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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273화. 서명하지 않는 선도착자 / 긁힌 수취인 이름 / 검은 발자국의 접수 순번 일러스트

271-273화. 서명하지 않는 선도착자 / 긁힌 수취인 이름 / 검은 발자국의 접수 순번

271화. 서명하지 않는 선도착자

접수 창구 너머의 어둠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빛을 집어삼키는 심연이자, 수백 년 동안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행정의 공백이었다. 로웬이 응시하던 창구 안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 장치가 억지로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었다.

“열람 권한의 유효 범위가 종료되었습니다.”

무미건조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창구의 쇠창살 사이로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압박감만큼은 실존하는 칼날처럼 로웬의 목 끝을 겨누었다. 이어 좁은 틈새를 통해 누렇게 바랜 양피지 한 장과 끝이 날카롭게 갈린 검은 깃펜이 밀려 나왔다.

“열람 기록을 확정하고, 정보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선도착자 확인 서명’을 요구합니다. 서명하십시오. 그것이 이곳의 절차입니다.”

양피지 위에는 기괴한 문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읽으려 할수록 눈동자가 시렸고,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감각이 로웬을 덮쳤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내밀어진 깃펜을 집어 드는 대신, 서늘한 눈빛으로 창구 안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거절한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나는 이 기록의 정당한 소유자로서 온 것이 아니다. 그저 유실된 원본의 행방을 쫓는 추적자이자, 낮은 등급의 열람 권한만을 부여받은 대행자일 뿐이다. 나에게는 이 거대한 인과가 담긴 서류에 서명할 권한이 없다.”

“서명하지 않으면 열람한 정보는 소멸하며, 귀하는 영구히 이 구역에 구금될 것입니다.”

“협박인가? 아니면 시스템의 오류인가?”

로웬이 한 걸음 다가서며 창살을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권한이 낮은 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정당한 절차가 아니다. 나는 서명 대신, 원본 보관 위치에 대한 최종 조회 결과만을 요구하겠다. 그것이 내가 가진 최소한의 권리이자, 네가 이행해야 할 의무다.”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네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까 보았던 ‘가장 오래 빈 좌석’의 문구에 머물러 있었다.

“로웬, 저 문구 말이에요. ‘첫 배달자는 성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성자가 될 사람을 먼저 보냈다’라는 문장 말이죠.”

이네스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건 성스러운 예언 같은 게 아닐지도 몰라요. 오히려 아주 치졸한 책임 전가에 가깝죠. 성자가 오기 전에 배달을 완료했다는 형식을 갖춤으로써, 배달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려 한 흔적이에요. 지금 저 창구가 당신에게 서명을 강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거예요.”

그녀의 해석은 날카로웠다. 이곳은 성소나 신전이라기보다, 거대한 서류 더미 속에 진실을 파묻어버린 관료적인 감옥에 가까웠다.

피핀은 그사이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가장 오래 비어 있었다는 의자 밑, 그곳에는 아주 오래된 빵 부스러기들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피핀이 귀를 바닥에 대고 웅얼거렸다.

“이상해. 의자 밑에서 소리가 나요. 아까 로웬 오빠가 창구를 두드렸을 때, 그 진동이 창구 뒤쪽 잠긴 문 안에서 똑같이 되돌아왔어. 누군가 안에서 같이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아. 아주 박자가 느리긴 하지만…….”

피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구 위에 놓여 있던 깃펜이 스스로 공중에 떠올랐다. 깃펜은 마치 살아있는 짐승처럼 로웬의 손등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낙하했다. 강제로라도 혈서(血書)를 받아내겠다는 기세였다.

“위험해!”

베라가 순식간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단단한 나무 쐐기를 꺼내 들었다. 의자를 부수거나 기물을 파손하지 않으면서도, 기계적인 톱니바퀴의 움직임을 멈추는 데 특화된 도구였다.

카강!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깃펜의 끝이 베라가 밀어 넣은 나무 쐐기에 박혔다. 펜촉은 종이를 찢기 직전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베라의 팔 근육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쐐기를 더 깊숙이 밀어 넣어 펜의 진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서두르게, 로웬! 이 장치는 말이 안 통해!”

로웬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단말기 역할을 하는 창구 옆의 돌판에 자신의 마력을 얇게 흘려보냈다. 정식 서명 대신, 자신의 권한이 미치는 가장 낮은 단계의 ‘오류 보고’ 명령을 강제로 입력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시스템의 논리적 허점을 찌르는 행위였다.

[조회 대상: 원본 반송 사유]

[권한 등급: 임시(Temporary)]

[상태: 미결재]

로웬의 눈앞에 흐릿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그는 낮은 권한 탓에 상세한 내용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반송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로웬이 고개를 돌려 창구 옆, 굳게 잠긴 철문을 가리켰다.

“반송 사유는 이 창구 안이 아니라, 저 문 너머에 보관되어 있다. 서명되지 않은 모든 기록이 쌓여 있는 곳이지.”

그 순간, 피핀이 가리키던 철문의 틈새에서 바람이 불어 나왔다. 끼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낡고 빛바랜 종이 조각 하나가 밀려 나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누군가 작성했을 배달표의 일부분이었다.

로웬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앞뒤 맥락이 잘린 채, 오직 단 한 문장만이 비정상적으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수취인은 성자가 된 뒤에야 부재 처리되었다.]

로웬의 미간이 좁아졌다. 수취인이 성자가 되기 전에는 그 자리에 있었으나, 성자가 된 순간 이곳에서 ‘사라졌다’는 뜻인가. 아니면 성자가 되었기에 더 이상 이 땅의 물건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인가.

어느 쪽이든 명백한 모순이었다. 성자를 위해 준비된 물건이, 정작 그가 성자가 되자 전달할 수 없게 되었다니.

로웬은 종이를 꽉 쥐었다. 창구 너머의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기괴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기계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비웃는 듯한, 혹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듯한 사람의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성자가 된 뒤에야 부재 처리된 수취인. 그리고 그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나버린 첫 배달자.

그 어긋난 시간의 틈바구니에 무엇이 버려져 있는지, 이제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가 확인해야만 했다.

272화. 긁힌 수취인 이름

문틈 사이로 비집고 나온 배달표 조각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종이 표면 위로 배어 나온 검은 잉크는 단순히 글자를 적기 위한 안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곪은 상처에서 터져 나온 진물처럼 끈적거렸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며 기괴한 무늬를 그렸다. 로웬은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그 잉크의 흐름을 주시했다.

잉크가 번지며 가려져 있던 글자들이 서서히 그 형태를 드러냈다. ‘부재 처리 시각’이라 적힌 칸 옆으로 기묘한 숫자들이 나열되었다.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숫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덧칠된 잉크 밑으로 서로 다른 체계의 시간들이 억지로 포개져 있었다.

“……이건 일반적인 기록이 아니군요.”

로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배달표 조각이 가리키는 시각은 종교력과 행정력이 기괴하게 뒤섞인 형태였다. 하나는 신성한 예언의 성취를 기록하는 방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속의 물건이 도착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두 시각 체계는 톱니바퀴가 어긋난 시계처럼 서로를 갉아먹으며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고 있었다.

[수취인은 성자가 된 뒤에야 부재 처리되었다.]

로웬이 그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기도 전에, 굳게 닫힌 철문의 표면이 진동했다. 문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들이 뒤틀리며 하나의 거대한 ‘공란’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써넣어야만 하는 서식의 빈칸처럼 보였다. 차가운 금속음이 복도 전체를 울렸다.

— 선도착자(先到着者)의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공기 중에 떠오른 글자는 강압적이었다. 열쇠를 꽂는 구멍도, 손잡이도 없는 이 문은 오직 정체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베라가 대검의 자루를 꽉 쥐며 로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에 경계심이 서렸다.

“이름이라고? 우리 중 누군가의 이름을 쓰라는 건가?”

로웬은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서 이름을 써넣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은 기록의 영역이었고, 행정의 미로였다. 이름을 기입하는 순간, 그 이름의 주인은 이 기괴한 배달 사고의 ‘책임자’로 고정된다. 그것은 단순한 본인 인증이 아니라, 이 일그러진 인과율의 한 축을 담당하겠다는 서약이나 다름없었다.

“아니요. 이름을 주면 안 됩니다. 이름을 쓰는 순간, 시스템은 우리를 이 오류의 일부로 편입시킬 겁니다.”

로웬은 품 안에서 낡은 인장을 꺼내 들었다. 그가 가진 것은 고작 낮은 등급의 서기관 권한일 뿐이었다.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거나 문을 단숨에 부술 수 있는 힘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법전의 빈틈을 찾아내는 법을 알았고, 절차의 모순을 파고드는 데 익숙했다.

로웬은 문에 새겨진 ‘이름 입력’ 칸을 무시하고, 그 아래쪽의 좁은 여백에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깃펜을 꺼내 침착하게 행정 명령어를 기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도착 불능 사유 조회 신청.”

로웬이 낮게 읊조렸다. 이름을 써넣어 책임을 지는 대신, 왜 이 배달이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묻는 낮은 단계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이것은 문을 열기 위한 열쇠가 아니라, 문이 닫혀 있어야만 하는 근거를 제출하라는 독촉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철문 내부에서 무거운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스템은 예상치 못한 하급 관리의 절차적 공격에 당황한 듯했다. 강제로 열리지 않으려 버티던 문이, 오히려 자신의 ‘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네스가 배달표에 적힌 시각 표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입을 열었다.

“로웬, 이것 보세요. 종교력과 행정력이 억지로 붙어 있어요. 이건 예언이 아니에요. 오히려 사건이 벌어진 후에 누군가가 기록을 사후 조작한 것에 가깝습니다. 마치…… 성자가 부재중이었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기워 붙인 것처럼요.”

이네스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분석대로라면, 이 공간은 성스러운 기적의 현장이 아니라 거대한 서류 조작의 현장이었다.

피핀은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이상해요. 안에서 똑똑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아주 작게…… 그리고 빵 부스러기 같은 냄새가 나요. 고소하고 따뜻한데, 어딘가 아주 오래된 것 같은 그런 냄새요. 누군가 도와달라고 두드리는 건지, 아니면 배달이 왔으니까 문을 열어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피핀의 말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노크라기보다는 무언가 긁는 소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베라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대검 대신 품 안에서 튼튼한 철제 쐐기를 꺼냈다.

“문을 부술 수 없다면, 최소한 닫히지는 않게 하겠어.”

베라는 로웬이 신청한 ‘조회’ 절차 때문에 문이 아주 미세하게 유격된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기록 투입구의 좁은 틈새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끼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문틈이 억지로 벌어진 채 고정되었다.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안에서 밖으로 무언가 전달될 정도의 공간은 확보되었다.

로웬은 숨을 죽이고 그 틈을 응시했다. 차가운 한기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좁은 틈 사이로 무언가가 천천히 밀려 나왔다.

그것은 낡은 봉투였다. 오랫동안 습한 곳에 방치된 듯 눅눅하게 젖어 있었고, 곳곳이 해져 있었다. 봉투 앞면의 수취인 칸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거칠게 긁혀 있어 이름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애쓴 흔적 같았다.

하지만 로웬의 시선이 멈춘 곳은 그 아래였다. 발신자(發信者)를 적는 칸에는 잉크가 번지지 않은 명확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성자가 되기 전의 나.]

봉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검은 잉크가 다시금 봉투 아래로 배어 나오며, 마치 누군가의 발자국처럼 복도 안쪽을 향해 길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로웬은 자신이 방금 연 것이 단순한 문이 아니라,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어떤 시간의 매듭이었음을 직감했다.

273화. 검은 발자국의 접수 순번

봉투의 발신인 칸에 새겨진 문장은 날카로운 칼날로 긁어낸 듯 위태로웠다. '성자가 되기 전의 나'. 그 기괴한 수식어가 로웬의 시야에 박히는 순간, 봉투 하단에서 툭 하고 검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잉크였다. 하지만 그것은 바닥에 닿자마자 무미건조하게 번지는 대신, 마치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점성 높은 액체는 가느다란 결을 그리더니, 이내 누군가 젖은 발로 바닥을 딛고 지나간 것 같은 선명한 발자국 모양으로 변했다.

발자국은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복도 안쪽을 향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검은 흔적들 위로, 흐릿한 글자들이 명멸하며 떠올랐다.

[접수 순번 042]

로웬은 숨을 들이켰다. 뒤이어 나타난 다음 발자국 위에는 다른 숫자가 새겨졌다.

[접수 순번 041]

“숫자가…… 줄어들고 있어요.”

피핀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발자국은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시작해 보이지 않는 근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앞에서 뒤로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결과에서 원인을 향해 되감기는 테이프처럼.

로웬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쥐었다. 당장이라도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봉투를 여는 순간, 자신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경계를 넘게 되리라는 것을. '성자가 되기 전의 나'라는 존재가 던진 질문에 답을 하는 꼴이 될 터였다.

그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대신 품 안에서 낡은 단말기를 꺼내 봉투의 겉면 훼손 기록만을 조회하기 시작했다. 관리자의 권한은 낮았고, 접근할 수 있는 정보도 제한적이었지만, 로웬은 그 낮은 권한 뒤로 몸을 숨겼다.

“내용물을 보지 않고도 정보를 캘 방법은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시스템에 등록된 '수하물'이니까요.”

로웬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름이나 발신인의 정체를 확인하는 대신, 그는 훼손 시각과 접수 순번의 로그를 훑었다. 기각된 요청들, 누락된 분류 코드들. 시스템의 틈새에 박힌 파편들이 데이터의 형태로 스쳐 지나갔다.

이네스가 차가운 눈으로 바닥의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순번, 예언이나 계시 같은 거창한 게 아니야.”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

“물류 접수대의 역순 폐기 규칙이야. 보관 기한이 만료된 물품을 처리할 때,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것부터 거꾸로 지워나가는 방식이지. 누군가 이 공간의 인과를 '폐기 대기' 상태로 되돌리고 있어.”

그 말과 동시에 복도에 기묘한 향취가 감돌았다.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가 이상해요. 발자국이 바뀔 때마다…… 방금 구운 따뜻한 빵 냄새가 났다가, 갑자기 코를 찌르는 차가운 잿물 냄새가 나요. 마치 누군가 살아있다가 순식간에 시체가 되는 걸 소리로 듣는 기분이에요.”

피핀의 감각은 예민했다. 따스한 온기와 죽음의 악취가 교차하는 간극 사이로, 검은 발자국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콰앙!

등 뒤에서 거친 소음이 들렸다. 베라가 문틈에 박아두었던 쐐기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뒤틀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문을 닫으려 밀어붙이고 있었다. 퇴로가 차단되려는 찰나였다.

하지만 베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춤에 감고 있던 묵직한 사슬을 풀었다.

“쐐기만으로는 부족하겠군.”

베라는 쐐기를 빼내는 대신, 오히려 사슬을 문고리와 복도의 고정 지지대에 단단히 얽어매었다. 쇳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며 퇴로가 억지로 고정되었다. 뒤쪽의 문은 이제 열리지도, 완전히 닫히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로 묶였다.

“길은 열어뒀다. 하지만 저 발자국이 끝나는 곳에 뭐가 있을지는 보장 못 해.”

베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로웬의 시선은 이미 복도 깊숙한 곳, 가장 마지막 발자국이 찍힌 장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어둠이 유독 짙게 고인 구석이었다. 마지막 발자국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크고 선명했다. 그 위로 검은 잉크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더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문구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로웬은 단말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시스템 로그가 강제로 갱신되며 화면이 붉게 점멸했다. 훼손된 데이터 사이로, 단 하나의 명확한 행정 기록이 떠올랐다.

[접수 순번 0000]

그 숫자는 모든 것의 시작이자, 폐기되어야 할 목록의 최상단이었다. 그리고 그 숫자 아래, 마치 낙인처럼 찍힌 문구가 로웬의 눈동자에 맺혔다.

[수취인: 로웬]

잉크는 멈추지 않고 번져나갔다. '로웬'이라는 이름 주위로 훼손된 문구들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이 자신을 마중 나온 것 같은, 지독하게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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