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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92화 합본. 방 안에 남은 것에서 발밑의 숟가락 소리까지 일러스트

190-192화 합본. 방 안에 남은 것에서 발밑의 숟가락 소리까지

190화. 방 안에 남은 것

‘방 안에 아직 하나 남았다.’

종이 뒷면,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것처럼 축축하게 번진 글자가 기괴한 빛을 내며 명멸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종이의 섬유질을 비집고 돋아난 생물처럼, 혹은 누군가 등 뒤에서 목덜미를 향해 내뱉는 서늘한 숨결처럼 그 자리에 박혀 있었다. 빛이 깜빡일 때마다 글자는 조금씩 형태를 비틀며 보는 이의 망막에 잔상을 남겼다.

순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사과문이 바르르 떨렸다. 마치 살아있는 짐승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종이 양 끝을 잡고 비트는 것처럼, 종이는 기괴하게 뒤틀리며 제 몸을 말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치부를 들킨 생물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는 것과 같았다. 방금 나타난 글자들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 영원히 감추려는 명백한 거부 반응이었다.

“억지로 펼치지 마십시오. 물리적 힘으로는 이 왜곡을 이길 수 없습니다.”

로웬이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그의 손은 이미 허공에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규격화된 인장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성자로서의 자비심이나 가여운 영혼에 대한 연민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구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철저히 관리하고 격리해야 할 위험 요소였다.

“이것은 단순한 개봉이나 확인 과정이 아닙니다. ‘사후 이의’의 단계를 넘어선, 실존하는 위협에 대한 ‘증거물 보존 개시’ 절차입니다. 지금부터 발생하는 모든 변칙 현상은 기록에 따라 통제될 것입니다.”

로웬은 냉정하게 사태를 규정했다. 그가 보존 절차를 선언하자 종이의 뒤틀림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하지만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사과문 하단의 ‘확인자’ 칸이 다시금 검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공백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입처럼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의 이름을 집어삼키려 탐욕스럽게 요동쳤다. 누군가 이름을 적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존재의 본질을 빨아들여 억지로 확인자로 등록시키려는 술책이었다.

베라가 한발 앞서 움직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요동치는 확인자 칸을 가차 없이 짓눌렀다. 동시에 종이가 접히려는 경계선을 다른 손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이름을 빌려줄 생각은 없어. 접히는 것도 여기까지다. 감히 누굴 집어삼키려 들어?”

베라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서늘한 마력이 종이의 물리적 변형을 강제로 억제했다. 종이는 비명을 지르는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으나, 베라의 완력과 마력 아래에서는 더는 말려 들어가지 못하고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그때, 옆에서 상황을 예리하게 지켜보던 이네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종이의 측면을 가리켰다. 그녀의 시선은 종이의 표면이 아니라, 종이가 접히며 생겨난 찰나의 틈새를 꿰뚫고 있었다.

“이건 본문이 아니에요. 공간의 비틀림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군요.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면은 종이의 앞면도, 뒷면도 아닙니다. 문서의 논리 구조 속에 억지로 끼워 넣은 ‘부속 은닉면’이에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읽을 수 없는 공간이죠.”

“부속 기록 비공개 조항인가. 역시나 구석구석 교활한 장치를 해두었군.”

모르그가 낮게 읊조리며 품 안에서 빛바랜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그는 사설 규약의 빼곡한 문구들 사이를 숙련된 솜씨로 훑어 내리더니, 특정 지점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여기 있군. ‘확인되지 않은 원동의 부존재가 증명될 시, 이에 부속된 모든 기록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며 이를 물리적 공간의 음영 뒤로 귀속시킨다.’ 법리적인 은닉술이야.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문서가 아니라, 일종의 보관함 입구인 셈이지. 문서가 접히려고 했던 건 단순히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은닉면을 완전히 폐쇄하려 했던 거다.”

그때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방 안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그녀를 괴롭히던 식은 수프 냄새는 이제 종이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냄새는 공기 중을 유령처럼 떠돌다 특정 지점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피핀의 시선이 방 한구석, 굳게 닫힌 문고리 아래로 향했다.

“냄새가…… 여기서 더 진해져요. 그냥 냄새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식탁 위에서 나는 눅눅하고 역한 냄새. 고기가 썩기 직전에 끓여낸 수프의 비린내 같은 거예요.”

피핀의 손가락이 문고리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등불의 각도상 자연스럽게 생겨야 할 그림자였지만, 유독 그 부분만은 주변보다 수만 배는 더 짙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액체처럼 일렁이며 문틀 안쪽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문고리 그림자 안쪽이에요. 저 안에 뭔가가…… 커다란 솥에 든 국자를 젓는 것 같은 냄새가 나요. 아주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소음과 함께요.”

로웬이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품에서 작은 성수병을 꺼내 손바닥에 적신 뒤, 공중에 가볍게 흩뿌렸다. 맑은 입자들이 그림자에 닿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끓어오르며 증발했다. 평범한 그림자라면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강제로 찢어서는 안 됩니다. 문서의 은닉면과 이 공간의 그림자가 동기화되어 있어요. 문서가 훼손되면 안의 내용물도, 이 방에 남은 마지막 단서도 함께 소멸할 겁니다. 정식으로 봉인 해제 절차를 요구합니다. 이 공간에 남은 ‘마지막 하나’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야 합니다.”

로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고, 벽면에 서린 습기가 얼어붙으며 빠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문고리 아래의 평면적인 그림자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2차원의 어둠이었던 그것은 어느덧 기괴한 질감을 얻으며 팽창하더니, 실제 금속 손잡이보다 더 입체적이고 날카로운 ‘그림자 손잡이’가 되어 허공으로 툭 튀어나왔다.

달각.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것은 누군가 안쪽에서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 너머, 보이지 않는 방 안쪽에서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끼익, 끼이익.

누군가 빈 냄비 바닥을 숟가락으로 긁어대는 듯한, 둔탁하고도 집요한 소리였다. 규칙적인 그 소리는 마치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들어오라는 초대 같기도 했고, 혹은 남겨진 수프 한 방울까지 핥아먹겠다는 광기 어린 갈구함처럼 들리기도 했다. 숟가락이 바닥을 긁는 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며 방 안의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191화. 문고리 안쪽의 식탁

검게 일렁이던 그림자가 기어코 문면(門面)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더 이상 평면적인 얼룩이 아니었다. 로웬의 손가락 끝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그림자는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질감을 모방하며 완벽한 손잡이의 형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가 구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첩 너머의 무게감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신 문 안쪽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변했다.

끼익, 끼이익.

금속 숟가락이 거친 돌바닥이나 그릇 바닥을 집요하게 긁어대는 소리. 완만했던 그 소음이 점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혹은 누군가의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것처럼 소음은 점차 날카로운 파찰음으로 변해 복도를 메웠다.

“열어젖힐까요?”

베라가 검 자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문틈의 기류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로웬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품 안에서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기록지를 꺼내며 낮게 읊조렸다.

“아니, 이건 강제로 여는 ‘개문’이 아니다.”

로웬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성자로서의 자비심이 아니라, 철저하게 규율을 따르는 실무자의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것은 봉인 해제 입회 절차다. 절차를 무시하고 문을 부수는 순간, 이 안에 기록된 모든 진실은 파기될 거다. 우리는 문서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그때, 그림자 속에서 흐릿한 형체로 머물러 있던 확인자 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종이가 스치는 듯 건조했다.

“……입회자(入會者). 절차를 진행하려면 기록에 남길 성명이 필요하다. 누가 이 권한을 승인하겠나?”

칸의 시선이 로웬을 향했다. 기록관으로서의 본능적인 요구였다. 칸의 손가락이 문서의 접힘선으로 향하려던 찰나, 베라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칸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이름은 나중에 적어라. 지금은 이 선을 넘지 마.”

베라의 경고는 단호했다. 문서의 접힘선은 곧 공간의 뒤틀림을 의미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입회 절차가 아니라 실종 절차가 시작될 판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코를 훌쩍이던 피핀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냄새?”

“네. 아주 오래된, 식어버린 수프 냄새요. 기름기가 겉돌다가 굳어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 나쁜 냄새가 문고리 아래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어요.”

피핀의 말에 이네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문틈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바닥과 문 사이에 난 가느다란 틈새를 유심히 관찰했다. 보통의 방이라면 그 너머로 건너편 방의 바닥이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도, 평범한 석재 바닥도 아니었다.

“이건 실제 방이 아니에요.”

이네스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보이시나요?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결이 목재나 석재가 아니라 섬유질이에요. 이건 문서 부속 은닉면과 결합된 ‘기록 보관면’이에요. 우리가 보고 있는 문은 물리적인 출입구가 아니라, 거대한 장부의 갈피를 입체적으로 구현해 놓은 것에 불과해요.”

로웬의 눈썹이 꿈틀했다. 기록 보관면. 그렇다면 이 안에서 들리는 소리와 냄새 역시 과거의 어느 시점이 박제된 채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모르그가 고문서의 규약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사설 규약 4조 12항…… ‘식탁 보관(Table Storage)’이라는 은어가 있네.”

“식탁 보관요?”

피핀이 되물었다. 모르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 되는 증인을 처리할 때 쓰는 관료들의 은어지. 죽이지는 않되, 식탁 앞에 앉혀둔 채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즉, 영구 격리된 기록물을 뜻하네.”

모르그의 해석이 끝나기 무섭게 로웬이 들고 있던 봉인 해제 주문의 마지막 문구를 읊었다.

“절차는 완료되었다. 증명하라.”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를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비늘처럼 벗겨져 나갔다. 문서를 훼손하지 않고도 입회 봉인이 일부 해제된 것이다.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방 안은 예상보다 훨씬 좁았다. 아니, 그것은 방이라기보다 거대한 서류함 내부 같았다. 사방의 벽면은 빽빽한 글자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중앙에 덩그러니 낡은 나무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피핀이 말한 대로 식어빠진 수프가 담긴 그릇 하나와 숟가락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도 누군가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식탁 표면에는 숟가락으로 집요하게 긁어낸 듯한 깊은 자국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비어 있네요.”

베라가 경계하며 식탁으로 다가갔다. 그릇 안의 수프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곰팡이조차 피지 못할 정도로 박제되어 있었다. 베라는 조심스럽게 그릇 옆의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릇 바닥에 가려져 있던 부분이 드러났다.

로웬은 숨을 들이켰다. 빈 그릇 아래, 식탁의 나무판 위에는 날카로운 금속으로 수천 번은 덧그은 듯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비명이자, 결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최후의 기록이었다.

[ 두 번째 사과는 받지 않았다. ]

그 문장을 확인하는 순간, 열려 있던 문이 거세게 흔들리며 복도의 촛불들이 일제히 꺼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다시, 숟가락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식탁 위가 아니라, 그들의 발밑이었다.

192화. 발밑의 숟가락 소리

끼이익, 끼익.

식탁 위가 아니었다. 소리는 로웬의 구두 굽 바로 아래, 그리고 일행이 딛고 선 대리석 바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누군가 바닥재 너머 거꾸로 매달린 채 숟가락으로 천장을 긁어대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었다.

“물러서십시오.”

베라가 로웬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지만, 바닥의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는 진동이 되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바닥에 쌓여 있던 얇은 먼지들이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휘젓는 것처럼, 먼지들이 로웬 일행의 발치에서부터 둥글게 원을 그리며 밀려났다. 그 모습은 흡사 식탁 위에 놓일 빈 그릇의 자리를 표시하는 것과 같았다.

베라의 검끝이 허공을 갈랐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검날에 무언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공간의 뒤틀림, 이른바 ‘접힘선’이었다. 얇은 실처럼 늘어진 공간의 단면이 칼끝에 감기며 지직거리는 소음을 냈다.

“공간이 물리적으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단순히 환각이 아닙니다.”

베라의 경고에 피핀이 코를 킁킁거렸다.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형, 이거 이상해. 냄새가…… 바닥 밑에서 나는 게 아니야.”

“무슨 소리지?”

로웬의 물음에 피핀이 제 발등을 내려다보며 뒷걸음질 쳤다.

“우리 신발 안쪽이야. 신발 안에서 식어빠진 수프 냄새가 올라와. 축축하고, 비린내가 나.”

피핀의 말에 로웬은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감각이 예민해지자 정말로 장화 안쪽에서부터 차가운 습기와 함께 역겨운 음식 냄새가 스며 나오는 기분이었다. 기록이 단순히 시각과 청각을 침범하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증거였다.

이네스가 손에 든 측정기를 흔들며 날카롭게 외쳤다.

“기록 보관면의 판정이 변경되었습니다! 보존 구역이 ‘방’ 단위에서 ‘입회자 동선’으로 확장됐어요. 우리가 걷는 모든 곳이 지금 이 순간 ‘식탁’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입회자는 관찰자일 뿐인데.”

모르그의 질문에 이네스는 대답 대신 바닥에 박힌 빈 그릇 자국들을 가리켰다. 소리는 이제 복도 전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의 숟가락이 일제히 바닥을 긁어대는 소음은 고문에 가까웠다.

모르그가 급히 고문서의 여백에 적힌 은어들을 해독하며 덧붙였다.

“식탁 보관 규약의 추가 조항을 찾았습니다.……‘빈 좌석은 입회자로 보충한다’. 맙소사, 이건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의 존재를 강제로 배역에 끼워 넣겠다는 뜻입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확인자 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깝고, 명확한 목소리였다.

“서명을…… 이름이 필요합니다. 식사가 시작되려면 손님의 성함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허공에서 다시 한번 접힘선이 로웬의 손등을 향해 뻗어 나왔다. 마치 펜을 쥐어주려는 듯, 혹은 강제로 지장을 찍게 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베라가 검을 휘둘러 그 선을 쳐냈지만, 찢어진 공간의 틈새로 더 많은 ‘숟가락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칸의 그림자가 로웬의 발치까지 늘어졌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딛는 바닥마다 먼지가 원형으로 밀려나며 식기 자리가 만들어졌다.

로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덮쳐오는 기괴한 현상들을 냉정한 실무자의 눈으로 응시했다. 공포에 질려 이름을 내뱉는 순간, 이 기록의 일부로 고착되어 영원히 ‘빈자리’를 채우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펜을 드는 대신 가슴팍에서 배달 관리인의 인장을 꺼내 쥐었다.

“이름은 제공하지 않는다.”

로웬의 목소리는 소음 사이를 뚫고 차갑게 울렸다.

“현 시간부로 관리번호 9-441번 기록물의 ‘입회면 전이 중지 신청’을 선언한다. 기록 보관면의 확장은 입회자의 안전 규약을 위반했다.”

“서명이…… 필요합니다.”

“닥쳐라. 절차대로 하겠다.”

로웬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에서 숟가락 소리가 비명처럼 커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배달 번호와 수취 거부 사유, 그리고 해당 구역의 보관 책임자 성명을 요구한다. 본 기록물은 현시점부로 ‘배송 불가’ 상태로 전환되었음을 통보한다. 입회자의 동선을 식탁으로 규정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이 방의 모든 보존 봉인을 강제 집행하겠다.”

로웬의 선언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관리인의 권능이 실린 언령이 복도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잠시 소음이 멎었다. 바닥을 긁던 숟가락 소리도, 신발 안쪽에서 올라오던 역겨운 수프 냄새도 찰나의 정적 속에 잠겼다. 확인자 칸의 그림자가 불규칙하게 일렁였다. 시스템과 기록의 논리가 로웬의 실무적 대응에 부딪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끼이익.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바닥이 아니었다.

로웬의 발치에서부터 시작된 숟가락 자국들이 거대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며 복도 바닥 전체로 뻗어 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원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좌석이 배치된, 거대한 연회장의 좌석 배치도였다.

그리고 그 수많은 빈자리 중 가장 상석, 로웬이 서 있는 바로 그 지점으로 주변의 먼지와 잿가루가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로웬이 물건을 보낼 때 사용하는 ‘배달 표식’과 기묘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로웬의 눈썹이 꿈틀했다. 잿가루는 마치 그의 서명을 대신하려는 듯, 그의 발등 위로 차곡차곡 쌓여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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