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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08화 합본. 보류된 성자의 면접장에서 빈 유골함의 수취인까지

106화. 보류된 성자의 면접장

장부의 마지막 빈칸에 ‘로웬 아델’이라는 이름이 새겨지자마자, 면접장의 공기가 비릿한 금속성 향기로 뒤덮였다.

성자 후보 배정 — 로웬 아델, 보류.

방금 막 기입된 문장이 채 마르기도 전에 번져나갔다. 잉크는 피처럼 붉게 변하며 종이 너머로 스며들었고, 이내 허공에 글자들이 둥둥 떠올랐다. 정면에는 주인 없는 화려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누구도 앉아 있지 않았지만, 등받이에 걸쳐진 빈 장갑과 탁자 위에 놓인 황금색 종, 그리고 주인을 기다리는 인장만이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을 뿜어냈다.

세라프 벨의 부재는 오히려 그 존재감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직접 나타나 꾸짖는 것보다, 비어 있는 서명란과 침묵하는 종소리가 주는 공포가 더 컸다.

딸깍.

누군가 손가락을 튕긴 듯한 소리가 나더니, 로웬의 머리 위로 눈부신 빛의 고리가 명멸했다. 면접장의 시스템이 가동된 것이다.

“……이거 놓지?”

로웬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면접장의 벽면에 박힌 수정구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그의 목소리를 가로채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상자 로웬 아델: 성스러운 권능을 거부함. — ‘겸손’ 항목 가산점 부여.]

[평가: 세속의 명예를 멀리하는 고결한 영혼. 성자 적합도 급상승.]

“미친 소리 하지 마. 난 그냥 집에 가고 싶을 뿐이야.”

[대상자: 안식을 갈구하며 내면의 평화를 추구함. — ‘정적’과 ‘관조’의 미덕 확인.]

로웬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면접장은 로웬이 내뱉는 모든 부정과 냉소를 성자의 언어로 왜곡해 삼키고 있었다. 그가 욕설을 내뱉으면 ‘악에 대한 분노’로, 침묵을 지키면 ‘심오한 명상’으로 채점표를 채웠다. 이대로라면 그는 영락없이 ‘보류’에서 ‘확정’으로 넘어가, 신의 꼭두각시가 될 판이었다.

이네스가 검 손잡이를 꽉 쥐며 로웬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말없이 로웬의 앞을 막아섰지만, 눈앞의 투명한 압력은 칼로 벨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모르그는 연신 깃펜을 움직이며 이 기괴한 채점 과정을 기록하다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로웬, 신학적인 논쟁으로는 이 시스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은 당신의 반항조차 신성한 시련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그럼 어떡하라고? 여기서 춤이라도 출까?”

“아니요. 성스러움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들로 이 깨끗한 채점표를 더럽혀야 합니다.”

모르그의 조언에 로웬은 즉시 방향을 틀었다. 숭고한 부정 대신, 구질구질한 현실을 들이밀기로 한 것이다. 로웬은 품 안에서 꼬질꼬질하게 접힌 종이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이거 봐. 나 성자 못 해. 여기 지난달 미납된 세금 고지서랑 식당 외상 장부 보이지? 그리고 이거, 저번에 주문한 물건 반송 사유서야. 규격 미달이라고 퇴짜 맞은 거.”

[대상자: 세속의 짐을 짊어진 고난의 길을 걷고 있음…….]

“아니, 고난이 아니라 그냥 돈이 없는 거야! 그리고 이 환불 요청서 읽어봐. 물건이 불량이라서 싸우다가 욕까지 먹었다고. 이게 어디 봐서 성자의 자질이야? 그냥 진상 손님이지!”

로웬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제 먹다 남은 빵의 영수증, 연체된 도서 대납금, 심지어 길가다 주운 잡다한 전단지까지 꺼내 보이며 면접장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숭고한 면접장은 순식간에 동네 파출소의 분실물 센터나 세관의 민원실처럼 변해갔다.

그때, 뒤에서 떨고 있던 피핀이 용기를 내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피핀은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무서운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로웬을 이 구렁텅이에서 꺼내겠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저, 저기요! 로웬 형은 절대 성자가 아니에요!”

피핀의 외침에 면접장의 광휘가 잠시 일렁였다.

“형은 저번에 제가 아끼는 과자도 몰래 뺏어 먹었단 말이에요! 제가 울 때 달래주는 척하면서 제 주머니에 있던 동전도 가져갔어요! 물론 나중에 더 맛있는 걸 사주긴 했지만…… 아무튼 동기를 보면 이건 명백한 절도예요! 성자가 남의 과자를 탐내면 안 되잖아요!”

피핀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로웬의 사소하고도 치졸한 악행들을 줄줄이 읊었다. 잠잘 때 코를 곤다는 사실부터, 씻기 귀찮아서 마법으로 먼지만 털어낸다는 고백까지. 그것은 상처를 헤집는 비난이 아니라, 로웬을 한 명의 평범하고 부족한 인간으로 되돌려놓으려는 필사적인 증언이었다.

고결한 채점표 위에 ‘식탐’, ‘나태’, ‘위생 불량’ 같은 단어들이 투박하게 적히기 시작했다. 신성한 시스템이 일시적인 과부하에 걸린 듯 치익 소리를 냈다.

[데이터 충돌…… 성자의 미덕과 세속의 조잡함이 공존 불가…….]

빈 장갑이 놓여 있던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탁자 위의 종이 스스로 울리며 불쾌한 금속음을 냈고, 공중에 떠 있던 붉은 글자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마침내, 거대한 인장이 허공에서 나타나 장부의 마지막 장을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면접장의 모든 빛이 바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로웬의 이름 옆에 찍힌 것은 ‘성자 확정’이 아니었다.

[서류 반송 — 죽은 신들의 회수 세관]

그것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의 영광이 아니라, 불량품을 반품 처리하는 세관의 냉혹한 도장이었다. 동시에 로웬의 손목 부근에서 검은 불꽃이 짧게 튀어 올랐다.

검은 순례자, 엘드의 표식이었다.

그 서늘한 낙인은 로웬의 피부 위에서 잠시 꿈틀거리더니, 이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면접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외부의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세라프 벨의 압력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로웬은 알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면접은 끝났을지 몰라도, 이제 막 더 거대한 세관의 문이 열렸음을.

성자의 면접이 끝난 자리에는, 이제 신조차 회수하기를 포기한 망자들의 기록만이 남았다.

107화. 죽은 신들의 회수 세관

‘서류 반송 — 죽은 신들의 회수 세관.’

붉은 낙인이 허공에서 번쩍인 순간, 면접장의 공기가 질척한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다. 엘드의 성자 후보를 가리던 금빛 광채는 순식간에 빛바랜 황동빛으로 변질되었고, 로웬의 손목에 새겨진 엘드의 표식이 비명을 지르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순히 아픈 수준이 아니었다. 살갗 아래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갈고리가 튀어나와 뼈를 긁어내며 '회수'를 시도하는 감각이었다.

“아윽, 이 미친…….”

로웬이 짧은 신음과 함께 손목을 움켜쥐었다. 성자니 뭐니 떠들던 면접관들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소거되었다. 대신 들려온 것은 수천 장의 종이가 동시에 넘어가는 서늘한 마찰음이었다. 그 소음 사이로, 공간의 경계선이 칼로 그은 듯 갈라지며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마치 불타버린 기록들의 잿더미를 뭉쳐 직조한 듯한 암회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옷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빛을 삼키는 그림자가 발치에서 파도처럼 일렁였다. 챙 넓은 모자 아래로 비치는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매끄럽고 창백했으며, 잉크가 밴 것처럼 검푸른 손가락 끝은 기계적인 정밀함으로 허공의 좌표를 하나하나 대조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생기가 없는 거울과 같아 로웬의 일행을 비추기보다 그들 뒤편에 정렬된 '가치'를 읽어 내리는 장부처럼 보였고,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차가운 서고 특유의 오래된 종이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그녀가 로웬의 손목을 가리키며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미신고 신성 잔여물 확인. 기한 내 자진 신고되지 않은 초과 자산입니다.”

“자산? 내 팔에 붙은 이게?”

로웬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쳤지만, 여자는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놋쇠로 된 작은 저울을 꺼냈다. 저울의 한쪽 접시가 로웬의 표식을 향해 기울자, 기괴한 인력이 발생했다.

“엘드의 표식뿐만 아닙니다. 저쪽에 있는…… 아인(亞人)의 재생된 성대, 기사의 맹세로 고정된 영혼의 무게, 그리고 기록자의 부풀려진 탐구심까지. 전부 규격 외 신성 오염물로 판정합니다. 즉시 압수하여 세관 창고로 이송하겠습니다.”

나흐라라고 불릴 이 세관원의 시선이 피핀과 이네스, 모르그를 차례로 훑었다. 저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피핀은 겁에 질려 제 목을 감싸 쥐었고, 이네스는 검 손잡이를 움켜쥐며 로웬의 앞을 막아섰다. 모르그는 이 기현상을 기록하려는 듯 펜을 들었지만, 그 펜촉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저울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잠깐, 세관원 양반.”

로웬이 아픈 손목을 내밀며 끼어들었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렸다. 저 여자는 신성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절차’를 집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결책도 절차 안에 있을 터였다.

“이거 좀 억울한데요. 분류가 완전히 틀렸어.”

나흐라의 무심한 눈동자가 로웬을 향했다.

“분류 오류입니까? 이 표식은 명백히 고대 신 엘드의 파편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이 표식 말이야, 자세히 좀 봐요. 여기 금 간 거 안 보여?”

로웬은 억지로 표식을 뒤틀어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이건 ‘운송 중 훼손’된 물품이야. 당신들 규정에 훼손된 신성 잔여물을 원형 그대로 회수하라는 조항이 있나? 이건 일단 ‘반송 처리’하고 수리 요청부터 넣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제대로 된 상태도 아닌 걸 가져갔다가 나중에 장부 안 맞으면 책임질 거야?”

나흐라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로웬은 기세를 몰아 피핀의 목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친구 목소리? 저건 신성 잔여물이 아니라 ‘동봉 금지 개인 물품’이야. 원래 가지고 있던 걸 신성력이라는 포장지로 잠시 감싼 것뿐이라고. 포장지만 벗겨가야지, 알맹이까지 가져가는 건 명백한 월권이지. 안 그래요?”

“……논리적 비약이 심하군요.”

“비약이 아니라 원칙이지! 나도 이 바닥 생리를 좀 알거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 말이야.”

로웬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나는 지금 이 구역에 잘못 배송된 ‘반송품’ 그 자체라고. 아까 그 붉은 도장 못 봤어? 서류 반송이라며. 그럼 물건인 나를 압류할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게 먼저지. 압류는 그다음 문제고.”

세관원의 저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로웬이 들이민 ‘행정적 모순’을 처리하느라 과부하가 걸린 듯 보였다. 로웬의 건조한 농담 섞인 항변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계의 법칙이 논리적 정당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일리가 있군요. 물품의 상태 부적합 및 분류 미비로 인한 압류 일시 유예를 승인합니다.”

나흐라가 저울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안도감 대신 기묘한 서늘함이 서렸다. 그녀는 품 안에서 또 다른 서류 뭉치를 꺼냈다.

“대신, 이 구역에서 발견된 다른 ‘미신고 폐기물’의 처리 협조를 요청합니다. 이것은 당신들의 소관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녀가 건넨 것은 차갑게 식은, 작은 은제 유골함이었다. 뚜껑은 이미 열려 있었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유골함 손잡이에는 낡은 종이 꼬리표가 하나 달려 있었다.

[회수 불가: 잿불 성자의 첫 번째 유해]

나흐라의 무채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회수 관인(官印)이 찍혀 있어야 할 유해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도난당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걸어 나간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군요.”

유골함 바닥에는 아직 채 식지 않은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로웬은 그 불길한 꼬리표를 내려다보며, 이제 막 끝난 면접보다 훨씬 더 지독한 사건의 소용돌이가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108화. 빈 유골함의 수취인

달그락.

세관 직인처럼 찍힌 낡은 꼬리표가 유골함 뚜껑 아래에서 흔들렸다.

[회수 불가: 잿불 성자의 첫 번째 유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주변의 소음이 일시에 소거되었다. 단순히 조용해진 것이 아니었다. 소리라는 개념 자체가 날카로운 흡입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었다.

로웬이 입술을 달싹였다. 긴장감을 풀기 위해 늘 내뱉던, 뼈 있는 농담이 튀어나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술 사이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음’조차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어떤 단어를 골랐는지조차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유골함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비어 있음은 강력한 인력을 발휘했다. 유골함은 성자의 유해 대신 채워 넣을 ‘무언가’를 갈구하며 주변의 존재감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로웬의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싹 가셨다. 자신의 본질인 기지(機智)가 거세당하는 공포가 로웬의 눈동자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공간에서 이네스가 움직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칠흑 같은 그림자가 일행의 발밑을 휘감으며 보호막을 형성했다. 유골함의 탐욕스러운 인력이 그림자의 끝단을 야금야금 씹어 먹었지만, 이네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버텼다.

모르그는 떨리는 손으로 깃펜을 꽉 쥐었다. 기록자로서 이 기이한 현상을 종이 위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잉크를 찍는 순간, 그의 기억과 기록에 대한 의지조차 저 빈 구멍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리라는 것을. 모르그는 입술을 깨물며 기록하려는 욕망을 억눌렀다.

“아아아아악! 으아아! 숫자! 하나! 둘! 셋! 넷!”

그 정적을 깬 것은 피핀이었다. 아이는 겁에 질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목이 터져라 아무 의미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숫자를 세고, 어제 먹은 음식 이름을 외치고, 제 이름을 연신 불렀다.

유골함의 인력이 피핀의 소음으로 향했다. 의미 있는 ‘이름’과 ‘본질’을 삼키려던 함이 피핀이 던져주는 가치 없는 소음의 파편들에 막혀 잠시 주춤거렸다.

“시끄러워.”

금속이 긁히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나흐라였다. 그녀는 잿빛 제복 소매를 걷어붙인 채, 납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그녀의 손에는 예의 그 육중한 쇠 집게가 들려 있었다.

피곤에 찌든 눈동자가 유골함을 응시했다. 그녀는 일행을 도울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다만, 이 상황이 초래한 ‘행정적 모순’이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회수 불능 물품이 현장에 방치되어 있다니. 상부의 하역 규정 위반이야. 이건 내 업무 범위 밖이지만, 보고서를 두 번 쓰느니 여기서 끝내는 게 낫지.”

나흐라는 이네스의 그림자 보호막 안으로 거침없이 발을 들였다. 그녀는 유골함의 인력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무표정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빼앗길 감정이나 생동감 따위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잘 들어. 이 함은 ‘성자’라는 개념의 빈자리를 채우려 하는 거다. 억지로 닫으려 하면 우리 존재를 통째로 으깨서 안을 채우겠지.”

로웬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흐라를 바라보았다. 나흐라는 품 안에서 붉은색 먹지가 붙은 새 라벨을 꺼냈다. 그녀가 쇠 집게로 유골함의 낡은 꼬리표를 집어 올렸다.

“전투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이건 세관의 오류다. 오류는 정정하면 그만이지.”

나흐라가 로웬을 향해 턱짓했다.

“거기, 심부름꾼. 손가락을 내밀어.”

로웬은 주저했지만, 나흐라의 강압적인 눈빛에 등 떠밀리듯 손을 뻗었다. 나흐라는 망설임 없이 로웬의 손가락끝을 쇠 집게로 살짝 꼬집어 피 한 방울을 냈다. 그리고 그 피를 새 라벨 위에 문질렀다.

라벨 위에 휘갈겨 쓴 글자가 붉게 박동했다.

[수취인: 아직 죽지 않은 심부름꾼]

[사유: 수취인 미거주에 따른 반송 처리]

나흐라가 그 라벨을 유골함 입구에 거칠게 붙였다.

순간, 주변을 휘감던 진공 상태가 일시에 해소되었다. 공기가 폐부로 밀려 들어오고, 로웬은 컥컥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골함은 더 이상 아무것도 빨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그저 낡고 무거운 돌덩이에 불과했다.

“……살았나.”

로웬이 목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그의 머릿속에 아까 삼켜졌던 농담의 편린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역시 공무원하고는 상종을 말아야 해. 사람 피를 서류 도장 찍듯이 쓰다니.”

“불평할 거면 다시 떼어 주지. 네 영혼이 반송되는 것보다는 피 한 방울이 싸게 먹힐 텐데.”

나흐라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쇠 집게를 정리했다. 그녀는 여전히 냉담했고, 친절한 동료의 기색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상황 종료다. 이건 규정대로 반송하겠어.”

그녀가 유골함을 수거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였다. 덜커덩, 하고 함이 가볍게 흔들렸다.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할 유골함 바닥에서 무언가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나흐라가 쇠 집게로 함 안쪽을 뒤적였다. 그리고 그녀의 집게 끝에 걸려 나온 것은, 마디가 채 굵어지지도 않은 어린아이의 잿빛 손가락뼈 한 마디였다.

“이건…….”

이네스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아까까지 분명히 비어 있었을 터였다.

나흐라의 피곤한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손가락뼈와 방금 자신이 붙인 ‘반송’ 라벨을 번갈아 보았다.

“이상하군.”

그녀의 금속성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반송 절차를 밟자마자 유해가 생겼어. 이건 과거의 잔재가 아니야.”

나흐라가 로웬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성자의 유해다.”

로웬의 등에 서늘한 오한이 스쳤다. 유골함 바닥에 남은 잿빛 뼈마디가, 마치 누군가의 미래를 미리 잘라온 것처럼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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