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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276화. 폐기 대기함의 첫 회신 / 접힌 빵봉투의 발신자 / 첫 배달 전 대기실 일러스트

274-276화. 폐기 대기함의 첫 회신 / 접힌 빵봉투의 발신자 / 첫 배달 전 대기실

274화. 폐기 대기함의 첫 회신

허공을 부유하던 청백색의 문자들이 파르르 떨리며 마지막 발자국 위로 가라앉았다. ‘접수 순번 0000’과 ‘수취인: 로웬’이라는 글자가 마치 낙인처럼 바닥을 태울 듯이 명멸했다. 그와 동시에 정면의 매끄러웠던 벽면이 기괴한 소음을 내며 뒤로 밀려났다.

오랜 시간 동안 닫혀 있었던 듯, 틈새에서는 케케묵은 먼지 대신 서늘하고 비릿한 금속성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드러난 것은 벽체 내부에 매립된 작은 금속 함이었다. ‘폐기 대기함’이라는 투박한 딱지가 붙은 그 함의 문이 힘없이 열렸다.

이네스는 지팡이를 고쳐 쥐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편지가 아니군.”

그녀의 말대로 대기함 안쪽에 놓인 것은 봉인된 봉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관공서의 서류 더미에서 한 장을 뽑아낸 듯한 정교한 회신 양식이었다. 로웬은 손을 뻗어 그 양식을 확인하려다 멈칫했다. 종이 위에는 기이한 절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배달 완료를 위해서는 수취인의 회신이 선행되어야 함. 회신이 도달하기 전까지 본 배달물은 ‘미완’ 상태로 폐기 대기함에 머무름.]

모순이었다. 배달된 물건을 확인해야 답장을 쓸 텐데, 답장을 먼저 써야만 배달이 완료된다는 논리였다. 마치 결과가 원인보다 앞서야 한다는 고압적인 요구 같았다.

“로웬, 건드리지 마요.”

이네스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이건 단순한 우편물이 아니에요. 수취인으로서 ‘회신’을 하는 순간, 당신은 이 말도 안 되는 배달 시스템의 구성원으로 완전히 귀속될 거예요. 원인이 누구인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정 지으려는 장치라고요.”

로웬은 이네스의 경고를 이해했다. 그는 잠시 그 양식을 응시하다가, 펜을 드는 대신 시스템의 가장 말단적인 권한을 끌어올렸다. 그가 사용한 것은 고도의 마법이나 권능이 아니었다. 관리자로서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고 낮은 수준의 ‘행정 조회’였다.

그는 회신란에 글을 적는 대신, 양식 하단의 공백에 손가락을 대고 읊조렸다.

“조회. 회신 불능 사유 코드 검색. 수취인 오기 가능성에 따른 접수 거부권 행사.”

로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거나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이 시스템이 가진 절차적 결함을 파고들었을 뿐이다. 수취인이 ‘로웬’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그는 자신이 그 ‘로웬’이 맞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답변을 유보했다.

“낮은 권한으로도 충분해. 확정되지 않은 정보에 답할 의무는 없으니까.”

로웬의 방어적인 태도에 이네스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함의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기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일행의 뒤편에서 경계를 서던 피핀의 귀가 쫑긋거렸다.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소리가 들려요.”

피핀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웬과 이네스의 시선이 피핀에게 향했다. 소년은 폐기 대기함의 어두운 안쪽을 가리키며 뒷걸음질 쳤다.

“저 안에서…… 누군가 빵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접는 소리가 나요. 그리고 아주, 아주 낮게 숨을 쉬고 있어요.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요.”

그 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규칙적이고 건조했다. 로웬 역시 느낄 수 있었다. 대기함 깊숙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적의라기보다는 지독하게 무거운 관찰에 가까웠다.

갑자기 대기함의 금속 문이 경련하듯 떨리더니, 로웬의 손목을 향해 자석처럼 끌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로웬의 손을 강제로 함 안으로 끌어넣어 회신 양식에 서명하게 만들려는 기세였다.

“어딜!”

그 순간, 베라가 짓이겨진 목소리로 외치며 품 안에서 묵직한 사슬을 뽑아 올렸다. 쇳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녀는 로웬의 팔을 낚아채듯 뒤로 당기며, 동시에 사슬을 대기함 주변의 돌출된 구조물에 단단히 감아버렸다.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보이지 않는 힘이 로웬을 끌어당기고, 베라의 물리적인 근력이 그를 지탱했다. 베라의 팔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그녀의 발밑 석판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물러나, 로웬! 이놈이 널 잡아먹으려 해!”

베라가 이를 악물며 버텼다. 로웬은 그녀의 도움으로 겨우 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이 마법적인 인력이 아니라, 끊어진 인과를 연결하려는 시스템의 강박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버텼다. 권한이 낮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스템의 거대한 명령체계에서 벗어날 틈새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웬은 자신의 정체성을 ‘수취인’으로 확정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차디찬 눈으로 대기함의 어둠을 응시했다.

공간이 진동했다. 피핀이 들었던 빵봉지 접는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바스락, 바스락. 마치 누군가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는 듯한 일상적인 소음이 기괴한 공포가 되어 복도를 메웠다.

그때였다. 로웬이 끝내 비워두었던, 베라의 사슬 덕분에 손도 대지 못했던 회신란의 빈 종이 위로 변화가 일어났다.

잉크가 번지는 소리조차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새겨져 있었다는 듯, 투명한 공기가 종이 위를 긁어내며 글자를 빚어냈다. 그것은 로웬의 필체도, 이 장소에 존재하는 그 누구의 필체도 아니었다.

지독하게 고전적이고, 마치 수만 번은 써 내려간 듯 익숙한 필치가 백지 위를 점령했다.

[답장은 이미 도착했다.]

로웬의 미간이 좁아졌다. 회신을 쓰지 않았는데 회신이 도착했다는 문구. 그 모순적인 문장이 새겨지는 순간, 베라를 잡아당기던 강력한 인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함의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마치 용건이 끝났다는 듯이. 하지만 로웬은 보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그 좁은 틈새로 보인 것은 편지가 아니라— 방금 막 접힌 듯한 작은 종이봉투 조각이었다.

275화. 접힌 빵봉투의 발신자

폐기 대기함의 틈새는 좁고 어두웠다. 그러나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작은 종이 조각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웬은 멈춰 선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그는 아무런 회신도 작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그의 인과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미 도착한 답장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끼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폐기함의 문틈이 미세하게 벌어졌다. 그 틈에서 빠져나오려는 것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정교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접힌 빵봉투의 귀퉁이였다.

종이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공기 중으로 기묘한 향취가 퍼져 나갔다. 그것은 갓 구운 빵의 구수한 냄새였고, 동시에 오래된 종이에 배어든 찌든 기름기였다. 척박한 거리를 구르며 묻었을 법한 먼지 냄새와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온기가 뒤섞여 있었다.

로웬이 손을 뻗으려 하자, 종이 조각이 스스로 몸을 뒤틀며 펼쳐지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종이 안쪽에는 진한 기름 얼룩이 번져 있었고, 그 얼룩 위로 붉은색 인영이 서서히 떠올랐다.

[발신자 확인 완료]

그것은 공인된 문서에나 찍힐 법한 육중한 도장이었다. 하지만 그 글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붉은 인영은 마치 액체처럼 꿈틀거리며 종이 위에 적힌 ‘발신자’라는 공란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시선은 정확히 로웬을 향하고 있었다.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손이 로웬의 이름을 그 공란 위에 겹쳐 찍으려는 듯한 압박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잠깐, 멈춰.”

날카로운 목소리가 로웬의 고막을 때렸다. 이네스였다. 그녀는 로웬의 곁으로 다가와 차가운 눈초리로 그 종이 조각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기록용 양식지가 들려 있었다.

“로웬, 건드리지 마세요. 이 물건은 아직 정식으로 접수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발신자 확인’ 절차가 시작된 것 같군.”

로웬의 말에 이네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 떠 있는 붉은 인영을 가리켰다.

“원본 봉투의 전체 형상도 없고, 무엇보다 이 편지가 어디를 거쳐 왔는지에 대한 접수 기록이 전무합니다. 발신자 확정은 원본과 기록이 일치할 때만 이루어지는 법이에요. 지금 저 도장이 찍히는 건 절차상 명백한 오류입니다. 확정 금지를 신청해야 해요.”

이네스의 논리적인 지적은 일종의 방어막처럼 작동했다. 로웬의 이름을 향해 쇄도하던 붉은 기운이 허공에서 멈칫하며 진동했다.

그때, 피핀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피핀은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무언가 먼 곳의 소리를 듣는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들려요. 누군가 말하고 있어.”

“뭐라고?”

“먼저 답한 사람이, 먼저 보낸 사람이라고요. 시간은 중요하지 않대요. 누가 먼저 마음을 먹었는지가 중요하다고…….”

피핀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울림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메시지도, 인간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어느 지점에서 흘러나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 순간, 바닥에서 파들거리던 종이봉투 조각이 갑자기 로웬의 손가락을 향해 튀어 올랐다. 그것은 마치 갈구하는 자의 손길처럼 로웬의 검지를 휘감으려 들었다. 얇은 종이날이 살을 베어 물 듯 날카롭게 세워졌다.

챙-!

강렬한 금속음과 함께 베라의 단검이 종이 조각과 로웬의 손가락 사이를 갈랐다. 베라는 로웬의 앞을 막아서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물러나십시오. 이 물건, 당신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단검에 베인 종이 조각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포기하지 않은 채 로웬의 발치에서 꿈틀거렸다. 종이 위에 찍히지 못한 채 맴돌던 ‘발신자 확인 완료’라는 글자가 로웬의 그림자를 향해 붉은빛을 뿜어냈다.

로웬은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빵봉투가 누구의 손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여기서 결론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확정되는 순간, 시스템이 강제하는 인과에 묶이게 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네스의 말이 맞다.”

로웬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고, 사무적이었다.

“이 조각만으로는 발신자를 특정할 수 없다. 규정에 따라 이 물건의 현물 보존을 신청한다. 또한, 유실된 원본과의 대조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발신자 식별을 무기한 보류하겠다.”

로웬이 선언하자, 허공을 떠돌던 붉은 인영이 힘을 잃고 흩어졌다. 바닥의 종이 조각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평범한 쓰레기처럼 가라앉았다. 로웬은 바닥에 떨어진 그 작은 조각을 굽어보았다. 기름때 묻은 종이 안쪽,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글자가 아주 작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로웬의 이름이 아니었다. 대신, 이 기묘한 배달물이 처음으로 생성되었던 장소를 가리키는 좌표에 가까웠다.

로웬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차가운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원본 보관처: 첫 배달 전 대기실]

그곳은 아직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한, 혹은 모두가 잊어버린 시작점이었다. 로웬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아직은 ‘성자’도, ‘발신자’도 아닌 채로 버텨야 했다. 원본이 있는 곳으로 가기 전까지는.

276화. 첫 배달 전 대기실

손바닥 위에 놓인 낡은 종이봉투 조각이 기이한 진동을 일으켰다. 거칠게 찢긴 단면마다 미세한 빛의 입자가 맺히더니, 그 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듯 허공으로 솟구쳤다. '첫 배달 전 대기실'. 그 문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을 비틀고 차원의 틈새를 여는 열쇠였다. 빛의 입자들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응집되었고, 이윽고 고풍스러운 목재 문 하나가 로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웬은 잠시 멈춰 섰다. 그 문의 너머에서 느껴지는 것은 압도적인 정적과 시간이 멈춘 듯한 권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은 거대한 서고이자 저장고였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으며, 벽면을 가득 채운 선반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이봉투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로웬이 지금까지 보아온 배달물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모든 봉투에는 발송 번호도, 수취인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직 세상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태초의 상태 그대로 보존된 빵봉투들이었다. 탁자 위에는 봉인되지 않은 편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내용물은 존재하나 그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비밀들. 그것들은 마치 부화를 기다리는 새들처럼 고요하게 숨을 죽인 채 대기실의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때, 허공에서 무거운 양피지 뭉치가 떨어져 내리며 탁자 위에 펼쳐졌다. 그것은 이곳의 입장대장이었다. 황금색 깃펜이 스스로 일어서더니 잉크도 없이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장은 로웬의 존재를 인식한 듯, 그의 이름을 '첫 배달자 후보'라는 항목 아래에 강제로 써넣으려 했다. 깃펜의 끝이 양피지를 긁는 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로웬은 그 기록이 단순한 명부 작성이 아니라, 영혼을 특정 직무에 귀속시키는 계약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며 대장의 마력을 분석했다. 그녀는 관리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며 대장의 흐름을 차단했다. 이네스는 원본 대조를 위해 방문한 외부인과 시스템에 귀속될 배달자 등록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녀의 단호한 개입으로 인해 날카롭게 움직이던 깃펜이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공간 전체가 이네스의 논리적인 거부권에 반응하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피핀은 멍한 표정으로 벽면의 봉투들을 응시했다. 피핀의 귓가에는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 은밀한 속삭임이 머물고 있었다. 낮은 진동과도 같은 목소리는 피핀의 정신을 파고들며 반복적으로 웅얼거렸다. "아직 보내지 않았으니 네가 처음이다. 모든 시작의 주인이 될 자여." 피핀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은 환청에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유혹이자 저주였고,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무게였다. 피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대기실의 정적을 깨뜨리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대기실 중앙에 놓여 있던 낡은 나무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로웬을 향해 미끄러져 왔다. '배달자석'이라 불리는 그 자리는 마치 자석처럼 로웬의 신체를 끌어당기려 했다. 의자에 앉는 순간, 그는 이 공간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첫 번째 배달의 굴레에 갇히게 될 터였다. 베라는 지체 없이 성검의 자루를 거머쥐었다. 그녀는 로웬과 의자 사이의 공간을 가로막으며 강력한 신성력을 발산했다. 의자가 로웬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할 때마다 베라의 투기가 그것을 밀어냈고, 그녀의 서늘한 기운이 대기실의 강압적인 의지를 억눌렀다.

로웬은 자신을 억죄려 하는 대장의 시선과 의자의 움직임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평온한 눈빛으로 허공의 대장을 응시했다. 로웬은 결코 이 시스템의 부속품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투영하며 짧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방문 목적은 배달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가 닿자 요동치던 대장의 페이지가 거칠게 넘어갔다. 로웬은 멈추지 않고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방문 목적을 원본 대조 및 유실물 확인으로 한정한다.”

공간을 지배하던 강제적인 마력이 로웬의 선언에 의해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깃펜은 갈 곳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로웬은 배달자 후보라는 칸을 지우는 대신, 그 자리가 결코 채워질 수 없음을 명시했다.

“배달자 후보 등록란은 공란으로 보존한다.”

시스템은 오류를 일으킨 듯 점멸했다. 로웬은 자신에게 부여되려던 '첫 번째'라는 칭호와 직무가 얼마나 위험한 함정인지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확인되지 않은 직무를 수락할 근거가 없다.”

그 선언과 동시에 대기실을 감싸고 있던 압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배달자석 의자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밀려났고, 입장대장은 스스로를 닫으며 탁자 아래로 사라졌다. 공간은 다시금 정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정적은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로웬은 선반 가장 깊은 곳, 그 어떤 번호도 붙지 않은 채 홀로 놓인 검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상자의 표면에는 붉은 인장과 함께 단 한 줄의 문구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수취인 확인 전 개봉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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