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182-184화 합본. 심부름꾼만 배달할 수 있는 죄에서 수정 가능한 죄의 내용물까지 일러스트

182-184화 합본. 심부름꾼만 배달할 수 있는 죄에서 수정 가능한 죄의 내용물까지

182화. 심부름꾼만 배달할 수 있는 죄

거대한 기록 회랑의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서늘한 냉기가 아니라 지독할 정도로 건조하고 텁텁한 공기였다.

증인의 발자국이 바닥에 새겨진 문양에 맞물리며 잠금이 풀리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가 녹슨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문 위에 떠오른 문구, ‘심부름꾼만 배달할 수 있는 죄’라는 글자가 파르르 떨리며 공중으로 비산했다.

회랑 내부는 도서관이라기보다 거대한 물류 창고에 가까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선반들 위에는 가죽 장정된 책 대신, 누런 종이 뭉치와 밧줄로 묶인 서류 더미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모든 기록들이 일제히 빛을 내뿜으며 로웬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배송장인가.”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중에 떠오른 기록들은 단순한 고백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발신인과 수신인, 그리고 ‘물품’의 내용이 적힌 정교한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수천, 수만 장의 기록들이 로웬의 발치까지 밀려들어 오며 하나의 거대한 파도를 형성했다.

[심부름꾼 식별 완료.]

[해당 기록의 단독 수령을 요구합니다.]

그 문구가 로웬의 망막에 박히는 순간, 베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이 로웬의 어깨를 짚었다. 차가운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로웬을 감싸 안으려 했지만, 공중의 기록들은 거부하듯 날카롭게 진동했다.

“단독 수령이라니, 그럴 수는 없다.”

베라의 목소리에 서리가 맺혔다. 로웬이 이 모든 죄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게 둘 순 없었다. 그녀는 기록의 권능을 분산시키기 위해 자신의 마력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네스가 곁에서 마법 공식을 빠르게 계산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언니. 이건 보관 방식의 문제가 아니에요. ‘기록’이 아니라 ‘배달’로 분류되어 있어요. 공동 보관식 프로토콜 자체가 활성화되지 않게 설계된 영역이에요. 이건 처음부터 ‘심부름꾼’이라는 자격을 가진 단 한 사람에게만 반응하도록 짜인 인과율이에요.”

로웬을 중심으로 기록들이 원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풍기는 냄새에 피핀이 코끝을 씰룩거렸다.

“이상해. 피 냄새나 썩은 냄새가 아니야.”

피핀이 킁킁거리며 공중에 떠다니는 종이 뭉치 하나를 가리켰다.

“이건 아주 오래된 빵 껍질 냄새랑…… 편지 봉투에 바르는 풀 냄새 같아. 끈적거리고 건조한 냄새.”

그 말에 모르그가 돋보기를 고쳐 쓰며 선반에서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주워 들었다. 그는 문자를 해독하자마자 신음 같은 탄성을 내뱉었다.

“피핀의 감각이 맞군. 이건 참회록이 아니야. 죄를 고백하는 서술형이 아니라, 죄를 ‘옮기기’ 위한 문서들이야. 양식이 전부 배송장과 반송장으로 되어 있어. 기록 회랑의 이 구역은 죄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어디론가 보내졌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반송된 죄’들의 집결지였던 모양이야.”

로웬은 자신을 압박해 오는 기록들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들은 로웬의 존재를 매개 삼아 세상 밖으로 나가길 원하고 있었다. 수만 명의 죄가 로웬이라는 좁은 통로를 통해 한꺼번에 쏟아지려 하는 형국이었다.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로웬의 영혼이 문자의 파도에 휩쓸려 지워질 판이었다.

로웬은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에 깃든 ‘심부름꾼’의 본질을 더듬었다. 그는 단순히 짐을 옮기는 자가 아니었다. 배달의 시작과 끝을 관리하고, 배달할 수 없는 물건을 판별하는 자이기도 했다.

로웬의 입술이 열렸다.

“수령 거부. 아니, ‘배달 불가 사유 확인’ 절차를 실행한다.”

그의 목소리가 회랑 전체에 울려 퍼졌다. 로웬은 억지로 기록을 떠맡는 대신, 심부름꾼의 권한으로 이 기록들이 왜 이곳에 멈춰 서 있는지를 역으로 질문했다.

“이 죄들은 수신인에게 닿지 못하고 반송되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의 소유권은 일시적으로 유예된다. 배달할 수 없는 물건을 억지로 수령할 의무는 내게 없다.”

순간, 휘몰아치던 종이 더미들이 일제히 정지했다. 공중에서 떨리던 문자들이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로웬의 논리에 부딪혀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베라와 이네스는 로웬의 곁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적 속에서, 가장 거대한 배송장 하나가 로웬의 눈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것은 다른 기록들과 달리 투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심부름꾼의 이의 제기를 접수함.]

[배달 불가 사유를 확인하기 위한 대조 작업을 시작합니다.]

로웬의 손이 그 기록에 닿았다. 차가운 종이의 질감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회랑의 벽면 가득 새로운 문장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로웬은 그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다 멈칫했다.

그것은 로웬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아니, 이 회랑을 만든 설계자가 심부름꾼에게 던지는 마지막 검증이었다.

[수령인이 심부름꾼이면, 발신인은 누구인가?]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든 배달에는 보낸 이가 있다. 죄라는 물건을 이곳으로 보내 심부름꾼의 손에 쥐여준 최초의 시작점.

“……설마.”

로웬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열려는 찰나, 회랑 깊은 곳에서 거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록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누군가 이 기록의 ‘진짜 주인’이 오고 있었다.

183화. 발신인이 남긴 빈 서명

기록 회랑의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로웬이 던진 질문, ‘수령인이 심부름꾼이라면 발신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복도를 타고 길게 울려 퍼졌다. 정적을 깬 것은 대답이 아니라 발소리였다.

벅, 벅, 벅.

일정한 박자로 회랑 깊은 곳에서 다가오는 소리. 그것은 침입자의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구조와 높낮이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마치 이 거대한 서고의 진짜 주인과도 같은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로웬, 조심해.”

베라가 검 자루를 꽉 쥐며 로웬의 앞을 막아섰다. 날카로운 경계심이 공기를 찢을 듯 팽팽해졌다. 하지만 그 긴장감을 깬 것은 피핀의 코끝이었다. 피핀은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의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 냄새가 아니야.”

“그럼 괴물인가?”

“아니, 그것도 아니야. 음…… 눅눅하게 젖은 봉랍 냄새. 그리고 아주 오래된 빈 봉투 냄새가 나. 아, 약간 식은 빵가루 냄새도 섞여 있고.”

피핀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생명체라기보다 움직이는 기록물에 가까웠다. 형체는 모호했으나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종이가 스치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로웬은 물러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발소리의 주인이 멈춰 선 곳은 로웬이 우회 수령을 시도했던 바로 그 기록판 앞이었다.

로웬은 다시 한번 배송장들을 훑었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위화감이 눈에 들어왔다.

“지워진 게 아니군.”

로웬의 낮은 목소리에 모르그가 돋보기를 들이대며 다가왔다.

“뭐가 말이냐?”

“발신인 칸 말입니다. 누군가 이름을 지우거나 훼손한 흔적이 없어요. 이건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겁니다.”

모르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배송장의 여백을 만져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이건 양식 자체가 발신인 부재를 전제로 설계됐어. 발신자가 누구인지 증명할 필요가 없는, 혹은 증명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서류라는 뜻이다.”

이네스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빈칸을 응시하며 계산을 마친 듯 입을 열었다.

“발신인 공란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해요.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수령인에게 넘기겠다는 규칙이죠. 보낸 이가 없으니, 이 물건이 죄든 축복이든 그 모든 인과율은 받는 사람이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것은 지독하게 불공정한 계약이었다. 심부름꾼이 수령인까지 겸하게 된다면, 로웬은 보낸 이도 모르는 ‘죄’의 무게를 오로지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내야 한다.

“안 돼.”

베라가 단호하게 로웬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왜 그 책임을 다 떠안아야 하지? 이건 배달 사고야. 발신인이 없는 물건은 반송해야 하는 게 원칙이잖아.”

“반송할 곳이 없잖아, 베라. 발신인이 비어 있으니까.”

로웬의 대답은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체념이 아닌 철저한 계산이 들어 있었다. 그는 성자처럼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닥친 이 기이한 업무 절차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는 실무자의 고집이었다.

그때, 이름 없는 증인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장이 화끈거리며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증인의 동공이 풀리며 과거의 환영이 회랑의 벽면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집무실의 풍경이었다. 누군가 깃펜을 들고 서류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펜 끝은 잉크를 머금은 채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서명을 해야 할 자리는 끝내 채워지지 않았다.

‘이름을 남기지 마라. 이름이 남는 순간, 그것은 기록이 되고 기록은 곧 심판이 될 것이니.’

환영 속의 목소리는 흐릿했다. 직함도, 이름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빈 서류를 봉투에 밀어 넣었다. 그것은 배달되어야 할 죄였으나,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 인정하지 않은 버려진 책임들이었다. 증인은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의 인장은 그 ‘빈 서명’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환영이 걷히고 다시 회랑의 냉기가 돌아왔다. 다가왔던 발소리의 주인공은 어느새 로웬의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형체 없는 그림자가 로웬의 귀가에 서류 뭉치가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발신인이 없다면, 이 기록은 완성되지 않는다.]

회랑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수만 개의 서랍이 일제히 덜컹거렸다. 로웬은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기록판이 그의 손등을 짓누르며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심부름꾼이여. 수령인이 너라면, 그리고 발신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회랑의 목소리는 이제 로웬의 머릿속을 직접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제안이자 강요였고, 이 기이한 미궁이 내리는 마지막 판결이었다.

[그렇다면 네 이름으로 발신하라. 네가 보낸 죄를, 네가 받는 식으로 이 회랑의 장부를 마감하라.]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신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회랑에 기록된 모든 ‘주인 없는 죄’의 근원이 로웬 자신이라고 선언하는 꼴이었다.

“로웬, 하지 마! 이건 함정이야!”

베라의 외침이 들렸지만, 로웬은 이미 깃펜을 쥔 것처럼 손가락을 말아 쥐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회랑은 영원히 닫힐 것이고, 증인이 가진 단서도 매몰될 터였다.

로웬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성자가 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이 지독하게 꼬인 배송 건을 종결지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책임감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빈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이름으로 발신한다고? 좋다. 대신 조건이 있어.”

로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렸다.

“내가 발신인이라면, 이 배송물의 내용물을 수정할 권한도 나에게 있겠지.”

회랑의 진동이 멈췄다. 로웬은 비어 있는 발신인 칸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것은 서명인 동시에, 이 거대한 기록의 바다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권한이었다.

184화. 수정 가능한 죄의 내용물

회랑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대한 배송장의 ‘발신인’ 칸이 비어 있다는 것은, 이 수만 개의 ‘죄’가 누구의 책임도 아닌 채 이 공간을 떠돌고 있다는 뜻이었다. 회랑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로웬의 이름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네가 발신인이 되어라. 그러면 이 모든 업보는 마땅히 갈 곳을 찾으리라.”

회랑의 의지가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장부 위로 보이지 않는 펜촉이 로웬의 이름을 써 내려가려 했다. ‘로’ 자의 획이 그어지려는 찰나, 차가운 검기가 그 흐름을 끊어 놓았다.

“함부로 휘두르지 마라. 그 이름은 네가 마음대로 적어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베라가 로웬의 앞을 막아서며 검자루를 쥐었다. 서늘한 살기가 회랑의 압박을 밀어냈다. 로웬은 베라의 어깨너머로 여전히 비어 있는 발신인 칸을 응시했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지극히 사무적인 오류임을 지적하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회랑, 네 논리대로라면 내가 이 물건들의 발신인이 되는 순간, 이 거래의 주도권은 나에게 넘어온다.”

로웬은 허공에 떠 있는 장부의 여백을 손가락으로 덧그었다.

“발신인은 발송하기 전, 내용물을 검수하고 수정할 권한이 있지. 내용물이 잘못되었다면 라벨을 정정하거나, 포장을 다시 하는 것도 발신인의 의무이자 권리다. 그렇지 않나?”

회랑은 잠시 침묵했다. 로웬의 말은 성자다운 희생이 아니라, 철저히 규정에 근거한 실무자의 항변이었다. 회랑의 시스템이 이 기묘한 논리를 검토하는 사이, 이네스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로웬의 말이 맞아요. 책임의 확정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내용물의 확인 절차죠. 발신인으로서 그가 이 ‘죄’들이 정말로 배송되어야 할 물건인지 확인하겠다는데, 그걸 막는다면 이 회랑의 존재 의의인 ‘공정한 기록’ 자체가 무너지는 것 아닌가요?”

이네스는 서류 뭉치를 훑어보듯 날카로운 눈으로 장부의 구조적 빈틈을 계산해 냈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모르그가 낮게 읊조렸다.

“면죄가 아니군. 이건 오배송 라벨의 정정이야. 로웬은 죄를 없애겠다는 게 아니라, 이 기록이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무엇’인지부터 다시 판독하겠다는 거군. 흥미로운 접근이야.”

회랑의 압박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로웬의 이름이 적히기 직전의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대신 거대한 작업대가 펼쳐진 것 같은 기묘한 정적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때였다.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로웬의 곁으로 다가왔다.

“……피 냄새가 아니야.”

피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보통 ‘죄’라고 하면 비릿한 피 냄새나 썩은 악취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피핀이 맡은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식은 수프 냄새…… 그리고 눅눅해진 빵 봉투 냄새가 나. 이건, 이건 그냥 아이들이 만진 것 같은 손때 냄새야.”

죄의 기록이라고 불리던 봉투들에서 풍겨 나오는 것은 거창한 악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하게 일상적이고, 그래서 더 서글픈 생활의 흔적들이었다.

로웬은 피핀이 가리킨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곁에서 ‘이름 없는 증인’이 인장을 들고 묵묵히 서 있었다. 증인이 로웬의 손에 들린 봉투를 보자, 장부의 한쪽 면에 새로운 리스트가 떠올랐다.

그것은 ‘받은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었다.

[배달되지 못한 명단: 수취인 불명]

증인은 새로운 이름이나 직함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그 인장으로 봉투의 겉면에 찍힌 ‘죄’라는 글자를 가릴 뿐이었다. 로웬은 증인이 보여주는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그곳에는 거창한 범죄자가 아니라, 제때 도착하지 못한 마음을 기다리다 지쳐버린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하겠다.”

로웬이 첫 번째 봉투의 봉인을 뜯었다.

주변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만약 그 안에서 끔찍한 살육의 기록이나 저주가 튀어나온다면, 발신인으로 지목된 로웬은 그 즉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베라는 검을 고쳐 쥐었고, 이네스는 방어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시커먼 죄명이 아니었다.

바스러질 듯 낡은 종이 한 장. 그 위에는 비뚤비뚤한 글씨로 적힌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미안해요. 그날 수프를 태우려던 건 아니었어요. 사실은 너무 배가 고파서 조금 일찍 불을 켰을 뿐인데…….’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전달되었어야 했으나 끝내 닿지 못한, 아주 오래된 ‘사과문’이었다.

로웬은 그 종이를 손에 쥔 채 낮은 숨을 내뱉었다. 배송 사고로 인해 ‘죄’라는 딱지가 붙어버린 진심들. 회랑이 그에게 지우려 했던 짐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수정해야겠군. 이건 죄가 아니라, 연착된 편지다.”

로웬의 목소리가 고요한 회랑에 울려 퍼졌다. 봉투 안에는 아직 수만 장의 종이가 남아 있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