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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240화 합본. 반송 불가의 수취인에서 완료 도장의 음각까지 일러스트

238-240화 합본. 반송 불가의 수취인에서 완료 도장의 음각까지

238화. 반송 불가의 수취인

철문 틈새로 비집고 나온 종이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치 짐승의 혓바닥처럼 길게 늘어진 서명란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로웬의 손등을 향해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로웬은 자신의 왼손 등을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선들로 이루어진 기괴한 표식이 마치 맥박이라도 뛰듯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수취인(受取人).

종이 위에 정갈하게 인쇄된 그 두 글자가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과 마주 보았다. 보이지 않는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서명란의 빈칸이 로웬의 살결을 집요하게 탐내고 있었다. 로웬은 손을 뒤로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 젖은 종이를 빤히 응시했다.

“서명할 생각은 없다.”

로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성자로서의 거창한 선언도, 어둠을 향한 일갈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잘못 배달된 물건을 마주한 수취인이 배달원에게 건네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거절이었다.

“그런 것은 주문한 적이 없으니까. 절차대로 처리하지. 수취 거부, 혹은 반송 사유를 적을 수 있는 칸을 내놔라. 서명란 말고.”

로웬의 요구에 문틈 너머의 공기가 일순간 굳어버린 듯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 기괴한 압도감 앞에서 공포에 질려 서명을 하거나, 혹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로웬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철저히 ‘수취 실무’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대응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명란 위로 검은 액체가 울컥 솟구쳤다. 그것은 잉크라기보다는 부패한 피에 가까운 빛깔이었다. 잉크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벌레처럼 종이 위를 기어 다니더니, 로웬이 요구한 반송 사유란을 만드는 대신 기존의 글자들을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로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반송 불가(返送不可)]

금방 써 내려간 듯 축축하게 젖은 필체였다. 글자 끝마다 맺힌 검은 액체가 종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이네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로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시선은 종이 위의 글자가 아니라, 그것이 번져나가는 ‘방향’에 고정되어 있었다.

“로웬, 잠깐만요. 저 글씨가 번지는 모양을 좀 보세요.”

이네스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가리켰다. 검은 잉크는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아래로 흘러야 할 액체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옆으로, 그리고 위로 사선형을 그리며 번져나갔다. 그 궤적은 놀랍게도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흉터 같은 선들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마치 종이 위의 글자가 로웬의 피부에 박힌 무늬를 투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필체가 당신 손등의 선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요. 이건 단순한 서류가 아니라, 당신의 신체적 표식과 공명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네스의 경고에 로웬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그랬다. 종이는 그를 수취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넘어, 이미 그의 존재 자체를 증명서의 일부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때, 피핀이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예민한 청각이 문틈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를 포착한 모양이었다.

“소리가… 멈췄어요.”

“뭐가 말이냐?”

“안에서 들리던 그 합창 소리요. 아까까진 계속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다들 숨을 참고 있어요. 마치… 누군가 대답하기를, 혹은 어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요.”

피핀의 말대로였다. 철문 너머를 가득 채웠던 기괴한 소음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 정적은 평화로운 안식이 아니라, 폭발하기 직전의 진공 상태와 같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복도 전체를 짓눌렀다.

베라는 로웬의 손등과 종이 사이의 빈 공간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안경테를 고쳐 쓰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수취인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게 무의미할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소리지, 베라?”

“우리는 저 ‘빈칸’에 들어갈 이름을 찾고 있지만, 어쩌면 저 칸 자체가 본질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비어 있는 상태 그 자체가 수취인인 거죠. 저 문은 지금 로웬 씨라는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 로웬 씨의 존재가 증발하고 남을 ‘빈 구멍’을 배달받으려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베라의 가설은 섬뜩했다. 수취인이 사람이 아니라 ‘빈칸’ 그 자체라면, 서명을 하는 순간 로웬이라는 존재는 지워지고 그 자리에 영원한 공백만이 남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때였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모르그가 등 뒤에 매달고 있던 천 줄을 뽑아 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듯, 마력을 실은 실타래를 문틈 사이로 쏘아 보냈다. 내부의 정체를 확인하거나, 적어도 저 불길한 종이를 찢어발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문틈 안쪽으로 파고들었던 모르그의 실들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안쪽에서 실을 잡아채고 있었다.

“어…?”

모르그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평소라면 바위라도 갈기갈기 찢었을 그의 천 줄이, 마치 거대한 아가리에 빨려 들어가는 국수 가닥처럼 무력하게 끌려 들어갔다. 모르그는 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버텼지만, 잡아당기는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라기보다,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주변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듯한 근원적인 인력이었다.

“안에서 잡아당기고 있어! 제길, 놓아주질 않아!”

모르그의 발이 바닥을 긁으며 문 쪽으로 끌려갔다. 로웬이 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인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문틈은 이제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아가리처럼 보였다.

그 순간, 로웬의 눈에 다시 한번 서명란의 글자가 들어왔다. 검은 잉크가 부르르 떨리더니, 아까보다 더욱 선명하고 기괴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모르그의 실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속도에 맞춰 한 글자씩 완성되었다.

로웬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소름을 느꼈다.

[심부름꾼이 배달한 것은 본인에게 반송된다.]

그것은 경고이자, 이 기괴한 배달의 숨겨진 법칙이었다. 문틈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모르그의 실뿐만이 아니었다. 그 실을 타고, 모르그가 내뿜었던 마력과 의지, 그리고 그가 ‘심부름꾼’으로서 수행해 온 모든 행위의 결과값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배달된 물건이 반송될 곳은 원래의 발신지가 아니었다. 수취 거부된 물건이 돌아갈 종착지는, 그것을 운반해 온 심부름꾼 그 자신이었다.

철문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아주 조금 더 열렸다. 그 틈새로 쏟아져 나온 것은 빛도 어둠도 아닌, 형언할 수 없는 ‘부재(不在)’의 감각이었다. 로웬은 자신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표식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239화. 되돌아온 첫 심부름

철문 틈새로 빨려 들어간 모르그의 천 줄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천들은 문 안쪽의 어둠 속에서 마치 누군가 억지로 비틀어 짠 젖은 매듭처럼 엉겨 붙었다. 끼익, 기분 나쁜 마찰음이 복도를 울렸다. 그저 물리적인 힘에 의한 당겨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질서가 실타래를 회수하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로웬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수취인 칸에 적힌 ‘반송 불가’라는 글자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며 그의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감각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의 냄새였다. 갓 구운 빵의 구수한 내음, 거친 자루에 담겨 있던 소금의 짠 기운, 그리고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던 낡고 거친 새끼줄의 까실까실한 감각. 로웬의 인생에서 가장 처음 행했던, 이제는 흐릿해진 ‘첫 심부름’의 파편들이었다.

“이건…….”

로웬이 신음처럼 뱉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눈앞의 철문은 이제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그가 과거에 내던졌던 모든 행위가 쌓여 있는 거대한 창고처럼 보였다. 심부름꾼이 배달한 모든 것은 결국 본인에게 반송된다는 그 기괴한 문구가 눈앞에서 번쩍였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성자나 예언자, 혹은 거창한 운명을 짊어진 자를 향한 경외감이 섞인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마주한 자의 앞에 놓인 서늘한 정적이었다.

하지만 로웬은 흔들리는 눈빛을 갈무리했다. 그는 자신을 덮쳐오는 과거의 감각에 매몰되는 대신, 습관처럼 굳어진 심부름꾼의 문법을 선택했다. 그는 운명을 묻지 않았다. 신의 뜻을 구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철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접수 번호는 어디에 있지?”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반송품이라면 마땅히 기록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발송 기록과 최초 접수 번호, 그리고 발송인의 서명 날인을 요구한다. 절차 없는 반송은 수취를 거부하겠어.”

로웬은 성자로서의 선언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무적인 심부름꾼의 태도로 버텼다. 예언이나 운명이라는 모호한 말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그대로 잡아먹힐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서류의 여백이 붉게 달아올랐다. 종이 위에 글자가 적히는 대신,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세 번째 획이 화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붉게 덧쓰였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펜으로 그의 살점을 짓누르며 접수 확인 도장을 찍는 듯한 감각이었다.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던 이네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것은 단순한 마법적 현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로웬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형체 없는 것들’을 보고 있었다.

“로웬, 조심해. 저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야.”

이네스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녀의 눈에는 반송되어 돌아오는 것들의 정체가 보였다. 그것은 로웬이 과거에 배달했던 빵이나 소금이 아니었다. 그 배달을 완수하기 위해 로웬이 지불했던 시간, 그 과정에서 파생된 인연,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의 ‘책임 조각’들이었다.

물건은 이미 소모되어 사라졌지만, 그 물건이 세상에 남긴 인과(因果)의 찌꺼기들이 주인을 찾아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피핀은 귀를 막은 채 몸을 떨었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기괴한 합창 소리가 변하고 있었다. 웅장하고 신비롭던 소리는 어느덧 아주 익숙하고도 평범한 소리로 뒤바뀌었다. 그것은 좁은 골목길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의 발소리였다.

“……로웬 형의 소리가 들려.”

피핀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옛날에, 아주 옛날에 형이 혼자 심부름할 때 내던 그 발걸음 소리야. 합창이 그 소리를 흉내 내고 있어. 아니, 저 안에서 형의 걸음 소리가 나오고 있어.”

베라는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하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그녀의 시선은 로웬의 손등과 철문의 틈새를 번갈아 훑었다.

“반송(返送)이라…… 보통은 물건을 출발지로 돌려보내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다르군요. 이건 장소의 귀환이 아니라 책임의 귀속입니다. 운반자가 목적지에 물건을 내려놓는 순간 끝났다고 믿었던 그 ‘연결’이, 배달 완료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운반자에게 되돌아오고 있는 거예요.”

베라의 목조각 같은 목소리가 로웬의 귓가를 때렸다.

“로웬, 저 문 안쪽에는 당신이 끝냈다고 생각했던 모든 심부름의 ‘뒷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운반자로서 짊어져야 할 최종적인 책임 말입니다.”

로웬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등의 붉은 표식은 이제 뼈를 태울 듯한 고통을 수반하고 있었다. 서류에는 여전히 접수 번호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로웬이 그동안 만나왔던 수많은 수취인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는 잔상이었다.

심부름꾼은 배달만 하면 그만이다. 그 이후에 그 물건이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고, 어떤 비극이나 희극을 만들어내는지까지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것이 이 바닥의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철문은 그 불문율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네가 옮긴 모든 것의 무게를 다시 느껴보라는 듯이.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 안쪽에서 기괴한 진동이 울렸다. 쇳덩이가 긁히는 소리 너머로, 아주 맑고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로웬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목소리였다.

― 배달 완료 도장을 돌려줘.

로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아직 하나가 찍히지 않았어. 내 첫 심부름, 기억나?

어둠 속에서 작은 손 하나가 문틈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그 손은 로웬의 손등에 새겨진 붉은 표식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 배달 완료 도장을 돌려줘. 그래야 나도 돌아갈 수 있어.

240화. 완료 도장의 음각

“배달 완료 도장을 돌려줘.”

문틈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맑았다. 그것은 로웬이 아주 오래전, 기억의 심해 속에 가라앉혀 두었던 어린 시절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로웬은 감상에 젖는 대신 서늘한 눈초리로 어둠이 일렁이는 틈새를 응시했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절차에 집중하는 편이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훨씬 효율적임을 알고 있었다.

“돌려줄 도장은 없다.”

로웬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물품의 수취인이 확인되지 않았고, 배달 완료를 증명할 객관적인 근거도 부족하다. 절차상 인수 확인자의 서명이나 직인이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이 확인되기 전까지 이 도장은 반환 대상이 아니라 공무 집행을 위한 보관 물품이다.”

상대방이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애원하든 협박하든, 로웬은 그것을 철저히 실무적인 오류로 치부했다. 성자로서의 자비나 공포보다는 관리자로서의 엄격함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때, 바닥에 흩어져 있던 젖은 서류 뭉치들이 기이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너덜너덜해진 종이 위로 무언가 선명한 무늬가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낡고 닳아버린 ‘완료’ 도장의 음각이었다. 글자는 뒤집혀 있었고, 종이의 섬유질을 파고들 듯 깊게 패어 있었다.

동시에 로웬의 손목에 묶여 있던 모르그의 천 줄 매듭이 꿈틀거렸다. 부드러운 실의 질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돌처럼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매듭은 마치 무언가를 찍어 누르기 위한 손잡이처럼 기괴한 형태로 변모했다. 로웬은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이질적인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로웬, 조심해요!”

이네스가 다급하게 외치며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녀의 눈에는 성스러운 빛과 불길한 예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도장은 과거의 기록을 정리하려는 게 아니에요. 지금, 당신의 손등에 찍힌 그 표식 위에 새로 찍히려고 하고 있어요. 기록을 덮어씌우려는 거예요!”

이네스의 지적대로였다. 허공에 떠오른 도장의 형상은 과거의 서류가 아니라, 현재 로웬의 신체에 각인된 표식을 노리고 있었다. 만약 그 도장이 찍힌다면, 그가 짊어진 모든 운명과 책임은 ‘완료’라는 명목하에 영원히 고착될 터였다.

주변의 공기가 기묘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피핀은 귀를 막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합창이…… 이상해요. 계속 똑같은 단어만 반복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우리가 아는 단어랑 미세하게 달라요.”

피핀의 말대로 허공을 떠도는 환청 같은 노랫소리는 오로지 한 단어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완료. 완료. 완료.

그것은 찬양도, 축복도 아니었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그 소리는 마치 고장 난 태엽 인형이 내뱉는 비명 같았다. ‘완료’라는 단어가 반복될 때마다 주변의 공간은 조금씩 왜곡되며 로웬을 압박해 왔다.

베라가 검 자루를 꽉 쥐며 경고했다.

“저 도장이 찍히는 순간, 모든 상황은 확정됩니다. 배달이 끝났다는 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는 뜻이죠. 그렇게 되면 반송에 대한 모든 책임과 대가는 고스란히 찍힌 자의 몫으로 확정될 겁니다.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베라의 경고는 매서웠다. 완료 도장이 찍힌다는 것은 이 기괴한 배달 사건의 마침표를 강제로 찍겠다는 선언이었다. 내용물이 무엇이든, 발송인이 누구든 상관없이 수취인이 로웬으로 확정되고 사고의 모든 책임이 그에게 귀속된다는 사법적 선고와 다름없었다.

로웬은 자신을 덮쳐오는 도장의 압력을 느꼈다.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손등을 내리누르려 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이제 비웃음처럼 들려왔다.

“자, 이제 도장을 돌려줘. 끝내야지?”

로웬은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모르그의 매듭, 즉 도장의 손잡이처럼 변한 그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끝내는 방식은 절차가 결정한다.”

로웬은 도장을 내리누르는 압력에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 손목을 비틀었다. 그는 도장의 면을 똑바로 맞추지 않았다. 도장을 거꾸로, 아주 비스듬하게 틀어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이 아니라, 허공에 떠오른 젖은 서류와 자신의 표식 그 경계선에 힘껏 내리눌렀다.

콰드득, 하는 기괴한 파열음이 들렸다.

도장은 정갈하게 찍히지 않았다. 로웬이 의도적으로 각도를 뒤틀어버린 탓에, ‘완료’라는 글자는 반으로 잘려 나갔고, 그 획들은 뭉개져서 읽을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 오히려 그것은 찍히지 말아야 할 곳에 찍힌 오점처럼 남았다.

글자가 뭉개진 자리에는 ‘완료’가 아닌, 뒤틀린 획들이 만들어낸 기묘한 흔적이 남았다. 그것은 마치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미완료’의 낙인과도 같았다.

“서류 미비로 인한 처리 보류다.”

로웬이 서늘하게 덧붙였다. 문틈 너머의 목소리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고, 주변을 감싸던 기괴한 합창이 일순간 멈췄다. 도장의 음각은 깨진 거울처럼 조각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로웬의 손등에는 완료되지 못한 채 일그러진 붉은 흔적만이 선명하게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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