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179-181화 합본. 이름 칸을 비우는 법에서 따라가는 증인의 발자국까지 일러스트

179-181화 합본. 이름 칸을 비우는 법에서 따라가는 증인의 발자국까지

179화. 이름 칸을 비우는 법

기록 봉투의 빈 칸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아가리처럼 베라의 존재를 빨아들이려 요동치고 있었다. 베라의 손등에 새겨진 낙인이 검붉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살이 타는 비릿한 냄새가 아니라, 영혼의 일부가 강제로 인쇄기에 끼여 들어가는 듯한 기괴한 감각이었다.

“...윽!”

베라가 신음하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낙인의 열기가 손등을 넘어 팔뚝으로, 다시 심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우산망 요원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베라의 발끝을 밟았다. 요원의 손이 봉투를 향해 뻗어 나왔다. 감정이 거세된 무채색의 목소리가 귓가를 짓눌렀다.

“확정되지 않은 기록은 오염의 원인이 됩니다. 주인을 찾지 못한 이름 칸에 베라의 서명을 기입하십시오. 그것이 절차이며, 이곳의 질서입니다.”

압박은 물리적인 무게를 동반했다. 요원이 내뿜는 기운은 마치 거대한 납 덩어리가 공기 중에 흩뿌려진 것처럼 무거웠다. 로웬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봉투에 그려진 둘째 손가락 모양의 테두리가 마치 베라를 지목하며 비웃는 듯했다.

이름을 쓰는 순간, 베라는 이 기록의 ‘단일 소유자’가 된다. 그것은 곧 검은 우산망이 설계한 함정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단일 표적이 된 자는 그들이 휘두르는 권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때,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냄새가 이상해. 이 지독한 잉크 냄새 말이야.”

피핀이 베라의 손등과 봉투 사이의 허공을 손으로 휘저었다.

“이거, 딱 한 사람만 노리고 있어. 잉크가 아주 굶주린 짐승처럼 베라 누나한테만 달려들려고 해. 이름 칸이 하나라서 그래. 표적이 하나니까 힘이 집중되는 거라고.”

로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피핀의 감각은 언제나 본질을 꿰뚫었다. 기록 수신 권한이 한 명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과부하이자 강제 집행이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였다.

“이름을 쓰지 않고도 이 기록을 고정해야 한다.”

로웬의 말에 이네스가 즉각 반응했다. 그녀는 이미 공중에 복잡한 마력 기하학 수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마력의 실타래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풀려나와 봉투 주변을 감쌌다.

“로웬 님의 말이 맞아요. 권한을 쪼개야 해요. 기록 수신 권한을 임시 다중 보관 상태로 전환하면, 단일 표적에 대한 압박을 분산시킬 수 있어요. 일종의 ‘공동 명의’로 만드는 마력식이에요.”

“가능하겠나?”

“이론상으로는요. 하지만 기록의 무게를 견딜 ‘앵커’가 필요해요. 단순히 마력만으로는 이 기록의 인력을 버틸 수 없어요.”

모르그가 옆에서 계산 수치를 읊었다. 그의 안경 너머로 데이터의 잔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세 개입니다. 독립된 증거 앵커가 최소 세 개는 확보되어야 이 이름 칸의 흡수력을 상쇄할 수 있습니다. 각 앵커는 기록의 서로 다른 측면을 증명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죠. 제한 시간은 180초. 그 안에 앵커가 설정되지 않으면 베라의 낙인이 폭주해 이름 칸을 강제로 채우게 될 겁니다.”

로웬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검은 우산망 요원의 서늘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명령했다.

“이네스, 즉시 마력식을 구동해라. 내가 첫 번째 앵커를 맡겠다.”

이네스의 손등 위로 문양이 떠오르며 봉투의 공백으로 마력의 쇠사슬이 연결되었다. 로웬이 그 쇠사슬 중 하나를 움켜쥐었다. 기록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로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베라, 네 낙인의 힘을 억누르지 말고 앵커로 전환해. 네가 피해자가 아니라 이 기록의 ‘관리자’ 중 한 명임을 선언하는 거다.”

베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등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빛이 로웬의 마력과 섞이며 두 번째 앵커로 변했다. 이름 칸으로 빨려 들어가려던 그녀의 존재감이 비로소 균형을 찾기 시작했다.

“마지막 하나는 내가 할게!”

피핀이 나섰다. 그는 잉크의 흐름을 직접 손으로 잡아채듯 허공을 움켜쥐었다. 짐승 같은 직관으로 기록의 ‘냄새’를 추적해온 그가 세 번째 연결고리가 되었다.

검은 우산망 요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의 계산에 없던 변수였다. 기록은 단 한 명의 죄인을 지목해야 하는데, 이제 그 무게가 세 명에게 나뉘어 흐르고 있었다. 봉투의 빈 칸은 이름을 채우지 못한 채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떨렸다.

“이런 방식은... 절차 위반이다.”

요원이 거칠게 손을 뻗으려 했으나, 로웬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가로막았다.

“절차? 우리는 지금 기록의 정당한 보관 방식을 논의 중이다. 증거가 확정되기 전까지 권한을 분산하는 것은 조사관의 재량이지. 네놈들이 간섭할 영역이 아니다.”

모르그의 계산대로 시간이 흘렀다. 세 개의 앵커가 단단히 고정되자, 이름 칸을 채우려던 압박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대신, 봉투 표면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단 하나였던 기다란 이름 칸이 마치 세포 분열을 하듯 꿈틀거리더니 세 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잉크가 번지며 새로운 문장이 그 위에 떠올랐다.

셋째 손은 증인을 고른다.

동시에 봉투 위에 그려져 있던 둘째 손가락의 테두리 옆으로, 보이지 않던 세 번째 손가락의 형상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 기괴한 문구에 꽂혔다. 기록은 이제 단순히 이름을 요구하는 단계를 넘어, 이 사건을 목격하고 책임질 자들을 강제로 선택하고 있었다.

180화. 증인을 고르는 셋째 손

갈라진 세 개의 이름 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던 양식지가 빛을 내뿜으며 현장을 훑기 시작했다. 로웬의 시선이 그 기괴한 궤적을 쫓았다. 179화에서 세 개의 증거 앵커를 박아 넣은 결과였다. 단일 표적으로 좁혀져야 할 인과율이 셋으로 찢기자, 시스템은 강제로 새로운 변수를 도출해 냈다.

‘셋째 손은 증인을 고른다.’

그 문구가 머릿속을 울림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현장을 포위하고 있던 검은 우산망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로웬 일행의 앞을 막아서고, 동시에 주변의 민간인과 저급 관리들을 밀어냈다.

“증거의 오염이 확인되었다. 지금부터 모든 현장 인원은 검은 우산망의 통제하에 격리된다. 증인 확보는 우리 관할이다.”

차가운 금속음 같은 목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그들은 단순히 상황을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갈라진 이름 칸이 누구를 지목하든, 그 ‘증인’을 자신들의 수중에 넣어 입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로웬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피핀이었다. 피핀은 코를 씰룩이며 허공에 떠다니는 잉크 냄새를 맡았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야. 이건 죄인의 냄새가 아니야.”

피핀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로웬이 고개를 돌려 피핀을 응시했다.

“무슨 뜻이지?”

“이 잉크 냄새 말이야. 뭔가 억울하거나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찾는 게 아니야. ‘본 것을 숨긴 자’의 냄새야. 아주 지독하고 끈적끈적한…… 입술을 짓눌러 닫은 것 같은 그런 냄새.”

피핀의 감각은 예리했다. 이 증명 양식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기록되지 못한 진실, 혹은 의도적으로 누락된 시선을 찾아내려는 강제 집행문이었다.

그 사이, 이네스와 모르그는 바닥에 새겨진 마력 회로의 변칙을 계산하고 있었다. 이름 칸이 셋으로 갈라지며 발생한 마력의 파동은 단순한 과부하가 아니었다. 다중 보관 마력식의 구조적인 균열이었다.

“로웬, 이 구조 좀 봐요.”

이네스가 단말기 대신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어 마력 구조도를 띄웠다.

“단순한 증인 채택이 아니에요. 이건 ‘예외 조항’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계산식이에요. 이름 칸이 세 개가 된 건, 우리가 세 개의 증거를 박아 넣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이 ‘세 명의 관찰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뜻이라고요.”

“즉, 증인 후보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군.”

모르그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의 마법 지팡이 끝에서 미세한 빛이 튀었다.

“하지만 검은 우산망 녀석들이 저렇게 가로막고 있으면, 시스템이 대상을 특정하지 못하고 공회전하게 돼요. 그들이 설치한 차폐막이 ‘관찰자’의 마력 반응을 지우고 있거든요.”

검은 우산망 요원들은 점점 더 원을 좁혀 왔다. 그들의 손에는 마력 억제용 구속구가 들려 있었다. 증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 아래, 사실상 현장에 있는 모든 이를 용의자로 몰아 입을 막으려는 처사였다.

로웬은 상황을 반대로 뒤집기로 했다. 저들이 절차를 무기로 사용한다면, 이쪽은 그 절차의 ‘예외’를 공략하면 된다.

“베라, 피핀. 저들의 차폐막을 깨뜨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강화해.”

“응? 막으라는 게 아니라 더 세게?”

피핀이 의아한 듯 물었지만, 로웬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지시를 이어갔다.

“검은 우산망은 ‘현장의 증인’을 격리하려 한다. 하지만 시스템이 찾는 증인은 우리가 보는 범위 안에 없을 수도 있어. 이네스, 마력식의 균열을 역방향으로 전개해. ‘내부의 증인’이 아니라 ‘외부의 관찰자’를 찾는 거다.”

로웬의 의도를 파악한 이네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즉시 영창을 시작했다. 다중 보관 마력식의 균열 사이로 역류하는 마력이 스며들었다.

검은 우산망 요원들은 당황했다. 자신들이 친 차단벽이 오히려 증명 양식의 추적 성능을 증폭시키는 렌즈 역할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로웬은 차갑게 웃으며 복도의 어두운 구석, 요원들의 등 뒤를 가리켰다.

“증인은 현장에 있는 자 중에서 고르는 게 아니야. 이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기록하고 있는 ‘진짜 관찰자’를 찾는 거지.”

순간, 허공을 떠돌던 세 개의 이름 칸 중 하나가 화살처럼 날아갔다. 그것이 향한 곳은 요원들 뒤편, 빈 공간처럼 보였던 어둠 속이었다.

“커헉!”

억눌린 비명과 함께 투명화 마법이 깨지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은 우산망의 정규 요원복이 아닌, 기묘한 은색 안경을 쓴 관찰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손에는 기록용 장치까지 들려 있었다.

그는 요원들이 증인을 격리하는 동안 그 모든 과정을 문서화하여 상부에 보고할 임무를 띤, 이른바 ‘그림자 증인’이었다. 로웬은 시스템의 절차를 역이용해, 검은 우산망이 숨겨두었던 자신들만의 증인을 강제로 무대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요원들이 당황하여 그를 보호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름 칸이 남자의 가슴에 박히듯 달라붙었다. 잉크가 번지며 그의 가슴팍에 보이지 않던 낙인이 새겨졌다.

“이제 증인이 확정됐군.”

로웬이 한 걸음 다가서자, 요원들이 무기를 겨눴다. 하지만 그들의 위협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봉투, 모든 사태의 시작이었던 그 종이 뭉치가 기괴하게 뒤틀리며 안쪽에서 새로운 종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혀를 내미는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여, 방금 정체가 탄로 난 ‘관찰자’의 발치까지 뻗어 나갔다.

종이 위에는 새로운 지시사항이 핏빛 잉크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증인은 심부름꾼을 따라간다.]

그 글귀가 나타남과 동시에, 관찰자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인형처럼, 그는 로웬 일행이 서 있는 방향으로, 그리고 그 너머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쫓아가야 해.”

로웬의 짧은 명령과 함께 일행이 움직였다. 검은 우산망 요원들이 가로막으려 했지만, 증명 양식이 내뿜는 강렬한 마력의 압박이 그들을 밀쳐냈다. 이제 사건은 단순한 증거 찾기를 넘어, 시스템이 지목한 ‘증인’이 이끄는 미지의 경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심부름꾼을 따라가는 증인, 그리고 그 증인을 쫓는 로웬 일행.

봉투 속에서 튀어나온 마지막 지시가 향하는 곳은, 아직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한 진실의 밑바닥이었다.

181화. 따라가는 증인의 발자국

검게 그을린 공기 너머로 기괴한 진동이 울렸다. 봉투의 안쪽, 그 가느다란 틈새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물리적인 파동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제약에 가까웠다.

‘증인은 심부름꾼을 따라간다.’

그 문장이 공중에 각인되는 순간, 바닥에 엎드려 있던 검은 우산망의 관찰자가 경련하듯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흐릿하게 변해 있었지만, 사지는 마치 정교한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절도 있게 움직였다. 그는 로웬을 향해 고개를 꺾더니, 이내 비틀거리며 복도 안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놈, 도망치는 게 아닌데요?”

피핀이 단검을 고쳐 쥐며 날카롭게 외쳤다. 로웬은 도주하는 관찰자의 뒷모습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아니, 끌려가는 거다. 우리가 아니라, 기록 회랑의 입구로.”

그들의 뒤편에선 이미 불길한 구둣발 소리가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검은 우산망의 추격조였다. 하지만 그들의 기색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살기보다는 무언가를 반드시 되찾아야만 한다는 조급함, 그리고 날 선 소유욕이 공기를 짓눌렀다.

“증인 보호가 목적이 아니군.”

이네스가 차갑게 분석하며 마법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회수’야. 저들은 저 증인 자체를 하나의 부품이나 기록물로 간주하고 있어. 파괴해서는 안 될 자산인 거지.”

추격자들의 외침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놈들은 증인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증인의 팔다리를 묶기 위한 구속 도구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웬 일행은 그 압박 속에서도 증인의 발자국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그때, 코를 킁킁거리던 피핀이 미간을 찌푸리며 멈춰 섰다.

“잠깐만요, 로웬 님. 냄새가 이상해요.”

“무슨 냄새지?”

“땀 냄새나 먼지 냄새가 아니에요. 이건… 눅눅하게 젖은 봉투 풀 냄새예요. 누군가 아주 급하게, 침을 잔뜩 묻혀서 봉투를 밀봉했을 때 나는 그 비린내요.”

피핀의 말에 로웬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증인이 딛고 지나간 자리마다 희미하게 번들거리는 액체가 점착제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발자국인 동시에, 거대한 배달 경로의 흔적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 설계한 ‘우편 배달 구조’ 속에 놓여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기록 회랑으로 통하는 첫 번째 갈림길에 도달했을 때, 증인은 기이한 보법으로 바닥을 밟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세 걸음, 다시 오른쪽으로 두 걸음, 그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단순한 도주 경로가 아니야.”

모르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바닥의 문양과 증인의 발자국을 대조했다.

“저건 회랑의 잠금 순서예요. 기록의 파수꾼들이 침입자를 막기 위해 걸어둔 고대식 배열이죠. 저 증인은 지금 무의식적으로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하고 있어요.”

“계산할 수 있겠나?”

“이미 끝났습니다. 다음 구역의 잠금 해제 지점은 저 증인이 멈춰 서는 곳이 될 겁니다.”

로웬은 증인의 뒤를 쫓으며 그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 증인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로웬 일행에게서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가야만 하는 목적지, 그 너머에 도사린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로웬은 증인을 윽박지르거나 붙잡아 세우지 않았다. 대신 그가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방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려 들어가는 방향 사이의 각도를 읽어냈다.

“저자는 지금 기록의 중심부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아. 오히려 그 주변부를 맴돌며 시간을 벌려고 하고 있지.”

로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가 피하려 하는 그 ‘방향’ 자체가 우리에겐 가장 확실한 이정표가 된다.”

검은 우산망의 추격자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어둠 속에서 쏘아 올린 쇠사슬이 증인의 발목을 낚아채려던 찰나, 로웬이 검기를 휘둘러 사슬을 쳐냈다. 챙그랑,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증인이 마지막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것은 거대한 청동제 문이었다. 아무런 손잡이도, 열쇠구멍도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표면 위로 증인의 손바닥이 닿았다.

치이익, 마치 뜨거운 인장을 찍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증인의 손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고통 섞인 비명을 질렀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거대한 진동에 파묻혔다.

문 위로 푸르스름한 안개가 서리더니, 이내 선명한 문장들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로웬 일행과 추격자들 모두가 그 글귀를 목도한 순간, 사방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심부름꾼만 배달할 수 있는 죄.]

문구가 명멸하며 회랑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빛이 아니라, 수천 년간 묵혀온 서늘한 종이 냄새와 누군가의 신음 같은 바람이었다.

로웬은 열린 문틈 사이를 응시하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이제 그 죄의 실체를 확인할 차례였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