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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9화 합본. 선의 배급실의 감정 배급표에서 검은 우산망 후보 보관함까지 일러스트

137-139화 합본. 선의 배급실의 감정 배급표에서 검은 우산망 후보 보관함까지

137화. 선의 배급실의 감정 배급표

로웬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선의 배급실. 문패가 붉은색으로 희미하게 빛나다 사그라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공간은 차가운 금속으로 마감된 실험실 같았다. 좌우로 길게 뻗은 선반 위에는 수십, 수백 개의 투명한 유리병이 빼곡히 정렬되어 있었다. 병들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내용물이 담겨 있었다. 옅은 주황색 액체, 핏기 없는 흰색 점액, 그리고 끈적한 검붉은 덩어리들이 병 속에 잠겨 있었다. 병 표면에는 각각 미열, 연민, 죄책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흡사 도장 같았다. 이 감정들이 누군가의 이름 옆에 찍히는 수취 도장처럼 줄지어 박혀 있었다. 병들 사이사이에는 작은 금속판이 삽입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 불규칙한 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이내 공기 중에 섞인 듯한 차가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음성은 특정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감싸는 듯했다. “좋은 마음은 절차를 대신합니다. 좋은 마음은 절차를 대신합니다.” 기계적인 발음은 뇌리까지 파고드는 듯한 불쾌한 반복을 이어갔다.

베라의 눈이 병들에 꽂혔다. 무심하게 놓인 감정들이 누군가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이들을 대신해 뭔가를 해주려던 그녀 자신의 마음이 그 병들 중 하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좋은 마음이 절차를 대신한다는 말에 흔들리지 마.” 로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선의는 권한 증명이 아니야. 서류와 물건 경로를 먼저 봐야 해.” 그는 베라의 어깨에 손을 얹어 시선을 돌리게 했다. 로웬의 시선은 병들이 아니라, 선반 아래 붙어있는 얇은 금속판과 거기에 적힌 숫자들로 향했다.

로웬은 선반 끝에 걸려 있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낚아챘다. 표지에는 감정 배급표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종이 뭉치를 넘겨보았다. “이건 승인서가 아니군.” 그의 목소리에는 실망감보다는 확신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오염 목록이야. 이 감정들이 배급된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강제로 주입된 오염 내역이라고.”

그 순간, 죄책감이라고 적힌 병들에서 검붉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희미한 신음 소리와 함께 병뚜껑이 서서히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안개는 빠르게 농도를 더하며 주변 공기를 집어삼킬 듯 퍼져나갔다. 이네스가 번개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그녀는 검을 뽑는 대신 맨손으로 선반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병들이 꽂힌 긴 선반을 통째로 움켜쥐고 흔들림 없이 고정했다.

“증거 보존이 우선이야.” 이네스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안개는 더 이상 퍼지지 못하고 병 입구에서 맴돌았다. 깨질 듯한 유리병을 고정하는 그녀의 힘은 놀라울 정도였다.

모르그는 로웬이 넘긴 감정 배급표를 받아 들고 빠르게 스캔했다. 그의 손가락이 표의 여러 열을 짚었다. “감정 공급 열과 대리 수취 승인 열이 같은 번호로 묶여 있습니다.” 모르그의 분석은 언제나처럼 정확했다. “단순한 배급이 아니라, 감정 공급과 수취가 동일한 승인 번호 아래 강제로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베라는 이네스가 고정한 선반 아래쪽을 살폈다. 병 아래쪽, 좁은 틈새에 구겨진 종이들이 보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꺼내든 것은 아이들의 이름표였다. 흐릿하게 번진 잉크로 씌어진 이름들. 그리고 그 옆에는 역시 구겨진 채 버려진 미수취 물건 꼬리표가 함께 있었다. 이름표와 꼬리표가 병 아래 눌려 있었다는 사실이, 감정들이 아이들의 물건을 대신했다는 섬뜩한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피핀은 병 뒤쪽으로 몸을 숙였다. 섬세한 코를 킁킁거리며 병과 선반 사이의 틈새를 맡았다. “여기, 주입구가 있어.” 피핀의 손가락이 병 뒤편의 작은 구멍을 가리켰다. “우산 손잡이에서 맡았던 그 기름 냄새랑 똑같아. 그리고… 설탕 냄새도 섞여 있어.”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달콤한 설탕과 역겨운 기름 냄새의 조합은 상상 이상으로 불쾌했다.

로웬은 감정 배급표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의 눈이 멈춘 곳에는 굵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성자 대리 감정: 무한 공급, 수취자명 공란 허용. 그 아래에는 희미하게 흐려진 철자가 보였다. 처음에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자세히 보니 그 철자는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로웬의 이름을 닮은 듯했다.

138화. 성자 대리 감정의 공란

선의 배급실의 기묘한 공기는 로웬의 눈앞에서 더욱 밀도를 더해갔다. 감정 배급표 가장 아래, ‘성자 대리 감정: 무한 공급, 수취자명 공란 허용’이라는 문구는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옆, 희미하게 번지던 철자들은 로웬의 이름과 섬뜩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 번지는 철자들 사이에서, 수취자명 공란이라는 네 글자가 마치 스스로 호흡하듯 희게 빛났다. 그 빛은 점차 강해져 배급실 내부의 옅은 어둠을 가르고, 일행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차갑고 무기질적인 금속성 목소리가 어디선가 울려 퍼졌다. “성자는 모두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성자는 모든 공백을 채울 수 있습니다.” 기계적이지만 어딘가 설득하는 듯한 억양은 일행의 기대감을 미묘하게 흔들었다. 베라의 눈길은 어느새 로웬의 옆구리에 박힌 감정병과, 빛나는 공란 칸을 오가고 있었다. 어쩌면, 저 빛나는 공백이 이 모든 미비한 사태를 수습할 방편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이 일렁였다.

하지만 로웬은 그런 기대를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의 시선은 빛나는 공란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거기에는 동요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이름 유사성, 소문, 직함, 혹은 선의가 본인 확인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로웬은 감정 배급표에 손가락을 뻗어 빛나는 공란 칸을 짚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선언했다. “공란은 위임장이 아닙니다. 미비 사유입니다.” 그 짧고 실무적인 문장은 시스템이 제시하는 '성자 대리'의 가능성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인했다. 로웬에게 공란은 채워질 공간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증명의 부재였다.

그 순간, 로웬의 손가락이 닿았던 공란 칸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주입구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하얀 실과 같은 감정의 촉수였다. 셀 수 없이 가늘고 반투명한 실타래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 춤을 추며 로웬의 손목을 휘감았다. 동시에, 그 촉수들은 빛나는 수취자명 공란 칸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갔다. 마치 로웬의 감정을 강제로 끌어내어 공란을 채우려는 듯했다.

이네스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작은 날붙이가 들려 있었지만, 그는 실들을 베는 대신 능숙하게 엮고 묶기 시작했다. 하얀 감정의 실타래들은 이네스의 손길 아래서 복잡한 매듭을 형성했다. “공급 경로를 파악해야 해.” 이네스는 로웬의 손목과 공란 칸을 잇는 실들을 조심스럽게 처리하며 중얼거렸다. 원천을 파괴하기보다는 연결을 보존하여 그 흐름을 추적하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그는 로웬을 보호하는 동시에, 이 기묘한 감정 공급의 진실에 다가가려 했다.

모르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촉수가 연결된 과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서는 수많은 데이터가 빠르게 계산되었다. “자동 입력은 이름이 아닌 직함, 소문, 감정값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모르그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개인 식별이 아니라, 시스템이 인지하는 ‘영향력’에 반응하는 겁니다.” 공란이 로웬의 이름으로 채워지려 했던 것은 그가 로웬이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를 '성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베라는 로웬의 단호한 반려와 모르그의 설명을 들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이름을 적었던 이름표들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대신 받아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베라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흩어져 있던 미수취 물건 꼬리표들을 다시 주워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름표를 그 꼬리표 위에 하나씩 정성스레 다시 붙였다. 마치 훼손된 반환 경로를 복원하려는 듯한 손길이었다. 각자의 주인을 찾아 돌아갈,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려는 작고 조용한 몸짓이었다.

피핀은 코를 킁킁거리며 배급실 한편을 서성였다. 코끝을 스치는 달큰한 설탕 냄새가 그를 이끌었다. 단순히 단것을 찾는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어떤 단서를 추적하는 듯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는 냄새의 근원을 쫓아 배급실 구석, 다른 물건들과는 다르게 비어있는 듯한 작은 보관함 앞으로 다가섰다. 보관함에는 아무런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공란' 보관함이었다.

그때, 배급실 한쪽 벽면에서 흐릿한 영상이 깜빡이며 떠올랐다. 거친 질감의 화면 속에는 손으로 대충 쓴 듯한 문서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검은 우산망 임시 성자 후보 목록」

그리고 그 목록의 한가운데, 로웬의 이름 옆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거부 반응 낮음」

139화. 검은 우산망 후보 보관함

철제 보관함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정갈하게 제본된 서류 뭉치가 아니었다. 낡은 가죽으로 덧댄 색인판과 그 사이사이에 끼워진 수많은 쪽지였다.

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목록의 첫 장을 넘겼다. 그러나 그곳에 적힌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었다.

[No. 402 - 찌른 설탕 냄새, 왼쪽 뺨의 화상 흉터, 제3 배달 경로, 미수취 물건 번호 88번.]

[No. 403 - 눅눅한 흙 내음, 오른쪽 발목의 깊은 자상, 제1 배달 경로, 미수취 물건 번호 102번.]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기괴한 식별 기호들만이 가득했다. 아이들을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닌, 분류해야 할 화물처럼 취급한 흔적이었다. 베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게…… 성자 후보 목록이라고요?”

베라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모르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색인판 위에 적힌 수식과 기호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의 손가락이 특정 대목에서 멈췄다.

“아닙니다. 이건 성자로서의 자질을 평가하는 표가 아닙니다.”

“그럼 뭔데?”

이네스가 묻자, 모르그가 건조하게 답했다.

“대리 수취 내성 실험표입니다. 타인의 감정을 강제로 주입받았을 때, 자아가 붕괴하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를 수치화한 겁니다.”

모르그의 손가락이 목록의 가장 끝자락, 로웬의 이름이 적힌 칸을 가리켰다. 그 옆에는 방금 전 로웬이 감정 배급을 반려했을 때 추가된 듯한 문구가 흐릿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반려 문구 반복 시 공란 안정화.]

“공란 안정화?”

이네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그가 짧게 덧붙였다.

“거부하면 할수록 그릇이 비워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름도, 인격도 사라지고 ‘대리 감정’만을 담기 위한 완벽한 빈껍데기가 된다는 소리죠.”

이네스의 손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그녀의 눈이 서늘하게 타올랐다.

“이딴 건 존재할 가치가 없어. 지금 당장 이 보관함째로 태워버리겠어.”

이네스가 손을 뻗는 순간, 로웬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뜨거운 열기가 로웬의 뺨을 스쳤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안 됩니다. 태우지 마십시오.”

“로웬! 이건 너를 괴롭히려고 만든 거야. 네 이름이 이런 끔찍한 실험표에 적혀 있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로웬은 이네스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이것은 증거물입니다. 다른 후보들의 단서까지 함께 사라집니다. 사적인 감정으로 공무 수행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로웬은 이네스의 손을 밀어내고 보관함에서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임시 성자 후보’라고 적힌 자신의 이름 옆 칸을 거칠게 그어버렸다.

“적합 판정 아닙니다. 무단 분류입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서류를 처리하는 하급 관리처럼 딱딱했다. 그녀는 칸 위에 명확한 필체로 다시 적어 넣었다.

“후보가 아니라 미확인 피해자입니다. 절차에 따라 정정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베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보관함 틈새에 끼워진 낡은 꼬리표들을 보았다. 아이들의 이름 대신 번호와 냄새로 치환된 그 조각들. 베라는 품 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작은 이름표 하나를 꺼내 보관함의 가장 깊은 틈새에 끼워 넣었다.

“이름이 돌아올 자리는 있어야 하니까요.”

베라의 낮은 읊조림이 보관함 안으로 스며들었다. 로웬은 보관함 옆에 놓인 ‘임시 성자 후보’라는 인장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잠시 인장의 문구를 응시하더니, 옆에 있던 칼날로 인장의 표면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무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로 새겨진 문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본인 확인 필요 / 구출 대상]

로웬은 그 인장을 목록의 모든 번호 위에 차례로 찍어 눌렀다. 성자 후보라는 가증스러운 명칭이 지워지고, 반드시 찾아내야 할 피해자라는 낙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때, 코를 킁킁거리던 피핀이 색인판의 뒷면을 가리켰다.

“이상해요. 여기선 설탕 냄새만 나는 게 아니에요.”

“뭐가 더 느껴지나?”

모르그의 질문에 피핀이 색인판 가장자리에 코를 바짝 들이댔다.

“달콤한 냄새 밑에…… 아주 축축하고 눅눅한 냄새가 나요. 비에 젖은 빵 껍질 같은 냄새요.”

피핀이 손톱으로 색인판 뒤쪽의 가죽을 살짝 긁어내자, 가려져 있던 희미한 문양이 드러났다. 그것은 일반적인 성소의 문양이 아니었다. 밀 이삭 두 개가 교차한 모양, 아주 오래된 빵집의 표식이었다.

로웬이 그 표식을 확인하는 순간, 보관함 깊숙한 곳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적힌 기괴한 안내 문구가 붉게 점멸했다.

[후보 보관소: 비 오는 날만 개방.]

“지금은 비가 오지 않는데…….”

이네스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투둑, 투둑.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은 천장에서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 지하 배급실의 좁은 창문 너머, 북문 밖의 황량한 거리에만 국한되어 내리는 기이한 비였다.

마치 누군가 지도를 그려놓은 것처럼, 북문 밖 옛 빵집이 있던 방향으로만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비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젖은 빵 껍질 냄새가 바람을 타고 지하까지 밀려 들어왔다.

로웬이 젖은 빵 냄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군요.”

비는 오직 그곳, 버려진 빵집의 잔해 위로만 차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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