 팽팽하게 펴진 채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종이라기보다 빛을 박제해둔 피편에 가까웠다. 일반적인 서류보다 질기고 매끄러운 표면 위로 기묘한 인광이 일렁였고, 상단에는 정교하지만 읽을 수 없는 고대의 문양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네스가 한 걸음 다가서며 그 물체를 응시했다. 이네스의 눈동자에 보관 틀의 은색 광택이 반사되어 차갑게 빛났다.

“이것이 정녕 선납 영수증이라는 말입니까.”

이네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영수증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곳에는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공포스러운 여백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빈 납부자 칸이었다. 어떤 잉크도 닿지 않은 그 백색의 공간은 주변의 인광을 빨아들이며 기묘한 깊이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그곳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영혼의 일부가 그 여백 속으로 영원히 매몰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베라는 보관 틀의 잠금장치를 점검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베라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더욱 강하게 틀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단순한 금전적 기록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미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치렀으나, 그 대가가 누구의 이름으로 지불되었는지는 증명되지 않은 위험한 인과의 파편이었다. 소유자 미정이라는 상태는 이 서류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우면서도 가장 무거운 것으로 만들었다.

“권리 보존을 위해서는 이 상태를 유지하며 절차를 진행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떤 운명을 미리 지불했는지 확정되지 않은 이상, 이 영수증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머물러야 하니까요.”

베라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피핀은 홀린 듯 영수증 가장자리에 그어진 보류선 세 줄을 관찰했다. 그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인과가 현실의 시공간으로 흘러넘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최후의 제어선이었다. 붉고 검은 선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방 안의 대기를 뒤틀고 있었다.

그때였다.

탁. 타악. 탁.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는 단순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시계의 초침이 어긋나는 소리 같기도 했고, 거대한 심장이 딱딱한 바닥 위에서 고동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문밖 박자였다.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는 듯하다가도 순식간에 박자를 비틀며 듣는 이의 평형감각을 어지럽혔다. 피핀이 반사적으로 문 쪽을 돌아보았으나, 문 너머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벽을 타고 스며들어 방 안의 가구들을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소리가…… 칸을 채우라고 재촉하는 것 같아요. 제 목소리가, 제 이름이 저 빈 납부자 칸으로…….”

피핀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피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음절들이 공중에서 흩어지지 않고, 보관 틀 안의 빈 납부자 칸을 향해 나선형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목소리가 빛의 가닥처럼 변해 여백에 닿으려 하자, 이네스가 급히 가방 안쪽 도구 중에서 청동으로 된 쐐기를 꺼내 영수증과 피핀 사이의 공간을 갈랐다.

“정신 차리십시오, 피핀! 함부로 말을 뱉지 마세요. 저 구멍은 지금 주인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네스가 도구를 휘두르는 순간, 영수증에서 뿜어져 나온 인과의 압력이 청동 쐐기를 짓눌렀다. 도구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명백한 도구 압류의 위험이었다. 인과를 강제로 분리하는 행위에 대한 시스템의 반동이었다. 이네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 도구를 잃는다는 것은 기록자로서의 수족 하나를 잃는 것과 같았으나, 이네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베라가 영수증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고정하자, 읽는 행위와 인정하는 행위가 기묘하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영수증에 적힌 문구들을 머릿속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인과를 고착시키는 선납 인정의 단계로 강제 진입하려 한 것이다. 베라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읽기와 인정이 분리되지 않으면, 베라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영수증은 불완전한 상태로 박제되어 버릴 터였다.

“베라, 정신을 유지하세요! 도구를 사용해서 관측과 수용을 분리해야 합니다!”

이네스의 외침에 베라가 떨리는 손으로 가방 안쪽 도구함에서 수정으로 된 안경알을 꺼내 눈앞에 가져다 댔다. 렌즈를 투과한 빛이 영수증의 문구들을 굴절시켰다. 읽고는 있으되, 그것을 뇌가 직접 수용하지 않게 만드는 이중 관측의 기술이었다. 수정알이 과부하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고 베라의 손등에는 화상 자국이 붉게 피어올랐다. 선택의 비용이었다. 자신의 감각기관을 보호하기 위해 도구의 파괴를 감수하고, 육체적인 고통을 지불하는 혹독한 거래였다.

보류선 세 줄이 이제는 비명과도 같은 고주파를 내뿜으며 붉게 달아올랐다. 문밖 박자는 이제 문을 부수려는 듯 거대한 충격음으로 변해 있었다. 쿵, 쿵, 쿵. 박자가 울릴 때마다 방 안의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났다가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성자 승인 아님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베라가 수정 렌즈 너머로 보이는 문구를 간신히 소리 내어 읽었다. 그 말은 이 영수증이 신의 섭리나 종교적인 구원의 영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님을 뜻했다. 누군가의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의지가 개입된 결과물이었다. 로웬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영수증은 마치 로웬을 시험하는 듯했다. 만약 로웬이 스스로를 성자라 선언하거나, 혹은 이 선납의 주체임을 인정한다면 이 혼란은 즉시 멈출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기만일 수 있었다. 로웬은 자신의 정체성이 확정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이 영수증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거짓된 인정을 내린다면, 영수증에 담긴 거대한 에너지는 갈 곳을 잃고 폭주하여 이 방 안의 모든 생명을 지워버릴 것이었다.

“베라, 기록이 증언으로 바뀌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베라가 자신의 말에 스스로 경고하며 영수증 하단의 문구들을 붙잡았다. 기록은 객관적인 사실의 보존이지만, 증언은 주관적인 확정이다. 지금 이 영수증이 증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빈 납부자 칸은 무작위의 누군가를 집어삼켜 그를 강제로 ‘희생한 자’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베라는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아니, 기록이 스스로를 변형시키지 못하도록 마력을 쏟아부어 글자들을 고정했다.

문밖 박자가 정점에 달했을 때, 로웬이 보관 틀 앞으로 다가갔다. 로웬의 그림자가 영수증 위로 드리워졌다. 로웬은 손을 뻗었으나 종이에 닿지는 않았다. 대신 로웬은 아주 명료하고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이 기록은 어떤 외부의 간섭에 의해서도 수정될 수 없으며, 환불 불가의 원칙에 따라 영구히 보전될 것입니다. 빈 납부자 칸이 누군가의 이름을 요구하더라도, 기록자는 오직 공백만을 수호할 것입니다.”

로웬은 피핀의 목소리가 빨려 들어갔던 영수증의 중심부를 차갑게 응시했다. 영수증이 선도착한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선납자가 누구인지, 혹은 그가 무엇을 바라고 이 이질적인 대가를 치렀는지는 보관 조건 접수 이후의 금기가 되었다.

그것은 가장 안전하면서도 가장 비겁하며, 동시에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결론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로웬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광기 어린 듯 춤추던 보류선 세 줄이 일제히 빛을 잃으며 차갑게 식어내렸다. 문밖을 두드리던 박자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복도에는 오직 깊고 무거운 정적만이 다시금 내려앉았다.

피핀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네스는 금이 간 청동 쐐기를 허탈하게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도구는 망가졌고, 그들의 영성은 깎여 나갔다. 선납 인정이라는 절차를 통과하기 위해 치른 비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베라는 다시금 결코 접지 않는 보관 틀의 덮개를 닫았다. 영수증은 이제 다시 침묵의 상태로 돌아갔으나, 그 질감은 이전보다 훨씬 선명해져 있었다. 하단의 환불 불가라는 조항은 마치 누군가의 피로 쓴 것처럼 짙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누군가 이미 치러버린 대가. 그것은 이미 세상 어딘가에서 소모되었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파편이 되어 이 영수증에 박제된 것이다.

“결국 보관자 칸만 채워졌군요.”

이네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영수증 하단의 보관자 칸에는 베라의 인장과 함께 로웬의 승인 흔적이 기묘한 문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상단의 납부자 칸은 매끄러운 백색 그대로였다. 그것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구멍처럼 보였다. 그들은 주인을 알 수 없는 티켓을 들고 목적지도 모르는 기차에 올라탄 여행자와 다를 바 없었다.

로웬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영수증의 인광이 남아 있는 듯 손끝이 미세하게 가려웠다. 누군가 자신들을 위해 미리 길을 닦아놓았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잃었을 것인가. 그리고 자신들은 그 이름 없는 희생 위에서 얼마나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가. 성자 승인 아님이라는 문구는 로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신의 계획이 아니라면, 이것은 오로지 인간의 의지로 점철된 처절한 생존의 기록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었다.

베라는 보관 틀을 다시 가죽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가방 안쪽 도구들은 이제 다시 제자리를 찾았으나, 한 번 훼손된 도구들과 그들의 마음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방 안의 촛불이 마지막 심지를 불태우며 짧은 불꽃을 일으켰다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네 사람의 숨소리만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이 영수증이 발급된 원인도, 문밖에서 박자를 맞추던 존재의 정체도 밝혀진 것은 없었다. 오직 확정된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대가는 지불되었고, 그 권리는 이제 그들의 손안에 보존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증서인지, 아니면 파멸로 이끄는 초대장인지는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베라는 가방의 끈을 어깨에 고쳐 메며 문 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어둠이 걷히는 자리마다 영수증의 빈 납부자 칸처럼 하얀 여백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로웬은 그 여백들을 응시하며, 언젠가 그곳에 적힐 이름을 상상해 보려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보관 틀 속의 영수증은 이제 현실의 물리적인 무게를 넘어 그들의 운명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선의일지, 혹은 거대한 악의의 일부일지 모를 선납의 기록을 품은 채, 그들은 다시금 이름 없는 길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정적 속에서 베라의 발소리만이 새로운 박자를 그리며 복도로 이어졌다.

환불 비고: 돌려줄 이름은 없었고, 보관자 칸의 잉크만 아직 젖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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