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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371화 합본. 이름 접힌 반송 봉투에서 젖은 이름의 보증금까지 일러스트

370-371화 합본. 이름 접힌 반송 봉투에서 젖은 이름의 보증금까지

370화. 이름 접힌 반송 봉투

반송 예고란의 떼지 않은 종이가 스스로 몸을 비틀었다. 평면을 유지하던 영수증 조각들이 일제히 들떠오르며 서로의 모서리를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리적인 바람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종이 섬유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꺾이는 소리가 고요한 통로 안에 파동처럼 퍼졌다. 조각들은 공중에서 기하학적인 궤적을 그리며 겹쳐졌고, 이내 납작하고 긴 직사각형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전달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라, 거부당하기 위해 태어난 형태였다. 완성된 반송 봉투는 공중에 머물며 가늘게 떨렸다.

봉투의 정중앙, 수취인의 성함이 적혀야 할 자리에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잉크가 번지는 것이 아니었다. 종이 자체가 안쪽으로 깊게 함몰되며 만들어낸 굴곡이었다. 그것은 이름 첫 획과 닮아 있었다. 누군가의 성(姓)을 쓰기 위해 그어 내린 첫 번째 칼질 같은 흔적이었다. 그 획은 완성되지 못한 채 멈춰 있었으나, 그 단호한 기울기만으로도 특정한 대상을 집요하게 호출하고 있었다.

이네스는 그 획이 누구를 향해 뻗어 있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수취인 미확정이라는 상태를 유지하며 이 기묘한 절차를 유예시키려 했던 시도는 이미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다. 봉투의 뒷면, 발신인의 주소가 적혀야 할 곳에는 이미 검붉은 선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반송 주소 선기입. 그것은 돌아갈 곳이 이미 확정되었음을 의미했다. 문제는 그 주소가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어떤 존재의 내부 혹은 Gate B의 가장 깊숙한 공백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왼쪽 끝, 발끝을 멈춰라.”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평소라면 이름을 불렀을 타이밍이었지만, 로웬은 철저하게 규칙을 준수했다. 이름 부르기 금지라는 제약이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공중에 떠 있는 이름 첫 획이 나머지 획들을 완성하며 수취인을 확정 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웬은 이네스를 지칭하는 대신 그녀가 서 있는 위치와 그녀가 쥐고 있는 물건의 방위를 이용해 지시를 내렸다.

로웬은 자신의 칼집 끈 매듭을 강하게 쥐었다. 가죽 끈의 거친 질감이 장갑 너머로 전해졌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가 종이 봉투의 그림자와 겹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발을 옮겼다. 종이 그림자 밟기 금지. 그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그림자가 겹치는 순간 존재의 무게가 종이 위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절차였다. 로웬은 어깨를 맞대고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어깨 맞대기 금지. 연대와 신뢰를 상징하는 육체적 접촉마저 이곳에서는 서로를 반송 봉투 안으로 밀어 넣는 행위가 되었다.

피핀은 귀를 기울였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짐 안쪽 마른 긁힘이 들립니다.”

피핀의 보고는 짧고 명확했다. 일행이 운반하던 짐의 내부에서, 마치 바짝 마른 손톱으로 딱딱한 나무판을 긁어대듯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불규칙했지만 일정한 리듬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리듬은 반대편에서도 들려왔다.

“문 안쪽 숨소리… 주소란 쪽과 맞물리고 있습니다.”

피핀의 시선이 닫힌 문을 향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생명체의 호흡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구멍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마찰음에 가까웠다. 짐 안쪽의 긁힘과 문 안쪽의 숨소리. 두 소리가 봉투에 적힌 반송 주소의 위치와 일직선상에서 교차했다. 그것은 수취인이 정해지지 않은 화물이 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내는 소리였다.

베라는 이 모든 과정을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접히지 않은 여백이 선명하게 보였다. 봉투의 가장자리, 아직 어떤 잉크도, 어떤 주름도 허용하지 않은 채 하얗게 남겨진 공간들. 그 여백은 굶주린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아직 불리지 않은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실수로 이름을 내뱉거나, 누군가 공포에 질려 자신을 증명하려 드는 순간, 그 여백은 무서운 속도로 이름을 삼키며 봉투를 봉인할 것이다.

베라는 개입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녀가 여기서 어떤 문구로든 이 절차에 끼어드는 순간, 발생할 선택 비용은 일행 전체의 존재론적 소멸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이네스의 손등 위로 솟아오른 핏줄과 로웬의 뻣뻣하게 굳은 뒷덜미만을 응시했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불하는 침묵의 대가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이네스는 자신의 손이 반송 주소 선기입란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손가락 끝이 종이의 섬유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수취인 미확정이라는 문구는 이미 봉투의 압력에 밀려 희미해진 상태였다. 주소란의 검붉은 글씨들이 꿈틀거리며 그녀의 지문을 향해 가느다란 촉수를 뻗었다.

“멈춰라, 세 번째 기사.”

로웬이 다시 한번 위치로 그녀를 고정했다. 그의 손은 칼집 끈 매듭을 거의 끊어놓을 듯 쥐고 있었다. 그는 이네스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여기서 누군가를 붙잡는 행위는 그를 봉투 안으로 함께 접어 넣겠다는 서명과 다를 바 없었다.

로웬의 손끝이 칼집을 옭아맨 끈 매듭에 닿았다. 단숨에 끊어낼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절차는 끊어짐보다 풀림을 요구했다. 거친 섬유의 결이 지문 사이를 파고들며 마찰음을 냈다. 팽팽하게 당겨진 가죽 끈이 비명을 지르듯 늘어날 때마다 로웬의 어깨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충동을 침묵 아래로 짓눌렀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대상은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책임이 되어버린다. 대신 로웬은 검지로 그녀의 발치 옆, 차갑게 식은 돌바닥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왼쪽 삼 분의 일 지점. 뒤꿈치 고정.”

인격이 거세된 지시가 허공을 갈랐다. 이네스는 그 지시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오직 위치의 감각으로만 읽어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닿는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취인 미확정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손마디에 힘을 주어 허공을 할퀴듯 버텼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펜촉이 손등 위를 긁어내리는 기분이었다. 반송 주소 선기입. 아직 도착지에 닿기도 전에 출발지로 강제로 되돌려 보내려는 압력이 손가락 끝의 감각을 짓눌렀다. 잉크가 번지듯 습기가 차오르는 주소란의 감각이 소름 끼치게 생생했다. 지문 사이로 스며드는 것은 땀인가, 혹은 기입을 마친 누군가의 서명인가.

피핀은 숨을 죽인 채 봉투의 주소란이 조여드는 궤적을 쫓았다. 짐 안쪽에서 들려오는 마른 긁힘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그것은 벽을 긁는 손톱 소리라기보다는, 종이의 섬유를 하나하나 뜯어내는 질긴 박동에 가까웠다.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는 그 긁힘의 박자에 맞춰 가빠졌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접힌 봉투의 날개 부분이 기괴한 각도로 뒤틀리며 서서히 주소란의 여백을 압박해 들어가는 광경을 보며 피핀은 마른침을 삼켰다. 숨소리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주소란에 적힌 글자들이 미세하게 번지는 듯했다.

베라는 그 모든 광경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채, 아직 접히지 않은 여백을 응시했다. 개입은 곧 접힘의 연쇄를 의미했다. 그녀는 침묵을 지키는 대가로 지불해야 할 비용을 가늠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흰 여백이 존재했지만, 그 가장자리는 이미 어둠의 습기로 눅눅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관찰자로서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베라는 자신의 그림자조차 움직이지 않도록 억눌렀다. 여백이 줄어들수록 그들의 존재가 적힌 종이는 더 얇게 접힐 것이다.

로웬의 손끝에서 마지막 매듭이 미끄러지듯 풀렸다. 툭,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해방이었으나, 그 대가는 무거웠다. 풀려난 끈이 바닥에 닿는 순간, 이네스의 어깨가 아래로 툭 꺾였다. 수취인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송 주소만이 선명해지는 모순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로웬은 여전히 그녀의 눈을 보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녀가 서 있는 위치와 그가 풀어낸 매듭의 잔해만을 응시하며, 다음 절차를 위해 이름을 삼킨 침묵을 유지했다.

피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짐 안쪽의 긁힘이 이제는 긁힘을 넘어 가죽을 찢으려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문 안쪽의 숨소리는 이제 비명 섞인 흡입음으로 바뀌어, 봉투의 이름 첫 획을 조금씩 연장시키고 있었다. 획의 끝이 휘어지며 다음 자음의 형태를 갖추려 했다.

이네스는 입을 열어 무언가 외치려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절차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리 높여 선언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보았다. 로웬의 눈 속에 담긴 차가운 경고를. 그리고 베라의 동요 없는 시선이 가리키는 여백의 공포를.

종이 봉투가 회전했다. 이름 첫 획이 허공을 긋자, 이네스의 발치에 있던 먼지들이 소용돌이치며 봉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물리적인 질량이 아니라 공간의 정보가 소거되는 과정이었다. 봉투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그럴수록 종이의 색깔은 죽은 자의 안색처럼 창백하게 변해갔다.

로웬은 주변의 사물들을 하나씩 지칭하며 좌표를 재설정했다.

“문고리에서 두 뼘 뒤, 바닥의 균열에서 왼쪽으로 한 뼘. 그곳이 현재의 위치다.”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를 좌표와 물건으로 치환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지우고 철저하게 배송품의 일부로 위장하는 고통스러운 연기였다.

이네스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수취인 미확정이라는 꼬리표가 자신의 영혼 어딘가에 대못처럼 박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반송 주소 선기입. 이미 정해진 종착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곳은 문 너머인가, 아니면 이 봉투의 좁고 어두운 틈새인가.

피핀의 귀에서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긁힘과 숨소리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봉투는 이제 거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름 첫 획은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마치 누군가의 대답을 촉구하듯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아직 이름은 완성되지 않았다.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그림자를 밟지 않았으며, 아무도 어깨를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서로에게서 가장 먼 타인이 되어야만 했다. 베라는 여백이 조금씩 좁아지는 것을 보았다. 봉투의 가장자리가 습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나 땀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존재가 녹아내리며 만들어낸 본질적인 젖음이었다.

로웬은 이네스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종이 인형처럼 얇아져 있었다. 그는 칼집 끈 매듭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자신이 아직 이곳에 ‘물건’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 한, 그들은 반송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름이 불리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이 통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봉투가 바닥에 닿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며 습한 무게감을 뿜어냈다. 수취인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으나, 그 빈자리가 주는 압박은 이름을 적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일행을 짓눌렀다. 이네스는 자신의 발등 위로 차가운 물기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봉투에서부터 시작된 전염이었다.

재반송 사유란: 아직 불리지 않은 이름이 먼저 젖음

371화. 젖은 이름의 보증금

재반송 사유란에 적힌 문장이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아직 불리지 않은 이름이 먼저 젖음'이라는 기괴한 문구의 끝단에서 검은 액체가 울컥 솟구쳤다. 그것은 단순한 잉크가 아니었다. 종이의 질감을 거칠게 비집고 나온 젖은 이름 획들이 마치 살아 있는 점막처럼 꿈틀거리며 이네스의 손등을 스쳐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차가운 액체가 닿은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바닥에 떨어진 획들은 기하학적인 선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매끄러운 석재 바닥 위로 스며든 물기는 이내 정교한 격자무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장부의 한 페이지를 바닥에 그대로 투영해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차갑고 습한 냉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로웬은 즉각 검자루를 거머쥐었으나, 당장 칼을 뽑아 휘두르는 대신 가죽 칼집 끝에 매달린 보조 끈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상대해야 하는 것은 베어낼 수 있는 육신이 아니라, 기록되지 못한 존재들이 강요하는 절차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그려진 장부 칸들은 저마다의 아가리를 벌린 채 무언가를 채워 넣으라 종용하고 있었다. 칸 속에는 이름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워야 할 것들은 기괴한 실체들로 치환되어 있었다. 누군가 딛고 지나간 발자국의 깊이, 벽면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각도, 혹은 운반하던 짐의 손잡이에 남은 희미한 손때와 흔적들. 장부는 실재하는 신체 그 자체보다, 그 신체가 세상에 남긴 부수적인 증거들을 담보로 요구하며 일행의 주변을 옥죄어 왔다.

이네스가 들고 있던 서류 뭉치 위로 붉은 낙인이 찍히듯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수취인 미확정]

그 글자가 선명해짐과 동시에, 장부의 첫 번째 칸이 요란하게 진동하며 검은 액체를 뿜어냈다. 이네스의 발치까지 밀려든 액체는 그녀의 그림자 끝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렸다. 서류 하단에 적힌 다음 문구는 더욱 서늘한 감각을 전해왔다.

[이름 보증금 선차감]

"이름을 가져가겠다는 건가?"

이네스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서류를 쥐고 있는 손끝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서류가 손안에서 미끄러져 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버텼다. 기록이 지워지거나 서류를 놓치는 순간, 보증금으로 잡힌 존재의 편린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로웬은 발을 움직여 이네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구두굽이 장부의 경계선에 닿자, 바닥의 잉크가 그의 신발 밑창을 타고 올라오려 끈적하게 꿈틀댔다. 로웬은 침착하게 허리춤의 칼집 끈 매듭을 풀었다. 그는 매듭의 남은 끝단을 자르지 않은 채, 장부의 격자무늬가 시작되는 경계선 위에 길게 늘어뜨렸다.

"물러나게. 이 칸이 확장되는 속도를 늦춰야 하니까."

로웬의 말대로, 가죽 끈이 닿은 지점에서 검은 잉크의 확산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아직 끊어지지 않은 연결'이라는 개념적 가치가 장부의 무분별한 기록 절차를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가죽 끈의 표면이 점차 검게 젖어 들어갔고, 매듭 사이사이로 습기가 차오르며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로웬이 지불해야 하는 체력과 집중력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피핀은 바닥에 귀를 바짝 대고 엎드려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보이지 않는 소리의 궤적을 치밀하게 쫓았다.

"들려요. 박자가 맞춰지고 있어요."

피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복도 끝, 그림자 속에 놓인 정체불명의 화물이었다.

"짐 안쪽 마른 긁힘 소리가 나요.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건조한 나무판을 아주 천천히, 신경질적으로 긁는 것 같은 소리인데, 그게 저 문 너머랑 연결되어 있어요."

피핀의 시선이 굳게 닫힌 Gate B의 육중한 철문으로 향했다.

"문 안쪽 숨소리가 들려요. 아주 느리고 무거워요. 폐에 물이 가득 찬 사람이 내뱉는 것 같은 축축한 호흡음이에요. 그리고… 동전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요. 틱, 티틱, 틱. 긁힘 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동전이 바닥을 치는 박자가 정확히 일치해요. 장부 칸이 하나씩 채워질 때마다 이 박자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마치 누군가 기록의 속도를 독촉하는 것처럼요."

피핀의 보고는 지극히 정교했으나, 상황을 타개할 즉각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공포의 실체를 더욱 구체화하여 공기를 무겁게 짓누를 뿐이었다.

베라는 이 모든 광경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무언가를 계산하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 비정상적인 통관 절차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지체는 비용으로 환산되어 일행의 어깨 위로 얹히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수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무게를 조금씩 깎아 먹으며 정신을 마모시키는 침묵 비용이었다.

누군가 나서서 이름을 선언하거나, 장부의 요구대로 보증금을 온전히 지불해야 이 상황이 종료될 터였다. 하지만 베라는 개입을 늦췄다. 지금 이름을 내어주는 것은 곧 이 기괴한 장부의 시스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완전히 편입됨을 의미했다. 그녀는 침묵 비용이 누적되어 일행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름이 완성되어 기록이 확정되는 순간, 그들이 마주할 존재가 무엇인지 아직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라는 자신의 침묵이 가져오는 압박을 견디며 장부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이네스, 서류를 놓지 마라."

베라의 낮은 목소리가 폐쇄적인 복도 공간에 무겁게 울렸다.

"수취인을 확정하는 순간, 보증금은 영영 반환되지 않는다. 그 짐을 누구에게 전달하려 하는지, 저 장부가 그 정보의 주도권을 쥐게 해서는 안 돼."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는 이미 무릎을 넘어 허벅지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장부 칸에 고인 검은 액체는 이제 거울처럼 매끄러운 표면을 유지하며 일행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그들의 모습에는 눈, 코, 입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젖은 손으로 문질러 지워버린 것처럼, 밋밋하고 흐릿한 형상만이 그곳에 고여 있었다.

로웬의 칼집 끈 매듭은 이제 절반 이상이 검게 물들었다. 가죽이 잉크를 머금어 퉁퉁 불어 올랐고, 견고하게 묶여 있던 매듭의 형태가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연결의 유효기간이 다해가고 있었다.

"경계가 무너지고 있군."

로웬이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의 구두 밑창에서는 치익, 소리와 함께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장부가 요구하는 '보증금'의 압박이 이제 심리적인 선을 넘어 실체적인 고통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밑바닥에서부터 잡아당겨지는 감각에 이네스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서류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서류의 종이 질감이 이제는 마치 타인의 살결처럼 눅눅하게 느껴졌다.

피핀의 박자 보고가 한층 긴박해졌다.

"빨라져요! 동전 소리가 이제 굴러가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미친 듯이 튀어 오르고 있어요! 긁힘 소리가 문 안쪽 숨소리를 잡아먹고 있어요! 박자가 겹쳐지면서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고 있어요!"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무거운 호흡은 이제 기괴한 웃음소리 혹은 단말마의 비명처럼 변질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짐 안쪽에서 들리던 마른 긁힘은 무언가 단단한 목재를 부수고 나오려는 파쇄음으로 격해졌다. 장부의 칸들은 이제 바닥의 경계를 넘어 벽면으로까지 타고 올라오며 거대한 그물망처럼 일행을 포위했다.

이네스는 서류의 비어 있는 칸들을 내려다보았다. '수취인 미확정'이라는 붉은 글자 아래로, 보증금 선차감의 항목들이 세부적으로 나열되며 실시간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보증금 항목: 로웬의 첫 번째 보폭에 담긴 무게]

[보증금 항목: 피핀의 들리지 않는 콧노래의 파장]

[보증금 항목: 이네스의 지워진 서명의 흔적]

그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편린들이 장부의 칸 속으로 하나둘씩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베라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 비용의 한계치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이 장부라는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는 '이름'의 무게가 무엇인지 차갑게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서류의 빈칸보다 그 빈칸을 채우지 못해 안달 난 장부의 갈증이 먼저 보였다.

"아직이다."

베라가 짧고 단호하게 단언했다.

"아직은 이름을 주어서는 안 돼. 젖은 이름은 주인을 찾지 못했을 때 가장 사나워지는 법이니까. 그 사나움이 장부 자체를 찢어발길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의 잉크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젖은 이름의 획들이 한데 엉키며 거대한 형상을 만들려 애썼다. 그것은 문자가 되고 싶어 하는 육체였고, 동시에 육체가 되고 싶어 하는 절박한 서류의 아우성이었다. 잉크의 파도가 로웬의 무릎까지 들이쳤다.

로웬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는 검게 타버려 기능을 상실해가는 칼집 끈 매듭을 날카로운 칼날로 베어냈다. 연결을 유지하던 마지막 끈이 끊어짐과 동시에, 억눌려 있던 장부의 반동이 폭발하며 일행의 몸을 뒤로 크게 밀어냈다. 장부 칸들이 일제히 붉게 점멸하며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주파의 소리를 내뱉었다. 사방을 진동시키던 동전의 박자가 단칼에 베인 듯 뚝 끊겼다.

매듭이 잘려 나간 자리에서 타버린 실조각들이 허공을 할퀴었다. 기어이 대가를 받아내겠다는 듯, 허공에 명멸하는 장부 칸들이 끊어진 끈의 잔해를 향해 탐욕스럽게 옥죄어 왔다. 이미 이름 보증금 선차감이 시작되었다는 서늘한 감각이 일행의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로웬의 검날이 남긴 궤적을 따라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쳤고, 그 소용돌이는 아직 채 채워지지 않은 칸들을 메울 다른 담보를 찾고 있었다. 잘려 나간 끈은 더 이상 계약의 매개체가 되지 못했지만, 장부는 그 파편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 끈질기게 허공을 유영했다.

이네스는 품 안에 안은 서류가 흩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차가운 습기에 젖은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강하게 짓눌렀다. 종이가 찢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손끝에 머물렀지만, 이네스는 결코 힘을 빼지 않았다. 기록의 파편이 저 장부의 빈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자신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눌린 손가락 끝에서 배어 나온 온기가 차가운 서류의 표면을 적시는 동안에도 이네스의 시선은 허공의 장부를 놓치지 않았다.

그때 피핀이 상체를 낮추며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귀를 쫑긋거리던 피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짐 안쪽 마른 긁힘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전까지 들려오던 일정한 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채, 불협화음을 내며 상자 벽면을 거칠게 긁어대고 있었다. 문 안쪽 숨소리 또한 한 박자씩 뒤로 밀려나며 기묘한 압박감을 조성했다. 동전이 부딪히며 내는 금속성의 박자가 뒤늦게 따라붙는 것을 확인한 피핀이 신음하듯 낮게 읊조렸다.

"박자가 밀리고 있어. 긁는 소리도, 숨소리도 전부... 아직 안 끝났어."

위험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매듭이 끊어지며 발생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가혹한 침묵 비용이 요구되고 있었다. 베라는 턱을 굳게 다물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름을 억누르며, 차가운 눈빛으로 허공의 장부 칸들을 노려보았다. 이름을 내어주는 순간 보증금의 영역은 단순한 계약을 넘어 영혼의 소유권까지 침범할 것이 분명했다. 베라는 설령 육신이 깎여 나가는 고통을 겪을지언정, 침묵의 대가를 더 치르겠다는 의지를 굳히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연결이 끊어진 찰나의 틈새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갈증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로웬은 검을 고쳐 쥐며 뒤로 밀려난 일행의 중심을 잡았고, 피핀의 경고대로 한 박자 늦게 도착하는 소리들의 위협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보이지 않는 장부의 칸들이 하나둘 닫히기 시작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이름을 갈구하는 듯한 환청이 귓가를 맴돌았다. 네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과 이름을 짓누르며, 가장 무겁고도 치명적인 침묵을 견뎌냈다.

지독한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평온이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 기록된 서류가 파기되기 직전의 위태롭고 서늘한 정적이었다. 이네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방금 발생한 모든 소동과 로웬의 희생, 그리고 베라의 침묵이 만들어낸 결과가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잉크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을 듯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그 문구는 마치 일행의 무력함을 비웃는 낙인처럼 선명했다.

보증금 반환란: 젖은 이름이 아직 주인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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