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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89화 합본. 두 번째 사과문에서 동의하지 않은 수취인까지 일러스트

188-189화 합본. 두 번째 사과문에서 동의하지 않은 수취인까지

188화. 두 번째 사과문

‘대신 용서받음.’

그 기괴한 문구가 찍힌 도장 자국 아래로 시커먼 잉크가 번져 나갔다. 마치 깊게 패인 상처에서 갓 흘러나온 선혈처럼, 붉고 검은 필치가 종이의 결을 따라 꿈틀거리며 한 획씩 기어갔다. 곧이어 빳빳하게 굳어 있던 두 번째 사과문 장이 스스로를 비틀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가죽이 비명을 지르며 뒤집히듯, 종이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로웬의 눈앞에 활짝 펼쳐졌다.

공간을 메운 것은 서늘하고도 무거운 정적이었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회랑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눈으로, 공중에 부유하듯 떠오른 문서를 갈무리하며 툭 내뱉었다.

“후속 절차가 시작됐군. 이건 사과문이라기보다, 용서 처리가 완료되었다는 사후 통보문에 가깝다.”

그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건조했다. 마치 구청 창구에서 기계적으로 날아온 세금 고지서를 읽어주는 공무원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 문장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미 ‘시스템’에 의해 용서가 처리되었으니, 수취인은 그저 정해진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강압적인 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로웬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그는 성자나 순교자 같은 초연한 표정을 짓는 대신, 아주 냉정하고 사무적인 시선으로 그 문서를 뜯어보았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는 대신, 그는 자신의 이성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냈다.

“통보문이라고 했나?”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감정에 휩쓸린 자의 떨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회랑, 분류가 틀렸어. 이건 사과문이 아니다. 상대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행된 통보문은 문서 체계상 ‘사과’ 항목에 들어갈 수 없어. 이건 명백한 행정적 오류이자 문서 분류 규정 위반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감정적 고통이나 과거의 피해를 구태여 호소하지 않았다. 대신 철저하게 실무적인 논리로 그 종이가 가진 권위를 부정했다. 상대가 제멋대로 ‘용서받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통보해 왔다면,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절차적으로 중대한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는 식이었다.

그때, 펼쳐진 종이의 하단에 위치한 ‘확인자’라는 공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공기가 일렁이며 ‘로웬’이라는 세 글자를 강제로 새겨 넣으려 했다. 그 이름이 완성되는 순간, 이 일방적인 통보문은 법적, 마력적 효력을 완벽히 갖춘 합의서로 변질될 판이었다.

“어딜 감히 손을 대.”

옆에 서 있던 베라가 전광석화처럼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한 장의 오른쪽 모서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육중한 압력이 종이를 짓눌렀고, 허공에서 글자를 빚어내던 마력의 흐름이 뚝 끊겼다. 베라는 어금니를 사려 물며 차갑게 덧붙였다.

“이름은 아무 데나 적는 게 아니야. 특히 이런 쓰레기 같은 종이 조각에는 더더욱. 네놈들의 편리한 결론에 우리 도련님의 이름을 이용하게 둘 줄 알았나?”

인장 위로 불길한 진동이 일었지만 베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이네스가 문서의 형식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서류의 허점을 찾아내는 감사관의 그것과 같았다.

“서식이 엉망이네요. 통상적인 ‘동의’와 ‘수령’, 그리고 ‘용서’의 서식은 엄연히 법적으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 문서는 수령 확인을 유도하면서 교묘하게 용서의 효력까지 포괄하려 들고 있어요. 상위 규약에서 정한 표준 서식을 무시한 이런 조잡한 문서는 증거물로서의 가치조차 없습니다. 이건 반려 사유예요.”

이네스의 손가락이 문서의 여백을 훑었다. 그녀의 지적대로, 그 종이는 용서를 구하는 자의 간절함 대신 어떻게든 절차를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는 조급함과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르그가 품 안에서 낡은 안경을 꺼내 쓰며 거들었다. 그는 문서 가장자리에 아주 작게, 마치 장식처럼 새겨진 고대 어구를 판독해 냈다. 그것은 일반적인 눈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계약의 독소 조항이었다.

“……사설 규약 제4조 12항. ‘침묵 동의’ 조항이로군. 아주 오래되고 낡은, 악취 나는 법이지. 수취인이 일정 시간 내에 명시적인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모든 조건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고약한 논리야.”

모르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지식인으로서 이런 저열한 수법에 대한 혐오감이 묻어났다.

“이 사과문은 진심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야. 침묵을 이용해 강제로 마침표를 찍으려 고안된 덫이지. 피해자의 입을 막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려 면죄부를 얻으려는 수작이란 말이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단순히 물리적인 온도가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지독하게 습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의 잔재가 밀물처럼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피핀이 코를 훌쩍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남들이 맡지 못하는 감정의 편린을 포착하는 피핀의 감각이 극도로 곤두섰다.

“……이상한 냄새가 나.”

피핀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방 냄새야. 아무도 환기하지 않아서 아주 눅눅하고, 먼지가 가득해. 그리고……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 냄새도 나. 그런데 이상해. 그 옆에서 식은 수프 냄새가 같이 나고 있어. 아무도 먹지 않아서 하얗게 굳어버린 차가운 수프 냄새. 기다리다 지쳐서, 결국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그런 냄새 말이야.”

그것은 시각적인 묘사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한 공간의 이미지를 환기했다. 누군가 고립된 채, 용서받지 못할 행위를 저지르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남겨진 고독의 풍경이었다. 사과문의 주인이 숨기고 싶어 했던, 혹은 이 일방적인 통보로 영원히 덮어버리려 했던 진실의 단면이었다.

종이 위에 다시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베라가 가하는 압박과 이네스의 논리적인 부정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은 막무가내로 결론을 내리려 발악했다. 종이 자체가 비명을 지르듯 파르르 떨리며, 마지막 문장을 강제로 인쇄해 나갔다.

[ 수취인은 이미 동의했다. ]

그 오만한 문장이 문단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마치 신의 선언이라도 되는 양,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종이의 광택이 갈무리되려던 그때였다.

그 강압적인 선언 바로 아래, 보일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글씨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포처럼 비쳐 나왔다. 그것은 시스템이 정한 매끄러운 활자가 아니었다. 종이의 뒷면,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심연에서 누군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 새긴 듯한, 투박하고 처절한 필체였다.

글씨는 검은 잉크가 아니라, 마치 오래된 원한이 고여 만들어진 것 같은 핏빛을 띠고 있었다.

[ 동의한 적 없다. ]

로웬의 서늘한 시선과 그 작은 글귀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일방적인 용서를 종용하던 사과문은 더 이상 스스로를 접지도, 빛을 내지도 못한 채 비참하게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거대한 시스템이 쌓아 올린 가짜 면죄부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었다.

189화. 동의하지 않은 수취인

종이 위에 박제되어 있던 글자들이 비명을 지르듯 뒤틀리기 시작했다. ‘수취인은 이미 동의했다’라는 오만한 문장 위로, 검붉은 얼룩 같은 잉크가 밑바닥에서부터 배어 나왔다. 그것은 마치 억울하게 매장당한 이가 무덤 흙을 파헤치고 지상으로 손을 뻗는 형국이었다. 매끄럽게 가공된 양피지의 표면이 거칠게 일어나며, 그 위로 차갑고도 날카로운 부정의 의사가 새겨졌다.

[ 동의한 적 없다. ]

그 문장이 떠오르자마자, 완성된 줄 알았던 사과문의 결론부가 보기 흉하게 번져나갔다. 용서가 처리되었다는 통보문 형식의 매끄러운 문체들은 검은 잉크에 녹아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질 듯 출렁거렸다. 성스러운 기운을 머금고 빛나던 문장들이 한순간에 오염된 오물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이미 절차는 끝났습니다. 사후 이의 제기는 행정적 효력이 없음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회랑의 대변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그의 눈빛에는 당혹감보다는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문서에 적힌 활자는 곧 진리였고, 그 진리가 한번 확정된 이상 뒤늦게 나타난 감정 섞인 낙서 따위는 단순한 노이즈에 불과했다. 그들은 로웬이 이 '기적적인 화해'라는 이름의 포장지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무대 뒤로 물러나길 원했다.

하지만 로웬은 번져가는 문서를 응시하며 서늘하게 대꾸했다.

“이것은 사후 이의 제기가 아닙니다.”

그는 잉크가 번져나가는 지점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에서 검은 잉크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수취인의 동의라는 전제 조건 자체가 성립한 적이 없음을 증명하는, ‘원동(原動)의 부존재 확인’ 절차입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동의를 근거로 작성된 문서라면, 이 사과문은 통보문이 아니라 허위 공문서에 불과하니까요. 절차의 선후 관계를 따지기 전에 문서의 자격부터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는 결코 자신을 가련한 피해자로 포장하거나 주위의 동정심에 호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할 정도로 냉정하게, 눈앞의 문서가 가진 논리적 결함과 실무적 오류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상대가 신성(神聖)을 논할 때 그는 실무(實務)를 논했고, 상대가 용서를 강요할 때 그는 증거를 요구했다.

그 순간, 문서 하단의 ‘확인자’ 칸이 기괴하게 진동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석에 끌려가듯, 공백이었던 칸이 주변의 먹물을 빨아들이며 로웬의 이름을 강제로 새겨 넣으려 했다. 서명이 강요되는 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로웬의 손을 짓눌러 펜을 쥐게 하려던 찰나, 옆에 서 있던 베라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로웬의 손을 잡아채는 대신, 단단한 손등으로 문서의 확인자 칸을 강하게 눌러 덮었다.

“주인님, 서두를 것 없습니다. 이 종이는 아직 정직하지 않으니까요.”

베라의 손등 아래서 서명란이 부들부들 떨리며 저항했다. 마치 잡힌 짐승이 빠져나가려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묵직한 힘으로 종이의 술수를 억눌렀다. 그 짧은 틈을 타 이네스가 문서 전체의 구성을 위에서 아래로 날카롭게 훑어내리며 지적을 던졌다.

“단순한 사과문이 아니군요. 수령 확인과 용서의 의사 표시, 그리고 향후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침묵 동의까지 한데 뒤섞어놨어요. 이런 복합 서식은 각 조항에 대한 개별 동의와 고지가 필수인데, 이 문서는 교묘하게 모든 것을 하나로 뭉뚱그려놨습니다. 이건 명백한 위조이자 서식 규정 위반이에요. 행정적으로는 쓰레기나 다름없죠.”

이네스의 분석에 힘을 보태듯, 조용히 자료를 분석하던 모르그가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동의한 적 없다’는 문구 주변에 남은 미세한 흔적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작은 글씨들…… 이건 규약에 정해진 공식 활자가 아닙니다. 문서를 작성할 때 미처 다 지워지지 않은, 혹은 의도적으로 은폐된 ‘잔류 기록’이에요. 종이 자체가 기억하고 있는 실제 사건의 파편이라는 소리죠. 기록을 덮어쓰려 했지만, 원본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잉크를 뚫고 터져 나온 겁니다.”

그때였다. 구석에서 연신 코를 킁킁거리던 피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문서 뒤편으로 다가갔다. 평소라면 장난기 가득했을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아까부터 계속, 이 종이 안쪽에서요.”

“냄새라니? 잉크 냄새 말이냐?”

로웬의 물음에 피핀이 고개를 저으며 종이 뒷면의 미세하게 접힌 틈새를 가리켰다.

“식은 수프 냄새요. 아주 오래전 방치되어 기름기가 굳어버린, 차가운 수프 냄새가 이 종이 뒷면의 접힌 공간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단순한 종이 냄새가 아니에요. 이건…… 누군가의 생활감이 진하게 묻어 있는 공간의 냄새예요. 아주 좁고, 아주 외로운 방의 냄새요.”

피핀의 말에 회랑의 관계자들이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의 견고한 안면 몰수 뒤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로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차갑게 명령했다.

“문서를 접지 마십시오. 증거물 보존 원칙에 따라 이 상태 그대로 펼쳐서 고정하세요. 뒷면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면, 그것까지 전부 이 문서의 일부이자 증거로 간주하겠습니다.”

로웬의 지시에 따라 베라가 눌렀던 손을 떼고 마력을 실어 종이를 허공에 팽팽하게 고정했다. 그러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평평해야 할 종이 뒷면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얼룩이나 조명에 의한 현상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형상이었다.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각도임에도 불구하고, 종이 뒷면에는 굳게 닫힌 방의 문고리 그림자가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마치 종이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이 실존하는 것처럼, 그림자는 입체감을 띠며 벽면으로까지 번져나갔다.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서늘해졌고, 사람들의 숨결은 하얀 김이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그 문고리 그림자 아래로, 아까보다 더 짙고 선명한 글자들이 피처럼 배어 나왔다. 그것은 문서의 내용을 완전히 부정하는 동시에, 누군가 숨기고 싶어 했던 진실을 폭로하는 최후의 기록이었다.

[ 방 안에 아직 하나 남았다. ]

그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집무실 안의 온도는 빙점 아래로 떨어진 듯했다. 수취인이 끝내 동의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 그리고 회랑 측에서 이 문서를 통해 그토록 급하게 ‘용서’를 강요하고 사건을 종결지으려 했던 근거가 그 어두운 그림자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로웬은 손끝에 닿는 서늘하게 식어버린 종이의 감각을 느끼며, 자신을 압박하던 대변인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제야 제대로 된 보고서가 나오겠군. 당신들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서명되지 않은 기록 말입니다.”

종이 너머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환청 같은 고요함 속에, 로웬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취인이 거부한 것은 사과가 아니라, 그들이 꾸며낸 거짓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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