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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98화. 첫 접힘 담당자의 손자국 / 종탑이 울지 않은 밤 / 빈 의자의 대리 서명 일러스트

196-198화. 첫 접힘 담당자의 손자국 / 종탑이 울지 않은 밤 / 빈 의자의 대리 서명

196화. 첫 접힘 담당자의 손자국

장부의 여백은 침묵보다 깊은 심연이었다. 로웬이 ‘발송 기록 대조 요청 / 수취인 추정 금지’ 인장을 찍어 누르는 순간, 종이 위에 번진 잉크가 기묘하게 일렁였다. 원 발송자의 이름을 억지로 끌어내려던 장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페이지는 스스로를 비틀며 새로운 칸을 열어젖혔다. [첫 접힘 담당자 확인].

그 글자가 허공에 새겨지는 순간, 로웬의 손끝에 닿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는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쇳가루처럼 장부의 빈칸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로웬은 본능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 단순한 시각적 환각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이 얼음물에 담긴 듯 서늘해졌고, 장부는 그의 존재 자체를 증명 서류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듯 끈질기게 그림자를 붙들고 늘어졌다.

“손 떼지 마세요, 로웬.”

옆에서 지켜보던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소년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피핀은 첫 번째 봉투의 꺾인 모서리에 코를 바짝 들이밀더니 기침을 내뱉었다.

“이거 냄새가 이상해요. 오래된 서고 냄새가 아니야. 식어버린 밀랍, 그리고 물에 젖은 재 냄새가 나요. 아주 오래전, 불이 꺼진 뒤에 억지로 다시 붙인 것 같은 그런 냄새요.”

밀랍과 젖은 재. 그것은 봉인의 흔적인 동시에 소멸의 증거였다. 피핀의 말에 베라가 돋보기를 꺼내 장부의 ‘첫 접힘 담당자’ 칸 옆에 찍힌 희미한 자국을 살폈다. 거기에는 사람의 지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매끄럽고, 기계의 자국이라고 하기엔 불규칙한 압착흔이 남아 있었다.

“이건 사람의 맨손이 아닙니다.”

베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그녀는 장갑을 낀 손으로 허공에 어떤 동작을 취해 보였다.

“손가락의 관절 마디가 보이지 않아요. 압력의 분포가 일정하지 않고 특정 지점에만 과도하게 쏠려 있죠. 사람의 손이라기보다는, 두꺼운 가죽이나 금속으로 된 절차용 도구, 혹은 아주 두터운 의례용 장갑을 낀 채 짓누른 형상입니다. 담당자가 누구인지 숨기려 한 게 아니라, 담당자의 ‘인간성’ 자체가 이 공정에 배제되어 있었다는 뜻이죠.”

로웬은 베라가 지적한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손자국이라기보다 낙인에 가까웠다. 서류를 처음 접어 봉투에 넣는 행위는 발신자의 의지를 봉인하는 신성한 절차다. 하지만 이 자국에선 어떤 의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기계적인 명령과 그에 따른 물리적인 압력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네스가 로웬의 어깨 너머로 장부를 훑으며 차갑게 조언했다.

“담당자의 성명을 특정할 수 없다면, 이름에 집착할 필요 없습니다. 관리국 규정 제4조 12항을 떠올리세요. ‘담당자의 신원이 불분명하거나 익명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특수 공정의 경우, 성명 대신 해당 시점의 절차 로그를 우선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이 무기질적인 손자국이 언제, 어떤 논리로 찍혔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로웬은 이네스의 말을 곱씹었다. 성자를 연기할 필요도, 행방불명된 담당자의 영혼을 위로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단지 이 기괴한 행정의 오류를 바로잡는 서기이자 집행자일 뿐이었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모르그가 장부의 종이 질감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툭, 투둑. 종이가 떨리는 소리가 기묘한 박자를 만들어냈다.

“박자가 어긋나 있어.”

모르그의 눈동자가 장부의 접힘선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종이가 접힌 간격, 이 압착흔이 남긴 깊이의 리듬이 이 도시의 시간과 맞지 않아. 로웬, 기억하나? 지난번 보고서에서 누락되었던 ‘종탑의 결락’ 사건 말이야. 특정 시간대에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그 밤, 도시의 모든 시계가 3초씩 늦게 갔던 날이 있었지.”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르그가 가리키는 접힘선의 간격은 마치 잘려 나간 시간의 틈새를 메우려는 듯 기괴하게 좁아져 있었다. 이 서류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접힌 것이 아니라, 뒤틀린 시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강제로 구겨진 것이었다.

“이름을 묻지 마세요. 장부에게 ‘언제’를 토해내라고 명령하십시오.”

모르그의 조언은 마침표처럼 명확했다. 로웬은 깊은 숨을 들이켰다.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업무의 피로감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깨웠다. 그는 더 이상 장부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행정관으로서의 권위를 담아 자신의 인장을 고쳐 쥐었다.

그는 빈칸 위에 인장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내리찍었다.

‘담당자 성명 부재 / 절차 로그 제출 요구’

인장이 종이에 닿는 순간, 장부가 비명을 지르듯 파르르 떨렸다. 종이 밑바닥에서부터 시커먼 잉크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글자가 아니라, 마치 검은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잉크는 ‘첫 접힘 담당자’라는 글자를 집어삼키고, 그 위에 거칠고 날카로운 필체로 새로운 문장들을 배설해내기 시작했다.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가운 금속성 냄새가 풍기는 시간의 기록이었다.

로웬의 시야에 장부가 토해낸 로그가 선명하게 박혔다.

[로그 분석 시작…….]

[공정 번호: 무효화됨]

[담당자: 식별 불가(의례용 의복 착용 확인)]

[특이사항: 대기 중 음파 진동 감지되지 않음. 도시 전체의 공진 주파수 이탈.]

피핀이 숨을 들이켰다. 베라와 이네스는 굳은 표정으로 장부의 마지막 줄을 응시했다. 로웬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진동을 느끼며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은 기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경고였다.

장부의 가장 깊은 곳, 첫 번째 접힘이 일어났던 그 찰나의 순간을 증명하는 문구가 핏빛 잉크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최초 접힘 시각: 종탑이 울지 않은 밤.]

그 문장이 완성되자마자, 사무실의 모든 시계가 일제히 멈췄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사라진 방 안에는 오직 젖은 재 냄새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로웬은 자신이 방금 금기된 시간의 뚜껑을 열었음을 직감했다.

197화. 종탑이 울지 않은 밤

장부가 토해낸 문장은 활자가 아니라 진동이었다.

‘최초 접힘 시각: 종탑이 울지 않은 밤.’

그 문구가 공중에 기록됨과 동시에, 집무실 사방에 걸린 시계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들이 거꾸로 회전하려다 비틀렸고, 시계추들은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생물처럼 유리 벽을 두드렸다. 로웬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장부의 서늘한 떨림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한 오류 메시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 세계의 시간이 한 번 뒤틀렸음을 증명하는 공문의 인장과도 같았다.

정적을 깬 것은 피핀의 코끝이었다. 그녀는 공기를 거칠게 들이마시더니, 헛구역질을 참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피 냄새인가?”

이네스가 검 손잡이를 쥔 채 묻자, 피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건…… 젖은 밧줄 냄새예요. 비를 잔뜩 머금어서 썩어가는 삼베 밧줄. 그리고 아주 오래된, 식어버린 쇳덩이 냄새.”

피핀의 말대로였다. 장부가 내뱉은 문장은 소리가 아니라 감각의 공백을 불러왔다. 종소리가 들려야 할 자리에 습한 금속의 악취가 들어찼다. 종탑의 종이 울리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침묵을 지켰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울려야 할 시간의 맥동이 거세당했다는 뜻이었다.

베라가 시계들의 광란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집무실 너머, 이 비정상적인 공간의 구조적 결함을 꿰뚫고 있었다.

“고장이 아니야.”

그녀의 단호한 진단에 로웬의 시선이 옮겨갔다. 베라는 부서진 시계 톱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종탑이 울지 않은 건 기계적 결함이나 외부의 파괴 때문이 아니야. 이건 ‘절차적 대체’의 흔적이야. 누군가 종을 치는 행위 자체를 다른 절차로 치환해버렸어. 그래서 시간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접혀버린 거지.”

“종소리 대신 무엇을 집어넣었다는 소리지?”

이네스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모르그였다. 그는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즉 ‘접힘선’의 간격을 손가락으로 더듬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바닥을 칠 때마다 일정한 박자가 만들어졌다.

“박자예요. 이 접힘선들이 갈라지는 간격이, 원래라면 종소리가 울려야 했을 박자와 일치해요. 누군가 종을 울리는 대신, 이 공간 자체를 접어서 시간을 넘긴 겁니다. 종줄을 당겨야 할 손이 다른 일을 했다는 증거죠.”

로웬은 상황을 정리했다. 관리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관리자는 ‘종을 울리는 의무’를 버리고 ‘공간을 접는 행위’를 선택했다. 그것이 이 모든 행정적 파행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닙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실무자 특유의 집요함이 서려 있었다.

“종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강제로 끼워 넣은 기록이 있을 겁니다. 종탑이 울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그 침묵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동으로라도 기록을 남겼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 거대한 시스템이 유지되는 최소한의 논리니까요.”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보고 없는 침묵은 반역이지만, 기록된 침묵은 절차지. 로웬, 수동 기록을 요구해.”

로웬은 다시 인장을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단순히 마력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이 비틀린 세계의 법규를 강제로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인장에 담았다.

종탑의 결락 시각과 현재 장부에 찍힌 로그의 모순. 그는 그 틈새를 정조준했다.

[종탑 결락 시각 대조 / 수동 종명 기록 제출 요구]

쾅!

인장이 장부의 종이 위를 강타했다. 단순한 타격음이 아니었다. 거대한 쇠문이 닫히는 듯한 굉음이 집무실을 울렸다. 장부는 잠시 저항하듯 검은 잉크를 사방으로 뿜어냈으나, 로웬은 밀어붙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담당자의 이름을 숨길 수 있다면, 그가 남긴 업무의 흔적이라도 내놓아라.’

그것이 로웬이 견지해온 행정관으로서의 투쟁 방식이었다. 성자처럼 용서할 수도, 용사처럼 베어 넘길 수도 없지만, 기록되지 않은 구멍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윽고 장부의 페이지가 미친 듯이 넘어가더니, 한 지점에서 멈췄다. 잉크가 번지며 글자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아니라, 직함과 상태를 나타내는 문장이었다.

피핀이 신음하듯 그 글자를 읽었다.

“……나왔어요.”

로웬의 눈이 장부의 가장 아랫단, 담당자 서명란 위에 적힌 문구에 머물렀다. 담당자의 이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 나타난 기록은 그 어떤 이름보다 기괴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수동 종명 대리인: 빈 의자]

로웬의 손에서 인장이 떨어질 뻔했다.

빈 의자.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직함이라기엔 실체가 없었고, 상태라기엔 너무나 구체적인 사물이었다. 종을 울리지 않은 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누군가는 그 ‘부재’의 상태로 대리 기록을 남겼다는 뜻이었다.

창밖에서 다시 한번 젖은 밧줄 냄새가 진동했다. 종탑의 꼭대기, 한 번도 울리지 않은 거대한 종이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신하듯 기분 나쁜 공명음을 내기 시작했다.

로웬은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며 빈 의자라는 단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이제 추적해야 할 대상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주인이 떠난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침묵으로 기록을 대신하고 있는 ‘공백’ 그 자체였다.

198화. 빈 의자의 대리 서명

장부가 뱉어낸 문장은 단순한 오기나 비유가 아니었다.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집무실 중앙의 공기가 비틀리며 무거운 질감이 내려앉았다.

끼익, 하는 짧은 마찰음과 함께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

등받이가 높고 가죽이 해진 집무용 의자 하나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위압적으로 놓여 있었다. 집무실에 원래 있던 비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의 틈새에서 방금 막 튀어나온 유물처럼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나타났네.”

피린이 코를 킁킁거리며 의자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미간이 가늘게 떨렸다. 수인 특유의 예민한 후각이 의자 주위의 공기를 핥았다.

“축축한 밧줄 냄새가 나. 바닷물에 절었다가 겨우 말린 것 같은 그런 냄새. 그리고…….”

피핀이 조심스럽게 의자 시트 위에 손을 올렸다가 황급히 떼어냈다.

“따뜻해. 방금 전까지 누군가 앉아 있었던 것처럼 체온이 남아 있어.”

누군가 앉아 있었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그 모순적인 상태가 실체화되어 눈앞에 놓인 것이다. 이네스가 차가운 눈으로 의자를 훑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로웬, 저걸 인물로 취급하지 마세요. 이름이 없는 게 아니라 이름이 있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기록의 권한만 가로챈 겁니다. 지금 즉시 증거물로 봉인하고 격리 절차를 밟아야 해요.”

“격리라기보단, 재현에 가깝겠지.”

베라가 팔짱을 낀 채 의자의 다리 부분을 관찰하며 말을 보탰다. 그녀의 시선은 의자 자체가 아니라, 의자가 바닥을 누르고 있는 지점을 향해 있었다.

“기록 보관 상태의 물리적 투영이야. 장부가 ‘빈 의자’라는 대리인을 인식했고, 그 대리인이 존재했던 현장을 집무실에 그대로 복사해 온 거라고 봐야 해. 저건 생명체가 아니라, 일종의 기록된 잔상이야.”

그때, 가만히 바닥의 흔적을 살피던 모르그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의자 다리가 놓인 지점 주변의 미세한 자국들을 더듬었다.

“박자가 맞지 않아.”

모르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로웬의 시선이 옮겨갔다.

“박자라고?”

“종탑의 수동 종명 기록에서 결락된 시각들 말일세. 내가 계산했던 그 공백의 리듬이, 이 의자 다리가 바닥을 찍은 압흔의 간격과 일치해. 의자가 그냥 놓여 있었던 게 아니야. 누군가 이 의자에 앉아 몸을 흔들었거나, 특정한 주기에 맞춰 의자를 움직였다는 뜻이지.”

모르그의 손가락이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탁, 탁, 타악. 그 소리는 묘하게도 종소리의 잔향을 닮아 있었다. 의자가 바닥을 누르는 행위 자체가 종을 치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기괴한 가설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로웬은 감상에 젖는 대신, 책상 위의 장부를 다시 끌어당겼다. 피핀이 느낀 체온이나 모르그가 발견한 박자는 실마리가 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행정적 실체. 대리인으로서 저 의자가 행사한 ‘권한’의 근거를 찾아야 했다.

로웬이 장부의 다음 페이지를 단호하게 넘기며 명령어를 찍어 눌렀다.

[수동 종명 대리 서명 원본 제출 요구.]

장부의 책장이 거칠게 펄럭였다. 평소라면 정갈한 서체로 기록된 문서의 사본이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장부의 종이 질감이 갑자기 딱딱하게 변하더니, 종이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장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장부의 빈 면에 깊은 구멍들이 뚫렸다.

그것은 활자가 아니었다.

네 개의 깊고 투박한 구멍. 의자의 다리 네 개가 종이를 짓눌러 뚫어버린 것 같은 압흔이었다. 잉크 한 방울 묻지 않은, 오직 무게와 압력만으로 새겨진 자국. 그것이 ‘빈 의자’라는 대리인이 남긴 유일한 서명이었다.

“글자가 없어…….”

피핀이 당혹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로웬은 그 압흔 위로 손을 올렸다. 거칠고 날카로운 종이의 단면이 손바닥을 찔렀다. 이 서명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아니라, 저 의자라는 존재 자체가 서명 그 자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름을 쓸 수 없는 존재가 대리인으로 서 있었다는 소리군. 혹은, 이름이 지워진 존재거나.”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그는 의자의 정체를 파헤치려 애쓰기보다, 이 비정상적인 결재 라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추적하기로 했다. 이 의자가 ‘대리인’이라면, 본래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을 ‘정식 점유자’가 있을 것이었다.

“대리인이 서명했다면, 위임한 자의 자리가 명시되어야 해.”

로웬이 다시 장부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기록의 내용이 아니라, 기록이 이루어진 ‘장소의 구조’를 건드렸다.

“대리 서명이 이루어진 당시의 좌석 배치 원본을 요구한다.”

집무실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장부는 이전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마치 시스템 내부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처럼, 누런 종이 위로 검은 잉크가 번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참의 지체 끝에 장부가 마지못해 마지막 한 줄을 토해냈다.

[경고: 좌석 배치 원본 없음. 해당 구역의 모든 물리적 위치 정보가 소멸되었습니다.]

로웬의 눈썹이 꿈틀했다. 원본이 ‘누락’된 것이 아니라 ‘없다’는 판정. 그리고 위치 정보 자체가 소멸했다는 통보.

그것은 저 의자가 놓였던 장소 자체가 이 세계의 지도에서 통째로 도려내졌다는 의미였다. 의자는 존재하지만, 그 의자가 놓일 ‘바닥’은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리가 없는데 의자만 남았다고?”

이네스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로웬은 이미 다음 단계의 모순을 직시하고 있었다.

원본이 없다면 대리 서명은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장부는 이 서명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 종탑의 시간을 조작했다.

로웬은 등받이가 높은 그 빈 의자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여전히 온기가 감도는 가죽 시트 위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무게감이 서서히 더 짙어지는 것만 같았다.

“원본이 없다는 건, 누군가 없앤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어야만 하는 곳’에서 서명이 이루어졌다는 뜻이겠지.”

로웬은 펜을 들어 장부의 경고 문구 바로 옆에 새로운 주석을 써 내려갔다.

‘존재하지 않는 좌석에서의 서명을 유효 기록으로 인정한 상위 승인자를 추적함.’

그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 중앙에 놓여 있던 빈 의자가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누군가 고개를 돌려 로웬을 바라보는 것처럼 옆으로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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