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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237화 합본. 손등의 세 번째 획에서 원서명자의 빈 칸까지 일러스트

235-237화 합본. 손등의 세 번째 획에서 원서명자의 빈 칸까지

235화. 손등의 세 번째 획

로웬은 자신의 왼손 등 위로 서늘한 감각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기온이 떨어진 것과는 다른,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살갗을 긋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접수 번호 세 개가 허공으로 흩어짐과 동시에 그의 손등 위로 세 번째 선이 그어져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이 허공에서 내려앉은 듯한 형상이었다. 로웬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는 대신, 곁에 서 있던 서기들을 향해 나직하게 명령했다.

“지금 즉시 기록해라. 현재 시각과 우리가 서 있는 위치. 그리고 접수 번호 114번부터 116번까지 세 개가 소멸한 시점을 정확히 기재해.”

“아, 예! 알겠습니다, 행정관님!”

서기들이 당황해하며 깃펜을 움직이는 사이, 이네스가 로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주저 없이 로웬의 손목을 잡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로웬의 손등에 새로 새겨진 그 선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네스의 손가락이 선 주변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로웬이 느꼈던 냉기와는 달리, 이네스의 표정은 기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로웬의 피부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요. 피부가 얼어붙거나 괴사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선…… 마치 피부 밑에서 잉크가 번져 나오는 것 같아요. 물리적인 상처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배어 나온 표식입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세 번째 획은 고정된 흉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아주 미세하게 요동치며, 주변의 혈관을 따라 검은 얼룩을 조금씩 퍼뜨리고 있었다.

그때,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피핀이 로웬의 손등 근처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경직되어 있었다.

“행정관님, 이 냄새…… 맡아지시나요?”

“냄새라고?”

로웬이 묻자, 피핀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성가대실이나 성당 내부에서 흔히 나는 밀랍 냄새가 아니에요. 왁스나 향유 냄새도 아니고요. 이건…… 비에 젖은 오래된 돌계단 냄새예요. 이끼가 잔뜩 끼어서 미끄러운, 아주 깊은 지하에서나 날 법한 그런 축축한 냄새요.”

피핀의 감각은 예리했다. 그녀가 지목한 것은 단순한 악취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의 이동을 암시하는 듯한 불길한 습기였다. 로웬은 피핀이 말한 그 ‘젖은 돌’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베라가 로웬의 손등과 복도 끝의 지형을 번갈아 살피더니, 자신의 수첩에 그려진 평면도를 펼쳤다.

“행정관님, 이 세 번째 획 말입니다. 이게 어떤 문자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지, 베라?”

“각도를 보십시오. 손등에 새겨진 세 번째 선이 가리키는 방향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복도의 끝…… 정확히는 지하 성가대석으로 내려가는 계단 방향과 일치합니다. 이건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이정표입니다.”

베라의 분석은 합리적이었다. 로웬은 행정관으로서 수많은 서류와 지도를 다루어 왔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 선들은 로웬을 어디론가 인도하고 있는 셈이었다.

모르그가 로웬의 손목을 잡아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깨끗한 흰 천을 꺼내 로웬의 손등을 꼼꼼히 감싸기 시작했다.

“일단 가립시다. 불필요한 공포가 확산되는 건 행정 업무에 도움이 안 되니까요.”

모르그의 손길은 단호했다. 그러나 그가 천으로 로웬의 손등을 완전히 덮어 시야를 차단한 순간,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로웬의 손등에서 사라진 시각적 정보가 통로 벽면으로 전이된 것이다.

“저길 봐!”

피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복도 벽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매끄러운 석벽 위로, 차가운 냉기가 서리더니 손등에 새겨졌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선 세 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선들은 벽면의 질감을 무시하고 마치 잉크가 물속에서 번지듯 길게 늘어났다. 세 개의 선은 서로 겹치고 꺾이더니,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화살표 형상을 만들어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끝에는 어둡고 축축한 지하 성가대 계단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결국 내려가라는 뜻이군.”

로웬이 천으로 감싸진 제 손등을 만져보았다. 천 너머로 느껴지는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벽에 새겨진 화살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지하 깊숙한 곳을 향해 매 순간 조금씩 연장되고 있었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 층을 내려갈 때마다 공기는 급격히 무거워졌고, 피핀이 말했던 그 ‘젖은 돌’의 냄새는 코끝을 찌를 정도로 강해졌다. 계단 사방의 벽에는 로웬의 손등에서 시작된 그 검은 선들이 마치 길잡이처럼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마침내 계단의 끝, 최하층의 무거운 철문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철문 너머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마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기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표를 지참한 자만 내려오라.]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너무나 축축했고, 짐승의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정중했다. 로웬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손등을 감싼 천을 꽉 쥐었다. 그 선들이, 이 지하의 주인에겐 ‘표’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236화. 젖은 철문의 검표

지하 성가대로 이어지는 계단은 눅눅한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화살표를 그리며 아래로 유도했고, 그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긁어 올린 듯한, 축축하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표를 지참한 자만 내려오라.”

목소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었다. 감정이 배제된 그 어조는 마치 정해진 문장만을 읊는 기계 장치와도 같았다.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로웬의 손등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세 번째 획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벽면의 화살표와 공명하듯 미세하게 떨리는 검은 흔적이었다.

로웬은 성호를 긋거나 기도를 올리는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철문의 서늘한 감촉을 응시했다. 그는 신의 뜻을 묻는 예언자의 태도가 아니라, 까다로운 공문을 검토하는 하급 관리의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발급 주체가 누구입니까?”

반복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철문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로웬은 개의치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이 표가 가리키는 목적지가 정확히 지하 성가대실입니까? 그리고 이 통행권의 유효 시간은 언제까지입니까? 절차에 따른 명확한 답변이 없다면 서명자로서 입장을 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자다운 경외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실무적인 물음이었다. 베라는 로웬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의 성직자라면 이 기이한 현상 앞에서 계시를 찾았겠지만, 로웬은 이 상황을 일종의 ‘행정적 절차’로 치부하며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철문이 기분 나쁜 마찰음을 내며 진동했다. 끼익, 하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목소리는 대답 대신 행동을 택했다. 문 상단의 틈새에서 맑은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것은 로웬의 손등을 덮고 있던 얇은 천 위로 정확히 낙하했다.

치익, 하는 소리가 들릴 듯했지만 연기는 나지 않았다. 물방울이 닿은 자리에 푸르스름한 인장이 새겨졌다. 그것은 마치 복잡한 음표와 기하학적 문양이 뒤섞인 형태였다.

“로웬 님, 괜찮으십니까?”

이네스가 급히 다가와 그의 손등을 살폈다. 그녀는 곧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요. 천이 전혀 젖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문양…… 마치 종이에 먹물이 번지듯 천의 결을 타고 글자처럼 변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랬다. 물방울은 액체의 성질을 잃어버린 채, 천의 섬유 사이를 파고들어 정교한 암호처럼 고착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인장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내용을 갱신하는 문서와도 같았다.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철문 틈새로 다가갔다. 그는 예민한 감각으로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를 읽어내려 애썼다.

“아저씨, 이거 기분 나쁜 냄새야. 아주 오래된 도서관 지하에 처박혀 있던, 곰팡이 낀 악보 냄새가 나.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이사이에 아주 비린 물 냄새가 섞여 있어.”

피핀의 말대로 그것은 썩은 내라기보다는 동결된 시간이 해금되며 뿜어내는 퀘퀘한 압박감이었다.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라가 품 안에서 자신이 기록해온 출입 장부를 꺼냈다. 그녀는 장부의 빈 칸과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획수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숫자가 맞지 않아.”

베라의 냉정한 목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 확인했던 지성소의 출입 장부 기록에 따르면, 지하 성가대로 향한 서명자는 항상 짝수여야 해. 하지만 지금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획수는 세 개지. 그리고 이 철문이 요구하는 ‘표’의 형식도 장부에 기재된 표준 규격과는 달라. 이건 정식 출입 절차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변개된 규칙이야.”

모르그는 베라의 지적에 즉각 반응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우리가 내려온 계단 쪽을 살폈다.

“퇴로를 확인하겠습니다.”

모르그가 계단 위쪽으로 손을 뻗었으나, 이내 멈칫하며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들이 내려왔던 돌계단 위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가로지르며 선을 긋고 있었다. 철문에서 흘러나온 것과 같은 푸른 수분이 계단 전체를 옭아매듯 번져나가고 있었다.

“뒤쪽 계단에도 젖은 선이 생겼습니다. 단순한 물이 아니군. 마치 영역을 확정 짓는 경계선 같습니다.”

이제 그들은 나아갈 수도, 쉽게 물러날 수도 없는 기로에 섰다. 철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대신 철문의 표면 자체가 파르르 떨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젖어 있던 철문의 표면 위로 글자들이 솟아올랐다. 녹슨 철판이 꿈틀거리며 만들어낸 문장은 차갑고도 단호했다.

[ 대리 서명자는 한 명만 통과한다. ]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등의 세 번째 획이 맥박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한 명뿐이라면, 남겨진 이들은 이 닫혀가는 지하 계단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로웬은 다시 한번 철문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합창 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그것은 찬송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는 비명에 가까웠다.

237화. 원서명자의 빈 칸

철문 너머에서 배어 나온 습기가 바닥을 적셨다. 푸르스름한 수증기 사이로 떠오른 문구, ‘대리 서명자는 한 명만 통과한다’는 글자가 로웬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물방울 인장의 획이 격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피부 아래에서 살아있는 벌레가 꿈틀거리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팔꿈치를 타고 어깨까지 치솟았다.

함께한 일행들 사이에서 서늘한 긴장이 감돌았다. 한 명만 통과해야 한다는 경고는 곧 나머지 인원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통상적인 영웅 서사라면 여기서 누군가가 자처하며 희생을 선언했겠지만, 로웬은 감상에 젖는 대신 차갑게 식은 눈으로 철문의 문구를 응시했다.

“한 명만 통과한다라. 그것이 대리 서명자에게 부여된 배타적 권한인가, 아니면 단순한 절차상의 제약인가.”

로웬은 통증이 느껴지는 손등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실무적인 문제를 검토하는 관리자처럼 담담했다.

“문구의 주어는 대리 서명자다. 그렇다면 이 계약의 ‘원서명자’는 어디에 있지? 대리인의 권한 범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없다. 원서명자의 신원과 대리 서명자가 이행해야 할 책임의 한계를 명확히 밝혀라.”

로웬의 요구는 철문의 법칙을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을 제물로 던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열쇠는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뒤틀린 계약의 빈틈을 찾아내는 실무적인 접근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로웬의 옆에서 인장을 살피던 이네스가 몸을 숙였다. 그녀의 시선은 로웬의 손등이 아니라, 철문 하단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줄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로웬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로웬의 손등 근처에 흐르는 습기를 훑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맺힌 것은 투명한 물방울이었다.

“인장의 반응이 이상해요. 보통 이런 종류의 각인은 소유자의 혈액이나 마력에 공명하기 마련인데, 지금 이 인장은 로웬 님의 신체 변화보다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습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건 동조가 아니라, 안쪽에서 밀어붙이는 압력에 가깝습니다.”

이네스의 관찰은 날카로웠다. 로웬이 느끼는 고통은 인장이 그의 몸을 갉아먹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문 너머의 무언가가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인장을 매개로 삼아 그를 억지로 끌어당기려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낮은 저음의 합창 같기도 했고, 젖은 헝겊이 바닥을 훑는 불길한 소음 같기도 했다. 피핀이 귀를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감각은 남들보다 예민하게 보이지 않는 파동을 잡아내고 있었다.

“...이름이 아니야.”

피핀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다 로웬의 손등으로 향했다.

“저 합창 속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저들이 외치는 건... 빈칸이에요. 비어 있는 서명란. 마치 주인을 잃어버린 이름표처럼, 그 자리를 채울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어요. 로웬을 부르는 게 아니라, 로웬의 손등에 있는 그 ‘공백’을 부르고 있다고요.”

피핀의 말에 베라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 기괴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규칙이 정리되고 있었다.

“짝수 규칙이군.”

베라의 건조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이 장소는 언제나 짝수를 원해. 하지만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건 대리인 한 명뿐이지. 대리인이 존재한다는 건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원본이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야. 원본과 대리. 이 둘이 합쳐져야 비로소 온전한 한 쌍, 즉 짝수가 완성되는 거지. 저 문이 대리인 한 명만 통과시키겠다고 고집하는 건, 안쪽에서 이미 ‘원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논리적인 추론이었으나, 그것이 반드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안쪽에 있는 원본이 뒤틀려 있거나, 이미 소멸한 상태라면 대리인은 그 빈자리를 강제로 메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모르그가 품 안에서 긴 천 자락을 꺼냈다. 그는 로웬의 허리에 천의 한쪽 끝을 단단히 묶고, 반대쪽 끝을 자신과 동료들의 손목에 감았다.

“무슨 계약이든 간에, 문서 하나만 달랑 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지. 우리가 당신을 잡고 있는 한,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설령 저 문이 당신을 삼키려 해도, 우리가 연결된 이 줄이 당신과 바깥 세계를 잇는 마지막 이정표가 될 거다.”

모르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단호했다. 로웬은 허리에 느껴지는 묵직한 압박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 절차상의 보증인이 확보된 셈이었다.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철문의 진동이 멈췄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의 틈새가 아주 조금 벌어졌다. 그 사이로 짙은 안개가 쏟아져 나왔고, 그 안개 속에서 종이처럼 얇고 젖은 무언가가 천천히 밀려 나왔다.

그것은 평범한 종이가 아니었다. 마치 사람의 살갗을 얇게 펴서 말린 듯한 기분 나쁜 질감의 서명란이었다. 서명란의 가장 윗부분에는 ‘원서명자’의 자리가 검게 타버린 듯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수취인(Recipient)이라고 적힌 칸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로웬의 손등을 향해 열렸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입을 벌리는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로웬은 피할 수 없는 서명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하며, 인장이 박동하는 손을 천천히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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