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05화. 울음을 돌려주는 방 / 첫 번째 울음의 죄수 / 울음 징수관의 장부
103화. 울음을 돌려주는 방
울음을 돌려주는 방(室). 모든 기록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코끝을 찌른 것은 신성한 향유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종이가 썩어가는 퀘퀘한 악취와, 밀폐된 지하 수로에서나 날 법한 비릿한 물비린내였다.
사방의 벽면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촘촘한 격자무늬 선반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선반 칸칸마다 놓인 것은 투명한 유리병들이었다. 수만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병 안에는 희뿌연 연기 같은 것들이, 혹은 점성이 강한 진흙 같은 액체들이 저마다의 농도로 일렁이고 있었다.
“성소(聖所)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수납에 집착한 모양새군.”
로웬이 구두 굽 소리를 낮게 울리며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그어진 선명한 금색 경계선을 훑었다. 그 선 너머로는 기묘한 진동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수천 명의 사람이 동시에 낮은 목소리로 흐느끼는 듯한 진동이었다.
세 번째 목격자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공포로 잘게 떨렸다. 선반 위의 유리병들이 그녀의 존재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일제히 벽면을 두드리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챙그랑, 챙그랑.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운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로웬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그는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 넣는 대신, 금색 경계선 밖 안전한 그늘 아래에 멈춰 서게 했다.
“여기서 더 들어오지 마십시오. 저 안은 당신이 내뱉은 것을 돌려주는 곳이 아니라, 당신의 입을 막기 위해 준비된 강제 급식소 같은 곳이니까.”
로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는 선반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교회는 참 알뜰하기도 하지. 신도들이 흘린 눈물을 단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본인의 목구멍에 다시 쏟아부어 주니까 말이야. 그걸 그들은 ‘완전한 회귀’라고 부르더군.”
피핀은 로웬의 등 뒤에서 숨을 헐떡였다. 평소라면 장부의 공포에 질려 구석에 웅크렸을 그였다. 하지만 지금 피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목격자의 창백한 낯빛이었다.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이미 보이지 않는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것처럼.
피핀은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제 몸을 떨면서도 목격자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제가 이 장부들의 숫자가 틀렸다는 걸 증명할게요. 로웬 경이 저 선을 넘지 말라고 했으니까, 여기 있으면 안전해요. 여긴 기록이 멈춘 곳이지, 당신을 잡아먹는 곳이 아니에요.”
피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단했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던 기록의 무게를 잠시 옆으로 밀어놓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종이 위의 숫자가 아니라, 눈앞에서 숨을 몰아쉬는 사람의 체온이었다.
모르그는 그사이 수첩을 펼쳐 들었다. 그는 방의 중앙 천장에 새겨진 문구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자비로운 반환’, ‘영혼의 치유’, ‘죄의 고해’.
가해자들이 즐겨 쓰는 미사여구들이 금박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모르그의 펜끝이 거칠게 움직였다. 그는 수첩에 적힌 그 단어들에 가차 없이 가로줄을 그었다.
[반환 → 강제 주입. 치유 → 증언 봉쇄. 고해 → 영구적 침묵.]
모르그는 그들이 오염시킨 언어를 피해자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갔다. 그에게 이 방은 성지가 아니라, 거대한 고문실의 변종에 불과했다.
“로웬 경, 저기 보십시오.”
모르그가 수첩 끝으로 방의 가장 깊숙한 곳, 단독으로 놓인 대좌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른 병들과 달리 유독 짙은 보랏빛을 띠는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 전체를 지배하는 진동의 근원지가 바로 그곳이었다.
로웬이 천천히 대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경계선을 넘자마자 수천 개의 환청이 그의 고막을 찔렀다. 억울함, 슬픔, 비명, 그리고 채 뱉지 못한 유언들이 뒤섞인 소음이었다. 하지만 로웬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소음의 바다를 가로질렀다.
“기록의 시작이자 끝이라…….”
그가 대좌 위에 놓인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병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병 안의 액체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벽면을 할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성녀의 눈물이라 칭송받으며, 이 거대한 기록 저장소의 초석이 되었다는 ‘첫 번째 울음’이었다.
로웬은 병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병 바닥을 장갑 낀 손가락으로 닦아내었다.
그곳에는 교단의 인장이 아닌, 아주 오래전 금기시되었던 형벌 부대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낙인 아래, 날카로운 도구로 새겨진 짧은 문장이 로웬의 눈에 박혔다.
로웬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병을 다시 대좌에 내려놓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거 실례했군. 성녀가 아니라 사형수의 것이었나.”
병 바닥에 새겨진 진실은 교단이 쌓아 올린 모든 신성함을 비웃고 있었다.
첫 번째 울음은 성자의 것이 아니었다.
104화. 첫 번째 울음의 죄수
첫 번째 울음은 성자의 것이 아니었다.
먼지 쌓인 기록고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로웬이 손에 든 유리병은 이제껏 이들이 찾아 헤매던 성스러운 유물도, 누군가의 야망을 증명할 단순한 물증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가장 깊은 곳에 가두어두었으나 끝내 침묵하지 못한 자의 마지막 증언.
“성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내뱉은 소리가 세상을 구원했다는 전설은, 역시나 수식어가 너무 많았군.”
로웬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유리병을 빛에 비추었다. 병 표면에는 세월이 겹겹이 쌓인 때와 마력이 엉겨 붙어 있었다. 보통의 탐색자라면 당장 병을 깨트려 내부의 진동을 확인하려 들었겠지만, 로웬의 손길은 지나칠 만큼 신중했다. 그는 품 안에서 가느다란 은제 나이프를 꺼냈다.
“깨뜨릴 건가요?”
이네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검자루에 가 있었다. 만약 이 병 안에서 무언가 불길한 것이 튀어나온다면 즉시 베어버릴 기세였다.
“아니. 이건 깨뜨리는 순간 증발해버릴 종류의 기록이야. 겉면의 거짓된 기록층을 벗겨내야 해. 속살을 드러내게 만드는 거지.”
로웬의 나이프 끝이 조심스럽게 유리 표면을 긁어냈다. 끼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요한 지하 공간을 메웠다. 투명한 유리 파편이 아니라, 검게 죽은 마력의 찌꺼기들이 허물처럼 벗겨져 내렸다.
그 순간, 병의 목 부분에 새겨진 일련의 숫자가 드러났다.
0-1-0-4-2.
그 숫자를 본 피핀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려다 발이 꼬여 비틀거렸다. 옆에 서 있던 이름 없는 세 번째 목격자가 말없이 피핀의 등 뒤에서 손수건을 펼쳐 받쳐 주었다. 피핀의 손에서 떨어지려던 펜과 수첩이 그 손수건 위로 안전하게 내려앉았다.
“피핀?”
모르그가 걱정스러운 듯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피핀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유리병에 새겨진 숫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거, 장부 번호예요.”
피핀의 목소리가 젖은 종이처럼 찢어졌다.
“단순한 유물 번호가 아니에요. 제가 총무처 지하 창고에서 보았던, 그 끔찍한 형벌 부대 명부의 형식이랑 똑같아요. 앞의 0은 미배정, 1은 1급 위험군, 그리고 마지막 2는…….”
피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꽉 쥐었다. 교회는 성자의 울음을 보관한다면서, 실상은 죄수의 번호를 매겨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자로 추앙받던 존재가 사실은 번호로 불리던 수인이었다는 사실이 피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2는 소모품이라는 뜻이지?”
로웬이 대신 말을 끝맺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더 깊은 냉소가 서려 있었다.
“울음을 징수당한 뒤 버려지는 가축. 교회가 써먹는 전형적인 방식이야. 신성을 제조하기 위해 인간을 압착하는 것.”
로웬은 멈추지 않고 나이프를 놀렸다. 마지막 껍질이 벗겨져 나가자, 병 안에서 희미한 청백색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광채라기보다 상처에서 스며 나오는 진물처럼 처연했다.
이네스는 그 빛이 피핀의 얼굴을 비추는 것을 보았다. 피핀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세 번째 목격자가 받쳐 준 손수건을 꽉 쥐며, 자신이 기록해야 할 진실을 똑똑히 응시하려 애쓰고 있었다. 공포보다 앞선 것은 기록자로서의 본능, 혹은 이 이름 없는 희생자에 대한 뒤늦은 예의였다.
빛의 파동 속에서 글자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기록층의 가장 밑바닥, 제작자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생소한 직함이 떠올랐다.
[ 울음 징수관(The Cry Collector) ]
그리고 그 옆에, 날카로운 필체로 적힌 한 사람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 세라프 벨(Seraph Bell) ]
“세라프…… 벨?”
모르그가 그 이름을 읊조렸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실로 대단했다. 유리병 속의 빛이 이름에 반응하듯 거칠게 소용돌이쳤다.
로웬은 나이프를 거두고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이거 순순히 물러나긴 글렀군. 징수관이라니. 교회가 숨기고 싶어 하던 실무자의 이름이 드디어 나왔어.”
피핀은 어느새 떨림을 멈추고 수첩에 그 이름을 적어 넣었다. 비록 손끝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기묘한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방금 적어 내린 이름이 거대한 재앙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 세라프 벨이라는 자가 이 모든 걸 관리했다는 뜻인가요? 이 수많은…… 비명들을?”
“단순히 관리만 한 게 아니겠지. 번호를 매기고, 무게를 재고, 가장 순수한 순간에 추출해냈을 거야.”
로웬이 유리병을 다시 품 안으로 갈무리했다. 이제 이 병은 단순한 증거품이 아니었다. 세라프 벨이라는 인물에게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열쇠였다.
“성자의 울음 뒤에 숨겨진 진짜 장부를 찾아야겠어.”
로웬의 시선이 기록고 너머, 더 깊은 어둠이 도사린 통로를 향했다.
“울음 징수관 세라프 벨. 그자가 남긴 진짜 기록을 찾으러 간다.”
로웬의 말에 이네스가 먼저 발을 뗐고, 피핀은 수건을 받쳐주던 세 번째 목격자에게 짧게 목례를 건넨 뒤 그 뒤를 따랐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들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105화. 울음 징수관의 장부
탁자 위에 놓인 장부는 가죽 표지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마치 사람의 피부를 가공해 만든 것처럼 기분 나쁜 온기가 남은 검은 가죽. 그 위에는 은색 실로 정교하게 자수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울음 징수관 세라프 벨.’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로웬은 목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 유리병에서 마주했던 그 기묘한 추적의 끝이, 이제는 형체 없는 압박으로 변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세라프 벨은 이곳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남긴 장부의 필체와 잉크 냄새, 그리고 종이 모서리에 찍힌 날카로운 관인(官印)이 그녀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었다.
“손대지 마세요.”
모르그가 낮게 경고하며 깃펜을 고쳐 잡았다. 그는 장부를 직접 만지는 대신 핀셋으로 갈피를 넘겼다. 장부의 속지는 이상하리만치 희었다. 빛을 반사하지 않고 빨아들이는 듯한 무채색의 종이. 그런데 그 안의 내용이 기괴했다.
글자들 사이사이에 입을 벌린 듯한 빈칸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어……?”
피핀이 짧은 신음과 함께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시선은 장부의 특정 구절에 고정되어 있었다. 피핀에게 숫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과거 그를 옭아맸던 실험 번호와 규격들이 장부의 빈칸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로웬 경, 저거 읽지 마세요. 저 빈칸이…… 말을 걸려고 해요.”
피핀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로웬이 장부를 응시하자, 빈칸 속에서 환청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로웬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그가 잃어버린 과거 속 누군가의 애원 같기도 했다. 장부는 읽는 사람의 기억과 목소리를 빌려 제 안의 공백을 채우려 드는 함정이었다.
그때 피핀이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장부의 빈칸들을 가리듯이 손수건을 펼쳐 그 위를 덮었다.
“이러면…… 목소리를 훔쳐가지 못할 거예요. 안 들리게 할게요.”
피핀의 작은 용기가 장부의 마력적인 유혹을 일시적으로 차단했다. 로웬은 비로소 숨을 크게 내쉬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모르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부의 내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장부 상단에는 ‘자비 배정표’라는 오만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타인의 슬픔을 거두어가는 것을 마치 신의 은총인 양 포장한 단어였다.
모르그의 눈썹이 비틀렸다. 그는 기록자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들고 있던 펜으로 그 제목을 거칠게 그어버렸다. 그리고 그 옆에 올바른 이름을 써넣었다.
[울음 징수 배정표]
“자비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이것은 약탈의 기록이다.”
모르그의 냉혹한 첨삭이 장부의 권위를 깎아내렸다. 기록 윤리를 지키려는 그의 단호한 태도가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조금씩 걷어냈다.
장부의 필체는 지독하리만치 일정했다. 한 획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갈한 글씨체는 세라프 벨이라는 이름 뒤의 실무자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손은 감정 없이 타인의 울음을 수거하고, 그것을 수치화하여 배정하고 있었다. 마치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처럼 말이다.
“여길 봐.”
로웬이 손수건 아래로 삐져나온 장부 하단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이번 ‘배정’의 핵심 대상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세라프 벨이 남긴 흔적은 단순한 장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예고장이자, 이 땅의 슬픔을 어떻게 재편할지에 대한 설계도였다. 로웬은 침을 삼키며 페이지의 가장 마지막 줄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유독 짙은 잉크로 적힌 문구가 있었다.
[성자 후보 배정 — 로웬 아델, 보류]
순간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진 기분이었다. 로웬 아델. 자신의 이름이 성자 후보라는 명목하에 ‘보류’ 상태로 분류되어 있었다. 세라프 벨은 이미 로웬의 존재를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웬은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입술을 비틀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보류라니. 이거 좀 섭섭한데? 탈락도 아니고 합격도 아니면, 나보고 면접이라도 준비하라는 건가? 면접비라도 두둑이 챙겨주면 고려해 보겠는데 말이야.”
로웬의 건조한 농담이 공중에 흩어졌다. 평소라면 피핀이 툴툴거리거나 모르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을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네스는 로웬의 옆에서 칼자루를 꽉 쥔 채 굳은 표정으로 장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우려와 함께, 로웬을 향한 보호 본능이 서늘한 투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로웬이 농담으로 넘기려 할수록, 그 ‘보류’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는 더욱 무겁게 일행을 짓눌렀다.
성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성자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인가.
어느 쪽이든 세라프 벨의 장부는 로웬 일행의 발밑을 이미 잠식하고 있었다. 이네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로웬의 웃음기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장부의 마지막 빈칸이 마치 다음 이야기를 써 내려가길 기다리는 괴물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